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기본개념들 | 02 진리와 인식 1 - 진리의 기본 개념, 합리와 이성


필사본이 있어서 별도로 강의 내용을 요약하지 않았다.


강유원의 철학의 기본개념들 2

강의 교재:  소광희.이석윤.김정선 <철학의 제문제>

강의 목차: 

                1강 : 철학의 개념 - 철학과 종교, 그리고 과학

                2강 : 진리와 인식 1 - 진리의 기본 개념, 합리와 이성

                3강 : 진리와 인식 2 - 비판과 종합

                4강 : 존재의 탐구: 형이상학과 존재론

                5강 : 보편과 개체, 물질과 생명

                6강 : 가치란 무엇인가

                7강 : 선의지와 공리주의, 미와 예술

                8강 : 사회철학과 역사철학의 기본개념들


도서 목록: 데카르트: 방법서설

                서준식: 옥중서한




2006년 가을 풀로엮은집

철학의 기본개념들

강사: 강유원

필사: 임경준

2강: 진리와 인식 1 - 진리의 기본 개념, 합리와 이성


# 지혜가 만들어지는 과정

지난 시간에 외워오라 한 문장을 되새겨 보겠다.

"지혜는 사실의 현상적인 분석과 기술에 바탕을 두고 그 내면적 근거와 본질 및 전체적 의미연관을 통찰하여 보다 근원적으로 사태를 파악하고 판단하는 능력이다"


옛적 유산들의 훌륭함을 가리킬 때 우리는 흔히 "조상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다"는 말을 쓰곤 한다. 지혜(wisdom)라는 단어가 꽤나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일상적 의미에서 쓰이는 '지혜'와,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바, 철학적 의미로서의 '지혜'는 어떠한 연관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 우선 일상적 의미에서 쓰이는 지혜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리가 '조상의 지혜'라고 부르는 옛적 유산들은 대개 우리가 실생활에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사용될 현실세계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이 첫번째 일이 될 것이다. 그렇게 수집된 데이터를 오랜 세월에 걸쳐 지속적으로 판단하고 분석하여 기술한 다음, 다시 그것을 여러 사람이 검증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면, 처음에는 산만하게 늘어져 있던 데이터들이 하나의 체계적인 지식(knowledge)으로 묶이게 된다. 조선시대의 <농사직설>, <무예도보통지>같은 것이 이에 대한 적절한 예시가 될 것이다. 체계적인 지식이 보편성을 갖는 지혜로 고양되려면 여기에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즉 세계관이 덧붙여져야 한다. 같은 지역에서 같은 지식을 갖고 있더라도, 그것을 어떤 세계관에 의해 재구성하느냐에 따라 지혜의 종류가 달라진다.


오랜 세월을 거친다는 것, 이것이야 말로 인문학만이 갖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다. 인문학은 당면한 현실에 대해서는 발언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인문학은 시간 속에 흘러가 버리는 현실세계를 다시금 붙잡아 그것을 오랜 세월에 걸쳐 숙성시킴으로써 그 내면적 의미를 드러내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요사이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그러나 그 말을 유행시키고 있는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위기의 본질에 대해 설득력 있게 말하고 있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저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지위의 위기일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문학을 위협하는가? 인문학은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지는 학적 탐구의 성과물이다. 오랜 세월에 반대되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빠른 속도다. 현재 우리가 살고있는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시간에 값을 매겨 팔아먹는다는 것이다. 중세에는 고리대금업을 금지시켰다. 중세에서 시간은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 신의 소유였는데, 고리대금업은 시간이 돈으로 전환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간관념을 뒤엎고 시간을 인간의 것으로 정당화시킨 것이 자본주의이다. 즉 '시간은 금이다'라는 표어는 자본주의적 시간관이 뿌리내린 이후에 생겨난 것인 셈이다. 자본주의의 목적은 이윤의 창출이다. 자본주의는 시간을 가속화시킴으로써 이윤을 만들어 낸다. 최대한 짧은 시간 안에 상품을 많이 만들어서 빨리 팔아버리면 그만큼 이윤이 많이 남을 것 아닌가? 시간을 가속화시키고자 하는 자본주의의 의지는 공간을 확장시키기도 한다. 어떠한 시공간 속에서도 상점을 돌리겠다는 자본주의의 의지가 사이버 스페이스에 구현된 것이 바로 인터넷 상점이다. 이렇게 볼 때 자본주의 경제시스템 하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만들어 내는 핍진적 시간경험을 견뎌내야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지식기반사회(Knowledge-based society)라는 말은 자본주의의 시간경험 속에 맞물려 돌아가는 지식을 말한다. 그러니 빨리 만들어 내서 빨리 소비되는 휘발성 지식이다. 이러한 근원적인 토대에 대한 분석없는 위기 담론은 그저 돈 좀 더 달라는 구걸에 지나지 않는다.


인문학은 현실의 사태를 예리하게 분석하고 그것을 철저하게 정교한 언어로 서술하고 그것에 바탕을 두어서 지속적으로 의심해 보는 학적 행위이다.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삼인)를 읽어보면 우리 머리 속에는 어떤 판단의 프레임이 존재한다고 한다. 가령 사람들이 독일관념론을 공부한 사람이라 하면 대체로 칸트와 같이 깔끔하고 반듯한 이미지를 떠올리곤 한다. 이것이 사람들이 갖고 있는 독일관념론 전공자에 대한 프레임이다. 프레임이 있어야 어떤 사태에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 빨리 나아갈 수 있다. 지금 강의도 철학에 대한 기본 프레임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프레임이 있어야 어떤 데이터가 들어왔을 때 빠른 시간 안에 그것을 적절한 자리에 배치할 수 있다. 그런데 기존 프레임에 어긋나는 데이터가 들어오면 받아들이지 않고 튕겨내 버린다.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레드 콤플렉스를 보라. 저 사람 간첩이라고 하면 모든 이성활동이 정지해 버린다. 철학공부에서의 의심은 프레임을 가지고 있되, 프레임을 가지고 있지 않은 듯이 생각하는 것이다. 가장 강력한 프레임을 가지고 세상을 사는 이들이 공무원이다. 공무원이 하는 모든 행위가 매뉴얼로 활자화되어 있다. 프레임이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공무원들은 이러한 프레임이 견고한 콘크리트 구조물처럼 머리 속에 박혀 있어서 웬만해서는 빠져나가기가 힘들다. 프레임은 우리가 현실세계를 인식하는 하나의 도구이지만 다른 한편 우리의 새로운 인식을 방해한다. 따라서 세계를 파악하려는 철학적 사색을 시작할 때는 프레임을 가지고 있되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은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의심하면 프레임이 전환된다. 이렇게 프레임을 전환시키고 여기에 새로운 데이터를 덧붙이고 새로운 세계관을 덧붙이면 새로운 지혜가 만들어 진다. 지혜가 만들어 지는 과정은 조상의 지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생각해 보면 가능하다. 지혜를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를 고민해 보기 바란다. 지금부터 10년동안 꾸준히 지혜를 만들어 나간다면 정말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합리론의 진리인식 방법

"이제 나는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모든 감각을 멀리하고, 물체적인 것들의 모든 상을 내 생각으로부터 지워 버리고, 혹은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적어도 이 상들을 헛되고 거짓된 것으로서 무시하련다. 그리하여 오직 나 자신에게만 이야기하고, 내 속을 깊이 살펴봄으로써 조금씩 나 자신을 나에게 더 잘 알려지게 하고 더 낯익은 것이 되게 하련다. 나는 하나의 생각하는 것이다. 즉 의심하고, 긍정하고, 부정하고, 약간의 것을 알고 많은 것을 모르며, 바라고, 바라지 않으며, 또 상상하고, 감각하는 어떤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 내가 깨달은 바와 같이 설사 내가 감각 및 상상이라고 부르는 이 사고 방식만큼은, 그것이 하나의 사고방식인 한, 확실히 내 속에 있음을 내가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몇 마디 말로써 나는 내가 참으로 알고 있는 것을 혹은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모든 것을 요약했다고 믿는다." (데카르트Descartes, <<성찰Les méditations sur la philosophie première(1641)>>, III)


이 텍스트는 Descartes의 <<제1철학에 관한 성찰>>의 세번째 성찰 첫 부분이다. 줄여서 보통 <<성찰>>이라고 하는데 1641년에 출간된 것이다. 17세기에 어떠한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사상사와 지성사는 다르다. Berlin은 사상의 흐름만 보기 때문에 사상사가이나, 지성사는 어떤 사상이나 철학이 등장하게 된 사회경제적 토대를 같이 살피는 것이다. 우리는 지성사의 입장을 취한다. 서양의 17세기는 그야말로 피가 낭자한 시기이다. 1641년에 영국의 장기의회는 당시 국왕이던 찰스 1세의 전제적 통치를 제한하는 법률을 통과시킨다. 대부르주아 세력들이 왕권을 제한하고 드디어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을 전세계로 뻗어나갈 힘을 보여준 사건이다. 1215년은 마그나카르타의 해이다. <<1215, 마그나카르타의 해>>를 보면 마그나카르타의 주요내용이 왕과 귀족의 땅싸움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영국은 이러한 땅싸움이 계속 벌어진 것이다. 한편 네덜란드는 일본에 와서 나가사키 근처에 있는 데지마에 무역식민지를 건설한다. 네덜란드가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 최초의 에이전트 스테이트(Agent State)로 등장했던 때이다. Descartes가 네덜란드에서 학술활동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1637년은 Descartes가 <<방법서설>>을 출간한 해이다. 같은 해에 네덜란드 지방에서 튤립공황이 발생한다. 튤립의 값어치가 높아지자 사람들이 앞다투어 튤립을 사재기했는데 그것이 한순간에 폭락한 것이다. 마이클 폴란의 <<욕망의 식물학>>(서울문화사)을 참조할 것. 또 프랑스가 지금의 코트디부아르에 선교관을 설치한다. 이것이 향후 200년 간 프랑스 식민지배의 거점이 된다. Descartes가 <<방법서설>>을 써서 근대철학의 여명을 열어 젖혔을 때, 프랑스는 아프리카에 식민지배의 여명을 열어 젖히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Descartes가 살았던 시대의 상황이다.


Hegel은 인간의 자기의식을 사유의 원리로 삼는다는 점에서 Descartes를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규정한다. 이 문단은 Descartes가 자기의식을 사유의 원리로 삼는 과정을 서술한 것이다. 문단 전반부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Descartes는 신체의 모든 감각을 정지시킴으로써 오로지 순수한 자기정신을 찾는다. 이것이 Descartes의 출발점이다. 철학사에서는 이것을 '내면적 자기에로의 퇴각'이라 부른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란 존재가 가장 순수하게 가지고 있는 것은 "의심하고, 긍정하고, 부정하고, 약간의 것을 알고 많은 것을 모르며, 바라고, 바라지 않으며, 또 상상하고, 감각하는 어떤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것을 자기가 자기를 의식한다는 의미에서 '자기 의식'이라고 한다.


Descartes가 이와 같이 자기의식으로 퇴각한 이유가 무엇인가? 확고한 인식의 산출을 위해서 였다. 즉 Descartes는 자기의식을 진리인식의 원천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Descartes가 철학자이면서 수학자이기도 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Descartes는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오면서 붙어있는 역사적인 지식, 감각적인 지식들을 털어버리고 오로지 순수수학, 기하학의 방법론을 자신만의 진리탐구의 방법론으로 삼고자 했다. Descartes가 말하는 순수한 내면적 자기란 달리 말해서 역사적 세계 속에서 획득되는 모든 진리를 부정하는 태도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전통적인 관습, 조상의 지혜같은 것은 Descartes에게 무시된다. 수학적으로 명증한 지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 철학의 임무이다. 이렇게 되면 고전적 의미의 지혜로서의 철학은 포기된다.


이렇게 Descartes는 철학의 개념을 다시 쓴다. Platon의 철학이 형이상학에서부터 시작하여 정치철학에까지 닿아있을 정도로 광범위한 반면에 Descartes의 철학은 순수한 자아로부터 확고하고 명석하고 뚜렷한 지식을 낳아놓는 것으로 철학의 영역을 한정시킨다. 이점에서 근대 이후 철학의 위기는 Descartes의 철학 개념에서부터 예견된다. 역사적 세계에 대한 통찰을 포기함으로써 철학을 인간과는 무관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대철학을 넘어선다는 것은 역사적 세계에 대한 통찰을 회복하는 것이다. 즉 유적(類的) 존재로서의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인데, 그런 점에서 Marx야 말로 최초의 포스트 모더니스트라 할 수 있다. 수학과 기하학에 기반한 근대적 인식론을 넘어서서 역사적 세계에 대한 통찰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역사철학으로서의 역사의 회복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근대를 관념론적으로 넘어선 인물은 Hegle일 것이나, 진정한 실천적 의미에서의 근대철학을 넘어선 이는 단연 Marx라 할 것이다.


"철학은 원래 전문적 문제영역을 가지지 않고 사회적 현실을 전면적으로 문제 삼는 학문인 것이다. 철학이라는 학문이 역사상 항상 현존 사회와 그 어떤 긴장 관계에 서 왔던 근본적 이유는 철학 자체의 이 같은 본질에서 유래한다. 이와 같은 고달픈 긴장관계 속에서 버티어 나가지 못하고 전문화, 과학화로 스스로의 활동을 한정시키는 것으로 현존 사회에 '편입'될 때, 철학은 그 고유의 총체성의 시각을 잃어 현존 사회(세계)에 대한 비판자로서의 영광스러운 자격을 스스로 포기하게 되는 셈이다... 특정한 '항간의 유행'이 도대체 어느 정도 진리에 가까우며 어느 정도 가짜인가를 판단함에 있어서 '엄밀한 학'만이 판단 특권을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즉, 진리가 프락시스의 과정에서 인식되고 프락시스에 의하여 검증된다는 인식론적 입장에서 볼 때, '엄밀한 학'만이 유행의 물결에 초연할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은 학자적 오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서준식, <<옥중서한>>, pp. 566-567)


이 텍스트는 서준식 선생이 감옥에서 조카에게 보낸 편지에서 발췌한 것이다. 편지의 앞뒤사정을 밝히자면 대강 이렇다. 조카가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을 하고싶다고 하자 서준식 선생이 답장을 통해 자신의 철학관을 밝힌 것이다. 이 구절은 방금 전에 읽었던 Descartes의 철학 개념과는 대척점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텍스트를 강유원이 썼다는 것과 서준식이 썼다는 것은 의미가 다르다. 강유원은 철학을 공부하는 훈련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서준식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여기까지 갔다. 대학생 시절에 감옥에 갇혀 몸으로 겪어가며 깨달은 것이다. 철학이 사회적 현실을 전면적으로 문제삼으면 총체성의 시각을 갖게 된다.


그렇게 되면 진리가 실천의 과정 속에서 인식된다. 서준식 선생의 철학 개념은 실천적 진리관에 속한다. 다시 말해 실천 속에서 스스로를 검증해 나가보겠다는 태도이다. 엄밀한 학이라는 것은 수학적 엄밀한 모형에 근거한 것이므로 Descartes적인 통찰 체계 속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텍스트는 Descartes 이전의 철학들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그것들을 복권시켜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서준식의 옥중서한은 군데군데 띄엄띄엄 읽어서는 안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해야 한다. 철없던 서준식이 성숙한 사회주의자로서의 서준식이 되어가는 과정을 읽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옥중서한을 읽다 보면 면회 오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들을 관찰해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면회 오는 이들의 면모가 하나같이 지지리 못난 이들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감옥에 나와서도 아무런 기득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관계도 없다. 있는 인간관계는 뒷바라지하다 스러졌다. 그렇다고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전향서를 쓰지 않아 아직 간첩이기 때문에 시민이 될 수도 없다. 정말로 몸뚱아리 하나 밖에 가지고 있지 못하므로, 내가 인간이라는 조건밖에 주장할 것이 없다. 그래서 인권운동을 하는 것이다.


인문학자에게는 옥중서한이야 말로 20세기 한국사회가 만들어낸 가장 뛰어난 사유의 원천이라 할 것이다.

읽어볼 것을 권한다.


"중세의 계시적 진리로부터 벗어난 근대인은 진리의 기준과 근거를 신에게서 구하지 않고 인간자신에게 있어서 구하게 되었다. 인간에 있어서 진리의 기준이나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자연의 빛lumen naturae'으로서의 이성이요, 다른 하나는 감각 내용의 축적으로서의 경험이다... 합리론의 주된 관심은 방법론과 진리론에 있다고 하겠다. 이 방법론을 수립하고 그것의 확실성과 타당성을 정초하기 위하여 데카르트는 사색할 수 있는 고독을 찾아 조국을 떠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합리론자들이 가장 확실하고 타당하다고 제시한 인식방법론이란 선천적 인식능력에 의한 연역추리이었다. 그것은 기하학(또는 수학)을 모델로 하는 사유의 자동성이기 때문에 거기서는 인간이 개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경험내용이나 자의적인 의견 따위는 무력할 뿐만 아니라 전혀 개입할 여지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에 입각한 사유의 필연성 -- 이것을 스피노자Spinoza는 '영원의 상하相下'(관점)이라고 한다 -- 에서 볼 때 개인적 경험이나 자의적 견해는 우연적인 것이요 조잡하고 부정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의 제문제>>, p. 62)


합리론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천적 이성의 힘을 신뢰하고 그것으로부터 확실한 진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것이 합리론의 태도이다. "합리론자들이 가장 확실하고 타당하다고 제시한 인식방법론이란 선천적 인식능력에 의한 연역추리이었다" 여기서 선천적 인식능력이란 모든 감각적, 역사적 요인들을 제거한 상태를 가리킨다. 선천적 인식능력이 무엇인지 우리는 적극적으로 규정할 수 없다. 그저 이러이러할 것이다 추측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갖고 있는 선천적 인식능력의 속성을 규정할 때 이러이러한 것은 없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Descartes <<성찰>>의 첫번째 말이다. 


그런데 선천적 인식능력이라는 것이 반드시 수학과 기하학을 모델로 전개될 필요는 없다. Descartes 합리론에서 진리인식의 원천은 내면적 자아이다. 내면적 자아인 이성이 어떤 방법으로 진리를 인식하느냐, 바로 기하학을 따라서 진리를 인식한다. 그러나 이 같은 경로가 필연적인 귀결은 아니다. 합리론자들은 이것을 필연적인 것으라 생각한다. 왜 그럴까? 기하학이라는 모델이 가장 뚜렷하게 사태를 설명해주고 무엇보다도 시간과 공간에 상관없이 보편적이었기 때문이다. 즉 확실한 진리를 낳아놓는 모델로 생각한 것이다. 합리론이 과학화의 길로 들어서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기서는 인간이 개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경험내용이나 자의적인 의견 따위는 무력할 뿐만 아니라 전혀 개입할 여지도 없는 것이다." 합리론은 인간이 갖고 있는 경험내용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 역사와는 당연히 무관하다. 각각의 개인의 경험과는 무관하게 초월적인 진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갖고 있는 이성으로 진리를 인식하는데 그것은 수학과 기하학의 모델을 따라간다. 여기에 모순점이 있다. 수학과 기하학의 모델을 따라가는 것은 인간과는 무관한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과연 합리론자들의 사유가 인간의 것인가? 과연 그들이 중세의 계시적 진리를 벗어나서 인간중심의 진리를 내놓은 것인가? 어쩌면 그것은 중세의 신적 진리를 교묘하게 인간중심적인 것으로 바꿔놓은 것은 아닌가? 합리론의 진리인식은 내면적 자아라는 인간주체에서 출발했으나 이제 인식론의 영역을 벗어나서 인간과는 무관한 독단적 형이상학에 빠져버리고 만다.


"진리에 입각한 사유의 필연성 -- 이것을 스피노자Spinoza는 '영원의 상하相下'이라고 한다 -- 에서 볼 때 개인적 경험이나 자의적 견해는 우연적인 것이요 조잡하고 부정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영원의 상하'는 영원의 관점으로 읽을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이 택할 수 있는 관점이 아니다. 칸트가 근대철학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이룬 것은 사실이지만, 칸트 철학의 한계가 여기서 나온다. 확실한 진리가 인간의 이성에서 반드시 나올 필요는 없다. 경험적 진리에서 확실성은 아니더라도 개연성을 인정함으로써 그 타당성을 받아들일 수도 있는 일이다. 합리론자들의 관점에서 개인적인 경험이나 자의적 견해를 우연적인 것으로 돌릴 수 있는 근거는 없다. 그렇다 해서 영원의 관점을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기준이 사라져 버린다.


"1) 내가 틀림없이 참이라고 인정한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참으로서 받아들이지 말 것. 다시 말하면 섣부른 판단과 편견을 주의깊게 피할 것. 그리고 의심할 여지가 조금도 없을 정도로 내 정신에 명석하고 판명하게 나타나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내 판단 속에 넣지 말 것.(확실성의 규칙)


2) 내가 음미하는 문제 하나하나를 될 수 있는 한 많이, 그리고 그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만큼 작게 나눌 것.(분할의 규칙)


3) 내 생각을 순서에 따라 이끌어 갈 것. 가장 단순하고 인식하기 쉬운 것부터 시작하여 계단을 올라가듯이 조금씩 올라가서, 가장 복잡한 것을 인식하는 데까지 나아갈 것. 그리고 자연대로라면 앞뒤의 순서도 갖지 않은 것들 사이에서도 순서가 있다고 상정하고 전진할 것.(순서의 규칙)


4)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완전한 열거와 전체적인 검토를 어디에서나 행할 것.(열거와 개관의 법칙" (데카르트, <<방법서설Le Discours de la methode(1637)>>, II)


Descartes는 이렇게 네 가지 법칙을 가지고 자신의 사유의 규칙을 만들어 낸다. Descartes의 이 규칙들은 명석판명함으로 집약된다. 명석하다는 것은 곧 뚜렷하다는 것이다. 가령 내가 누군가를 때렸을 때 상대방이 느끼는 고통감은 상대방에게 명석한 것이다. 판명하다는 것은 여기서 더 나아가 정확하게 구별되는 것이다. 즉 원인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판명한 것이 명석한 것보다 훨씬 더 진전된 인식형태다. 정리해 보자. 순수한 내면적 자아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Descartes는 굉장히 명석하고 판명한 인식을 정초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 마음세계가 아무리 순수하다 해도 대상세계가 내 마음과 같다는 가망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Descartes는 중세의 신으로부터 벗어났다고는 하나 신으로서의 실체를 궁극적 원리로 삼게된다. 대상세계에 대한 감각적인 경험과 지식의 확실성을 인정치 않음으로써 결국 신이 진리의 보증자로 나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출발은 순수한 내면적 자아라는 인간주체였지만 결국은 신에게 굴복하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주체성이 등장하자마자 몰락하게 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합리적, 이성적 인식만이 확고한 인식이라는 편견때문이다.


"신으로서의 실체를 궁극적 원리로 삼는 것은 스피노자나 라이프니츠에 있어서도 다름이 없다. 그리고 신으로부터 모든 존재자를 연역하는 것도 데카르트와 같다. 스피노자는 그의 <<윤리학>>의 첫머리에서 신에 관하여 논증함으로써 그것을 제일원리로 삼아 그밖의 모든 것을 엄밀한 기하학적 방법으로 연역한다. 그에  의하면 신은... 자기 원인causa sui적 실체로서 절대무한한 존재자, 다시 말하면 그 하나하나가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나타내는 무한한 속성들로부터 성립하는 실체이다... 어째서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를 위시하여 모든 합리론자들에게 신 내지 실체가 문제되는가? 그것은 세계의 모든 존재자를 필연적 연역에 의하여 논증하기 위한 최후의 궁극적 제일원리를 정립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것은 논리적 실체를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의 명증성에 의해서 직관적으로 포착되는 것이다." (<<철학의 제문제>>,p.67-68)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보자. 신이 없다면 우리가 지각하고 사유하는 대상이 의미가 없는 것인가? 합리론자들처럼 반드시 신이 있어야만 하는가? Descartes가 말하는 대로. 인간은 의심하는 자기의식. 계속 의심함으로써 반드시 확실한 진리를 얻어와야 하는가?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당장당장 얻어지는 것들에 만족하며 살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신이라는 존재가 필연적으로 명석하고 판명한 지식을 보증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실존철학자들의 의문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순간순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결단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살아가라고 주문한다. 실존철학의 의지의 결단 요구가 여기서 출발하는 것이다.


# 경험론의 진리인식 방법

"어떤 주의 주장을 경험론(Empirismus, empiricism)이라고 일컬을 때 '경험(empeiria, experientia,experience)'이란 감각기관을 통하여 수용한 것, 곧 감각-지각을 뜻한다. 그리고 경험론은 '감각중에 있지않던, 그 무엇도 이성 중에 있지 않다Nihil est in intellectu, quod non fuerit in sensu'는 주의 주장을 말한다. 그래서 경험론은 경험주의 또는 감각주의sensualism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경험론 내지 감각주의는 인식의 원천 내지 출발점의 문제에서 그것을 이성이라고 보는 이성론과는 반대로 그것이 감각경험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경험론은 모든 인식의 질료뿐만 아니라 타당성의 근원도 경험에서 구한다. 이성론자들이 인식의 타당성은 인식의 확실성에서 보증되며, 인식의 확실성은 수학적 보편적 이성에 근거한다고 보고, 모든 지식을 수학적[기하학적]으로 전개하고자 한 데에 반하여, 경험론자들은 인식의 확실성은 경험만이 보증한다고 믿는다. 여기서 더 나아가 공간 시간상에서 감각적으로 경험된 것만이 '사실'이고 '실재'며, 그 이상의 것은 무의미하다는 주장에까지 이르면 경험론은 실증주의positivism가 된다... 경험론의 원칙은 비단 이론적 인식 영역에서만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정치와 종교 영역에도 적용될 것이 요구되었고, 그 결과 시민 통치이론과 자연종교 이론이 나왔다." (백종현, <<서양근대철학>>, pp. 64-65)


경험론은 합리론과 진리인식의 입각점이 다르다. 합리론과는 대조적으로 정신은 가만히 있고 감각이 먼저 주어져야 한다. 합리론이 진리인식에서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경험론은 수동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하겠다. 경험론을 아주 수월한 우리말로 옮기자면 '겪어봐야 안다'이다. 경험론자들은 인간이 뭔가 경험함으로써 그것을 통해 인식을 만들어 낸다는 굉장히 소극적인 태도에서 출발한다. 감각을 중시한다고 해서 경험론이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공간 시간상에서 감각적으로 경험된 것만이 '사실'이고 '실재'며, 그 이상의 것은 무의미하다는 주장에까지 이르면 경험론은 실증주의positivism가 된다." 근대의 합리론은 극단적으로 빠지면 독단적 형이상학에 빠진다. 경험론은 그와 반대로 인간의 이성은 수동적이라는 인식 하에 경험한 것만을 죽 나열해 놓고 법칙을 발견하면 된다고 생각함으로써 실증주의에 빠지고 만다. 이렇게 보면 합리론이나 경험론이나 철학이라는 행위가 본래적으로 수행해왔던 행위가 없어지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출발점부터 몰락의 씨앗을 품고 있는 미묘한 행위인 것이다. 사회적 문제를 전면적으로 문제삼지 않고 단순히 전문적이고 엄밀한 인식만을 추구하게 되면 이렇게 몰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결과를 알면서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철학이다. 그러니 철학은 자기파괴적인 학문인 셈이다.


경험론도 확실한 인식을 찾고자 하였으나 그러다 보니 철학을 포기하고 과학적 실증주의에 빠지고 만다. 과학적 실증주의가 정치와 종교 영역에 빠지게 되면 시민통치론과 자연종교로 나간다. 정치적인 것을 다루는 학문체계를 놓고 생각해 보자. 정치철학(Political Philosophy)은 국가를 통치할 때 뭔가 도덕적인 개입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다. 사회과학의 한 분과로서의 정치학(Politics)은 유권자들이 어디에 투표하는가와 같이 좀더 실증적인 문제를 다룬다. 정치공학(Political Engineering)은 어떻게 해야 선거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 즉 정치 컨설턴트들이 고민하는 문제를 다룬다. 여기서 보이는 것과 같이 경험되는 데이터에 진리값이 있다는 논리는 결국 통계학으로 환원된다.


"나는 정신이 자신 속에서 지각하는 것 또는 지각, 사유나 오성의 직접적인 대상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관념이라 부르고, 우리의 정신 안에 어떤 관념을 만들어주는 힘은 그 힘을 가진 주관의 성질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하나의 눈덩이가 희다, 차갑다, 둥글다는 관념을 우리 안에 만들어내는 힘을 가질 때, 눈덩이 안에 있는 힘처럼 우리 안에 그러한 관념을 만들어내는 힘을 나는 성질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오성 안에 있는 감각작용 또는 지각일 경우 나는 그것들을 관념이라 부른다. (로크Locke, <<인간오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1689)>>, II. viii. 8)


어떤 원천이 있는데, 그것이 물체 안에 있으면 성질인 것이고, 우리의 오성 안에 있으면 관념이 된다는 주장이다. Locke는 대상세계가 가지고 있는 어떤 특성이 우리가 경험하면 아무런 변형도 없이 우리에게 온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감각경험이라는 것이 아무런 변형도 거치지 않고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경험론자로서 Locke는 이렇게 레디칼하게 밀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인식론의 입장에서 경험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가지고 있는 인식이 대상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대상의 성질과 내가 갖고 있는 관념이 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을 어떻게든 주장해야 한다. 그래야 인식의 확실성이 보장된다. 이것이 <<인간오성론>>의 바닥에 깔려있는 의지이다.


"물체 속에 있는 이러한 성질은, 물체가 어떤 상태에있건 물체에서 절대로 분리할 수 없는 것, 물체가 어떤 변경이나 변화를 겪더라도, 또는 어떤 힘이 그 물체에 가해지더라도 물체가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성질들을 물체의 원초적 성질 또는 제1성질이라고 부른다." (로크, <<인간오성론>>, II. viii. 9)


"둘째, 대상 그 자체에 진짜로 속하지는 않지만, 대상의 제1성질, 즉 감지될 수 없는 부분들의 크기, 모양, 조직, 그리고 운동을 통해 우리 안에 여러 가지 감각작용을 만들어내는 힘인 색깔, 소리, 맛 등과 같은 성질이 있다. 이것을 나는 제2성질이라고 부른다." (로크, <<인간오성론>>, II. viii. 10)


제일성질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 물체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면을 말한다. 제일성질을 알게 되면 대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확실해 질 것이나 우리는 제일성질을 알아낼 수 없다. 그래서 Locke는 제일성질에서 파생된 맛, 색깔, 소리 등과 같은 제이성질을 거론하고, 그것이 우리가 갖게 되는 인식의 근원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쯤되면 경험론이 주장하는 바, 감각적 경험이 갖고 있는 확실성은 질적인 수준이 상당히 떨어지게 된다. 제일성질은 영원히 알 수 없다. 제이성질은 우리가 갖고 있는 관념이다. 그러니 관념만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라 밀고 나갈 수밖에 없다. 역설적이게도 감각경험에 의한 인식을 주장하는 경험론자들이 우리가 갖고 있는 대상이나 물체에 대한 관념이 중요시하게 되고 결국 관념론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내가 상대방의 손을 잡는다. 상대방은 내 체온을 미지근하다고 느낀다. 미지근하다는 것은 제이성질이다. 그러나 믿을 것은 미지근하다는 관념 밖에 없다. 관념을 통하지 않고는 진리를 전할 수 없다. 관념에 진리치가 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요컨대 제1성질이란 대상 자체에 필연적으로 속해 있는 실재적 성질인데 반하여, 제2성질은 제1성질이 감각에 미치는 결과로서 주관 속에 생기는 파생적 성질이다. 그러나 이처럼 제1성질을 실재적 성질이라 보고, 나아가서는 물체의 충격에 의하여 제1성질의 관념이 우리에게 생긴다고 설명함은, 이미 경험적 관념의 영역을 넘어서서 실재론을 전제한 물성적物性的고찰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이것은 로크의 최초의 입장에 어긋나는일이다. 이 점은 버어클레이Berkeley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버어클레이는...제1성질의 객관성을 부정함으로써 그 담지자로서의 실체의 실재성을 부정한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가감적可感的사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있어서 우리의 제諸감각이 지각하는 것은 여러가지의 관념뿐이요, 따라서 이러한 '여러 관념의 집합(collections of ideas)'을 우리는 사물이라고 부르게 된다고 한다."(<<철학의 제문제>>, pp. 86-87)


앞서 살펴보았던 대로 Locke는 제일성질을 우리가 확인할 수 없는 것임을 전제한 후, 진리인식은 제이성질을 통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Berkeley는 이러한 Locke의 주장을 비판한다. 제일성질은 물체가 그것 자체로 갖고 있는 특성이다. 따라서 감각경험이 중요하다 말하는 사람이 물체 그것 자체가 갖고 있는 것을 거론한다는 것은 결국 감각경험 이외의 것을 말하는 것이다. Berkeley는 맛, 소리, 색깔과 같은 관념에 만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험론은 Berkeley에 이르러서 관념론으로 빠지고 만다. Hume은 이것을 더욱 밀고 나간다.


"영국경험론에 의한 실체의 부정은 다시 휴움Hume에 이르러 정신적 실체까지도 부정됨으로써 그 정점에 달하였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신속하게 계기繼起하며 영원히 유동하는 가지가지의 '지각의 묶음(a bundle of perception)' 또는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휴움의 이와 같은 회의론이 로크의 경험론을 철저히 밀고 나감으로써 도달하게 된 필연적 귀결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감각적 경험은 엄격한 의미에서 필연성과 보편타당성을 가지지 않은 것이므로, 인식의 기원이 경험 속에 있다고 보는 한 그러한 인식의 필연성과 보편타당성을 단념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지식이 고도의 개연성을 갖는 것이면 그것을 일상적으로는 거의 필연적 지식으로서 통용하는 것이 사실이요, 휴움도 그렇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회의론은 스스로 자처하고 있듯이 '보다 완화된 회의론 또는 학구적 철학'이요, '철학적 회의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볼 때에 그것은 데까르트 이래의 17세기적 합리론과는 달리 인간의 경험에 즉하여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보고 인간의 지식의 한계를 명확히 하여, 지성의 교만과 월권을 경계하였다는 점에서 그 인식론적 의의가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철학의 제문제>>, pp. 87-89)


Hume은 내가 이것을 미지근하다고 판단했을 때, 그것이 언젠가 한 번 느꼈기 때문이지 항상 그런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Berkeley가 얘기했던 바, 미지근하다고 판단하는 정신은 늘 그렇다는 것마저도 부정한 것이다. 요컨대 Hume은 정신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영국경험론은 감각경험이라는 확실하고 뚜렷한 데서 출발한 것 같지만 결국은 회의론이라고 하는 자멸적인 귀결에 빠지고 만다. 그러면 경험론자들이 도대체 왜 이런 길로 나아갔던 것일까? 이런 귀결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회의론은 스스로 자처하고 있듯이 '보다 완화된 회의론 또는 학구적 철학'이요, '철학적 회의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볼 때에 그것은 데까르트 이래의 17세기적 합리론과는 달리 인간의 경험에 즉하여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보고 인간의 지식의 한계를 명확히 하여, 지성의 교만과 월권을 경계하였다는 점에서 그 인식론적 의의가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Hume은 자신이 한 주장의 귀결을 알고 있었다. 빤히 알면서도 그렇게 한 이유가 있다. 바로 인간의 지성의 교만과 월권을 경계하기 위해서 였다. 또한 17세기는 자연과학의 시기이기도 했다. 이 시대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자연과학의 시대이다. 모든 인간을 기계로 환원시키는 유물론의 시대였다. 인문학이 설 자리가 없었다. Hume과 같이 계속해서 회의함으로써 극단적인 회의에 이르게 되면 인과율을 부정하게 된다. 인과율이 부정되면 자연과학은 성립되지 않는다. Hume은 회의를 통해 인과율을 부정함으로써 자연과학도 따지고 보면 그렇게 확실한 인식을 주는 것이 아님을 밝히려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Hume은 자연과학만이 진정한 학이 아니라 인간과학도 인간생활을 분석할 수 있는 중요한 학의 하나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Hume이 굉장히 건전한 상식의 소유자였던 것을 알 수 있다. Hume과 굉장히 친했던 친구가 Adam Smith이다. Hume과 Smith는 17세기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로서 묶인다. 그만큼 정치, 경제, 윤리학이 함께 움직이던 시대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셈이다. 이것이 Hegel에게도 영향을 준다.


# 정리

오늘 강의한 것을 정리해 보겠다.

지혜는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새로운 지혜를 만들어 내는 데는 오랜 세월에 걸친 숙성기간이 필요하다. Descartes적 회의주의는 순수한 내면적 자아를 진리인식의 출발점으로 삼음으로써 종래의 프락시스로서의 철학관과 결별하고 근대철학의 학적 토대를 정초한다. 


합리론은 인간의 순수한 내면적 자아로부터 출발하여 이를 수학과 기하학적 모델에 입각한 명석판명한 진리로 세움으로써 사유의 확고부동함을 보증하려 한다. 그러나 수학과 기하학적 모델은 인간의 경험내용과는 무관한 것이고 따라서 합리론 자체가 인간과는 무관한 독단적 형이상학으로 전락한다. 그리하여 근대철학은 그 출발점에서부터 인간의 주체성의 몰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게 된다.


경험론은 감각의 수동성을 전제한다. 감각은 감각 자체가 갖고 있는 본래의 제일성질에 대해서는 개입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제이성질에서 얻게 되는 관념들에서 진리를 얻을 수 밖에 없다. 이렇듯 제일성질과 제이성질을 구분해 버리는 Locke의 불철저함은 Berkeley의 주관적 관념론으로 비판되고 이후 정신적 실체마저 부정해 버리는 Hume의 회의론에 이름으로써 자멸적 귀결에 빠진다. 이들은 지성의 교만과 월권을 경계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시간은 근대철학의 혁명적 철학자 칸트에 대해 강의할 것이다. 강의주제가 '비판과 종합'인데 합리론과 경험론의 한계를 비판하고 종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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