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벌린: 낭만주의의 뿌리


낭만주의의 뿌리 - 10점
이사야 벌린 지음, 나현영 외 옮김/이제이북스


1. 낭만주의의 정의를 찾아서

2. 계몽주의에 대한 최초의 반격

3. 낭만주의의 진정한 아버지들

4. 억제된 낭만주의자들

5. 해방된 낭만주의

6. 지속되는 영향력


옮긴이의 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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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글

근대를 규정하는 술어 중에는 불확실성과 방향 상실 등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삶의 혼란과 고통 속에서 어떤 희망의 원리가 있음을 알게 된다. 벌린이 예로 들었듯이 종교 전쟁의 시대였던 16세기에는 서로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살육했던 가톨릭 교도와 프로테스탄트가 18세기 말에는 각자의 신념에 쏟는 진정성과 신실함을 인정하고 존중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방향 상실의 대가로 세상에는 단 하나의 객관적인 진리가 존재하지 않으며,자신이 가진 진리의 이름으로 타인을 억압할 수 없다는 값진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다. 16세기와 18세기, 엄밀히 말해 1760년부터 1830년 사이에 과연 어떤 변화가 일어나 유럽인들의 생각과 태도를 이렇게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을가. 그것은 바로 낭만주의 운동이었다.


낭만주의에 도전한 수많은 학자들은 낭만주의의 이름으로 불리는 여러 가지 이질적인 요소들 가운데 어떤 공통점도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몇 페이지에 걸친 낭만주의의 정의를 숨가쁘게 따라가다 보면, 낭만주의가 "한번 들어가면 결코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는 폴리페모스의 동굴"이라는 데 동의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벌린은 17세기와 18세기의 유럽 사회를 면밀히 관찰한 뒤 낭만주의는 무엇보다 당시 유럽의 2등국으로 전락했던 독일인들의 상처 입은 자존심과 굴욕감, 프랑스의 계몽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하여, 사물의 불변하는 구조는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끊임엇이 세계를 창조하고 변화시키는 힘으로서의 인간 의지가 최우선에 놓여야 함을 주장한 운동이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겉으로는 모순되어 보이는, "고귀한 야만인"으로 대표되는 단순하고 소박한 삶에 대한 찬양과, 네르발 같은 이들이 추구한 극단적인 세련됨은 모두 사물의 주어진 본성에의 거부라는 핵심개념으로 통하게 된다.


인간의 구속받지 않은 강력한 의지가 자유롭게 창조하는 세계를 구현하려 했던 낭만주의는, 의지를 가진 주체의 외연을 국가와 민족 같은 공통체에까지 넓히며 피히테의 민족주의나 파시즘처럼 극단적으로 왜곡된 형태를 낳기도 했다. 이러한 파국적인 귀결을 통해 낭만주의를 비판적으로 반성할 수 있게된 오늘날의 우리는, 예술이나 인생에서 완전한 진리임을 주장하는 어떤 답도 원칙적으로는 완전한 진리일 수 없다는 낭만주의의 개념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어느 정도는 공통의 가치가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히틀러 같은 인물이 아무리 자신의 이상에 진정성과 신실함을 쏟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의 과오가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낭만주의는 결국 개인의 불굴의 의지, 개인의 신념과 이상을 강조하면서 원래의 의도와는 반대로 타인의 의지를 인정하고 타협할 필요성을 불러일으켰다. 인류는 타인의 이상을 인정하지 않으면 자신의 이상도 인정받을 수 없음을 역사를 통해 배우게 된 것이다. 낭만주의가 우리에게 남긴 진정한 유산은 바로 이 관용과 이해의 정신이다.


벌린의 이 책은 1965년 3월부터 4월까지 일곱 번에 걸쳐 워싱턴에서 행한 A. W. Mellon 강연을 BBC에서 녹음한 것을 바탕으로 그의 동료 헨리 하디가 편집한 것이다. 박학한 달변가로 유명했떤 그답게, 이 책에는 처음부터 원로로 쓰인 글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생생한 현장감이 담겨 있다. 칸트나 헤르더, 피히테나 실러 같은 철학자와 사상가들뿐 아니라 문학과 음악과 미술의 각 분야를 아우르며 예리한 분석과 풍부한 실례를 쏟아내는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교양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2005년 6월

강유원·나현영 적음





1. 낭만주의의 정의를 찾아서

10 낭만주의는 베르길리우스가 묘사했던 어두운 동굴처럼 어느 곳을 향해 걸어도 한 방향에만 이르도록 되어 있지 않으면, 폴리페모스의 동굴처럼 한번 들어간 사람은 결코 살아 나오지 못하는 곳이다. 내가 이 주제를 선택하면서 약간의 두려움을 느끼는 것도 바로 이런 까닭이다


10 낭만주의의 중요성은 이것이 서구 세계의 삶과 사고를 근본적으로 바꾼 가장 광범위한 근대의 운동이라는 것이다. 내게 이것은 서구인들의 의식에 일어난 단일한 변화로는 가장 거대해 보이며, 19세기와 20세기에 일어났던 다른 모든 변화들은 이보다 비교적 덜 중요하거나, 적어도 이 운동에 깊이 영향을 받은 듯하다.


10 한 예로,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문학을 생각해 보자. 플라톤의 철학을 읽는 사람은 그가 기하학적 모형이나 수학적 모형을 따르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11 어딘가에 완전한 통찰이 존재하며, 엄격한 훈련이나 방법만 있으면 수학에서의 차갑고 추상적인 진리와 어느 정도 유사한 이러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관념은, 플라톤 이후의 수많은 다른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11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은 물론 이와 비슷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스피노자 같은 철학자를 비롯해, 18세기나 19세기 철학자들도 분명, 절대적이지는 않다 해도 어느 정도 절대적 진리에 가까운 무엇에 도달하여 이것으로 세상을 정리하고 어떤 종류의 합리적 질서를 세우는 것이 가능하며, 그 안에서 공들여 습득한 지식을 사용 하고 보편적으로 이해 가능한 이성을 적용하면, 마침내 과거에 인간을 그토록 무수한 파멸의 길로 이끌었던 비극과 악덕과 우매함을 피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11 이것은 한 가지 모형을 예로 든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모형들은 언제나 인간을 과오와 혼란으로부터, 그들이 하나의 모형을 가지고 설명하고자 하는 어떤 불가해한 세계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에서 출발하지만, 거의 예외 없이 바로 그 동일한 인간들을 노예로 만들고, 경험 전체를 설명하는 데 실패하는 것으로 끝난다. 해방자로 시작하여 일종의 독재자로 끝을 맺는 것이다.


12 고대 그리스와 비교되는, 그와 비슷한 시대에 있었던 성서와 유대인들의 문화를 살펴보자.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인들에게는 불가해해했을 전혀 다른 지배적 모형과 전혀 다른 관념의 집합을 발견하게 된다.


13 상이한 모형들이 얼마나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가에 대한 얘기를 해보겠는데... 잠바티스타 비코... 는 아마도 고대 문화의 생소함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 최초의 학자일 것이다.


14 내가 이런 사례들을 제시하는 것은 단순히 이런 고대 문화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이질적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일 뿐 아니라, 그저 무비판적으로 고전들을 읽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더 커다란 변화가 인간 의식의 역사에서 일어나왔음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15 일반적으로 어떤 분야가 우세해지면 - 예컨대 물리학이나 화학 - 그것은 당대의 상상력에 엄청난 지배력을 미치고, 그 결과가 다른 영역에까지도 마찬가지로 적용된 다.


15 이런 일이 19세기의 사회학에서 일어났고, 우리 시대의 심리학에서도 일어났다.


15 내가 논증하고나 하는 바는 낭만주의 운동이 그처럼 거대하고 급진적인 변혁이었으며, 낭만주의 이후로는 이와 유사한 운동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주장이다.


16 출발은 프랑스의 18세기, 즉 모든 것이 순조롭고 평온하게 시작하며, 삶과 예술은 법칙을 따르고


16 일반적으로 이성이 진보하고, 합리주의가 확산되고, 교회의 세력이 약화되며, 비이성적인 것은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들에게 호되게 비판을 당하는 우아한 세기다. 거기엔 평화가 있고, 고요함이 있고, 우아한 건축이 있으며, 인간사뿐 아니라 예술적 실천, 윤리, 정치, 철학에까지 보편적 이성을 적용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16 그때 느닷없이 명백하게 설명할 수 없는 습격이 일어난다.


16 갑자기 감정의 거친 폭발, 즉 어떤 열광이 생겨난다. 사람들은 고딕 건축과 자신의 내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들은 갑자기 신경증적이고 우울해지며, 타고난 천재의 불가사의한 약동을 찬미하기 시작한다. 지금까지의 조화롭고 우아하며 평온했던 사태에 대한 관심은 어디서나 감소한다. 동시에 다른 변화들 역시 일어난다. 프랑스 혁명이 터지고, 불만이 팽배하며, 국왕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공포시대가 열린다.


18 어쨌든 관념이 관념을 낳지는 않는 법이다. 어떤 사회적.경제적 요인들에 의해 인간 의식에 중대한 변동들이 일어났음은 분명하다.


21 전심 전력을 다하는 태도, 성실함, 영혼의 순수함, 무엇이든 관계없이 자신의 이상에 헌신하는 능력과 망설임 없는 자세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21 그게 무엇이 되었든, 이 점이 중요하다.


21 전심 전력을 다하는 태도, 성실함, 영혼의 순수함, 무엇이든 관계없이 자신의 이상에 헌신하는 능력과 망설임 없는 자세


23 마호메트는 미신에 사로잡힌 잔인하고 광신적인 괴물로 자유와 정의와 이성을 향한 모든 노력을 짓밟는 존재로 그려져 있으며, 당연히 볼테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 관용과 정의, 진리와 문명의 적으로 비난받고 있다.


23 칼라일이 마호메트에게서 높이 사는 점은 그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열정적인 인생에서 엄청난 수의 추종자를 거느렸으며, 무언가 강력하고 장엄한 사건을 통해 인류의 역사에 위대하고 감동적인 순간을 가져왔고, 이것을 실증했다는 점이었다.


37 여기에 접근하는 유일하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법, 최소한 내가 유익하다는 것을 알게 된 유일한 방법은, 천천히 인내심을 가지고 다가서는 역사적 방법이며 18세기 초를 관찰하여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본 다음, 그 저변을 잠식하던 요인들이 무엇이었는지 하나하나 생각해 보고, 18세기 후반까지 이 요인들에 어떤 특수한 결합이나 집합이 일어나, 내게는 분명 우리 시대 서구인들의 의식에 가장 큰 변화로 여겨지는 낭만주의 운동을 일으켰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2. 계몽주의에 대한 최초의 반격

41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의 계몽주의는 정의해 둘 필요가 있다. 이렇게 압축해도 좋다면, 서구에는 세 가지 기본 명제, 즉 서구의 전통 전체를 지탱해 온 세 개의 기둥이 있다. 그것들은 계몽주의 시대에만 한정되지 않으나, 계몽주의는 그것에 특정한 형태를 부여하고, 그것을 특정한 방식으로 변형시켰다.


41 첫째, 모든 진정한 질문에는 대답이 존재하며,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은 질문이 아니다,


42 이것이 기독교도와 스콜라 철학자들, 계몽주의와 20세기의 실증주의 전통에 모두 공통되는 명제다. 실로 그것은 주요 서구 전통의 뼈대이며, 낭만주의가 균열시킨 것도 바로 이것이다.


42둘째 명제는, 모든 답은 알 수 있고, 타인에게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수단을 통해 발견되며, 어떤 기술이 있어 그것으로 세계가 무엇으로 구성되었는지, 그 안에서 인간은 어떤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무엇이고, 사물들과의 관계는 무엇이며,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지, 또 나머지 모든 진지하고 대답 가능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내는 방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42 셋째 명제로 모든 대답들은 서로 모순되지 않아야 하는데, 만일 그것들이 서로 모순된다면 혼돈이 야기되기 때문이다.


43 계몽주의가 이 전통에 가져온 특별한 반전은, 이제까지 대부분의 전통적 방식들 -이미 잘 알려져 있을 테니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 로는 그 대답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 점이다. 그 답은 계시로도 얻지 못하니, 여러 사람들이 받은 계시가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까닭이다. 그것은 전통으로도 얻지 못하니, 전통은 종종 인간 을 현혹시키는 거짓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까닭이다. 그것은 도그마로도 얻을 수 없고, 권위를 가진 인간의 개인적인 자기 성찰을 통해서도 얻을 수 없으니, 너무 많은 사기꾼들이 이 역할을 불법으로 행사해 온 까닭이다 - 나머지 다른 방식들도 마찬가지였다. 대답을 발견하는 단 하나의 방법이 있다면, 한편으로는 수학적 학문에서처럼 연역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과학에서처럼 귀납적으로,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다.


43 이것이 일반적인 대답, 곧 진지한 질문에 대한 진정한 대답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물리학과 화학 분야에서 찬란한 승리를 거두어 낸 이러한 대답들이 훨씬 골치 아픈 분야인 정치학이나 윤리학, 미학에 똑같이 적용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46 계몽주의는 분명, 간혹 그렇게 유지된 적도 있었으나, 모든 계몽주의자들이 대체 로 비슷한 신념을 지닌 단일한 운동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인간 본성에 관한 의견은 매우 광범위하게 나뉘었다. 퐁트넬과 생테브르몽, 볼테르와 라 메트리에게, 인간은 구제받을 길 없이 질투와 시기로 가득 찬, 사악하고 나약하며 타락한 존재였고, 따라서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는 최대한 혹독한 규율이 필요했다.... 루소처럼 인간의 본성은 악하지도, 중립적이기도 않은 선한 것이며, 다만 스스로 만든 제도에 의 해 타락했을 뿐이라고 말한 이들도 있었다.... 또한 계몽주의 시대의 몇몇 탁월한 이론가들은 영혼의 불멸을 믿었다.


48 이것이 모든 계몽사상가들이 품고 있던 신념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자연과학자들이 18세기의 위대한 승리를 거두는 데 사용했던 신뢰할 만한 방법, 곧 자연과학 그 자체를 통해 이러한 보편적인 명제들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48 18세기 초의 지배적인 미학 이론은, 인간은 자연을 비추는 거울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48


50 영국을 대표하는 인물임에 틀림없는 조슈아 레이놀즈는, 화가는 자연 그 자체로 자연을 바로잡으며, 더 완전한 자연으로 자연의 불완전한 상태를 바로잡고, 형상의 추상적인 관념을 현실에 있는 어떤 원본보다 완전한 것으로 인식한다고 말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이상적인 미의 이론으로, 그에 따르면 페이디아스가 불멸의 명성을 얻은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이상이 어디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54 이 시대의 지배적인 태도는, 인간은 진보하며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있고, 낡은 편견과 우상, 무지와 잔인함을 떨치고 인류를 행복하고 자유롭게, 고결하고 바르게 만들어 줄 어떤 학문을 세우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었다. 다음에 언급할 사람들이 공격한 것은 바로 이러한 태도였다.


54 계몽주의 시대의 매우 전형적인 인물인 몽테스키외는 인간은 어디서나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는데, 이미 많은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이 말했지만 그동안 잊혀져 있었던 이 명제는 비록 아주 깊숙이는 아니라 해도 전체적인 그림에 흠집 같은 것을 냈다.


56 몽테스키외의 어떤 발언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는 몬테수마Montexuma(아스텍 제국의 제9대 황제-옮긴이)가 코르테스에게,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기독교라는 종교가 유익할지 모르지만, 자기 백성들에게는 아스텍의 종교가 가장 유익하다고 한 말이 틀리지 않다고 말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발언은 양쪽 진영에게 모두 충격을 주었는데, 로마가톨릭 교회와 당시 프랑스의 좌파가 그들이었다.


56 그러므로 우리 눈에 참으로 보이지 않는 명제들이 다른 문화에서는 참일 수도 있다는 관념, 종교적 진리의 가치를 어떤 객관적 기준을 만족시키느냐에 의해서가 아니라 더 융통성 있고 실용적인 방법을 통해, 즉 그것을 믿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느냐, 그들의 삶의 방식에 적합하느냐, 그들로 하여금 어떤 높은 목표를 지향하게 하느냐, 그들의 삶과 경험의 일반적인 구조에 잘 들어맞느냐를 물어 따져 보아야만 한다는 관념은 로마가톨릭 교회와 무신론적인 유물론자들 모두에게 배신처럼 보였다.


56 이제 사람들은 영원불변하거나 어디든 적용되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 대신,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이 적당히 들어맞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대부분의 장소에서 적용되는 것이 있다고 말해야 했다.


60 17세기와 18세기의 독일에 대해 사실대로 말하자면, 독일은 어쨌든 뒤떨어진 촌구석이었다. 독일인들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것은 사실이었다. 16세기의 독일인들은 어느 누구 못지않게 진보적이고 역동적이었으며, 유럽 문화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61 무엇보다 30년 전쟁이라는 극심한 혼란을 겪는 와중에 루이 14세를 비롯한 다른 왕의 군대가 독일 인구의 상당수를 살육하고 파괴했으며, 그 피바다 속에서 문화적 진보를 이루었어야 할 것들이 궤멸되었다.


62 이런 배경에 대항하여 낭만주의의 진정한 뿌리인 경겅주의 운동이 독일 사회 내부에 깊이 자리잡았다. 경건주의는 루터주의의 한 분파로, 성서를 면밀히 연구하였으며 인간과 하느님이 맺는 인격적 관계를 매우 중시했다. 그 결과 자연히 영적 생활을 강조하고, 지식을 경시하며, 의례와 형식, 겉치레와 의식을 멀리하게 되었고, 고통받는 인간 개개인의 영혼이 그의 조물주와 맺는 직접적인 관계에 중점을 두었다.


64 인간은 점차 자신의 주위를 단단한 벽으로 둘러싸 연약한 표면을 드러내지 않으려한다 - 최대한 상처를 덜 받고 싶은 것이다. 갖은 상처들이 그 위에 겹겹이 쌓여 왔으므로, 그는 최소의 공간에 자신을 제한시켜 더는 상처에 노출되지 않기를 바란다.


68 계몽주의에 가장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으며, 낭만주의의 모든 과정, 즉 지금까지 내가 기술하고자 했던 관점들에 대한 반역의 모든 과정을 촉발시킨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으나, 때로는 무명의 인물들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법이다 (히틀러 역시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는 무명이었다).


68 요한 게오르크 하만은 매우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쾨니히스베르크의 목욕탕 주인이었으며, 어린 하만은 동프로이센의 경건주의 운동의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다.


70 프랑스인들은 학문의 일반 원칙들을 다루었지만, 이러한 일반 원칙들은 현실의 삶, 고동치는 삶의 실재성을 결코 붙잡지 못했다. 한 남자를 만나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자 할 때, 몽테스키외나 콩디야크의 저서에서 주워 들은 다양한 심리학적.사회학적 일반론으로 성급히 정의해 버리는 것으로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본질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서로 교제하는 방법 뿐이다. 교제는 두 인간 존재가 실제로 만나는 것을 의미하며, 상대방의 얼굴을 관찰하고, 몸을 어떻게 비트는지, 또 몸짓은 어떠한지를 관찰하고, 그가 하는 말을 듣고, 나중에 분석해낼 수 없는 다른 많은 방식들로 주어진 자료에 확신을 얻어, 자신이 지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3. 낭만주의의 진정한 아버지들

79 18세기는 누구나 알다시피 - 이것은 진부한 얘기다 - 과학이 위대한 승리를 거둔 시대였다. 과학이 올린 개가는 이 시대의 가장 경이로운 사건이었으며, 이 시기에 인간의 감성에 일어난 가장 근본적인 혁명은 낡은 형식들이 파괴된 것에 따른 결과, 즉 기성 종교는 조직화된 자연과학에 의해, 중세의 낡은 신분 질서는 새롭게 등장한 세속 국가에 의해 양쪽으로 공격을 받은 결과였다.


79 이와 동시에 합리주의는 확실히 아주 극단적으로 나아갔고, 그런 유형의 합리주의에 가로막힌 인간의 감정은 으레 그렇듯이 다른 방향에서 분출구를 찾았다.


80 합리주의가 이렇게까지 전략했으며, 받아들여질 기회라도 얻기 위해 종교가 이런 식으로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사람들이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욕구 충족을 위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야 했다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81 새로운 과학적 철학이 행복과 질서를 가져다 주었을지는 모르지만, 그동안 인간의 비합리적인 욕망, 20세기가 인류에게 매우 뼈저리게 자각하게 해 주었던 그 무의식적 충동의 모든 영역이, 나름대로 충족될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했음은 분명하다. 그리하여 18세기를 조화롭고 균형 잡혀 있으며, 무한히 합리적이고 우아하고 흠 없는 세기로 믿는 사람들, 이른바 인간의 이성과 미를 비추는 잔잔한 거울과도 같아 어떤 흐릿함이나 모호함도 어지럽히지 못했다고만 믿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놀라운 일이겠지만, 유럽의 역사에서 이토록 많은 비합리적인 인물들이 고집스럽게 그 표면을 배회했던 적도 없었다.


82 어쨌든 이것이 우리가 다루는 세기의 분위기로, 일관되고 우아해 보이는 표면 밑으로 온갖 종류의 어두운 힘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하만은, 이미 설명했듯이, 이 양量에 대한 질質의 격렬한 반란에서, 인간의 모든 반과학적인 열망과 욕망의 격렬한 반란에서, 가장 시적이고, 신학적으로 가장 심오하며, 가장 흥미로운 대표자일 뿐이다.


83 이것이 하만이 가진 사상의 핵심이다. 이것은 자연과 역사에서 신의 음성을 감지하는 일종의 신비주의적 생기론이다. 자연을 통해 신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아주 오래된 신비주의의 신앙이다. 하만은 여기서 더 나아가 역사 또한 인간에게 말을 하며, 둔감한 역사가들에게는 단순히 평범한 경험적 사건들로만 여겨지는 모든 다양한 역사적인 사건들 역시 진정 그로써 신성이 인간에게 말을 거는 수단이라고 덧붙였다. 개개의 사건들은 눈이 있는 자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비의秘意, 또는 신비주의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83 하만은 최초로 - 그보다 먼저 비코가 있었으나 그는 널리 읽히지 않았다 - 신화는 단순히 세계에 대한 거짓 진술이 아니며, 세인들을 현혹하려는 파렴치한들이 날조해 낸 이야기도, 시인들이 멋을 부리기 위해 고안한 장식도 아니라고 주장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신화는 인간이 감히 말로 나타낼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자연의 신비를 표현하는 수단이었으며, 달리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84 물론 이 모든 것이 프랑스에 대한 거대한 반발이었다. 그의 사상은 독일 바깥까지 퍼져 나갔다. 이런 현상은 영국에서도 역시 두드러졌는데, 그곳에는 어쨌든 하만 이후로 이러한 관점의 가장 강력한 대변자인 신비주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있었다. 블레이크의 적들, 즉 그가 근대를 통틀어 악당으로 간주하는 이들은 로크와 뉴턴이다.


95 이것이『젊은 베르터의 슬픔』에 담긴 교훈이며, 독일 전체의 젊은이들이 베르터의 이름으로 - 18세기나 그들이 속한 특정한 사회에 적절한 해결책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세계에 절망했고, 세계는 비합리적인 곳이며, 원칙적으로 그 안에서는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 자살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95 그리고 이것이 1760년대와 1770년대 무렵의 독일에 널리 퍼져 있던 분위기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낭만주의의 진정한 아버지라 부를 만한 두 사람이 있다. 그들은 분명 내가 지금까지 낭만주의의 태동에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한 이들 중 어느 누구보다도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었으니, 이제 그쪽으로 화제를 돌려 보겠다. 두 사람은 모두 낭만주의 운동으로부터 등장했는데, 한 명은 낭만주의에 공감했고, 다른 한 명은 그것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나, 가끔씩 일어나는 불가사의한 일들처럼 그의 저작은 낭만주의의 이념을 크게 발전시켰다. 전자가 요한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고, 후자가 바로 임마누엘 칸트인데, 이제 그들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 보자.


96 중요하게 다루고 싶은 헤르더의 사상은 세 가지다.... 첫째는 내가 표상주의라고 부르게 될 개념이고, 둘째는 어떤 집단에 소속되었다는 의미에서의 소속 개념이며, 마지막은 종종 모순되며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이상들, 즉 순수한 이상들에 대한 개념이다.


96 대체로 18세기 미학에서... 예술 작품의 가치는 그것의 본질이 어떤지에 달려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97 먼저 표상주의 개념은 다음과 같다. 헤르더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기능 중 하나가 표현하는 것과 말하는 것, 곧 그게 무엇이든 한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충분히 표현하는 것이라고 믿었으며, 만일 누군가 자신의 본성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가 자신을 불구로 만들었거나, 자신을 억누르고 있거나, 자신의 생명력에 어떤 굴레를 씌웠기 때문이었다.


100 헤르더는 혈연을 기준으로 삼지 않으며, 인종이라는 기준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국가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18세기의 독일어로 Nation”이라는 단어는 19세기의 nation”이 내포하고 있는 뜻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에게 언어는 하나의 결속이고, 국가의 영토 역시 마찬가지인데, 거칠게 말해 그의 논제는 다음과 같으니 같은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그들이 다른 장소의 다른 사람들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보다 그들이 지금의 모습을 가지게 된 데 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101 여기에서 어떤 낭만주의적인 결론들이 뒤따라 나오는데, 이 결론들은 어쨌든 18세기에 이해된 바로는 반합리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에 맞는 가장 중요한 결론은 이것인데, 즉 이것이 정말로 진실이라면, 어떤 대상은 그것을 창조한자의 목적을 언급하지 않고는 설명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어떤 예술 작품의 가치는 그것이 말을 거는 어느 특정한 인간 집단, 말하는 사람의 동기, 그 말을 들은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 그리고 그것이 자동적으로 화자와 청자 사이에 형성하는 결속에 의거하여 분석해야만 한다.


102 바꾸어 말해 그들의 삶의 형태 속으로 자신을 집어넣어 살아 보려 하지 않는다면 -지금은 흔한 이야기지만, 모든 이야기는 이 말이 처음 1760년대와 1770년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 진정 그들의 예술을 이해하고, 그들의 저작을 이해하며, 진정으로 플라톤의 참뜻을 알고, 진정 소크라테스가 누구였는지를 알게 될 기회는 적어진다.


103 그리스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의 예술을 이해해야 하고, 그리스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의 역사를 이해해야 하며, 그리스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의 지리학을 이해해야 하고, 그리스인들이 보았던 식물들을 보아야 하며, 그들이 살았던 토양과 기타 무수한 배경들을 이해해야만 한다. 따라서 이것은 역사주의와 사회진화론, 즉 인간은 오로지 자신의 것과 매우 다른 환경에 처했을 때만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는 개념 전체의 발단이 된다.


107 이것이 불가능하기에 완벽한 삶이라는 전체 개념 - 모든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목표로서의 인간 이상이 존재하며, 이런 종류의 질문들에는 바로 화학이나 물리학, 수학에서 원리적으로 최소한 어떤 종류의 궁극적인 답변이 주어지듯이, 또는 궁극적이지는 않다 해도 어느 정도는 궁극에 가까워서 우리가 지금까지 얻은 어떤 대답보다도 궁극적이며, 같은 방향으로 계속 진행한다면 궁극적인 해답에 더욱 가까워지리라는 희망이나 최소한 가능성이 있는 특정한 질문들에 대답이 존재하듯이, 어떤 종류의 대답이 존재한다는 전체 개념 - 이 붕괴한다.


108 따라서 헤르더의 최종 결론은 개개의 인간 집단은 그 골수에 있는 것, 그 전통의 일부인 것을 얻는 데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개개인은 자신이 소속된 집단에 속해 있고, 인간으로서 그의 임무는 자신에게 보이는 그대로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그에게 보이는 그대로의 진실이란 다른 이들에게 보이는 진실 만큼이나 타당한 것이다.


4. 억제된 낭만주의자들


113 이제 세 명의 독일 사상가들에게로 화제를 옮겨 보겠는데, 두 명은 철학자이고 나머지 한 명은 예술가 - 극작가 - 이며, 이들은 독일과 그 경계 너머에서 모든 낭만주의 운동 전체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낭만주의자들을 정확히 억제된 낭만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는데, 그에 이어 다음 장에서는 이 운동의 귀결인 억제되지 않은 낭만주의자들에 대해 논의해 보겠다.


113 칸트는 낭만주의를 혐오했다. 그는 모든 형태의 방종과 환상, 그가 허황된 생각이라고 부르던 것, 어떤 식으로든 과장된 것, 신비주의, 모호함과 혼란을 싫어했다. 그런데도 그는 낭만주의의 아버지 중 한 명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바로 여기에 어떤 불가사의함이 있다.


114 칸트는 과학의 신봉자였다


114 그는 엄격하며 극도로 명징한 정신의 소유자로, 쉽게 이해하기 힘든 글을 썼으나, 모호하게 쓴 적은 거의 없었다. 그 자신이 뛰어난 과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우주론자였다) 칸트는 과학의 원리가 그 어떤 학문의 원리들보다 심오하다고 믿었으며, 과학적 논리와 과학적 방법의 근거를 설명하는 것을 일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114 칸트는 사실 인간의 자유라는 관념에 경도되어 있었다.


114 논리와 엄밀함은 인간 정신의 고도의 훈련이었으며, 이런 일들이 너무 벅차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다른 곳에서 반대의 이유를 생각해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115 그가 확신했던 명제 중 하나는, 모든 인간은 한편으로 자신의 성향과 욕망과 열정, 외부 세계로부터 자신을 유혹하는 것과 자신의 감정적이고 감각적인, 또는 경험적인 본성의 일부분을, 다른 한편으로는 의무와 옳은 일에 대한 책무의 개념, 쾌락을 좇고 싶은 욕망이나 자신의 성향과 종종 충돌하곤 하는 것들과 구분할 줄 안다는 것이었다.


115 인간과,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식물이든 다른 자연의 대상물과의 차이는 다른 것들이 인과법칙 아래 놓여 미리 결정된 인과관계의 도식을 엄격히 따르는 데 반해, 인간은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한다는 데 있다. 바로 이것, 이 자유의지가 인간을 자연의 다른 대상들과 구별해 준다.


116「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라는 소고에서 칸트는 계몽을, 간단히 인간이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능력이자 타인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성숙해진 인간이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하는 데 있어 그것이 선하든 악하든, 권위에, 이런 저런 선생들에, 국가에, 자기 부모나 유모에, 전통에, 또는 도덕적 책임의 무게가 분명히 실려 있는 기존의 가치에 지나치게 기대지 않는 상태라 규정한다.


117 진정 그는 착취를 해악으로 보는 개념의 창시자이다.


117 칸트에게 그들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만의 목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는 행위는, 어느 것이나 한 인간이 또 다른 인간에게 강요하는 가치 하락의 한 형태이자, 타인을 끔찍한 불구로 만드는 동시에 그들을 인간으로 구별해 주는 것, 곧 스스로 결정하는 자유를 박탈하는 행위로 보였다.


117 이것이 칸트가 착취와 인간의 가치 하락과 인간성 말살, 이후 19세기와 20세기의 모든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의 밑천이 된 모든 것, 즉 인간의 가치 하락과 물상화, 삶의 기계화, 인간들끼리의, 또는 자신의 고유한 목적으로부터의 소외, 인간을 도구로, 또는 타인의 의지를 행사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으로 보는 개념 전체와, 인간을 그들의 의지에 거슬러 강요하거나 결정하거나 교육할 수 있는 실체로 보는 일반적 관점에 대해 그렇게 열렬히 반대한 이유이다.


118 이런 것들이 무섭고 끔찍하며,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행사할 수 있는 도덕적으로 가장 해로운 일이라는 개념은, 칸트의 이 열정적인 주장에서 나왔다. 물론 이런 주장은 칸트 이전에도, 특히 기독교 사상가들의 저작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그것을 종교적인 맥락에서 이탈시켜 유럽에 보편적으로 수용된 언어로 옮긴 이는 바로 칸트였다.


124 칸트는 무차별적 결정론을 전적으로 거부했으며, 그만큼 인간의 의지를 몹시 강조했다. 이것이 그가 자율성을 요청하는 이유이니, 그는 물리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외부 요인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것을 타율, 즉 인간의 외부에 있는 법칙과 원천들이라고 불렀다. 이는 자연을 바라보는 새롭고 다소 혁명적인 견해를 수반하며, 또 유럽인들의 의식 속에 매우 핵심적인 요인으로 자리 잡았다.


126 자연이 인간의 적, 또는 중립적인 질료라는 이러한 개념은 비교적 새로운 것이다.이것은 칸트가 1790년에 제정된 프랑스 헌법에 갈채를 보낸 이유이다. 그는 이에 대해,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투표하고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는 형태의 정부가 마침내 등장했으니, 더는 누구도 아무리 자애로운 정부라 해도 복종 할 필요가 없고, 아무리 훌륭한 교회라 해도 복종할 필요가 없으며, 아무리 유구하다 해도 그들이 직접 만들지 않은 원리들에 복종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126 동료 교수들이 공포정치를 개탄하며 프랑스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들을 말 그대로 참사로 여기고 있을 때, 칸트는 비록 정확히 드러내 놓고 시인하지는 않았지만, 만에 하나 혁명이 실패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쨌든 올바른 방향의 실험이었다는 견해에서 완전히 멀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것은 보통은 관습적이고 체제 순응적이며, 정돈된 것을 좋아하고 구식이었던, 어느 정도는 촌구석인 동프로이센의 교수 칸트가 이 인류 역사에 위대한 해방의 장을, 늘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경계해왔던 거대한 우상에 맞선 인간들의 자기 주장을 어느 정도의 열정을 가지고 지켜보았는지를 보여 준다.


127 전통, 깨뜨릴 수 없는 오래된 원리들, 왕, 정부, 부모, 단지 그것이 권위라는 이유로 받아들여지는 모든 종류의 권위, 이 모든 것에 그는 혐오감을 느꼈다... 그의 도덕철학은 의심의 여지없이 이러한 반권위주의의 원리 위에 확고히 기초를 두고 있다.


128 다시 한 번 말하건대, 아무리 관대하다 하더라도 그저 충동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과 아무리 고귀하다 하더라도 자신의 타고난 기질대로만 행동하는 인간, 외부로부터 온 것이든 자신의 고유한 본성으로부터 온 것이든, 어떤 종류의 불가항력에 의해 행동하는 인간은 정확히 말해 도덕적 행위자로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유일하게 소유할 가치가 있는 것은 구속에서 풀려난 자유의지이니, 이것이 칸트가 유명하게 만든 핵심명제다.


128 칸트의 사상에 대한 온갖 종류의 해석이 18세기 말에 등장했으나, 우리의 관점에서 가장 생생하고 흥미로운 해석은 그의 충실한 제자이자 극작가, 시인, 역사학자인 프리드리히 실러에게서 나왔다.


128 실러 또한 칸트와 마찬가지로 의지, 자유, 자율성, 자기 자신을 책임지는 인간이라는 관념에 경도되어 있었다.


129 그들과 달리 이러한 견해에 정면으로 반대한 실러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유일한 것은, 자연을 초월하고, 자연에 형상을 부여하며, 자연을 개척하여 자신의 훌륭하고 자유롭고 도덕적인 의지에 복종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있음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129 그는 쉬지 않고 정신적인 자유에 관해 말하는데, 그것은 이성의 자유, 자유의 왕국, 자유로운 자아, 내적 자유, 정신의 자유, 도덕적 자유, 자유로운 지성 - 특히 그가 즐겨 쓰는 표현인 - 성스러운 자유, 견고한 자유의 요새와 같은 표현으로 나타나며, “자유” 대신 “자주”라는 단어가 사용되기도 한다.


129 실러의 비극 이론은 바로 이 자유라는 개념 위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바로 이런 방식 덕분에 문학과 조형 예술 양쪽에 걸친 낭만주의 예술은 칸트의 직접적인 저작보다는 그의 작품을 통해 더욱 강력한 영향을 받은 듯하다.


130 이들은 모두 비극적 인물로, 그 이유는 자신을 굽히지 않고, 타협하지 않으며, 쾌락의 형태든 고통의 형태든, 육체적 유혹이든 도덕적 유혹이든, 유혹에 굴하지 않고, 중대한 갈림길에서 팔짱을 낀 채 자연에 맞섰기 때문인데, 이 반항 - 실러의 경우, 여느 반항과는 달리 인간이 진정으로 헌신하는 어떤 이상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도덕적 반항 - 이 비극을 만드는 요소이며, 이 비극은 반항이 갈등을 빚어내기에 생겨나고, 인간은 이 갈등 속에서 경우에 따라 자기보다 지나치게 거대하거나, 또는 그렇지 않은 힘들에 맞선다,


141 피히테가 낭만주의 사상에 기여한 바는 이러하다. 그는, 만일 우리가 단지 생각하는 존재고, 자신의 영역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와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요청받는다면, 우리는 결코 그에 대한 답을 발견해 내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우리가 결코 답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는, 지식이란 단지 언제나 더 광범위한 지식을 전제하기 때문인데, 우리는 어떤 명제에 도달하여 그것의 검증을 요청받으면 첫 번째 것을 증명하기 위해 어떤 다른 지식, 다른 명제를 도입한다.

그러면 이번에는 그 명제가 또 다른 증명을 필요로 하고, 그 관념을 뒷받침하기 위해 더 광범위한 일반화가 요구되며, 이러한 일이 무한히 반복된다. 따라서 이러한 탐구에 끝은 없으며, 우리는 그저 스피노자의 체계, 잘 해야 그 안에서 그 무엇도 움직일 공간이 없는 엄밀하고 논리적인 통일체로 귀결된다.

142 여기서 창안된 형식에 대한, 인간이 만든 이상에 대한 열정이 생겨난다. 한때 우리는 완전한 총체였으며, 우리는 그리스인이었다. (이것은 그리스인에 대한 거대한신화로, 분명 역사적으로 몹시 우스꽝스러운 생각이지만, 정치적으로 무력한 상황에 있던 독일인들 - 실러와 횔덜린, 헤겔과 슐레겔과 마르크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42 이 이상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자연과는 대립되며,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므로, 이상주의 - 목적의 발명 - 는 자연과의 단절이고, 따라서 우리의 임무는 자연을 변화시키고, 자신을 계몽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이 다루기가 쉽지만은 않은 자연이 우리로 하여금 어떠한 갈등도 없는 바람직한 방법으로 어떤 이상을 좇고 실현하게 만들도록 허락하게 하는 것이다.


143 기질적으로, 이런 엄격한 질서와 깨뜨릴 수 없는 조화, 그 안에서 모든 것이 불가피하고, 질서 정연하고, 완전히 고정불변한 방식으로 나머지 모든 것에 뒤이어 일어나는 어떤 사방이 막힌 세계를 생각하면 우울해지는 사람들이 있고, 피히테도 거기에 속했다.”


146 자유는 행동이며, 어떤 관조적인 상태가 아니다. 피히테는 말한다. “자유롭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장 기쁜 일은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 편의 시를 창작하듯이 우리의 세계를 창조한다. 그러나 자유는 양날의 칼과 같아서, 우리는 자유롭기 때문에 타인을 절멸시키는 일도 가능하니, 자유란 악한 행동을 저지를 자유까지 포함한다.


146 피히테가 가진 전체 개념은, 인간은 행위자도 아닌 끊임없는 행동 그 자체라는 것이다. 자신을 최대한 실현하기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생성과 창조를 지속해야만 한다.


5. 해방된 낭만주의

153 이제 해방된 낭만주의가 마침내 어떻게 폭발했는지를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낭만주의 운동에 관해 가장 권위 있는 글을 썼으며, 실제 그 자신도 이 운동의 일부였던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에 의하면, 이 운동 전체에 미학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측면으로도 깊은 영향을 미친 세 가지 요인이 있는데, 순서대로 말하자면 피히테의 지식학과 프랑스 혁명, 괴테의 유명한 소설『빌헬름 마이스터』가 그것이다. 이렇게 대응시키는 것이 합당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지를 지금부터 밝히고자 한다.


154 흄은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이, 자신을 성찰하고, 자기 내면을 들여다볼 때, 무수한 감각과 감정, 기억의 파편, 희망이나 두려움 같은 온갖 종류의 미세한 심리적 구성 요소들을 발견했지만, 정확히 자아라고 부를 만한 어떤 실체도 인식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자아란 직접 지각되는 대상인 어떤 실재가 아니라, 다만 그것으로부터 인간의 정체와 역사가 형성된 경험의 연속에 붙은 이름, 즉 실제로 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양파를 한 줄로 꿰어 놓은 실과 같다고 결론내렸다. 칸트 또한 이러한 명제를 받아들였으며


154 피히테는 더욱 열정적인 노력을 기울여 자아가 인식의 작용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자아를 인식하는 것은 오직 어떤 저항이 있을 때뿐이다.... 비아非我와 구별되는 실체로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은 그 장애물의 영향이다.


155 주체로서의 나는 결코 인식의 작용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것에 충격을 주는 어떤 것을 통해 인식될 따름이다. 이것을 피히테는 장해, 또는 충돌이라 불렀고, 그는 이것을 모든 경험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범주로 여겼다.... 그러한 저항에서 자아와 비아가 정립된다.


156 이것으로부터 피히테는 그 후 낭만주의자들의 상상력을 지배하게 된 거대한 이상상을 전개하는데,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은 앞서 설명하려 했듯이, 창조적으로 활동하고, 질료에 형상을 부여하며, 다른 사물들에 침투하여 가치를 창조하고, 스스로 이러한 가치들에 헌신하는 특정한 자아의 파편이다. 잠깐 암시했듯이, 이것은 정치적인 함의를 지닐 수도 있어서, 자아가 더는 개인과 동일시되지 않고, 지역 사회나 교회, 국가나 계급과 같은 어떤 초인격적인 실체와 동일시될 때, 이것은 전진을 강요하는 거대한 의지가 되며, 그 특정한 인격을 외부 세계에 강요함과 동시에, 단순히 그 구성 요소의 역할이나, 더 거대하고 장엄하며 역사적으로 더욱 지속적인 인격성의 일부로 환원될 수도 있을 인간 존재에게도 강요한다.


158 그가 바탕에 깔고 있는 개념을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의욕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이다.


189 이 두 가지 요소 - 속박되지 않은 자유로운 의지와 사물의 본성이 있다는 진리의 거부, 만물에 불변의 구조가 있다는 개념을 파괴하고 전복하려는 시도 - 는 이 매우 의미 있고 중요한 운동의 가장 심오하고, 어느 정도는 가장 비상식적인 요소들다.


159 인간 의지의 살아 있는 원리를 자연 - 칸트에게 있어서 어느 정도는 죽은 물질이자, 형상을 부여받아야 할 것으로, 그것에 부여되어야 할 어떤 조화와는 대립되는 것이었던 - 과 대비시킨 피히테와는 달리, 셸링은 신비주의적 생기론을 지지했다. 그에게 자연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것이었으며, 이른바 정신적인 자기 전개였다.


160 이 사상은 독일의 미학이나 예술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자연 만물에 생명이 있다면, 그리고 우리 인간이 자연의 가장 자각적인 대표자에 지나지 않는다면, 예술가의 임무는 자신의 내부를 탐색하여,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내부에서 움직이는 어둡고 무의식적인 힘들을 탐색하여, 이것을 가장 고통스럽고 격렬한 내적 투쟁을 통해 의식의 세계로 끄집어내는 것이다. 이것이 셸링의 사상이다.


161 셸링에게 유일한 예술 작품, 즉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은... 완전한 의식에 이르지 않은 생명력의 파동을 전달하는 자연과 유사한 작품들이다... 과학처럼 그저 주의 깊게 관찰한 후 자신이 본 것을 전적으로 명료하고 정확하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정직하게 기술한 결과물은 이미 죽은 것이다.


161 예술 작품의 생명력, 곧 예술 작품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특질은 우리가 자연에서 예찬하는 것과 유사하니, 곧 어떤 힘과 권능, 에너지, 생명력, 터질 듯 쏟아지는 활기이다.


165 낭만주의 사상에 따르면, 우리를 둘러싼 실재와 우주는 끝없이 전진하며, 거기엔 어떤 무한하고 고갈되지 않는 것, 유한한 것들이 그것의 상징이 되고자 하나 당연히 실패하고 마는 무엇이 있다. 우리는 오직 자신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수단을 통해 전달 가능한 무언가를 전달하려 애쓰나, 이것으로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모두 전달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으니, 이 전체는 말 그대로 무한한 까닭이다.


169 우리는 심오하다는 인상을 받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이러한 말들을 적용시킬 때마다 그것들이 새로운 지평을 열며, 이러한 지평들은 다른 것으로 환원하거나, 파악하거나, 설명, 축적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으로, 추론을 통해 이 모든 것에 이르게 되는 원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170 이것은 매우 흥미롭게 반복하여 나타나며, 그 후 19세기와 20세기의 사상과 감정 모두가 당면하게 된 두 가지 현상으로 우리를 이끈다. 하나는 과거에 대한 동경이며, 다른 하나는 특정한 종류의 근거 없는 불안이다.


173 그리고 또 하나, 낭만주의의 더 비관적인 변형이 있는데, 이것은 20세기 들어 어느정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개인들이 아무리 자신을 해방시키려 발버둥쳐도 우주는 그렇게 쉽게 통제되지 않는다는 관점이 있다. 무언가가 항상 배후에, 무의식이나 역사의 배후에 숨어 있으며, 어쨌든 우리가 포착할 수 없는 무엇이 우리의 가장 간절한 바람들을 좌절시킨다... 이것은 거대하고 압도적이며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 적대적인 힘이므로, 저항하거나 타협하는 것조차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다.


176 슐레겔이 밝힌 낭만주의에 끼친 세 가지 중대한 영향 중 두 번째는 프랑스 혁명이다... 따라서 혁명이 주목하게 하는 것은... 폭력과 공포, 인간사의 예측할 수 없는 변화, 폭도들의 무분별함, 특정한 소수의 영웅과 유명인사들, 곧 선악을 떠나 이들 폭도를 지배하고 역사의 추이를 마음먹은 대로 바꿀 수 있는 이들이 가진 엄청난 힘이었다.


193 나는 앞서 꺼냈던 주제로 다시 돌아가려 하는데, 즉 18세기 중반 전까지 적어도 2천 년, 또는 그 이상의 시간 동안 모든 서구 사상의 핵심에 놓여 있던 오래된 전통, 그 특정한 태도, 특정한 신념은 낭만주의의 공격으로 심각한 손상을 입은 듯 보인다는 것이다. 지식은 선이라는 오래된 명제는, 추정컨대 플라톤이 기록한 소크라테스의 대화에서 최초로 명확히 언급되며, 플라톤과 기독교 전통에 공통되는 명제이다.


6. 지속되는 영향력


206 이상이 낭만주의의 근본적인 출발점으로, 곧 낭만주의는 의지라는 개념과, 사물의 구조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우리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사물들을 빚을 수 있다는 사실 - 그것들은 오직 우리의 창조하는 행동의 결과로만 생겨난다 - 에 기초하며, 따라서 실재를 연구하고, 기록하고, 습득하고,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는, 그리고 다른 측면으로는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다루어질 수 있는 어떤 형식을 가진 것으로 설명하려는 모든 관점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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