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기본개념들 | 05 보편과 개체, 물질과 생명


필사본이 있어서 별도로 강의 내용을 요약하지 않았다.


강유원의 철학의 기본개념들 5

강의 교재:  소광희.이석윤.김정선 <철학의 제문제>

강의 목차: 

                1강 : 철학의 개념 - 철학과 종교, 그리고 과학

                2강 : 진리와 인식 1 - 진리의 기본 개념, 합리와 이성

                3강 : 진리와 인식 2 - 비판과 종합

                4강 : 존재의 탐구: 형이상학과 존재론

                5강 : 보편과 개체, 물질과 생명

                6강 : 가치란 무엇인가

                7강 : 선의지와 공리주의, 미와 예술

                8강 : 사회철학과 역사철학의 기본개념들


도서 목록: 

                키케로: 수사학

                움베르트 에코: 장미의 이름




2006년 가을 풀로엮은집

철학의 기본개념들

강사: 강유원

필사: 임경준


5강 : 보편과 개체, 물질과 생명

철학적 개념들을 접하다 보면 그것의 사용범례가 우리의 일상적인 사용범례와 다른 까닭에 퍽 낯설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기본개념이란 특정한 사태를 지칭할 때는 이 용어를 사용하자는 일종의 약속이어서 그것을 지켜줘야 상호간의 의사소통이 가능해 진다. 이를테면 '감각', '감정', '감성'을 각각 구별해 보자.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개념들이지만 아마 구분이 쉽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만큼 대충대충 살고 있다는 증거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므로 무엇이든지 이성적으로 규정을 해봐야 한다. 이것들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사전적 정의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어떤 사유를 가지고 분석해 보고 해명할 것이냐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감각perception은 "내가 대상을 느껴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관과 객관 사이에 이뤄지는 interaction으로 이해해야 한다. 감각은 객관세계로부터 주어지는 데이터들을 주관이 받아들여서 성립하는 것이다. 칸트의 구성설적 인식이론을 보면 대상의 데이터들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직관의 형식을 통해 재구성되어 감각이 형성된다. 감각은 대상의 인식에 관해 논의하는 것이니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영역에서만 통용되는 술어이다. 인간의 행동의 규칙에 대해 논의하는 <<실천이성비판>>에서는 무의미하다. 도덕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나?


감정은 감각과 다르게 객관세계에서 데이터가 주어지지 않아도 있을 수 있다. 초감각적인 무엇이다. 즉 내가 어떤 대상을 겪지 않아도 감정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타고나는 것라고도 말할 수 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아무것도 겪은 것이 없어도 운다. 즉 뭔가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니 순수주관이 가지는 것이다. 대상세계와는 무관하다. '순수'라는 단어는 칸트철학에서 '경험과는 무관한'이란 뜻이다. 순수라는 말이 붙으면 주관과 관련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감정은 미학에 대해 다루는 <<판단력 비판>>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된다. 어쨌든 무언가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객관세계의 데이터가 주관으로 들어온다는 것이라는 점에서 감정은 인식의 대상일 수 없으며 주관과 객관의 상호작용의 결과물이 아니다.


감성Sinnlichkeit은 흔히 감수성과 혼동되기도 한다. <<순수이성비판>>을 보면 직관의 형식이 감각데이터를 만들어 내는 것을 감성작용이다. 그러니 감수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런 식으로 철학적 용어는 명확하게 구분되어 사용된다. 특히 인식론에서는 감각, 감정, 감성 사이의 상호작용을 염두에 두고 논의해야 한다. 이는 순수사유의 영역에서만 일어나는 것이고 일상세계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긴 하나 습관화시켜 틀이 형성되면 논리적으로 엄격해진다. "느낀바 있다"보다 "일련의 감각이 형성되었다"고 얘기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철학은 자기가 알고 있는바, 생각한 바를 언어를 통해 의사소통하는 것이다. 때문에 정확한 언어를 합당한 규칙에 의거하여 쓰는 것이 철학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서양철학은 무엇보다도 공통의 의사소통을 갖추는 데에 노력해왔다.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의 가장 중요한 차이가 이것이다. 즉 공통의 의사소통에 필요한 수사학도 철학의 한 분과로서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강의 막바지에 키케로의 <<수사학>>에 대해 얘기할 생각이다. 논술도 수사학의 한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 이전에는 자신의 생각을 시라는 서사형식을 통해서 표현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도 그렇고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봐도 그러하다. 하나의 철학적 서사양식으로서 플라톤의 대화편도 그렇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면 논술의 형식이 원시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자신에 선행하는 철학의 논의들을 정리한 다음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식으로 논의를 전개해 나간다는 것이다. 로마시대에는 그런 모든 것들을 취합하여 수사학이라는 하나의 엄격한 형식과 체계를 마련했다.


오늘은 보편과 개체, 물질과 생명에 대해 강의할 것인데, 무척 난해하고 복잡하다. 먼저 분명하게 얘기하자면 내 인생에 별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알아두면 재미있다. 베드민턴을 규모있고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특징은 과도한 몸짓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무슨 후라이팬으로 치는 것 같다. 뭔가 규모있고 체계적으로 배우려면 기본동작이 완벽하게 몸에 배게 해야한다. 지난 주 아스날과 레딩의 축구경기를 보면 그렇다. 사실 나는 축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축구는 누구 때문에 승패가 갈리는지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스날과 레딩의 경기를 보니 정말 멋지고 아름다웠다. 아스날은 자로 잰듯한 패스와 인간이 아닌 것 같은 플레이를 보여줬다. 정말이지 그 방법 이외의 최선의 패스는 존재할 것 같지 않고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다. 쓸데없는 힘을 사용하지 않으니 아스날 선수들은 경기가 끝난 후에도 지쳐있지 않다. 우리는 철학의 기본개념들을 통해서 아스날 축구와 같은 아름다움을 구현해 보도록 하자. 감각, 감정, 감성 같은 말들을 일상적인 차원에서 사용해도 사는 데 별 지장 없다. 그러나 규모있고 체계적으로 말하면 정확하고 깔끔하다. 철학적 태도가 일상생활에서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상을 파악하는 하나의 이념형, 즉 궁극적 형태로서 쓸모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철학의 기본개념들을 반복해서 읽어보고 이해해서 정리해 봐야 한다. 이렇게 하면 기본개념들이 내 머리 속에 탑재되고 그에 따라 세상을 보는 필터가 생겨서 필요한 정보와 필요하지 않은 정보를 빠르게 걸러낼 수 있다. 말이나 문장의 보이지 않는 행간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아래의 문단은 지난 시간에 강의했던 내용들을 정리해 놓은 것이다.


"'존재 그 자체'의 탐구라고 하는 존재론의 출발지평은 근대로 오면서 변화하게 된다. 신 중심의 세계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로 이행함에 따라 철학적 사고도 '존재'를 '인간에 대한 존재'로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간을 완전히 떠난 존재라면, 즉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이 전혀 경험할 수 없는 존재라면, 그에 관한 논의조차 무의미하고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에 대해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도 인간에 의해 경험되는 특수한 양식이 존재자의 고유한 존재방식으로 파악된다. 근대 이후의 존재 개념이 고중세의 존재개념과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존재가 인간에 의해 경험되는 방식은 무엇보다도 '인식'이므로 '존재의 경험에 관한 이론'으로서의 존재론은 인식론에 그 자리를 물려주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칸트의 철학이다. 칸트에 있어서 존재론은 직관의 형식과 오성의 범주가 경험을 통해 보증할 수 있는 대상에 관계하는 한에 있어서, 오성의 범주와 직관의 형식으로써 성립되는 학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대상 자체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인식하는 인간의 인식 능력에 내재하는 선천적인 요소들이다. 즉 경험에 앞서서transzendental 인식 주관에 주어진 일종의 규정작용의 법칙들이다. 따라서 주관에 속하는 이 선천적 법칙들이 객관의 경험과 합치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나, 이로써 존재론은 선험철학 속으로 해소되어 인식론으로 변신했다고 할 수 있다. 존재론의 학적 성격이 이렇게 변화됨에 따라 칸트에 있어서 형이상학도 새로이 규정된다. 즉 그것은 인식영역을 넘어서는 초감성적 세계를 문제삼는 탐구로 규정된다."


존재는 더 이상의 유개념을 가지지 않으므로 가장 최상위의 유개념이다. 지구상의 모든 개별적인 것들은 각기 존재라는 속성을 갖는다. 중세에는 존재가 신의 영역에 속해서 인간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던 것이 근대로 넘어오면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신을 철학적 탐구의 영역에서 제외시킨다는 것이다. 궁극적 존재에 대한 탐구는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것에 대한 탐구로 한정된다. 결국 존재론이 인식론으로 전환하게 되는 것이다.


중세에서 궁극적 존재는 신이었다. 그런데 신은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대상이다. 그저 느껴야 한다. 중세에서 존재론의 주제는 신에 대한 탐구였다. 존재론이 다루는 대상이 신이었으니 그것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 있는 것이었고 따라서 인간의 탐구대상이 아니었다. 근대에는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것은 탐구하지 않는다. 인간이 알 수 있는 것만이 궁극적인 존재이다. 인간이 알 수 있는 것만을 존재론의 영역으로 잡는다면 그것은 존재론이 아니라 인식론이 된다. 이것이 칸트의 업적이다. 칸트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인간이 알 수 없는 영역이었던 형이상학을 폐기하였다. 인간이 알 수 없는 것, 즉 물 자체는 학적인 인식에서는 성립할 수 없다. 우리의 감각 데이터에 들어오는 것만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중세에는 인간이 신을 인식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근대에는 그런 식의 논쟁은 의미가 없게 된다. 인간의 인식영역을 넘어서는 초감성적 세계를 문제삼는 탐구가 형이상학인데, 이것은 인간의 인식능력으로는 탐구할 수 없는 주제이다. 그런 점에서 칸트는 전통적 형이상학을 폐기하고 새로운 형이상학을 세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칸트의 새로운 형이상학이 과연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문제가 많다. 어쨌든 여기에서 핵심은 중세와 근대에서 인간이 궁극적으로 생각하는 존재는 무엇이냐, 그리고 칸트가 전통적 형이상학을 폐기하는 데 앞장섰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말을 하곤 한다. 지나치게 단순화할 우려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겪는 문제는 결국 죽느냐 사느냐로 귀결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규정성은 인간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랜 옛날부터 철학자들이 해결도 못하면서 천착한 문제가 있음과 없음의 문제이다. 왜 있는 건 있고 없는 건 없는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 또 다른 문제는 인식의 확실성을 어떻게 보증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가령 내가 종이라고 믿는 것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 종이일까? 만약 진짜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 나타나서 우리가 걸레를 종이로 여겼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할까?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에서 고민한 문제가 이것이다. 데카르트는 모든 사람을 속이는 악마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철없는 질문 같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다. 대상에 대해 판단해서 얘기했을 때, 주관의 사유와 대상 사이의 관계문제. 이것이 철학에서 일급의 문제이다.


한편 우리는 각각의 개체들이 있는데 그로부터 도출되지 않는 상위개념 하나로 개체들을 뭉뚱그려 표현한다. 플라톤은 상위개념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 사물들의 원형이 있다고 생각했다. 현실세계의 모든 것은 그것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이것이 플라톤의 이데아론인데 보편과 개체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요즘 이재만군이 코에 뾰루지가 나있다. 그런데 뾰루지가 났거나 나지 않았거나 이재만은 이재만이다. 코에 뾰루지가 났다고 하여 이재만의 본질이 변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연적 변화이다. 그런데 내가 이재만군의 뾰루지를 트집잡아 계속 괴롭히면 이재만군의 성격이 변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본질적 변화가 되겠다. 이러한 변화 혹은 운동의 문제가 철학에서는 중요한 문제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네 가지의 문제들 -- 1) 있음과 없음, 2) 대상인식의 문제, 3) 보편과 개체, 4)운동과 변화 -- 은 철학에서는 일진급의 문제들이다.

먼저 운동의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고대의 자연철학시대로부터 끊임없이 제기되고 논란되어 온 근본문제 중의 하나는 운동과 변화, 즉 kinesis의 문제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처럼 만물을 끊임없는 유동 속에서 파악하려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파르메니데스는 생성 소멸을 의견doxa이라 하여 운동을 부정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kinesis의 아포리아를 해결하기 위하여 가능적 존재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가능적 존재는 현실적 존재와 비존재(무)의 중간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단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 가능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에 Kinesis의 수수께끼를 풀 열쇠가 들어 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믿었다. 그에 의하면 Kinesis는 "가능적으로 존재하는 것의 -- 그것이 가능적인 것인 한 -- 현실화이다." 다시 말하면 Kinesis는 가능태로부터 현실태로의 이행이며, 따라서 그것은 미완료적 현실태라고 한다."


운동의 문제는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에서 처음 제기되었다. 단순화 시켜 설명하자면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이 운동이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파르메니데스는 운동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운동이 이들에게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이유는 자아정체성 때문이었다. 일단 운동이 있으면 자아정체성이 성립하지 않는다. 뾰루지 난 재만과 뾰루지 안 난 재만이 같은 사람이라 어떻게 주장할 수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능적 존재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이를 보면 아리스토텔레스도 선행하는 철학자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답안을 내놓았음을 알 수 있는데, 가능적 존재란 "현실적 존재와 비존재의 중간적인 것"이다. 여기서 현실적 존재는 눈 앞에 보이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존재는 가능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 뿐이지 눈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말장난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이는 어떤 사태를 설명해보는 것이다. 사람들이 수긍할만한 설명체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 철학의 과제이다. 이른바 정당화 논리의 개발하는 것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fact를 놓고 실험적 방법에 의해서 판단하고 그것을 통해 한발한발 전진하는 자연과학자에게는 말장난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철학적 설명이 있어서 덜 괴롭다. 누구나 보편적으로 수긍할만한 그럴싸하고 설득력있는 논리를 마련해 주니까 말이다.


보편과 개체에 대해 본격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다음 문단이다.


"현실적 세계 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결코 보편자가 아니라 개별자요 개체인 것이다. 모든 현실적인 것은 개체이다. 현실적 존재와 개체는 일단 일치한다. 현실적 세계 속에서 만나는 일체는 특수자요,  서로 다른 존재자와 구별되는 존재자인 것이다. 모든 현실적인 것과 상응하는 개체란 무엇인가? 개체individuum는 불가분할의 기본존재를 의미한다. in-dividuum은 분할할 수 없는 존재란 뜻이다. 이점에서는 원자a-tom와 같다. 불가분할성은 적극적으로 통일성이다. 따라서 개체는 일자요, 자기동일적인 것이다. 자기동일이라는 것은 다른 것과는 구별되나 자기자신과는 일치함을 말한다. 이리하여 개체에는 첫째로 유일성이라는 뜻이 있고, 둘째로 다른 것과 교환되거나 다른 것에로 회귀하지 않는 유일회성이라는 뜻이 있다. 개체는 '단독적 일자로서 있는 존재'이다. 현실적인 것은 개별자, 유일자, 유일회자이건만, 우리가 어떤 개념을 형성할 때에는 유개념, 종개념을 갖게 되는데, 이것은 이미 개체가 아닌 유와 종이다. 개념 속에서 개체는 사라지고 만다. 개념은 많은 개물에 공통되는 일련의 특징을 일반적인 것으로 추상화한다. 개념이 현실적 타당성을 가지려면 그것이 사물의 질서 속에서도 보편적임이 인정되어야 한다."


개별자, 개체, 현실적 존재, 존재자 모두 다른 말이 아니라 각각의 문맥에 맞춰서 쓰인 것이다. "모든 현실적인 것과 상응하는 개체란 무엇인가?" 는 표현은 쉽게 말하면 "현실에서 우리가 만나는 개체란 무엇인가?"로 바뀌 쓸 수 있을 것이다. 나눌 수 없기 때문에 통일되어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일자- 하나 - 이다. 내 안에 내가 알 수 없는 것이 있지 않다. 정신이 나간 사람이 아니라면 그 사람의 행동은 그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 분할될 수 없는 단독적 존재가 개체인 것이다. 개물들은 보편으로 포섭되는데, 일단 포섭되고 나면 개물들의 특성은 사라진다. 이렇게 보면 보편은 범위는 넓으나 그 내용은 굉장히 공허하다. 이것이 보편자와 개별자에 관한 일반적인 논의이다. 라틴어 individuum은 개체 혹은 개인으로 번역된다. Divium에서 divine이 파생되었다. In이 '~에 반대되는'이라는 접두사니까, individuum을 문자 그대로 옮기면 '나눌 수 없는 것'이 되는 셈이다. 개인주의individualism는 개인과 개체, 즉 나눌 수 없는 존재를 단초로 삼는 정치사회적 주의주장을 말한다. 개인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존재이니까 모든 것이 여기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주장이 도출될 수 있다. 그러니까 그것 자체로 완성된, 분할할 수 없는 존재인 셈이다. 개인은 달리 말하면 원자atom이다. 원자적이라는 말과 개인적이라는 말은 같은 뜻이 된다.


"보편자가 실재한다는 측을 보편실재론realism이라 하는데 거기에는 두 견해가 있다. 하나는 그것이 객관적으로 개물에 선행해서 실재한다는 것이며(플라톤, 안셀무스), 다른 하나는 그것이 개물들 가운데 공통하는 개념으로 있다는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명목론nominalism은 보편자의 개념내 실재성을 극단화하여 보편은 개물 뒤에 있는 하나의 이름일 뿐이라고 한다(스코투스, 오캄). 보편실재론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보편자(유나 종)는 우리의 의식과는 독립적으로 그 자체로서 실재하고 따라서 모든 개물에 선행한다고 한다. 플라톤은 개별적 특수자에 대하여 초월적이고 무시간적이며 이성에 의하여 파악되는 형상으로서의 이데아가 실재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이데아만이 참된 실재이고, 변화를 입는 경험계의 개별자는 준실재적이거나 실재의 모상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자는 특수자를 떠난 실재로서 현존하지 않지만, 다만 특수자들 사이에 공통하는 요소로서 현존한다고 한다. 즉 X라는 보편은 x에 공통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색깔있는 대상'은 색깔있는 존재에 공통적이지만, 이것은 다시 '붉은 대상'과 '초록빛 대상'이라는 종으로 분할된다. 보편은 개별적 사물 안에 실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이 중세로 넘어오자 보편의 문제는 기독교의 교리와 얽혀서 따른 격렬한 논쟁까지도 유발하게 되었다. 보편문제와 관련된 교리는 신존재의 보편성, 교회의 보편성, 원죄의 보편성 등이 있다. 명목론은 일반개념이 이름에 불과하고 참된 실재는 종을 구성하는 개물 가운데서 발견된다고 한다. 개념실재론자에게 인간성은 하나의 실재이지만 명목론자에게는 실재하는 것은 개개의 인간들 뿐인 것이다. 따라서 보편자는 관념적 표상으로서 있는 사물집합의 기호에 불과하다. 그것은 개물의 실재성에서 본다면 한갓 바람소리요, 하나의 명사나 명목nomina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여기 강의실에는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다. 우리는 그것을 '인간'이란 이름nomina으로 한데 묶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 이름은 실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말그대로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서양철학에서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입장이 두 가지로 갈린다. 하나는 이름이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보편실재론이고, 다른 하나는 이름은 그저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유명론이다. 보편실재론은 크게 보아 초월적 실재론과 내재적 실재론으로 나눠진다. 이는 철학에서 주관과 객관의 문제와 연관된다. 철학에서 주관이라고 하면 '내 안에 있는 것'으로, 객관이라고 하면 '저 너머에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초월적 실재론은 보편자가 객관에 있다고 보는 반면에, 내재적 실재론은 주관에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하여 초월적 실재론은 보편자가 인간의 인식능력을 초월한 곳에 존재한다고 보지만, 내재적 실재론은 사물들 각자에 들어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전자의 대표적인 철학자가 플라톤이고, 후자의 대표적인 철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유명론은 보편자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 옛날의 장미는 이름뿐"이라는 <<장미의 이름>>의 한 구절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유명론에서 실재하는 것은 개체들 뿐이고 보편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의사소통을 위한 방편일 뿐이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윌리엄 오캄이 유명론의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보편자는 초월적이고 무시간적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초월적이지도 않고 무시간적이지도 못하다. 그런데 이러한 보편자는 인간의 이성에 의해 파악된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초월적이지도 무시간적이지도 못하지만, 인간 내부에 있는 이성은 초월적이고 무시간적인 보편자를 인식할 수 있으므로 같은 속성을 가질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단박에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신적인 연마가 필요하다. 그렇게 하여 대상을 탁월하게 취급할 수 있는 능력, 즉 지혜sophia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수의 엘리트만이 가질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이 <<국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국가는 그들에 의해 다스려져야 한다. 이와 같이 플라톤은 이성에 의해서 파악되는 형상인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데아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엘리트적 인간이다. 그러니 플라톤의 형이상학에서 궁극적 실체는 인간이라 하겠다. 이렇게 본다면 플라톤의 인식이론은 이성에 의해서 이데아를 파악하는 능력을 추적하는 것이다. 형이상학과 인식론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색깔은 보편자이다. 이것은 노란색, 파란색, 빨간색 등으로 분화된다. 이것들 안에 색깔이라는 것이 들어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념을 가지고 논의를 전개시켜 나간다. 이렇게 하여 개념의 구조가 대상의 구조라고 하는 독특한 이론을 만들어 낸다. 보편문제와 관련된 교리에는 신존재의 보편성, 교회의 보편성, 원죄의 보편성 등이 있다. 이것이 없으면 기독교 교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가톨릭 교리의 핵심은 구원의 매개자인 사제를 믿는 것이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소서"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마리아라는 매개자를 믿는다. 이와 달리 프로테스탄트는 신과 직접적으로 관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보편실재론과 유명론이 이 문제를 두고 갈등한다. 이로부터 중세의 보편논쟁이 벌어진다.


보편실재론자들에게 인간성을 실제로 있는 참된 것이지만, 유명론자들에게 실제로 있는 것은 개개의 인간들에 불과하다. "그 옛날의 장미는 이름뿐"이라는 구절에 장미 대신 신을 넣어보라. "그 옛날의 신은 이름뿐". 신이 가진 참된 것으로서의 성격 자체가 빠져 나간다. 보편자란 사물집합을 통칭하는 기호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에서 논리적 실증주의가 나온다. 신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이들에게 전혀 논의할 가치가 없다. 칸트의 인식론에 따르면 객관세계의 감각 데이터가 우리의 감각경험으로 오지 않으면 인식이 성립되지 않는데, 인식되지 않는 것을 어떻게 논의할 것이냐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논의할 가치가 없는 무의미한 문제이다.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윌리엄 수도사가 윌리엄 오캄을 모델로 한 것이다. 읽어보기를 권한다. 이 소설의 배경이 1327년인데, 벌써 14세기부터 유명론이 유행한다. 보편실재론이 성립되어야 신에 대한 신앙이 정당화되는데 유명론에 의해서 균열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에 유행했던 건축양식이 고딕이다. 모르는 사람은 고딕양식이 신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표현된 것이라 주장한다. 이미 신앙 자체가 균열이 일어난 판국에 무슨 강렬한 열망이 있었겠는가? 신앙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찼을 때의 건축양식은 로마네스크이다. 고딕은 신에 대한 불신이 가득 찼는데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 잠재우려 했던 인간의식의 산물로 이해해야 한다. 어쨌든 보편과 개체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룬 것이 보편실재론과 유명론이다. 이것은 여러 방식으로 변조되어 나타난다.


"물질은 가장 큰 외연을 가지며 실재 세계의 최종적 토대가 되는 층으로, '존재와 비존재로 합성된 것'(플라톤), '단순한 잠세태'(아리스토텔레스)로, '가장 어두운 최저급의 단자로 구성된 것'(라이프니쯔)으로 이해되었다. 현대물리학은 물질을 질량의 담지자, 즉 관성을 가진 것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관성은 가속도에 대한 저항의 크기로 측정된다. 종래는 이 질량이 물질에 고유한 양으로 생각되었으나 상대성 이론에서는 운동하는 물체의 질량은 운동에너지의 증감에 따라 변화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물체가 '무엇'이냐는 물음을 놓고 볼 때, 기계론적인 입장에서 보면 물질은 입자이겠지만, 역동론적 입장에서 보면 물질은 파동이 될 것이다. 이 차이는 자연과학적인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생명은 물질을 '상층형성'함으로써 존립하게 되는, 물질 다음으로 광범한 존재영역을 차지하는 존재층이다. 생명의 본질에 관한 견해는 생기론적 입장과 기계론적 입장이 있다. 생명층과 물질층 간의 존재원리상 구별을 인정하면 생기론, 복잡성의 차이만 인정하면 기계론에 이른다. 기계론적 생명개념은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의 유물론에서 유래한다. 데모크리토스는 생명 현상도 원자의 형태와 운동의 현상으로 보았다. 물질과 정신을 각기 실체로 본 데카르트는 이 이원론적 입장에서 물질의 운동은 정신의 사고와는 달리 오직 기계적이라고 보았다. 인간을 제외한 생명체는 기계적 운동만을 하는 일종의 '자동기계'라는 것이며, 라메트리는 이를 인간에까지 적용해 <<인간기계론>>이라는 저술을 발표하였다. 기계론에 대립하는 생기론은 생명의 본질을 생명력에서, 또는 생명소라는 특수한 소재에서 찾으려는 데서 출발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생체와 생명체의 구별을 영혼의 유무에서 찾았는데, 생명체를 생명체로 만들어 주는 영혼을 '영양의 영혼'(anima vegetativa)이라하여 이것의 생명적 힘을 인정했다. 근세 이후 기계론적 인과관계에 의한 자연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생기론은 위축되었는데, 기계론적 생명관에 의거해 있다 하더라도, 생명체의 유기적 합목적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나의 유기적 전체로서의 생명체의 모습은 물리화학적 요소의 집합으로 해소될 수 없는 형태체(Gestalt)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정신을 세계의 근원적 기초로 생각하게 되면 그 존재근거를 실재세계를 떠난 이념적 존재에서 찾게 되기 쉽고, 이념적 존재는 자연히 완전한 절대자로 표상된다. 스콜라철학, 스피노자의 범신론, 헤겔의 절대정신의 철학 등이 그 대표적인 전형이다. 그런데 정신은 개인적인 측면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민족정신'이니 '시대정신'을 말하거니와, 이러한 '객관정신'은 개인정신과 별개의 것이 아니요, 정신 자체의 다른 형식이다. 정신이 초개인적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본질상 시공적 제한을 벗어나는 존재적 특성을 갖기 때문이다. 정신의 본질은 이성적 사유에 있고 사유는 본성상 보편성을 지향하는 것이므로, 이성의 보편성이 정신의 초개별성을 정초해 준다 하겠다. 이 보편성과 영속성을 가능케 하는 매개는 언어다."


철학에서는 물질의 뜻은 '현실세계의 가장 저변에 놓여있는 것'을 말한다. 철학자들에게 물질은 다양하게 인식되어왔다. 탈레스에 의하면 만물은 물에 뿌리를 둔다. 이때의 물은 water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액체이면서도 끊임없이 흐르는 것을 뜻한다. 물이 '현실세계의 가장 저변에 놓여있는 것'이니 탈레스에게 있어서 이것이 물질이다. 형체를 가지면서도 뭐라 딱 부러지게 규정할 수 없는 것이 물질이다. 현대물리학에서는 물질을 질량의 담지자로만 파악한다. 그러니 질량을 어떤 방식으로 측정하느냐가 주요한 문제가 된다. 그 방법에 따라 물질에 대한 정의가 달라질 것이다. 자연과학자들이 갖고 있는 편견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개념들이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오해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하나의 약속일 뿐이다. 기계론에서 보는 것과 역동론에서 보는 입장이 다르며, 아인슈타인이 보는 것과 뉴턴이 보는 것이 다르다. 오로지 자연과학적인 것은 아니다. 형이상학적인 측면도 존재한다.


의학에서 생명의 끊김을 설명할 때 통일된 의견이 없다. 어떤 이는 심장사(心臟死)라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뇌사라 주장하기도 한다. 생명의 개념이 생명을 어떤 것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얼마전에 텔레비전을 보니까 김지하씨가 티벳에 가서 고승들에게 죽음이 뭐냐고 묻고 있었다. 그걸 물으러 거기까지 갔다는 것이 어이없긴 하지만, 고승들은 죽음이란 없다고 대답했다. 즉 죽음이란 육체라는 껍질을 벗는 것일 뿐이다. 이들에게 생명은 영원불멸이다. 현대과학의 생명관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명이란 개념도 엄밀하게 자연과학적인 해명이 불가능하다. 특히 동물 같은 경우는 자아정체성을 확인할 수 없으나 인간은 가능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자아정체성을 확보해 주는 핵심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바로 정신이다. 인간은 정신을 통해 자아정체성을 확보한다. 그래서 생명이란 개념이 형이상학적인 개념이 된다.


정신(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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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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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물(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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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물(물질)


물질과 식물에는 선이 하나가 그어져 있는데 비해 동물과 식물, 인간과 동물에는 선이 두 개가 그어져 있다. 먼저 물질과 식물 사이에 한 개의 선과 두 개의 선의 차이는 서로 상호 인과성의 관계에 놓여있느냐 아니냐에 따른다. 먼저 무기물은 유기물의 직접적으로 바탕이 된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무기물이 땅이고 유기물이 식물이다. 그런데 물질과 식물과는 달리 식물과 동물은 서로 상호인과성의 관계에 놓여있지 않다. 그래서 선이 두 개이다. 동물에게는 감각이 있다. 그러므로 감각 없는 식물은 동물과 호환이 안 되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도 무기물로 호환이 되지 않는다. 인간의 육신은 썩을지 모르나 정신은 살아남기 때문이다. 즉 자아정체성은 인간에게만 성립하는 것이고 그것의 토대는 정신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여러 많은 철학자들이 공감하는 존재의 구조이다.


정신은 미묘하다. 정신의 본질적인 특징은 자유인데, 이것은 달리 말하면 무규정적이라는 것이다. 정신은 특정한 개인에게만 성립하지 않는다. 나와 너는 공통적으로 뭔가를 가질 수 있다. 이 강의실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어떤 학구적 정신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혼자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것이니까 각각의 개인에게 속하지 않는 공통의 정신이다. 이를 객관적 정신이라 한다. 시대정신, 민족정신, 협동정신 같은 것이 여기에 속한다. 딱히 누가 가진 것은 아니지만 "정신은 개인적인 측면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민족정신'이니 '시대정신'을 말하거니와, 이러한 '객관정신'은 개인정신과 별개의 것이 아니요, 정신 자체의 다른 형식이다."


객관적 정신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매개체가 필요하다. 가령 우리가 민주주의 정신을 시대정신으로 합의한다면 그것을 현실에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거기에 입각한 제도가 필요하다. 사회적 제도는 객관적 정신을 실현하는 매개체이다. 사회, 역사, 정치가 모두 객관적 정신의 산물이고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에서 핵심적인 요소는 정신이고, 그것은 무인도에서 고립되어 살지 않는 한 객관적 정신의 지배를 받는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사회는 갑돌이 - 조갑제,김용갑, 서정갑 - 들의 객관적 정신이 국가보안법이라는 사회적 제도에 의해 구현되어 있는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사회에 구현되어 있는 제도를 알면 객관적 정신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갑돌이들의 객관적 정신과 우리들의 객관적 정신은 다르다. 즉 객관적 정신이 다르면 통약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그 사람의 언어로 판단하는 수 밖에 없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언어는 그 사람의 객관적 정신의 징표이다. 사회적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특정한 객관적 정신에 입각하여 그것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와 근거를 설명해야 할 것인데, 우리와 갑돌이들의 객관적 정신이 다른 것과 같이 반대자들이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담론투쟁이 발생한다. 즉 객관적 정신이 제도화하는데 있어서 개입하는 것이 언어이다. 그러니 어떤 제도를 두고 벌어지는 담론투쟁을 분석하면, 어떠한 객관적 정신이 대립되어 있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권력관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키케로의 <<수사학>>을 읽을 필요가 있다.


<<수사학>>의 부제는 '말하기의 규칙과 체계'이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이 만들어 놓은 철학을 어떻게 하면 현실세계에 정확하게 구현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호간의 의사소통이 중요했을 것이고, 각자 자신의 의견을 상대방에게 정확하고 틀림없이 전달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규칙과 체계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한 고민의 결과물이 철학의 한 분과로서 '수사학'을 만들었다. 그러니 철학공부하는 사람들은 엄밀한 규칙과 체계에 의거하여 최소한의 술어로써 사태를 언술해야 한다. 니체에 관한 글을 니체처럼 쓸 필요는 없다. 상대방에게 정확하게 전달되면 된다.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제대로 알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철학에서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것이 논리학과 수사학이다. 모두들 한 번씩 사서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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