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의 뿌리 | 03 낭만주의의 진정한 아버지들

 

 

 

필사본이 있어서 별도로 강의 내용을 요약하지 않았다.

 

강유원의 낭만주의의 뿌리 강의 3

강의 교재: 이사야 벌린의 <낭만주의의 뿌리>

강의 목차: 1강 낭만주의의 정의를 찾아서

               2강 계몽주의에 대한 최초의 반격

               3강 낭만주의의 진정한 아버지들

               4강 억제된 낭만주의자들 (1)

               5강 억제된 낭만주의자들 (2)

               6강 해방된 낭만주의

               7강 지속되는 영향력

               8강 지속되는 영향력

 


 

2006년 여름 풀로엮은집

낭만주의 강의

강사 : 강유원

필사 : 이재만

교재 : 이사야 벌린,『낭만주의의 뿌리』(The Roots of Romanticism), 이제이북스, 2005

 

3강 낭만주의의 진정한 아버지들

지난주에 했던 2강 ‘계몽주의에 대한 최초의 반격’ 정리를 하겠다. 계몽주의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태도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무엇인가? 인간은 이성적 존재라는 것을 확실히 해두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룻동안 했던 생각과 행동을 돌이켜보면 이성적이지 못할 때가 훨씬 더 많다. 그렇기 때문에 계몽주의는 인간에게 스트레스가 된다. 계몽주의에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있다.

계몽주의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는가? (학생 A : 순진한 것 같다) 그렇다. 순진하다고 할 수 있다. 계몽주의는 인간을 너무 믿는다. 마르크스의 책을 읽어봐도 사람을 너무 믿는다. 근래에 미국 공화당의 선거 전략을 분석한 후, 그렇다면 민주당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는 조지 레이코프의『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삼인)를 읽었다. 그런데 이 책 앞부분에 계몽주의는 너무 순진한 생각이라는 말이 나온다. 민주당은 진리를 알기만 하면 누구나 자기들에게 투표하리라고 생각했지만, 인간은 진리에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정체성에 투표한다는 것이다. 하버마스가 ‘미완의 프로젝트로서의 계몽’이라고 말했다. 당연히 미완이다. 왜? 사람은 그렇게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몽주의에 대한 반격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오늘은 3강을 하고, 다음 시간에는 4장 ‘억제된 낭만주의자들’ 절반을 하고, 그 다음 시간에 4장 나머지 절반을 한다. 4장을 두 번 하는 이유는 4장에 칸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서양철학을 읽다 보면 칸트가 안 나오는 곳이 없다. 다음주에는 칸트에 대해서만 2시간 내내 하겠다.

학생 질문 : 계몽주의에서 인간은 ‘이성적 존재’라고 할 때, 그 ‘이성’은 이치에 맞게 사고한다는 것과 다른 뜻인가?

그런 질문 많이 받았다. 계몽주의에서 말하는 ‘이성’의 첫 번째 의미는 종교적 신념에 대한 강한 거부이다. 종교적 신념은 일종의 opinion이다. 두 번째 의미는 경험과 학적으로 증명 가능한 것들에 대한 신뢰, 아울러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거기에 일치시키려고 하는 태도이다. 세 번째 의미는 자기의 이익과 손해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계몽주의를 단순하게 표현하면 invisible한 것에 대한 전적인 거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얼마나 이성적인지는 알 수 없다. 이성적이라는 것도 invisible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보이는 것을 찾다 보니 자기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이성적
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원래 rational(합리적/이성적)이라는 것은 굉장히 넓은 의미이다. 그런데 그것은 invisible하기 때문에 자꾸 빠져나간다. 그러다 보니 아주 좁은 의미의 합리성만 남게 되었다. 계몽주의 초기에는 합리적이라는 것에 도덕적인 판단까지 함축적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19세기와 20세기를 지나면서 양적으로 측정 가능한 것만 합리성에 남게 되었다. 그래서 합리성이 이른바 ‘자본주의적 합리성’과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다.

3장에서 집중적으로 봐야 할 사람들은 하만과 헤르더이다. 루소나 블레이크는 그냥 읽어보면 된다. 그리고 잠바티스타 비코에 대해서 잠깐 설명하겠다. 예전에 민음사에서 나온『비코와 헤르더』라는 책이 있다. 참 좋은 책인데 헌책방에서도 구하기가 쉽지 않다.

“18세기는 누구나 알다시피 - 이것은 진부한 얘기다 - 과학이 위대한 승리를 거둔 시대였다. 과학이 올린 개가는 이 시대의 가장 경이로운 사건이었으며, 이 시기에 인간의 감성에 일어난 가장 근본적인 혁명은 낡은 형식들이 파괴된 것에 따른 결과, 즉 기성 종교는 조직화된 자연과학에 의해, 중세의 낡은 신분 질서는 새롭게 등장한 세속 국가에 의해 양쪽으로 공격을 받은 결과였다.”(79쪽) 

여기서 나타나듯이, 18세기의 핵심 요소는 자연과학과 세속 국가이다. 3장에서는 낭만주의의 진정한 아버지들은 이 두 요소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얘기를 할 것이다. 실제로 그렇다. 독일의 낭만주의자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즉 기성 종교로 되돌아간 이들이다. 자신이 자연과학을 거부한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표현했다.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하만과 같은 이들의 심리 상태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사야 벌린이 말하는 사상사 방법론이 당시의 시대적 context 속에 감정을 이입(Einführung)하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합리주의는 확실히 아주 극단적으로 나아갔고, 그런 유형의 합리주의에 가로막힌 인간의 감정은 으레 그렇듯이 다른 방향에서 분출구를 찾았다.”(79쪽)

“합리주의가 이렇게까지 전략했으며, 받아들여질 기회라도 얻기 위해 종교가 이런식으로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사람들이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욕구 충족을 위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야 했다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80-81쪽)

이제부터 낭만주의가 등장했을 당시 사람들의 심리상태에 대해 말한다.

“새로운 과학적 철학이 행복과 질서를 가져다 주었을지는 모르지만, 그동안 인간의 비합리적인 욕망, 20세기가 인류에게 매우 뼈저리게 자각하게 해 주었던 그 무의식적 충동의 모든 영역이, 나름대로 충족될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했음은 분명하다. 그리하여 18세기를 조화롭고 균형 잡혀 있으며, 무한히 합리적이고 우아하고 흠 없는 세기로 믿는 사람들, 이른바 인간의 이성과 미를 비추는 잔잔한 거울과도 같아 어떤 흐릿함이나 모호함도 어지럽히지 못했다고만 믿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놀라운 일이겠지만, 유럽의 역사에서 이토록 많은 비합리적인 인물들이 고집스럽게 그 표면을 배회했던 적도 없었다.”(81쪽)

합리주의가 극단으로 나아가니까 인생이 괴로워졌다. 이어서 ‘비합리적인 인물들’이 거론된다. 프리메이슨단과 장미십자회는 움베르토 에코의『푸코의 진자』에도 나온다. 비밀결사, 성배와 성혈 얘기는 이때부터 번성하기 시작했다. 온갖 종류의 사기꾼, 프란츠 안톤 메스머의 동물자기動物磁氣, 점쟁이, 손금쟁이, 찻잎으로 점을 치는 사람들 등이 등장했다. 여기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람은 81쪽 맨 아래에 나오는, 관상학을 창안한 요한 카스파르 라바터이다. 당시 독일에는 관상학을 가르치는 학과도 있었다. 18세기는 계몽주의가 절정에 달한 세기였는데도, 그 이면에는 이런 신비주의적인, 어찌 보면 사이비 학문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이런 분위기가 하만이
경건주의를 전개하는 바탕이 되었다. 

“어쨌든 이것이 우리가 다루는 세기의 분위기로, 일관되고 우아해 보이는 표면 밑으로 온갖 종류의 어두운 힘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하만은, 이미 설명했듯이, 이 양量에 대한 질質의 격렬한 반란에서, 인간의 모든 반과학적인 열망과 욕망의 격렬한 반란에서, 가장 시적이고, 신학적으로 가장 심오하며, 가장 흥미로운 대표자일 뿐이다.”(82쪽)

“이것이 하만이 가진 사상의 핵심이다. 이것은 자연과 역사에서 신의 음성을 감지하는 일종의 신비주의적 생기론이다. 자연을 통해 신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아주 오래된 신비주의의 신앙이다. 하만은 여기서 더 나아가 역사 또한 인간에게 말을 하며, 둔감한 역사가들에게는 단순히 평범한 경험적 사건들로만 여겨지는 모든 다양한 역사적인 사건들 역시 진정 그로써 신성이 인간에게 말을 거는 수단이라고 덧붙였다. 개개의 사건들은 눈이 있는 자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비의秘意, 또는 신비주의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83쪽)

하만은 신비주의적 생기론과 신비주의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눈이 있는 자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비의秘意, 또는 신비주의적 의미”는 말이 안 된다. 눈없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여기서 말하는 눈은 미친 눈이다.

“하만은 최초로 - 그보다 먼저 비코가 있었으나 그는 널리 읽히지 않았다 - 신화는 단순히 세계에 대한 거짓 진술이 아니며, 세인들을 현혹하려는 파렴치한들이 날조해 낸 이야기도, 시인들이 멋을 부리기 위해 고안한 장식도 아니라고 주장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신화는 인간이 감히 말로 나타낼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자연의 신비를 표현하는 수단이었으며, 달리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83쪽)

여기서 잠깐 비코에 관해 말하겠다. 지금 말하는 것은 벌린의『비코와 헤르더』에서 비코에 관한 부분이다.

비코는 지식을 두 종류, 즉 내부적 지식과 외부적 지식으로 나누었다. 외부적 지식은 자연과학에 해당하고, 내부적 지식은 정신과학에 해당한다. 이 두 가지를 구별했다는 것이 비코의 중요한 업적이다. 그러나 이렇게 구분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이렇게 했느냐는 것이다. 비코가 대결했던 사람은 데카르트이다. 데카르트 하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생각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 데카르트의 사상은 무언가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나온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었는가? 데카르트는 중세 스콜라 철학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Cogito ergo sum
1)나는 2)생각한다 3)그러므로 4)나는 5)존재한다

이 다섯 가지 중에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 방금 말했듯이, 중세 스콜라 철학에 대항했다는 것에 정답이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장미의 이름』에서 진리의 기준은 무엇인가? 신? 아니다. auctoritas, 전거典據이다. 스콜라 철학에서는 전거를 갖다 대면된다. 스콜라 철학의 최후 전거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다시 말해 나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전거가 생각해준다. 따라서 데카르트에게 중요한 것은 전거도 아니고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생각하는 것이다. 답은 1번이다. 데카르트의 제1전선은 스콜라 철학이다.

비코의 전선은 데카르트이다. 그렇다면 비코는 외부적 지식과 내부적 지식 중 어떤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겠는가? 당연히 내부적 지식이다. 비코는 자연세계와 구분되는 역사세계가 있으며,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독자적인 방법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계몽주의자들은 사실 역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시대마다 다르니 보편성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대개 낭만적인 이들이 역사적인 것을 좋아한다. 물론 역사에서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 이른바 역사주의자가 된다. 역사를 어떤 목적에 종속시켜버리는 historicism이라는 폐해가 있기는 하다.

데카르트에 맞선 비코의 방법론이 역사철학이다. 비코는 한 사회의 문화가 나선형으로 순환하는 패턴을 따라 움직인다고 말했다. 비코의 방법론 중 하나가 Verstehen, ‘이해’라는 것이다. 다른 시대 사람들의 심리적 세계로 들어가서 그들을 이해하려는 역사인류학적 내부 지식을 말한다. 이러한 방법론을 충실하게 받아들인 이들 중 하나가 Collingwood이다. 콜링우드가 쓴『자연이라는 개념』(이제이북스)가 최근 번역되어 나왔다. 지금 말하는 것과 관련된 책으로는『Idea of history』가 있다. ‘역사의 인식’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나왔는데, 지금은 어디서도 구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사야 벌린은 ‘감정 이입’이라는 방법론을 사용한다. 벌린도 비코의 ‘이해’ 개념을 받아들인 것이다. 따라서 비코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이사야 벌린의 사상사 방법론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물론 비코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벌린이다.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그것은 역사철학에 대한 상세한 논의를 수반하기 때문에 이번 강의에서는 생략하겠다.

“물론 이 모든 것이 프랑스에 대한 거대한 반발이었다. 그의 사상은 독일 바깥까지 퍼져 나갔다. 이런 현상은 영국에서도 역시 두드러졌는데, 그곳에는 어쨌든 하만 이후로 이러한 관점의 가장 강력한 대변자인 신비주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있었다. 블레이크의 적들, 즉 그가 근대를 통틀어 악당으로 간주하는 이들은 로크와 뉴턴이다.”(84쪽)

로크와 뉴턴은, 비코의 용어를 빌리자면 외부적 지식을 추구하는 이들이다. 로크와 뉴턴은 상당히 친했다.

“이것이『젊은 베르터의 슬픔』에 담긴 교훈이며, 독일 전체의 젊은이들이 베르터의 이름으로 - 18세기나 그들이 속한 특정한 사회에 적절한 해결책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세계에 절망했고, 세계는 비합리적인 곳이며, 원칙적으로 그 안에서는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 자살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95쪽)

“그리고 이것이 1760년대와 1770년대 무렵의 독일에 널리 퍼져 있던 분위기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낭만주의의 진정한 아버지라 부를 만한 두 사람이 있다. 그들은 분명 내가 지금까지 낭만주의의 태동에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한 이들 중 어느 누구보다도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었으니, 이제 그쪽으로 화제를 돌려 보겠다. 두 사람은 모두 낭만주의 운동으로부터 등장했는데, 한 명은 낭만주의에 공감했고, 다른 한 명은 그것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나, 가끔씩 일어나는 불가사의한 일들처럼 그의 저작은 낭만주의의 이념을 크게 발전시켰다. 전자가 요한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고, 후자가 바로 임마누엘 칸트인데, 이제 그들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 보자.”(95쪽)

헤르더는 역사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민족 개념을 이야기했으니 이해가 되는데, 칸트를 낭만주의의 진정한 아버지 중 한 사람으로 거론했다는 것은 의아하다. 이 점이 벌린의 책에서 유념해서 봐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칸트에 관해서는 다음 시간에 집중적으로 할 것이고, 지금은 헤르더에 관해 이야기하겠다.

헤르더는 독일 철학사에서는 거의 거론되지 않는다. 그러나 독일 사상에서는 헤르더가 많이 거론된다. 여기서 철학사와 사상사의 괴리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철학자들이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 독일의 경우에는 오히려 헤르더가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헤르더가 창시한 일반적인 관념과 새로운 개념들은 세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벌린이『비코와 헤르더』에서 집약한 것은 표현주의, 인민주의, 다원주의다. Vorstellung를 ‘표상’이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표현’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stellung은 세운다는 것이고, Vor은 영어의 before다. 그러니까 앞에 세운다는 뜻이다.

“중요하게 다루고 싶은 헤르더의 사상은 세 가지다.... 첫째는 내가 표상주의라고 부르게 될 개념이고, 둘째는 어떤 집단에 소속되었다는 의미에서의 소속 개념이며, 마지막은 종종 모순되며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이상들, 즉 순수한 이상들에 대한 개념이다.”(96쪽)

소속 개념은 ‘민족주의’ 혹은 ‘인민주의’다. 나는 민족주의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민족주의 하면 강력한 쇼비니즘을 떠올리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다. 어떤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뜻이다. 소속 개념은 계몽주의의 세계시민주의와 보편성에 대립되는 개념이다. ‘순수한 이상들’은 다원주의로 집약할 수 있다. 표상주의는 인간의 본성을 표현하는 것인데, 수학적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계몽주의에서는 네가 진실하다고 믿는 것과 내가 진실하다고 믿는 것이 동일한 가치를 갖지 못한다. 별도의 기준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맞추어야 한다. 그러나 낭만주의는 그렇지 않다. 각자의 힘과 내면의 진실함을 강조한다.

“먼저 표상주의 개념은 다음과 같다. 헤르더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기능 중 하나가 표현하는 것과 말하는 것, 곧 그게 무엇이든 한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충분히 표현하는 것이라고 믿었으며, 만일 누군가 자신의 본성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가 자신을 불구로 만들었거나, 자신을 억누르고 있거나, 자신의 생명력에 어떤 굴레를 씌웠기 때문이었다.”(97쪽)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명력’이다. 모든 인간은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는데, 중요한 언어로 ‘생명력’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대체로 18세기 미학에서... 예술 작품의 가치는 그것의 본질이 어떤지에 달려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96쪽)

여기서 ‘본질’은 쉽게 말하자면 contents, 즉 내용이다. 어떻게 표현하느냐보다 무엇을 표현하느냐가 중요하다.

“헤르더의 기본적인 확신은 이런 순서를 따르고 있었다.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모든 인간은 언어를 사용한다. 언어는 그의 창작물이 아니며, 그것들은 이미 대물림해 온 어떤 전통적인 표상들의 물결 속에서 그에게 전해진 것이다.”(100쪽)

모든 인간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헤르더의 표현주의의 한 부분인데, 그것을 소속 개념인 인민주의와 연결하려 하고 있다. 특정한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특정한 집단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헤르더는 혈연을 기준으로 삼지 않으며, 인종이라는 기준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국가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18세기의 독일어로 “Nation”이라는 단어는 19세기의 “nation”이 내포하고 있는 뜻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에게 언어는 하나의 결속이고, 국가의 영토 역시 마찬가지인데, 거칠게 말해 그의 논제는 다음과 같으니 같은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그들이 다른 장소의 다른 사람들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보다 그들이 지금의 모습을 가지게 된 데 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100쪽)

헤르더는 혈연과 인종을 기준으로 삼지 않았지만, 인민주의는 얼마든지 변형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파시스트를 지원하는 집단이 되는 것이다. 한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101쪽에 나오는 바와 같다.

“이를테면 독일인들이 일어나고 앉는 방식, 춤추는 방식, 법률을 제정하고, 글씨를 쓰고, 시를 짓고, 음악을 만드는 방식, 머리를 빗는 방식, 철학적으로 사색하는 방식등 모든 것이 무언가 미묘하고 공통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어떤 양식적 특징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에 의하여 그들은 가지 자신에게나 남들에게 독일인으로 인식되며, 그들의 행동은 중국인들이 보이는 그와 유사한 행동과 구별된다.”(101쪽)

이런 것들은 일반적으로 민족주의에 속하는 것과는 다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교양적 민족주의라 하기도 한다. 이때 Bildung(교양)은 독일어의 독특한 개념인데, 독일인들은 문화적 관습을 통칭해서 교양이라고 한다. Bildung을 영어로는 culture로옮긴다.

“여기에서 어떤 낭만주의적인 결론들이 뒤따라 나오는데, 이 결론들은 어쨌든 18세기에 이해된 바로는 반합리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에 맞는 가장 중요한 결론은 이것인데, 즉 이것이 정말로 진실이라면, 어떤 대상은 그것을 창조한 자의 목적을 언급하지 않고는 설명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어떤 예술 작품의 가치는 그것이 말을 거는 어느 특정한 인간 집단, 말하는 사람의 동기, 그 말을 들은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 그리고 그것이 자동적으로 화자와 청자 사이에 형성하는 결속에 의 거하여 분석해야만 한다.”(101-102쪽)

특정한 집단에 속한 이들은 특정한 것을 공유하기 때문에 보편적 기준에 따라 예술작품에 접근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작품이 만들어지는 context 속에서 봐야 한다. 102, 103쪽은 이사야 벌린의 헤르더에 대한 해석이 강력하게 나타난 부분이다. 헤르더에 대한 다른 해석도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특히 헤르더가 특정한 소속감이나 교양적 민족주의를 강조하기는 했지만, 과거의 사상을 이해할 때 그것을 context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방법론까지 내놓았다고 보는 것은 벌린의 해석이다. 비코에 대해서도 그렇다. 나는 좀 오버가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헤르더가 그렇게까지 생각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지난 번에 소개했던『인류의 역사철학에 대한 이념』(책세상)을 봐도 역사학 방법론과 역사철학 테제를 내놓은 것 같지는 않다.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5세기에 아테네에서 살았던 그 시대의 아테네인 - 4세기도, 2세기도 아니고, 독일도, 프랑스도 아니며, 그리스라는 장소에 그때, 오직 그때에만 존재했던 - 이다.”(102-103쪽)

특히 이런 부분이 헤르더에 대한 벌린의 해석이 나타나는 부분이다.

“그리스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의 예술을 이해해야 하고, 그리스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의 역사를 이해해야 하며, 그리스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의 지리학을 이해해야 하고, 그리스인들이 보았던 식물들을 보아야 하며, 그들이 살았던 토양과 기타 무수한 배경들을 이해해야만 한다. 따라서 이것은 역사주의와 사회진화론, 즉 인간은 오로지 자신의 것과 매우 다른 환경에 처했을 때만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는 개념 전체의 발단이 된다.”(103쪽)

이 부분에서 고민을 많이 하는데, 나중에 내가 틀렸다는 게 밝혀진다 해도 역사주의까지 가는 건 좀 오버라고 해두고 싶다. 역사주의를 굉장히 싫어하는 사람이 칼 포퍼다. 그의『역사주의의 빈곤』,『열린 사회와 그 적들』모두 역사주의에 대한 반박이다. 역사주의의 핵심적인 테제가 어떤 특정한 테제를 보편 테제로 설정하는 것인데, 헤르더는 거기까지 가지는 않았다.

“누구든 이것을 경험하는 행운을 타고나지 못했거나, 무인도에 버려져서, 또는 외톨이로 자라서, 망명 중이거나 국외로 이주하여 뿌리 없이 성장한 인간은 결과적으로 약해지게 마련이며, 그의 창조적 역량 또한 자동적으로 약화된다. 이것은 18세기 프랑스의 합리주의자이자, 보편론자, 객관주의자인 세계시민주의 사상가들에게는 이해되지도 않고, 절대 받아들일 수도 없는 생각이다.”(103쪽)

프랑스의 합리주의자, 보편주의자, 객관주의자는 한 마디로 계몽주의자이다. 그들은 헤르더의 소속 개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헤르더 역시 계몽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표상주의와 인민주의는 했고 이제 다원주의가 남았다. 

“이상적인 삶의 형태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리스인인 동시에 페니키아인이나 중세인이 될 수 없고, 동양인인 동시에 서양인일 수 없으며, 북부 사람인 동시에 남부 사람일 수 없다. 우리는 모든 시간과 공간의 가장 위대한 이상들을 동시에 달성할 수는 없다. 이것이 불가능하기에 완벽한 삶이라는 전체 개념... 이 붕괴한다.”(107쪽)

계몽주의자들은 이 테제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108쪽에서 최종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헤르더의 최종 결론은 개개의 인간 집단은 그 골수에 있는 것, 그 전통의 일부인 것을 얻는 데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개개인은 자신이 소속된 집단에 속해 있고, 인간으로서 그의 임무는 자신에게 보이는 그대로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그에게 보이는 그대로의 진실이란 다른 이들에게 보이는 진실 만큼이나 타당한 것이다. “(108쪽)

기준이 각자에게 달려 있다. 이것이 낭만주의가 가지고 있는 아주 강력한 호소력이 자 칸트와 이어지는 지점이다. 칸트에게 진리의 기준은 인간의 주관에 있다. 칸트이전에는 사물과 나의 지식이 일치되어야 진리라고 했지만, 칸트는 그러한 물 자체는 영원히 알 수 없으며, 나의 선험적 오성의 형식이 주관적인 진리를 구성한다고말했다. 위에서 ‘진실’을 ‘진리’로 바꾸면, 개개인이 진리의 담지체가 될 수 있다.

“바꾸어 말해 그들의 삶의 형태 속으로 자신을 집어넣어 살아 보려 하지 않는다면 - 지금은 흔한 이야기지만, 모든 이야기는 이 말이 처음 1760년대와 1770년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 진정 그들의 예술을 이해하고, 그들의 저작을 이해하며, 진정으로 플라톤의 참뜻을 알고, 진정 소크라테스가 누구였는지를 알게 될 기회는 적어진다.”(102쪽)

이번 장에서 내가 꼽은 문장이다. 벌린의 낭만주의에 대한 태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이 아닌가 싶다. 다음 시간에는 칸트를 하는데, 128쪽까지 집중적으로 한다. 혹시 철학사책 가지고 있으면 칸트 부분을 읽어와라. 칸트의 학설을 외워오려 하지 말고, 칸트가 어떤 전선에서 싸웠는지 알아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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