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의 뿌리 | 08 지속되는 영향력


필사본이 있어서 별도로 강의 내용을 요약하지 않았다.


강유원의 낭만주의의 뿌리 강의 8

강의 교재: 이사야 벌린의 <낭만주의의 뿌리>

강의 목차: 1강 낭만주의의 정의를 찾아서

               2강 계몽주의에 대한 최초의 반격

               3강 낭만주의의 진정한 아버지들

               4강 억제된 낭만주의자들 (1)

               5강 억제된 낭만주의자들 (2)

               6강 해방된 낭만주의

               7강 지속되는 영향력

               8강 지속되는 영향력


도서 목록: 조가경: 실존철학

               존 산본마쓰: 탈근대 군주론

               밀란 쿤데라: 불멸

               카를 뢰비트: 헤겔에서 니체로

               찰스 테일러: 불안한 현대사회




2006년 여름 풀로엮은집

낭만주의 강의

강사 : 강유원

필사 : 이재만

교재 : 이사야 벌린,『낭만주의의 뿌리』(The Roots of Romanticism), 이제이북스, 2005


조가경: 실존철학

존 산본마쓰: 탈근대 군주론

밀란 쿤데라: 불멸

카를 뢰비트: 헤겔에서 니체로

찰스 테일러: 불안한 현대사회


8강 지속되는 영향력

오늘은 ‘8강 지속되는 영향력’을 마저 하고, 조가경 선생의 『실존철학』(박영사)를 잠깐 하고, 마지막으로 『탈근대 군주론』(갈무리)를 하겠다.『실존철학』은 1961년에 초판이 나왔는데, 실존철학에 관한 한 지금까지 이만한 책을 본 적이 없다.


최근에 밀란 쿤데라의 『불멸』을 다시 읽었다. 예전에는 책이 불멸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차라리 불멸하고 있는 책들을 번역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앞으로 10년은 번역만 할까 생각중이다. 책을 쓰고 나서 읽어보면 다 남들이 쓴 얘기를 가지고 또 쓴 것이다.


지금까지 벌린이 해온 이야기에 따르면, 낭만주의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계몽주의에 대립된다는 것이다. 계몽주의는 보편적 이성에 근거한 시대정신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계몽주의는 모든 것을 보편화하고 개체가 가지고 있는 특수성을 무시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계몽주의는 또한 실증주의적 태도도 가지고 있다. 보편적인 이성과 실증주의에 대립해서 인간 내면의 의지, 열정, 동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 그리고 푸른 꽃과 같은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이상주의가 낭만주의의 두 가지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낭만주의가 이 두 요소와 필연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예컨대 인간의 정서에는 필연성이 없다. 즉 정서적인 것이 반드시 낭만주의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발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주 넓은 범위에서 낭만주의의 영향권 안에 들어 있다고 혐의를 둘 만한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벌린은 그 대표적인 것으로 실존철학과 파시즘을 거론한다.


“이미 지적했다시피 – 이제 이 사실을 더욱 강조해야겠지만 – 낭만주의와 함께 새로운 가치 체계가 등장했다. 인간은 무엇보다 의지이고, 칸트나 피히테적인 의미에서 자유로워야 하므로, 동기는 결과보다 중요하다. 결과는 통제가 불가능하지만, 동기는 가능하기 때문이다.”(223쪽)


원래 동기를 중요하게 여긴 사람은 칸트다. 이 때 칸트가 말한 동기는 지고지순한 선(善)의지였다. 그런데 낭만주의는 칸트의 동기 개념을 과잉해석했다.


“인간은 반드시 자유로워야 하고,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어야 하므로, 가장 큰 미덕은, 곧 모든 미덕 중 으뜸은 실존주의자들은 진정성이라 부르고, 낭만주의자들은 신실함이라 부른 것이다.”(223-224쪽)


벌린은 칸트의 동기주의를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진정성과 낭만주의자들이 말하는 신실함의 원천에 두고 있다. 이것은 벌린의 해석이다. 더 나아가 칸트가 말하는 동기주의가 도덕철학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피히테가 ‘절대적 자아’라는 관념을 내세워서 적극적으로 해석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칸트가 원래 말한 것이 무엇이었고, 그것을 피히테가 어떻게 해석했는지, 바로 이 지점이 벌린이 낭만주의의 사상적 뿌리에 관해 말하고 있는 지점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 두 세계 모두의 자식들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낭만주의의 후예들로, 낭만주의는 인류가 여태까지 거기에 맞춰 걸어온 거대하고도 유일한 틀, “영원의 철학”을 깨뜨렸다. 우리는 어떤 의혹 –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것들 – 의 산물이다. 우리는 결과도 강조하고, 동기도 강조하며, 이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226쪽)


벌린이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이것이 17세기 계몽주의와 18세기 낭만주의를 거쳐 19세기 세기말이 되었을 때 그렇게 갈팡질팡했던 이유이다.


“이것이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치달아 히틀러 같은 인물이 생겨났을 때, 1930년대에는 그의 편을 드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하나, 우리는 그의 신실함이 반드시 그의 과오를 상쇄해 주는 미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진정 매우 멀리까지 나아갔음이 분명하나, 그 와중에 아주 근본적으로 보편적인 가치들을 모욕한다.”(226-227쪽)


‘근본적으로 보편적인 가치들’은 낭만주의와 계몽주의 모두 용인해야 하는 것들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벌린이 보기에 낭만주의가 남긴 진정한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어떤 통합된 전통의 일원들이지만, 이제 우리는 그 영역 안을 자유롭게 오가며, 우리가 허용하는 범위도 예전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다. 이것은 상당 부분 낭만주의 운동의 덕분이니, 그것이 이상들의 양립 불가능성, 동기와 품성의 중요성, 또는 어쨌든 결과와 효율성, 효과, 성공과 행복과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보다 우선하는 의도의 중요성을 설파했기 때문이다.”(227쪽)


이제 우리는 계몽주의의 전통에 속해 있든 낭만주의의 전통에 속해 있든 간에 다른 전통에 속한 이들을 용인할 수 있는 관용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에도 종교적 관용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계몽주의가 말하는 보편적 이성으로는 심정적인 것까지 관용할 수는 없었다. 심정적인 것까지 관용할 수 있으려면 낭만주의의 성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벌린은 이것이 낭만주의 덕분이라고 말하고 있다.


파시즘의 기본적인 멘털리티 중 하나는 ‘차이’를 ‘차별’로 치환시키고, 차이나는 이들을 완전히 절멸(Vernichtung)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낭만주의에 의해 생겨난 관용이 파시즘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다. 아까 말해듯이 낭만주의의 영향권 안에 있는 것들이 반드시 낭만주의적인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어서 실존주의가 나오는데, 벌린이 말하는 실존주의는 한 마디로 모든 것을 자신이 짊어지려는 태도이다.


“이 세계에 만들어진 것은 무엇이든 우리가 만든 것이고, 우리는 자신이 만든 것에 책임이 있으며, 어떤 정상참작도 요구할 수 없다. 모든 변명은 거짓이고, 모든 설명은 발뺌이며,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용감하고 충분히 비극적인 인간이라면, 이것을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230쪽)


그러나 실존주의가 단순히 모든 것을 짊어지려는 태도라면, 조가경 선생처럼 공부 많이 한 분이 실존주의에 관해 이렇게 두꺼운 책(『실존철학』)을 쓸 이유가 없을 것이다. 실존철학도 하나의 철학인데, 모든 철학은 구조가 있다. 이 책에 근거해서 실존철학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혹시 철학에 알기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이 좋다. 먼저 목차를 보자. 1부 ‘실존사상의 발전사적 개관’에서는 실존철학의 현대적 선구자로서 키에르케고르와 니체를 거론하고 있는데, 이걸 보면 유신론적 실존철학과 무신론적 실존철학이라는 일반적인 구별을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카를 뢰비트라는 사람이 쓴 『헤겔에서 니체로』(민음사)라는 책이 있다. 19세기 독일 사상사의 전환 과정을 다룬 책인데, 부제가 ‘마르크스와 키아케고어, 19세기 사상의 혁명적 결렬’이다. 헤겔, 니체, 마르크스, 키에르케고르, 이 네 사람을 통해 19세기 사상을 조망하고 있다. 어쨌든 조가경 선생은 키에르케고르와 니체를 실존철학의 선구자로 본다.


2부는 ‘실존철학의 대상과 방법’이다. 우리는 실존철학의 방법론에 대해 잘 생각해 보지 않는데, 철학자는 어떤 방법론을 통해 주장을 전개하느냐에 따라 유파가 갈리기 때문에 방법론이 중요하다. 3부는‘실존철학의 근본문제’이다. 철학책은 이 책처럼 목차를 써야 한다. 3부는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실존철학에 있어서만 근본문제가 아니라 철학에 있어서도 근본문제이다. 첫째가 ‘유한성과 우연성의 문제’이다. 실존철학은 우연이 철저하게 우연임을 인정하고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배후에 어떤 법칙이 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초월과 자유의 형이상학’이다. 세 번째는 ‘실존적 인간해석의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실존철학에서 우연성 다음으로 중요한 역사에 관한 문제제기가 있다. 우리는 과거를 들여다보면서 어떤 법칙을 이끌어내려 한다. 필연적 법칙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개연성이 높은 법칙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4부는 ‘실존철학의 학문이론’, 5부는 ‘현대 실존철학의 개별적 형태의 특징’, 6부는 ‘실존철학 비판’이다. 조가경 선생이 ‘증판을 위한 새 서문’에 5쪽에 걸쳐 실존철학을 아주 잘 정리해 놓았다.


“실존철학은 인간 내면을 향한 반성을 일삼는 극단적인 주관주의 철학이라고 불리어왔고, 주관 내면의 무풍지대에서 자족과 위안을 찾는 퇴형적인 사상이라고 간주되어왔다.”


이것이 실존철학에 대한 일반적인 태도이다. 그리고 실존철학에 관한 저서를 읽은 이들이 이러한 태도를 보여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실존철학에서 강조하는 인간 주관에 대한 반성은 과학적 객관성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실존철학자들은 과학적 진리를 인정한다. 그런데 과연 그 진리가 인간 주관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반성적으로 묻겠다는 의미에서 실존철학이 주관을 강조한 것이다. 진리는 나의 밖에 있으며, 나에게 명령한다. 나는 진리를 어찌해볼 수 없다. 이것이 실존철학이 문제 삼는 지점이다. 그래서 조가경 선생이 이렇게 말했다.


“주관의 자각적 반성은 생의 근원에 직결된 사유의 보편적 요구이며, 반드시 실존철학만이 제창한 사고방식은 아니다.”


“실존주의의 중심이 되는 주장은 본질적으로 낭만주의적인 것으로, 다시 말해서 이 세계의 그 무엇도 우리를 강요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려 하면서, “그것이 나보다 훨씬 강하며”, 어떤 감정이 나를 압도하고, 어떤 객관적인 원리들이 있어 내가 아무리 그것을 증오한다 해도 복종할 수 밖에 없으며”(227쪽)


“어떤 객관적인 원리들이 있어 내가 아무리 그것을 증오한다 해도 복종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인간의 좌절이다. 실존주의는 이것에 대해 응답한다. 아까 실존주의와 함께 거론했던 것이 파시즘이다. 파시즘이 가지고 있는 낭만주의적 요소는 ‘의지의 분출’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파시즘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파시즘은 고유의 작동방식을 가지고 있다. 파시즘을 바라보는 여러 가지 시각이 있는데, 그 중에서 전체주의적 시각으로 바라본 사람이 한나 아렌트이다. 재미있는 것은, 한나 아렌트가 미국에서 뜨게 된 이유가 소련을 전체주의 국가로 규정했기 때문이었는데, 사실 요즘은 미국이 전체주의적이라는 점이다.


낭만주의에 관해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이 있다. 벌린이 말하듯이,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의 기계적 합리성을 극복하고 관용적인 태도를 가져왔으며, 또한 인간의 의지를 강조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가 극단으로 치달으면 매사를 미학화하게 된다.


이제부터 존 산본마쓰의 『탈근대 군주론』(갈무리)를 하겠다. 이 책은 1960,70년대 서구신좌파 운동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인정하고, 어떤 지점에서 실패했는지를 검토한다. 그리고 푸코와 알튀세르 같은 프랑스 철학이 미국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고 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를 검토한다.


군주, 즉 prince는 마키아벨리의 용어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 개념을 받아들여서 좌파 실천 운동에 새로운 군주가 필요하다고 말한 사람이 안토니오 그람시이다. 존 산본마쓰는 마키아벨리의 prince보다는 그람시의 prince를 가져다 쓰고 있다. 이 사람은 굉장히 야망에 차 있다. 그람시가 살았던 시대는 근대였는데, 이 책 제목이 ‘탈근대 군주론’이니 탈근대에 맞는 새로운 군주론을 제시해보겠다는 것이다. 이런 의도가 얼마나 성취되었는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이 문제의식만큼은 높이 살 만하다.


1장부터 4장까지는 신좌파를 분석하고, 프랑스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있다. 5장이 ‘군주와 고고학자’인데, 여기서 군주는 그람시를 말하고 고고학은 미셸 푸코를 말한다. 6장은 ‘탈근대 군주’인데, 존 산본마쓰가 주장하고자 하는 내용이 여기에 들어 있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현재의 기득권력에 대항하는 대중적인 대항권력을 어떤 구조로 만들어낼 것인가이다.


산본마쓰가 보기에 신좌파의 핵심적인 특징은 벌린이 헤르더를 얘기하면서 거론했던 표현주의다. 좌파는 계몽주의자들이다. 그런데 신좌파는 계몽주의적 요소가 없었다.


“1960년대와 70년대 초의 신좌파와 대항문화(counter-culture) 운동은 근대 기술 중심 사회의 소외와 위선, 폭력에 맞서는 열정적이고 뿌리 깊은 낭만적 외침, 한마디로 근대성 자체에 대한 반역을 대변했다.”(43쪽)


계몽주의가 불러온 직접적인 성과가 ‘근대 기술 중심 사회’이다. 아까 실존주의를 하면서 ‘소외’에 관해 이야기했었다. ‘위선’은 낭만주의자들이 혐오해 마지 않는 것이다. 미국 라스베이거스 사령부에 가면 공군 조종사들이 pc방 같은 곳에 앉아서 아프가니스탄 상공을 날아다니는 무인 폭격기를 조종하고 있다. 거기서 버튼을 누르면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폭격기가 폭격을 가한다. 완전히 smart war이다. 기술 중심 사회가 극단에 달했을 때 이러한 폭력성을 나타내게 된다.


“지금 우리가 단순히 ‘60년대라고 부르는 시절은 체계적이고 뿌리 깊은 권력구조에 맞서는 상상력 풍부한 문화적, 정치적 반역을 대표했다.”(43쪽)


신좌파가 내놓은 다섯 가지 주제를 보면, 

“첫째, 신좌파는 사회에 대한 ‘도덕적 반란’, 개인적 자기표현에 뿌리를 둔 반란을 강조했다. 둘째, 사회의 전체 문화적, 정신적 구성을 세밀하게 해명하는 모습을 띠면서 맑스주의의 훨씬 폭넓고 깊이 있는 비판을 포괄했다. 셋째, 훨씬 전통적인 정치 참여 영역을 회피하면서 대신 직접행동 전술을 강조했다. 넷째, 신좌파의 지지자들은 일반적으로 풀뿌리 또는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헌신을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이 운동은 전반적인 “구조와 행동의 탈집중화와 다양성”에 헌신했다.”(45쪽)


이 다섯 가지 요소는 상당히 훌륭하고 좋다. 그러나 

“신좌파에게 결여된 것은, “미국 사회의 구조 분석, 미래 사회의 전망, 한쪽으로 다른 쪽으로 이끌어 가는 변혁을 촉발할 방법과 수단”을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적 종합’이었다.”(45쪽)


신좌파 운동은 ‘미국 사회의 구조 분석’과 ‘미래 사회의 전망’ 없는 상태에서 출발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열정적인 운동으로, 한 순간의 푸닥거리로 끝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존 산본마쓰가 신좌파에 대해 가지고 있는 하나의 문제의식이다.


3장 ‘장식적인 이론’의 소제목 중에 ‘‘사용 가치’와 이론의 장식적인 무기’, ‘상품 미학’ 등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론의 미학화다. 즉 현실과 괴리된 이론이 상품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찰스 테일러는 (유사한 용어인 이사야 벌린의 ‘표현주의’expressionism를 따라서) 표현주의(expressivism)라는 용어를 써서, 18세기 말 낭만주의의 도래와 함께 나타난 유럽 문명의 큰 변화를 문학적.문화적.정치적 순간으로 묘사한다.”


찰스 테일러라는 사람이 나왔다. 48쪽 각주에『헤겔철학과 현대의 위기』(서광사)라는 책이 나왔는데 이 책은 헤겔철학을 잘 모르면 어렵고,『불안한 현대사회』(이학사)가 훨씬 더 이해하기 쉽다. 어쨌든 지금 47~48쪽에 걸쳐 낭만주의가 잘 정리되어 있다.


“낭만주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1960년대 운동의 정치적.문화적 표현은 위대한 내부적 열기와 정열로 타올랐다. 감정은 이성보다 우월한 것으로 여겨졌고, 실천(praxis)은 정서적이고 종종 미적인 용어를 통해서 창조적이고 자발적인 포에이시스(poeisis) 또는 ‘창출’의 기획으로 표현됐다.”(50쪽)


‘내부적 열기와 정열’은 낭만적 정서다. 1960년대에 praxis는 마르크스주의 철학과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고 선행하는 이론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좌파들은 이 실천을 ‘창출의 기획’으로 표현했다. 1960년대 신좌파 운동은 낭만주의 시대와 근본적으로 같은 mentality를 가지고 있었다.


“시오도어 로셔크는 1968년에 내놓은 연작 논문에서, 초기 낭만주의자들이 초기 자본주의 근대성의 영적 공허함에 도전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좌파와 대항문화의 말기 낭만주의자들도 근대 사회의 소외와 비인간성 곧 삶과 경험과 자연을, 합리화한 절치와 관료주의 그리고 이익추구로 환원하는 데 반대했다고 봤다.”(51-52쪽)


여기서 ‘근대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Modern은 ‘근대’로 번역하기도 하고, ‘현대’로 번역하기도 한다. 21세기 한국은 근대적 패러다임 위에 성립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때 근대는 세 가지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사회의 저변에 놓여 있는 ‘계몽주의적 합리성’이다. 둘째 ‘자본주의적 계산성’이다. 셋째 ‘법치국가적 합리성’이다. 여기에 하나 더 끼워 넣는다면 ‘도덕적 무관심주의’, ‘종교적 관용주의’를 거론할 수 있다. 근대적 합리성의 이면에는 그 합리성 때문에 초래되는 인간의 파편화된 어두운 삶이 있다. Modernity라는 용어는 이러한 것까지 포괄할 때 사용한다. 어쨌든 이 책에서 modern이 쓰일 때는 방금 말한 세 가지를 의미하고 ‘현대’는 단순히 시대를 말한다.


“사회학자 알랭 투랜은 당시에 대해 분석하면서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썼다. “5월운동은 몇 주간의 집단 행동 이후 정치 생활을 변혁시키거나 사회 혁명을 폭발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운동은 에너지 상당 부분을 폭력 또는 자기표현 곧 말들에 소모하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은 5월 한 달의 최대 성과는 이 자기표현이라고 여겼다. 이 견해는 내 생각이 아니다.”(54-55쪽)


신좌파 운동은 현실적 context에 뿌리 박지 못하고 하나의 표현주의로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표현주의에도 대가가 따랐다. 표현주의는, 소비주의에 주관적인 한계를 설정함으로써 자본주의의 확장을 억제하던 부르주아적 문화 규범들이 맹렬한 기세로 자본주의의 족쇄를 푸는 걸 방치했다. 선진자본주의 문화 내부에서 대항논리로 개발된 것들이, 후기포드주의의 새로운 논리를 구성하게 된 것이다.”(93쪽)


“소비주의에 주관적인 한계를 설정”했다는 것은 객관적 한계를 없애버렸다는 뜻이다. “부르주아적 문화 규범”은 절제, 검약 같은 미덕이다. 계몽적 합리성에 대한 신좌파의 대항논리는 상상력, 창조력, 포에이시스 등이었다. 포드주의는 표준화된 모델을 대량생산하는 것이다. 후기포드주의는 다품종 소량생산, 각자가 원하는 상품을 만드는 것이다. 표현주의는 이 후기포드주의에 기여하게 되었다.


“이런 주관적 공간-시간의 압축감은 서구 경제와 문화가 새로운 상품 생산 체제를 향해 폭넓게 이행하던 것(하비가 “모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이라고 한 것)에 부합했다.”(94쪽)


“표현주의적 감정 구조의 두 번째 결과는 신좌파가 자신의 이념을 명료화하고 성장 가능한 형식을 구성하는 걸 가로막은 것이다.”(94쪽)


이념을 명료화되지 않고 형식적으로 구성되지 않았다는 것은 체계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후계자들을 남기지 못하게 된다.


“신좌파가 지나간 자취에는 그 어떤 일관된 실천의 사회이론도 확실히 남지 않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95쪽)


심지어는 2장 제목처럼 ‘방언으로 말하기’가 된다. 방언으로 말한다는 것은 못 알아들으면 진리라는 것이다. 합리성이 통용되지 시기에는 알아듣는 것이 진리이지만, 합리성이 통용되지 않으면 ‘상식이 아닌 기도’로 사는 사태가 발생한다.


8번 강의 했는데, 녹음과 필사를 다시 듣고 보면서 복습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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