에릭 홉스봄: 자본의 시대


제 1부 혁명의 서막

01. '여러 국민들의 봄'


재 2부 전개 과정

02. 대호황 

03. 하나가 된 세계 

04. 분쟁과 전쟁 

05. 국민들의 형성 

06. 민주주의 세력들 

07. 패배자들 

08. 승리자들 

09. 변화하는 사회 


제 3부 결과

10. 토지 

11. 인간의 이동 

12. 도시/산업/노동자 계급 

13. 부르주아의 세계 

14. 과학/종교/이데올로기 

15. 예술

16. 결론 





제 1부 혁명의 서막

01. '여러 국민들의 봄'

85  1848년의 혁명은 잠재적으로 최초의 전 세계적 혁명이었으니, 그 직접적 영향은 1848년 페르남부쿠(브라질)에서 일어난 반란, 몇년 뒤 멀리 콜롬비아에서 일어난 반란 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어떤 의미로 그것은 그런 유의 '세계혁명'의 한 범례였다. 그 이후 혁명가들은 바로 그러한 유의 '세계혁명'을 꿈꾸게 되었고, 또 대전쟁 직후의 매우 드문 기회에 그러한 세계혁명의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도 되었다.


재 2부 전개 과정

02. 대호황 

111 이리하여 중류계급, 자유주의, 내셔널리즘, 심지어 노동자계급까지도 그 후로는 정치가 펼쳐 보이는 무대풍경에 항상 따라다니는 등장물이 된다는 것이 1848년의 혁명에 의해 분명해졌다. 1848년의 혁명들이 패배함에 따라 그것들은 일시 시계에서 사라졌을지 모르나, 다시 나타났을 때에는 그것들에게 전혀 공감하지 않는 정치가들의 행동까지도 그것들이 좌우하게 되는 것이다.


142 1840년대 말엽부터  1870년대 중반에 이르는 기간은 당시의 식자들이 상투적으로 생각했던 것과 같은 경제성장, 정치적 발전, 지적 진보, 문화적 성취 따위의 모델, 적절한 개량을 거듭하면서 무한한 미래로 지속되어갈 그러한 것들의 모델이 아니라, 그보다는 오히려 어떤 특수한 종류의 막간극 시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성취한 바는 지극히 감명적이었다. 이 시기에 산업자본주의는 진정한 의미의 세계경제로 발전했고, 그럼으로써 세계라는 말은 지리학적인 표현으로부터 끊임없이 활동하는 현실적 실체로 바뀌었다. 역사는 이때부터 세계사가 되는 것이다.


03. 하나가 된 세계 

172 세계의 단일화는 그 내용상으로 다양한 분화를 의미했다. 세계적인 자본주의 체계는 서로 경쟁하는 여러 '국민경제'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유주의가 세계적으로 승리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것은 모든 민족, 적어도 '문명화된' 민족들을 자유주의 쪽으로 마음을 돌리게 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었다. 19세기의 3사분기에 진보의 창도자들은 조만간에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확신은 튼튼하지 못한 근거 위에 서 있었다.


04. 분쟁과 전쟁 

195 그러한 1848년부터 1871년 사이에, 보다 정화하게는 1860년대에 세가지 일이 일어났다. 그 첫째는 공업화의 확대 결과 영국 이외에도 본질적으로 공업적인 자본주의적 국가가 생겨났다. 미국과 프로이센(독일), 그리고 그 전보다도 산업자본주의화의 정도가 더 진행된 프랑스, 그리고 나중에 이 대열에 끼이게 되는 일본 등이 곧 그들이었다. 둘째로는 공업화의 진전으로 부와 공업능력이 국제적 세력관계에서 점점 더 결정적인 요소가 되어갔으며, 그럼으로써 러시아와 프랑스의 상대적 지위가 저하되고 프로이센의 상대적 지위가 크게 높아졌다. 셋째로 유럽 이외의 두 국가, 즉 아메리카 합중국과 일본이 자주적인 강국으로 대두함으로써 처음으로 세계적 분쟁의 가능성이 조성되기에 이른다. 

196 사실상 그러한 유럽 전명전쟁은 그 후 40년이 지나도록 일어나지 않았다. 이 40년은 20세기가 오늘날까지 애써 전쟁 없이 넘길 수 있었던 세월보다도 긴 기간이다. 그러나 강대국간의 전쟁, 혹은 중규모의 강대국간 전쟁도 없었던 약 30년간을 이 책 집필의 시점에서 돌이켜볼 수 있는 우리들 자신의 세대는, 전쟁의 부재가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부단한 공포와 공존한다는 것을 다른 어느 세대보다도 잘 알고 있다.


05. 국민들의 형성 

218 그러나 민족적 감정이나 민족적 충성심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네이션'이란 자연발생적으로 성장한 것이 아니라 인공적인 산물이었다. 그것은 비록 매우 오랜 옛날의 인간집단성원들이 '외부인'과 비교해서 그들만이 공통적으로 나누어 가졌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구현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역사적으로 볼 때 새로운 것이었다. 아니, 비단 새로울 뿐만 아니라 사실 '네이션'은 새로이 건설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국민적 통일성을 '강제할' 수 있는 제도가 결정적 중요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06. 민주주의 세력들  

244 프롤레타리아트의 진출은 정치적 행동과 산업적 행동의 복합적 작용, 민주주의로부터 무정부주의에 이르는 갖가지 급진주의의 혼합, 그리고 계급투장과 계급간의 연합과 양보 등의 혼합된 작용이라는 기이한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도 '국제적인' 과정이었다. 자유주의가 부활한 경우처럼 프롤레타리아트의 진출이 여러 나라에서 동시에 일어났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의 국제적인 단결, 즉 급진 좌파(1848년 이전부터 내려오는 유산)의 국제적 단결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국제노동자협회'로서 조직되고 또 그것에 의하여 조직되어 나갔는데, 이것이 곧 카를 마르크스의 제1인터내셔널(1864~1872년)이다.


250 그리하여 어쨌든, 자유시장의 매커니즘에 대한 어떠한 공공적인 간섭까지 일종의 파괴공작으로 간주해오던 살마들도 이제는 노동자의 조직과 그 활동을 순하게 길들이려면 그것들을 우선 승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기에 이르렀다. 앞으로 본 바와 같이, 나폴레옹 3세나 디즈레일리는 물론이요, 선동적인 정객들은 선거전에서 노동자 계급의 잠재적인 세력을 절실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1860년대 유럽의 모든 곳에서는 적어도 제한된 범위에서 노동자조직과 파업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법률이 수정되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자유시장의 이론 속에 노동자의 자유로운 단체교섭권의 여지를 마련해주기 위하여 법을 개정했던 것이다.


07. 패배자들 

255 부르주아 세계의 경제사상, 정치사상, 사회사상 및 생물학적 사상의 본질을 은유하는 말, 즉 '생존경쟁'에서는 오직 '최적자'만이 살아 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최적자'임은 단순히 살아 남은 것만으로서가 아니라 지배적이 되는 것으로써 증명되었다. 그래서 온 세계의 주민들은 대부분 경제적, 기술적 우월성을 가진 자들, 그리고 그럼으로써 군사적인 우월성이 의문의 여지없이 명배가고 그 누구도 감히 도전하지 못할 것 처럼 생각되는 자들의 희생물이 되었다. 즉 북서 유럽 및 중앙 유럽의 여러 국민경제와 국가들, 그리고 그 곳 출신의 해외 이민들이 정착한 나라들, 특히 아메리카 합중국에 의해 희생물이 되었다.


273 이집트의 파샤들이 나폴레옹 3세의 매혹적인 파리를 모방하고 있는 동안 19세기 최대의 혁명이 비유럽 세계의 최대의 제국에서 일어나다. 중국에서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1850~1866년)이 곧 그것이다.  유럽 중심주의적 역사가들은 태평천국의 난을 무시해왔다. 다만 적어도 마르크스만은 이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으니 1853년에 이미 "아마도 유럽 인민의 이 다음 봉기는 다른 어떤 기존의 정치적 주의주장보다도 지금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더 많이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썼다.


08. 승리자들 

285 이렇게 하여 19세기의 3사분기만큼 유럽인들이 세계를 완전히 그리고 의문의 여지없이 지배했던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해서 유럽 출신의 백인들이 이만큼이나 별 도전을 받지 않고 세계를 지배했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본주의 경제와 자본주의 권력의 세계에는 적어도 하나의 비유럽 세계 국가, 아니 그보다는 하나의 연방이라고 해야할 아메리카 합중구간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말이다.


305 모든 비유럽 국가들 중에서 서양과 맞부딪치고 서양의 수법을 써서 그들을 무찌르는 데 성공한 나라는 오직 한 나라뿐이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다소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것은 다름 아닌 일본이었다.


09. 변화하는 사회 

399 우리가 다루고 있는 시대의 그 많은 혁명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파리 코뮌은 그 자체의 성과보다는 그것이 예측케 해주는 것으로 인해서 휠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파리 코뮌은 하나의 사실로서보다는 하나의 상징으로서 훨씽 가공스러운 것이다. 프랑스 자체 안에서나 (마르크스를 통한)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서나 파리 코뮌의 실제 역사는 파리 코뮌이 낳은 그 엄청나게 강력한 신화에 휩싸여 무색해지고 있다. 이 신화는 오늘날에도, 특히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메아리치고 있는 것이다.


제 3부 결과

10. 토지 

346 따라서 대다수 인류에게 삶의 운영은 토지, 그리고 그 토지 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의하여 좌우되었다. 그리고 토지 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경제적, 기술적, 인구학적 요인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이들 요인은 국지적 특수성과 지방간의 격차가 물론 있을 수 있지만 대체로 크게 지구적 규모에서, 혹은 적어도 커다란 지리, 풍토적 지대라는 스케일에서 작용하였다. 또 토지 위에 일어난 일들은 (사회적, 정치적, 법적 등의) 제도적 요인에 의해서도 좌우되었다.


11. 인간의 이동 

379 19세기 중반은 역사상 최대의 인간이동이 시작된 시기이다. 

인간의 이동에는 도시로 향한 농촌으로부터의 인구유출, 지역간의 이동, 마을에서 마을로의 이동, 대양의 횡당, 변경지역으로의 인구유입, 그리고 꼭 짚어 지적하기가 한결 어려운 여러 경로를 통한 인구의 유출입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구이동의 드라마틱한 한 형태에 대해서는 거의 명확하게 알 수가 있다. 즉 1848년부터 1875년 사이에 900만 이상의 사람들이 유럽을 떠났으며, 그 압도적 다수가 미국으로 향했던 것이다. 이 900만이라는 숫자는 1851년 런런 인구의 4배 이상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보다 앞선 반세기 동안에는 150만 명도 안 되는 사람들이 유럽을 떠났을 뿐이다.


12. 도시/산업/노동자 계급 

423 19세기 노동자들의 생활을 지배한 단일 요인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안정성'이었다. 노동자들은 주말에 임금을 얼마만큼 가지고 집에 돌아갈 수 있을지를 주초에 알지 못했다. 또 노동자들은 현재 하고 있는 일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그 일자리를 잃게 되었을 때는 언제 다른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지, 새 일자리를 얻게 된다 해도 어떠한 조건에서 일을 하게 될지를 알지 못했다. 

그들의 불안정성은 농민들의 불안정성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농민들의 경우는 정기적으로 닥쳐오는 한발이나 기근과 같은 재앙에 내맡겨져 살아야 하지만, 세상에 태어나 죽어서 땅에 묻힐 때까지의 대부분의 생애를 어떻게 보내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정확하게 예측될 수 있는 불안정성이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경우는 한층 더 예측이 어려운 불안정성이었다. 

자유주의 세계의 불안정이란 부는 물론이요, 진보와 자유에 대한 값으로 지불해야만 하는 희생이었다.


13. 부르주아의 세계 

444 그리하여 튼튼함과 아름다움이라는 이중성은 부르주아 세계의 매우 전형적인 분열, 즉 물질적인 것과 이념적인 것,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날카로운 분열을 표현한 것이었다. 하지만 부르주아 세계의 정신과 이상은 물질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물질을 통해서만, 적어도 물질을 구매할 수 있는 금전을 매개로 해서만 표현될 수 있었다. 음악만큼 정신적인 것은 없다. 그러나 부르주아 가정의 전형적인 악기 형태는 정교하고 값비싼 극히 대형의 악기, 즉 피아노였다. 부르주아풍의 실내란 피아노 없이는 제대로 갖추었다고 할 수 없었다. 피아노 없는 부르주아 집안의 따님이란 어불성설이었다. 하긴 그 따님들은 그리하여 밑도 끝도 없이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려야 했지만.


451 '가족'은 부르주아 사회의 기초적 사회단위일 뿐만 아니라 재산 및 기업의 기본적 단위이기도 했다. 또 가족은 여성 플러스 재산('결혼 지참금')의 교환제도에 의해서 다른 가족 단위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 아래서 여성은 부르주아 사회 이전부터 내려오는 전통의 엄격한 관습에 의해서 순결한 처녀여야 했다. 무절제한 육체적 욕구는 '부적당한' 구혼자와 신부를 집안에 끌어들이게 되고 부부사이를 갈라놓아 공동의 자산을 낭비하게 되는 것이었다.


469 이긴다는 것 또는 살아 남아는다는 것은 그것이 적자임을 실증하는 것임과 동시에 이러한 적합성의 실현을 가능케하는 유일한 도덕성을 실증하는 것이라고 하는 널리 보급된 생각, 생존경쟁과 지연선택에 관한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낡은 부르주아적 윤리가 새로운 사태에 대응하여 자기 수정을 반영한 것일 뿐이었다. 다윈주의는 사회적 다윈주의이건 그 이외의 것이건 간에 단지 과학임에 그쳤던 것이 아니라, 다위니즘이 정식화되기 이전부터도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부르주아가 된다는 것은 단지 우월자가 된다는 것뿐 아니라 옛 청교도들의 그것과도 같은 도덕성의 실현을 의미하였다.


473 고용주의 절대적 권리인 고용권과 해고권을 제한하려는 움직임 뒤에는 공산주의의 위험성이 숨어 있다고 공장주들이 말할 때, 그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사회혁명이 아니었다. 그들은 다만 소유권과 지배권이 불가분의 것이며, 따라서 소유권 침해를 일단 허용하면 부르주아 사회가 감아고 만다는 것을 말하려고 했던 것뿐이다. 그러므로 사회혁명의 도깨비가 확신에 가득 찬 자본주의 세계에 다시금 나타났을 때 그들이 보인 공포와 증오의 반응은 한결 히스테릭할 수 밖에 없었다. 파리 코뮌 참가자에 대한 대학살은 이러한 공포와 증오의 힘이 어떠한 것이었던가를 입증했다.


14. 과학/종교/이데올로기 

505 인종주의는 오늘날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당시의 사상속에 깊이 침투해 있었다. 그것을 이애하는 일은 반드시 용이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인종주의는 백인의 유색인종에 대한 지배, 부자의 가난한 자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편리했다는 것 이외에도, 그것이 기본적으로 평등주의적 이데올로기에 기초를 두면서도 기본적으로 불평등중의적인 한 사회가 그 불평등성을 정당화 시키는 매커니즘이었으며, 또 그 제도 속에 내재하는 민주주의에 의해 불가피하게 도전을 받을 특권계층을 정당화하고 옹호하는 매커니즘이었다고 설명하면 가장 잘 이해가 될 것이다. 자유주의는 평등과 민주주의로부터 자신을 방위할 논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인종이라는 비논리적 장벽을 구축한 것이다. 자유주의의 트럼프 카드인 과학마저도 인간이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있었다.


510 19세기 중반에 일반 대중이 신을 믿지 않게 되는 것은 비교적 쉽게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상류계끕의 자유사상은 벌써 오래전부터 잘 알려져있었다. 중산계급의 지적 무신론도 새삼스로운 것이 아니었고, 반교권주의가 정치적으로 중요성을 더해감에 따라 전투성을 띄기에 이르렀다. 노동자 계끕의 자유사상은 이미 혁명적 사상과 관련을 맺고 있었지만, 그러한 옛 혁명적 이데올로기가 퇴조하여 직접적으로는 정치적 색체가 희박한 부분만이 남게 됨에 따라, 그리고 확고히 유물론적 철학에 뿌리 박은 새로운 혁신적 이데올로기가 발판을 넓혀감에 따라 독특한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518 기독교 세계의 밖에서는 침투해 들어오는 자유사상에 대한 저항, 즉 서양과의 대결을 주로 전통주의의 힘에 의존하였다. 이들 종교를 '자유사상화'하려는 시도는 자유주의에 거의 동화된 부르주아지의 동조를 얻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통파가 저주하는 바가 되었고, 불가지론자가 경멸하는 바가 되었다. 전통의 힘은 아직도 압도적으로 강했고, 나아가 흔히 '진보'와 서양의 팽창에 대한 저항을 통하여 더 강화되었다.


15. 예술

520 19세기 부르주아 사회만큼 창조적인 천재들(그 자체가 사회현상으로서 부르주아의 산물이었다(의 작품을 애지중지 소중히 한 사회는 별로 없었다. 또 19세기 부르주아 사회만큼 예술에 마음껏 돈을 쓴 사회도 별로 없엇다. 순수히 양적인 관점에서 볼 땨, 그 전의 어느 사회도 신간서적, 고서적, 자료, 그림, 조각, 석조 장식물, 그리고 음악, 연극 관계 공연의 입장권 등이 그만큼 대량으로 사고 팔린 일은 별로 없었다. 그 무엇보다도 그리고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19세기 부르주아 사회만큼 사람들이 창조적 예술의 황금시대에 살고 있다고 확신하던 사회도 드물다.


16. 결론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19세기 중반의 자본주의 세계 구조는 무너지지 않았고 오히려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자본주의 세계가 그 경제적,정치적 자유주의를 서서히 수정해가면서 작동해갈 영역은 충분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다만 피지배국, 저개발국, 후진적이고 가난한 나라, 혹은 러시아처럼 승자의 세계와 희생자의 세계 양쪽에 동시에 속해 있었던 나라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러시아에서는 '대불황'이 목전에 다가선 혁명의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1875년 이후의 1세대 내지 2세대들에게는 승리한 부르주아지의 세계가 전과 다름없이 튼튼한 것으로만 보였다. 아마도 부르주아지는 전에 비하면 다소 자신을 잃고 있었으리라. 그래서 그 자신감의 표명도 다소 지나치게 찌렁찌렁했다. 아마도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장래에 대한 근심이 좀 더해졌을 것이다. 종래 간직해왔던 지적 확실성이 무너진 것을 보고 당황했을 것이다. 이것은 사상가, 예술과, 그리고 과학자들이, 많은 난관ㄴ이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지적 영역으로 진출해 들어간 사실로 두드러졌다.

그러나  '진보'는 확실하게 지속했다. 전과 다름없이 부르주아적, 자본주의적, 그리고 개괄적으로는 자유주의적 사회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계속되었던 것이다. '대불황'은 단지 막간극에 지나지 않았다. 경제성장, 기술적, 과학적 전진과 향상, 그리고 평화가 지속되었다. 그러면 20세기는 19세기의 재현, 빛나고 보다 많은 성공이 약속된 19세기의 재현이 될까?

오늘날 우리는 그렇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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