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판 츠바이크: 위로하는 정신(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


위로하는 정신 - 10점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유유


역자 서문 츠바이크가 남긴 유언 

머리말 몽테뉴에 대한 회고 


1 평민에서 귀족으로 

2 몽테뉴가 된 몽테뉴 

3 창작의 10년 

4 자아를 찾아서 

5 자신만의 보루 지키기 

6 여행 

7 마지막 나날들 


원서 편집자 후기 

몽테뉴 연보





서문

몇몇 작가들은 연령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생애의 모든 시기에 활짝 열려 있다. 이를테면 호메로스, 셰익스피어, 괴테, 발자크, 톨스토이 같은 작가들이다. 그 밖에 특정한 순간에야 비로소 그 완전한 의미가 분명하게 밝혀지는 작가들도 있다. 몽테뉴는 후자에 속한다. 아직은 젊어서 경험이 부족하거나 좌절을 겪은 적이 없는 사람은 그를 제대로 평가하거나 존중하기가 어렵다. 자유롭고도 흔들림이 없는 그의 사색은 우리 세대처럼 운명에 의해 폭포같은 격동의 세계 속으로 던져진 세대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된다. 전쟁, 폭력, 전체적 이데올로기가 목숨을 위협하고, 한 사람의 삶에서도 가장 소중한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는 시대를 뒤흔들린 영혼으로 겪어본 사람만이 그를 이해하게 된다. 그런 사람이라야 이런 집단 광증의 시대에 가장 내밀한 자아에 충실하기 위해선 얼마만 한 용기와 정직성과 단호한이 필요한지를, 그리고 이 거대한 파멸의 한가운데서 정신적·도덕적 독립을 흠 없이 지키는 일보다 세상에 더 어렵고도 심각한 일이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인류의 품위나 이성에 대해 스스로 의심을 품고 그것에 대해 절망도 해봐야 비로소야, 그런 전체적인 무질서 한가운데서도 모범적으로 똑바로 서 있는 어떤 개인을 진짜로 찬양할 수 있게 된다.

경험을 해보고 시련을 겪어보아야만 비로소 몽테뉴의 지혜와 위대함을 존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 자신이 직접 경험하였다. 스무 살 때 처음으로 그가 우리에게 남긴 유일한 책인 <수상록>을 손에 잡았을 때 나는 솔직히 시작부터 그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었다. 존경심에 가득 차서 이 흥미로운 개성이 자신을 알리고 있음을 인정할 만큼의 문학적 이해력은 있었다. 특별히 눈이 밝고 시야가 넓고 사랑스러운 인간이며, 모든 문장과 격언에 자신만의 특징을 부여할 줄 아는 예술가라는 점을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즐거움이라고 해봐야 고작 오래된 문학을 향한 것이었을 뿐이다. 거기엔 마음속에 불붙는 정열적인 열광, 영혼에서 영혼으로 전기처럼 전해오는 힘이 없었다. 우선 <수상록>의 주제부터가 나와는 맞지 않았고, 그 대부분이 나의 삶에 적용될 수 없는 것으로만 생각되었다. "왕들이 만날 때의 기념식"이나 "키케로 관찰"등 몽테뉴 선생의 광범위한 산책들이 대체 나 같은 20세기의 젊은이한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자기 시대의 색체를 강하게 지닌 프랑스어에 라틴어까지 잔뜩 섞인 그의 문장이 내 눈에는 교과서처럼 구식으로 여겨졌고, 그의 온화하고 잘 조율된 지혜도 나와는 무관해 보였다. 그것은 너무 일찍 나타난 지혜였다. 명예를 얻으려 애쓰지 말고, 지나치게 정열적으로 외부 세계에 얽히지 말라는 몽테뉴의 똑똑한 경고나, 온건함과 관용을 보이라며 마음을 진정시키는 권고등이 망상에서 벗어날 생각도 없고 평온은 커녕 위로 올라가려는 충동만 강렬했던 한창때의 젊은이에게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젊음의 본질에는 온건함과 회의를 품으라는 충고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소가 있다. 어떤 의심이든 젊음에는 믿음과 이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믿음과 이상에 불길을 붙여주기만 한다면, 젊은 시절에는 가장 격하고 부조리한 망상조차도 의지력을 약화시키는 고귀한 지혜보다 더욱 중요하게 생각되는 법이다.

게다가 몽테뉴가 모든 시대를 위해 가장 단호하게 전파한 저 개인의 자유라는 게 1900년 무렵의 우리가 정말 그토록 열렬히 옹호할 만한 것이었던가? 이 모든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명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 자유는 이미 오래전에 독재와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인류에게 법률과 관습을 통해 확고히 보장된 소유물이 아니었던가? 자신의 목숨에 대한 권리, 스스로 생각할 권리 그리고 아무런 방해없이 그 생각을 말이나 글로 표현할 권리는 마치 우리 입의 숨결처럼, 우리 심장의 박동처럼 자명하게 우리 자신의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던가?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하나씩 우리 앞에 열렸으며, 우리는 국가의 포로가 아니었고, 전쟁 복무에 묶이지도 않았고, 전체적인 이데올로기의 변덕에 종속되지도 않았으며, 추방당하거나 쫓겨나거나 갇히거나 박해당할 위험에 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우리 세대에게 몽테뉴는 진작 부수어버린 쇠사슬을 무의미하게 쩔그럭거리는 사람으로만 보였다. 당시 우리는 운명이 우리를 위해 이 쇠사슬을 전보다 더욱 강하고 더욱 잔인한 모습으로 새로 주조하고 있음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우리는 영혼의 자유를 얻기 위한 몽테뉴의 싸움을, 이젠 필요도 없고 의미도 없는 지나간 역사의 싸움으로만 여기 멀리서만 존중했다. 청춘이 사라져야 비로소 그 가치를 알고, 건강이 없어져야 그 귀중함을 알고, 우리 영혼의 가장 소중한 핵심인 자유를 뺏기는 중이거나 이미 빼앗긴 다음에야 비로소 그 귀함을 안다는 것이 인생의 비밀스러운 법칙이다.

몽테뉴의 삶의 기술과 지혜를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그의 싸움의 필연성이야말로 우리 정신의 세게에서 가장 절실한 것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과 비슷한 상황을 마주해야 했던 것이다. 몽테뉴처럼 우리도 세계가 최고 높이에서 끔찍하게 추락하는 상황을 겪어야 했다. 우리도 크나큰 희망과 경험과 기대와 열광에서 물러나, 채찍을 맞으며 기껏 자신의 벌거벗은 자아, 유일무이하고 되풀이 할 수 없는 제 생존을 지키려는 지점까지 쫓겨나야 했다. 이런 운명의 동질성을 겪고서야 비로소 몽테뉴는 내게 없어서는 안 되는 형제, 조력자, 위안을 주는 친구가 되었다. 그의 운명이 얼마나 절망적으로 우리의 운명과 비슷한가.


하지만 그다음에는 다시 그의 미소가 느껴진다. 어쩌자고 그 모든 일을 그렇게 힘들게 받아들여? 너의 시대의 부조리와 야만성을 앞에 두고 어쩌자고 그렇게 힘들어하고 풀이 죽지? 그 모든 것은 너의 피부만을, 너의 외적인 삶을 건드릴 뿐 진짜 내면의 자아는 건드리지 못하는데, 이런 외부의 힘은 네가 스스로 헷갈리지 않는 한 네게서 아무것도 뺏어가지 못하고 네게 방해가 되지도 못한다. "분별력이 있는 인간은 아무것도 잃을 게 없다." 시대의 사건들은 네가 거기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는 한 네게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다. 네가 스스로 명료함을 지닌다면 시대의 광증은 진짜 곤궁이 아니다. 너의 체험 중에서 가장 고약한 것들, 패배로 보이는 것들, 운명의 타격은 네가 그런 것들 앞에서 약해질 때만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 이들에 가치와 무게를 두고, 그런 일에 즐거움이나 고통을 분배하는 사람이 네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냐? 너 자신을 말고는 그 무엇도 너의 자아를 귀하거나 비천하게 만들지 못한다. 외부에서 들어온 가장 힘든 압력도 내적으로 확고하고 자유로운 사람을 쉽게 들어 올리지 못한다.

특히 개별적 인간이 자신의 영적인 평화와 자유가 위혐에 빠진 것을 느낄 때면, 언제나 몽테뉴의 말과 지혜로운 충고가 아주 유익하다. 패거리 짓기와 혼란의 시대에 정직함과 인간성 말고는 그 무엇이 우리를 더 잘 보호할 수 있을것인가. 그의 책은 한 시간 또는 반 시간이나 붙들지 않아도 언제나 딱 알맞은 말을 찾아내게 한다. 자신의 독립성을 찾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가 이미 수백 년 전에 말한 내용이 언제나 거듭 타당성을 얻는 것이다. 우리 시대처럼 비인간적인 시대에는 우리 안에 인간적인 것을 강화해주는 사람, 즉 우리가 가장 유일하고 잃어버릴 수 없는 깊은 내면의 자아를 그 어떤 외저인 강요를 위해서도, 시대나 국가가 정치적 강제와 임무를 위해서도 내버리지 말라고 경고해주는 사람만큼 고마운 사람은 없다. 모든 것과 모든 사람에 맞서 스스로 자유를 지킨 사람만이 지상에서 자유를 더욱 늘리고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102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 살기 시작한다.” 그가 찾아낸 진리는 이듬해에, 아니 종종 바로 다음 순간에 이미 진리가 아니다. 그는 새로운 진리를 찾아야 한다. 그러니 수많은 모순들이 나타난다. 때로는 쾌락주의자이다가 바로 스토아주의자가 되고, 곧 회의주의자가 된다. 그는 모든 것이며 아무것도 아니다. 언제나 다른 사람이며, 그러면서도 언제나 같은 사람이다.


102 발견하여 거기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계속 찾아보는 것이 몽테뉴의 낙이었다. 그는 목적을 위해 쓸 수 있는 공식인 ‘현자의 돌’을 찾는 철학자가 아니었다. 도그마나 학설을 원하지 않고, 고정된 주장에 대해 언제나 두려움을 품었다. “그 무엇도 대담하게 주장하지 않기, 그 무엇도 경박하게 부인하지 않기.” 그는 그 어떤 목적을 향해서 나아가는 게 아니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그의 생각에는 모든 길이 올바른 길이다. 그래서 그는 소크라테스 같은 의미에서가 아니라면 절대로 철학자가 아니었다. 소크라테스가 그 어떤 도그마나 학설, 법칙, 체계 등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몽테뉴는 그를 가장 좋아했다. 소크라테스는 그 자체로 하나의 형태일 뿐이었다. 몽테뉴는 모든 것에서 자신을 찾고, 자신 속에서 모든 것을 찾는 인간이었다.


120 칼뱅은 마녀 재판을 옹호하면서도 적대자를 서서히 불길에 태워 죽이도록 했고, 루터는 악마가 나타난 것으로 믿고 벽을 향해 잉크병을 던졌으며, 토르케마다는 수백 명을 화형에 처했다. 그들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달리 도리가 없었다는 식의 변명을 하곤 한다. 자기 시대의 관점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란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인간적인 것은 변하지 않는 법이다. 광신주의의 시대에도 언제나 휴머니스트들이 살았고, 마녀 박해의 시대에도 화형 재판소와 종교재판 당국은 에라스무스, 몽테뉴, 카스텔리오 같은 사람들의 명료함과 인간적인 면모를 단 한순간도 흐려놓을 수가 없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자유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지상의 모든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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