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버트 O. 허시먼: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 10점
앨버트 O. 허시먼 지음, 이근영 옮김/웅진지식하우스



추천사│허무주의는 우리의 적이다 _ 우석훈 

서문│그들에게 매혹당하지 않기 위하여 


1장. 시간을 거꾸로 돌리려 했던 사람들 _ 지난 200년을 지배해온 반동 레토릭 

2장.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것이다”_ 역효과 명제 

3장. “그래 봐야 기존의 체제가 바뀌지 않을 것이다”_ 무용 명제 

4장. “그렇게 하면 우리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위태로워질 것이다”_ 위험 명제 

5장. 세 명제의 불편한 동거 

6장. 보수에게서 배우는 진보 레토릭 

7장. 어떻게 새로워질 것인가 


후기 

주 

찾아보기





21 나와 함께 포드재단의 모임에 참여했던 랠프 다렌도르프는 모임을 여는 개막사를 통해, 영국 사회학자 토머스 마셜이 1949년에 했던 서유럽의 '시민권(citizenship) 발전'에 대한 유명한 강의를 상기시킴으로써 모임의 토론 대상이 될 주제가 어떤 역사적 맥락을 갖고 있는지를 밝혔다. 마셜은 시민권의 시민적(civil) 차원과 정치적(political) 차원, 사화적(social) 차원을 구분한 뒤 휘그당의 역사 해석 정신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보다 발전한 사회가 어떻게 이런 시민권들을 하나씩 하나씩 성공적으로 얻어냈는지를 이야기 했다. 마셜의 도식에 따르자면, 공교롭게도 세가지 과제는 매 세기마다 하나씩 부여되었다. 18세기는 언론·사상·종교의 자유에서 시작해 공평한 정의와 개인적 자유의 다른 측면들에 대한 권리, 즉 자연법 사상과 미국 독립전쟁 및 프랑스 혁명에서 주창된 '인권'을 포함하는 시민적 시민권을 정립하는 시기였다. 19세기에는 시민이 정치 권력 행사에 참여하는 권리를 말하는 시민권의 정치적 측면이 상당히 발전함으로써 투표권이 더 큰 집단으로 확대됐다. 마지막으로 20세기에는 복지국가가 등장하면서 시민권의 개념이 사회적·경제적 영역으로까지 넓혀졌다. 복지국가에서는 최소한의 교육과 건강, 경제적 복지, 그리고 사회보장과 같은 조건들이 문명인으로서 삶을 영위하고 시민권의 시민적·정치적 속성들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 기본요소들로 인정받고 있다.

마셜이 이런 단계적 진보라고 장대하고 확신에 찬 캔버스에 색칠을 하고 있을 때만 해도, 사회적·경제적 영역에서 벌어졌던 시민권의 세 번째 다녜를 성취하기 위한 전투는 거의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사회보장에 대해 민감한 노동당이 지배하던 시기의 영국은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35년 후 다렌도르프는 마셜이 지나치게 낙관적이었으며, 시민권의 사회경제적 차원이 시민권의 시민적·정치적 차원에 대한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보완재라는 개념은 상당한 어려움과 반대에 부딪혀 결국 근본적인 재고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밖에 없었다.



24 역사적인 반동의 움직임과 세 가지 반동 명제

따라서 역사적으로 잇달아 나타난 추진력들에 대한 반동적 움직임들을 살펴볼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먼저, 내가 무엇을 '세가지 반동' 혹은 반동적 조류라고 부르는지에 대해 짤막하게 설명해야겠다. 왜냐하면 그 조류들은 마셜의 아주 단순한 3단계 도식보다 훨씬 다양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반동은 마셜이 말하는 시민권의 차원, 곧 법 앞에서의 평등과 보편적인 시민권에 대한 주장에 뒤이은(그리고 그에 반대하는)사상의 조류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사상의 조류를 구분해 내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법 앞에서의 평등과 보편적인 시민권에 대한 잘 알려진 주장들은 대부분 프랑스혁명의 초기 단계와 그 후에 이루어졌고, 자연히 그런 주장들에 대한 당대의 반동은 프랑스 혁명 자체 및 혁명의 저작물들에 대한 반대와 섞여 있기 때문이다. 물론 <프랑스인권선언>에 대한 모든 반대는 그 안에 담긴 내용에 대한 반대라기 보다는 그 선언을 만들어낸 사건들에 대한 반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선언이 나온 후에 곧바로 등장한 급진적인 반혁명적 담론들은 프랑스 혁명의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구분하는 것이나, 혁명에 어떤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 자체를 부정했다. 후에 좌파들이 사용한 '혁명은 하나다'라는 슬로건을 예견이라도 하듯, 프랑스혁명의 초기 반대자들은 그것을 하나의 통합체로 취급했다. 특히 첫 번째 포괄적인 고발인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1970)은 <프랑스인권선언>에 대한 훌륭한 반대 논증으로 시작한다. 버크의 반혁명적 담론은 프랑스혁명의 이념을 진지하게 보면서, 혁명가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그 선언 자체를 포괄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버크의 입장은 근본적인 지적 조류를 이루어 현대의 보수적 태도가 형성되는 기초를 제공했다.

보통선거권에 반대하는 두 번째 반동적 조류는 반혁명적인 자의식이 훨씬 덜했으며, 그런 측면에서 첫 번째 조류보다 훨씬 덜 반개혁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19세기를 거치면서 선거권을 확대하고 '하원'의 권력을 강화해 얻어낸 대중의 정치 참여라는 진전을 거꾸로 돌리자고 주장한 논자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20세기 이전에는 남성에게만 국한된 것이긴 했지만, 보통선거권을 향한 진정이 많은 국가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어떤 통일된 태도를 갖기 어려웠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 일단 귀족-사제-평민이라는 전통적인 구분이 흐려진 후에는 정치적 민주화를 향한 진전을 막기 어려웠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선거권의 확장을 위한 투쟁 과정에서 중요한 진전이 있을 때마다 나타났던 몇가지 영향력 있는 지적 조류들로부터 정치적 민주화에 반대하는 지적 반대 운동을 구성해 낼 수는 있다. 19세기의 마지막 3분의 1에 해당하는 기간으로부터 제1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에 이르는 기간까지, 철학·심리학·정치학·순수문학을 포괄하는 다양하고 폭넓은 저작물들 안에서 '대중'과 다수, 의회정치, 그리고 민주적 통치를 비난하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주장을 찾아볼 수 있다. 비록 대안이 될 제도에 대한 제안은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그런 저작물 대부분은 민주화를 추진한 결과로 사회가 처한 심각한 위험을 암시적으로 혹은 명시적으로 경고하고 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기는 하지만, 그런 저작물들이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 동안 이탈리아와 독일의 민주주의를 파괴했고, 제5장의 말미에서 보게될 것처럼 러시아혁명을 반민주적인 방향으로 바꾸는 데 일부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다. 따라서, 이런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두 번째 반동은 역사상 가장 놀랍고 파괴적인 자성예언이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이상한 일이지만, 지속되는 변화나 개혁을 거꾸로 돌릴 명시적인 의도가 거의 없었던 반동이 실제로는 가장 파괴적인, 혹은 후에 가장 파괴적이었다는 비난을 받게 되는 반동적 조류가 되고 말았다.

이제 세 번째 반동적 조류를 살펴보자. 그것은 복지국가에 대한 현재의 비판과, 복지국가 정책을 일부 '개조'하거나 거꾸로 돌리려는 시도들이다. 그러나 이 주제는 아마도 여기서 길게 다룰 필요가 없을 듯하다. 복지국가에 대한 반동적 조류의 직접적이고 일상적인 관찰자로서 우리는 그리 안에 어떤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상식적인 수준에서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엄청나게 많은 양의 저작물들이 경제적·정치적 관점에서 복지국가의 모든 측면에 대해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다양하고 강력한 정치 세력들이 사회복지 정책과 제도에 대해 끈질긴 공격을 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새로운 반동적 조류의 결과를 평가하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있다는 점도 지적된다.

이런 간략한 설명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듯이, 내가 다루려는 주제의 범위는 대단히 넓고 주제를 다루는 방법은 무척 선별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내가 이 책에서 하지 않으려는 일을 지그 밝히는 편이 나을 것이다. 먼저 나는 보수 사상의 역사적 근원이나 본질에 대한 또 다른 책을 쓰려고 하지는 않는다. 내 목적은 주장이나 수사가 어떤 형식을 가지는지 그 유형들을 묘사하고, '진보적' 정책이나 사상 운동을 뒤집거나 비난하려는 사람들은 어떤 논쟁 태도나 전략을 사용하는지를 강조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두 번째로, 나는 프랑스혁명 이후에 있었던 일련의 개혁과 반동, 명제와 반명제의 역사를 간추려 다시 쓰려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에 나는 위에서 언급한 세가지 반동적 조류들이 명백하게 만들어낸 몇 가지 공통적이고 전형적인 주장에 집중하려고 한다. 그런 주장들이 이 책의 세부 분류가 될 것이다. 각자의 주장들이 다양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어떻게 '세 가지 반동적 조류'와 연관을 맺으면서 특정한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지도 밝혀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주장들은 무엇이며, 몇가지나 되는가? 내게는 대칭에 대한 타고난 욕구가 있는 것 같다. 마셜이 말한 세가지의 연속되는 '진보적' 추진력을 비판하고 공격하고 조롱하는 근본적인 방법들을 살펴보면서 나는 또 다른 세 가지 대칭 명체들을 발견했다. 내가 찾아낸 것은 세 가지 근본적인 반동적/반작용적 명제들인데, 나는 그것을 역효과 명제(perversity thesis, 엉뚱한 결과를 낳는 명제), 무용 명제(futility thesis), 위험 명제(jeopardy thesis)라고 부른다. 역효과 명제에 따르면 정치·사회·경제 질서의 일부를 향상시키려는 어떤 의도적인 행동도 행위자가 개선하려는 환경을 악화시킬 뿐이다. 무용 명제는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모든 노력은 효과가 없으며 그 노력들은 어던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한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위험 명제는 변화나 개역에 드는 비용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 변화나 개혁은 이전의 소중한 성취를 위험에 빠뜨린다고 주장한다.

물론 '반동파'만이 이런 논쟁적 수사법을 독보적으로 사용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새로운 정책 제안이나 법안에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어떤 집단이라도 이런 수사법을 사용할 수 있다. 보수주의자들이나 반동파가 권력을 잡아 자신들이 원하는 정책이나 프로그램을 제안하거나 실행하려고 할 때, 그들과 역효과 명제나 무용 명제, 위험 명제를 사용하는 자유주의자들이나 진보주의자들로부터 비난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제2장에서 제5장까지의 내용에서 보게 될 것처럼, 이 세 가지 명제는 기존의 혹은 새로운 진보적 정책에 대한 보수파의 비판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쓰였으며, 그런 명제의 가장 중요한 옹호자는 보수주의 사상가들이었다. 제6장에서는 이에 맞서는 진보 진영이 사용하는 대항 명제들에 대해 다룬다. 진보 진영의 명제들은 반동 명제들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지만, 형태는 대단히 다르다.


113 이 부분에서 역효과 명제와 무용 명제의 보다 근본적인 차이가 눈에 띈다. 얼핏 보기에는 무용 명제도 역효과 명제와 마찬가지로 인간 행동의 예측하지 못한 결과라는 생각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역효과 명제 대신 무용 명제가 제기되는 경우 이외에는, 의도하지 않았던 부작용은 의도했던 것과 정반대되는 결과를 낳는 데까지 이르는 것은 아니고 그저 본래의 행위를 무효화하는 정도일 뿐이다. 그러나 무용 명제는 이런 구조를 갖고 있어서 역효과 명제의 가벼운 형태에 불과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이 시나리오에서는 인간의 행동이나 의도가, 거기서 여러가지 부작용이 생겨나기 때문이 아니라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변화시키는 체하기 때문에 좌절되고 만다. 사회의 기본구조를 무시한 탓이다. 따라서 이 두 명제는 인간세계나 인간 및 사회의 활동이 지는 목적을 보는 관점에서 거의 정반대의 견해에 근거를 두고 있다. 역효과 명제는 인간 세계가 매우 변덕스러우며 그런 하나하나의 변화는 곧바로 생각지도 않았던 여러가지 반작용으로 이어진다고 본다. 반면에 무용 명제 지지자들은 세계가 고도로 조직화되어 있고 내재하는 법칙에 따라 진화하느 것이어서, 인간의 행위는 세계를 고쳐나가기에는 너무나도 무력하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어떤 목표를 추구하는 인간의 행동이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고 단지 수포로 돌아갈 뿐이라는 무용명제의 주장이 상대적으로 온건하기는 하지만, 그 온건함은 앞서 모욕적 성격이라고 표현한 것에 의해 메워지고도 남음이 있다. 인간 세계가 진보적 방향으로의 변화에 대해 열려 있어야 한다는 어떤 주장에 대해서도 오만하게 거부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명제가 전혀 다른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메스트르의 고전적인 역효과 명제 표현에서 인간 행위자들을 좌절시키는 거은 '신의 섭리'다. 그 섭리는 인간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옴으로써 '달콤한 복수'를 하고, 인간의 무력함을 드러내는 데서 사적인 재미와 기쁨을 만끽하는 듯하다. 무용 명제에서는 인간의 행위가 이런 식의 사적인 불쾌감 없이 조롱당하고 좌절된다. 인간의 행위는 사적인 관계를 떠나 세상사를 주관하는 어떤 거대한 법칙에 위배됨으로써 무용한 것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역효과 명제는 신화와 종교 및 인간사에 대한 초자연의 직접적인 간섭을 믿는 일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반면에 무용 명제는 그 이후의 과학의 권위에 대한 믿음, 특히 당시 현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으로 생각됐던 것보다 더 확실한 법칙을 지닌 사회과학을 구축하려는 19세기의 열망과 더 긴밀히 연결돼 있었다. 역효과 명제는 낭만주의와 튼튼하게 연결돼 있었던 데 반해, 모스카·파레토·미헬스의 무용론은 '과학'에 호소했다. 특히 무용론은 대두하고 있던 마르크스주의 사조 및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과학 사칭에 맞서 싸우기에 이상적인 것이었다.


210 반동주의 수사학 진보주의 수사학에 공통되는 이들 과장과 환상으로부터 양쪽 모두와 대비되는, '성숙한' 입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두가지 구성 요소가 추출될 수 있다.
(1) 행동과 행동하지 않는 것 모두에는 위협과 위험이 있다. 양쪽의 위험은 가능한 충분히 검토되고 평가되고 대비돼야 한다.
(2) 행동과 행동하지 않는 것 양쪽의 해로운 결과들이 이제 우리에게 친숙해진 두 유형의 경종을 울리는 예언자들로부터 영향을 받기 때문에 확살히게는 결코 알 수 없다. 그들이 임박한 불행이나 재난을 예고하게 되면 "최악의 사태는 언제나 올 것인지 여부가 확실치 않다'라는 말을 기억하는게 좋을 것이다.


226 나는 반동주의자들의 주장들 각각이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진보주의 짝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사회적 행동에 관해 반동주의의 진술과 진보주의 진술이 대비되는 쌍들을 만들었다. 그 가운데 일부를 되새겨 보자.
반동: 계획된 행동은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진보: 계획된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반동: 새로운 개혁은 옛 개혁을 위험에 빠뜨릴 것이다.
진보: 신-구의 개혁은 서로가 서로를 강화시켜 줄 것이다.

반동: 계획된 행동은 사회 질서의 항구적이고 구조적인 성격('법칙')을 바꾸려 한다. 따라서 그것은 전혀 효과가 없고 무용하다.
진보: 계획돈 행동은 이미 '굴러가고 있는' 강력한 역사의 힘에 의해 뒷받침된다. 거기에 맞서는 것은 아주 쓸데없는 짓이다.

이 주장의 쌍들의 존재를 드러내 보이면 반동 명제는 추락하고 만다. 그 명제들은 그 진보주의 짝들과 함께 공상적이고 매우 양극화된 일련의 논쟁에서 그저 극단적인 진술일 뿐이다. 이런식으로, 그 명제들은 대부분의 경우 한정이 되고 완화되거나 아니면 수정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한 극단적인 주장임이 결국 드러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