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기본개념들 | 06 가치란 무엇인가


필사본이 있어서 별도로 강의 내용을 요약하지 않았다.


강유원의 철학의 기본개념들 6

강의 교재:  소광희.이석윤.김정선 <철학의 제문제>

강의 목차:  

                1강 : 철학의 개념 - 철학과 종교, 그리고 과학

                2강 : 진리와 인식 1 - 진리의 기본 개념, 합리와 이성

                3강 : 진리와 인식 2 - 비판과 종합

                4강 : 존재의 탐구: 형이상학과 존재론

                5강 : 보편과 개체, 물질과 생명

                6강 : 가치란 무엇인가

                7강 : 선의지와 공리주의, 미와 예술

                8강 : 사회철학과 역사철학의 기본개념들

도서 목록: 

               콜링우드: 자연이라는 개념

               홍성욱: 과학은 얼마나




철학의 기본개념들 6강 : 가치란 무엇인가

강사: 강유원

필사: 임경준


오늘 강의할 가치론은 철학에서 응용철학의 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시간까지 강의했던 내용이 다소 딱딱하고 낯설었다면, 가치론은 비교적 우리가 실생활에서 맞부닥치는 문제들을 다루기 때문에 비교적 이해가 수월할 것 같다.


본격적인 강의에 들어가기 앞서 책을 한 권 추천하고자 한다. R.G. 콜링우드라는 사람이 쓴 <<자연이라는 개념>>(이제이북스)이다. 콜링우드는 이사야 벌린과 프란시스 콘포드와 비견되는 일진급 사상사가이다. 그는 <<새로운 리바이어던>>을 비롯하여 많은 책을 썼는데 그중에서 특히 'Idea of'로 시작하는 3부작이 유명하다. <<Idea of history>>, <<Idea of art>>, <<Idea of nature>>이 그것인데, 모두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다. 먼저 <<Idea of history>>는 소광희 선생과 손동현 교수의 번역으로 <<역사의 인식>>(경문사)으로 출간되었다. <<Idea of art>>는 <<예술의 원리>>(형설출판사)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마지막으로 <<Idea of nature>>가 방금 소개한 <<자연이라는 개념>>으로 출간되어 있는데, 이 책이 시중에서 구하기가 가장 수월하다. <<자연이라는 개념>>은 이번 겨울방학에 한번씩 꼭 읽어보기 바란다. 지난 시간에 짧게 언급했던 서양의 자연관을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잘 설명하고 있다. 언뜻 어려울 것 같지만 지난 시간에 강의했던 것들만 이해하고 있어도 꾸준히 읽어나갈 수 있다. 번역본은 오역이 몇몇 눈에 띄기는 하는데 전체적인 내용을 거스를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니다.


말이 나왔으니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하겠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여기 있는 사람들은 회사원이 될 것이다. 회사에 취직했다면 그 즉시 앞으로 10년 동안 공부할 것을 계획해 놓아야 한다. 대개 남자는 30살 전후하여, 여자는 20대 중반에 취직한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면 남자는 40대 초반이고 여자는 30대 중반이다. 이때 즈음이 회사생활하면서 단물이 거진 다 빨리고 시들해지는 때이다. 그때 가서 계획하면 늦는다. 그 전에 회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만을 위한 것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약자가 강자에게 당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공부를 해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사에 있을 때와 공부할 때의 전환이 빨라야 한다. 무슨 소리냐 하면 퇴근시간이 되면 그 즉시 회사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잊어버리고 내가 공부할 것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다음날 출근하여 사무실에 들어서기 전까지 오로지 내 공부할 것만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핵심이다. 그렇다면 공부계획을 어떻게 세우나? 먼저 1년 동안 읽을 책을 정해야 한다. 몇 권을 정하나? 자신이 알고 싶어하는 분야에서 가장 기본적인 저작 1권을 정한다. 1년 동안 고작 1권이라니 너무 적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많이 읽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을 얼마나 꼼꼼하게 정리해서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었느냐가 중요하다. 이제 책을 읽고 정리하는 방법이 필요하겠다. 3공 노트와 펜을 준비한다. 그런 다음 책을 읽어나간다. 가령 이종흡 교수가 쓴 <<마술 과학 인문학>>(지영사)라는 책을 읽는다고 상상해보자. 이 책은 르네상스 시대의 신비주의를 학문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신비주의에 관심이 있다고 한다면 이 책으로 출발하는 것이 좋다. 이 책을 꼼꼼하게 정리해 놓으면 <<다빈치 코드>>나 <<성배와 잃어버린 장미>>같은 책은 30분이면 읽어 치운다. 이 책은 모두 6개의 챕터로 이뤄져 있다. 먼저 1개 챕터를 통독하도록 한다. 읽어나가면서 모르는 개념이 있으면 표시해 둔다. 그런 다음 표시해 둔 부분에 대한 설명을 사전에서 찾아 3공 노트에 옮겨 적는다. 이렇게 하면 이 책을 읽기 위한 나만의 용어집이 만들어 진다. 이런 식으로 나머지 챕터들도 정리해가며 읽어나간다. 1챕터에 1달을 안배한다면 모두 읽는데 6달이 걸릴 것이다. 이렇게 모든 챕터를 정리했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책을 다시 읽어본다. 이전과 비교했을 때 책에 대한 이해도가 훨씬 깊어졌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1번 더 읽어본다. 그렇게 모두 3번을 읽으면 이 책에서 웬만한 것들은 모두 이해가 될 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방법은 표준저작을 읽어나가는 방법이다. 표준저작은 서브저작으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이다. 이제 서브저작을 읽는 방법을 설명하겠다. 서브저작은 1년에 10권 정도를 선정한다. 한 달에 한 권 읽을 정도의 분량이다. 왜 12권이 아니라 10권이냐 하면 1월과 12월은 놀아야 되니까 그렇다. 책 선정은 표준저작과 관련있어 보이는 것으로 하는데, 표준저작의 각 챕터에 대응되는 책들로 한다. 그렇게 표준저작의 1챕터를 읽은 후에 서브저작을 같이 읽어나간다. 이해가 훨씬 수월할 것이다. 서브저작 역시 노트정리를 한다. 그렇게 1년을 공부하면 정리한 노트들이 쌓일 것이다. 그것이 내 재산이 된다. 세상에 공부할 것은 많은데 이런 식으로 공부하다 보면 언제 다른 걸 공부하나 하는 생각도 들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꾸준히 공부하다 보면 그것들이 언젠가는 이어진다. 1년 동안 공부할 주제를 정한 다음 그와 관련된 책들을 선정하여 정리하는 것. 이것이 핵심이다. 정리하지 않으면 증발해 버린다.


나눠준 영문 텍스트는 루이 뒤프레 Louis Dupre라는 사람이 쓴 <<The Enlightenment and the intellectual foundation of modern culture>>에서 문화에 대한 definition을 발췌한 것이다. 가치는 문화까지도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가치의 정의부터 알아보자. 어떤 것을 정의하려고 한다면 그것의 유와 종차를 가지고 설명하되, 오캄의 면도날을 유념해야 한다. 즉 '사태를 설명할 때는 최소한의 element로써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존재는 그것이 자연적인 것이든 또는 정신적인 것이든 간에 일정한 위계의 차별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위계의 차별을 일반적으로 가치라고 한다. 그러나 동일한 존재에 직면하고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존재의 위계를 동일하게만 보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이나 이해, 취미나 관심 등에 따라 서로 다른 가치를 인지하고 선취하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의 위계의 차별은 그 존재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와 그 존재를 평가하는 주관과의 관계에 의하여 제약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가치의 개념은 평가하는 주관의 요구와 평가되는 객관 -- 그것이 실재적인 것이든 또는 관점적인 것이든 -- 과의 상관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철학적 가치론이 주로 다루는 것은 윤리적 가치, 예술적 가치, 종교적 가치이므로, 이것을 인간의 의지와 감정의 요구에 대응하는 것으로 보아 가치의 개념을 더욱 좁게 정의한다면, 가치란 주관의 의지나 감정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실재적 또는 관념적 대상의 위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텍스트에 나와있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존재"를 '위계의 차별'로써 인식한다. 이러한 "위계의 차별"을 일반적으로 가치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주관의 영역이고 "직면하고 있는 존재"는 객관의 영역이다. 쉽게 말하면 뭔가를 따질 때 위 아래를 보면서 따진다는 것이다. 이 문단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존재의 위계의 차별은 그 존재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와 그 존재를 평가하는 주관과의 관계에 의하여 제약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이다. 아까는 가치를 정의함에 있어 대상 그 자체만 가지고 논했으나 지금은 주관과의 관계에 의해 제약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즉 모든 사람은 존재의 위계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황금은 귀한 것이지만 최영장군에게는 돌에 불과하다. 이는 대상세계에 대한 어떤 가치판단이 주관에 의한 것임을 알게 해준다. 그러므로 가치의 개념은 주관과 객관의 상관관계에 의하여 판단되어야 한다. 가령 나에게는 만년필이 굉장한 실용적 가치가 있다. 그런데 만년필을 쓰지 않은 사람에게는 몽블랑 만년필을 가져다 줘도 별다른 가치가 없을 것이다. 가치라는 것은 그만큼 평가되는 객관문제도 고려되어야 겠지만 주관의 영역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최종적인 가치의 정의는 "주관의 의지나 감정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실재적 또는 관념적 대상의 위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가치를 정의하는데 있어 넓은 범위에서 출발하여 좁은 범위로까지 폭넓게 다룬다. 가치의 정의를 왜 그렇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그것의 하위영역들도 설명하는 것이다. 이 정도면 더 이상 가치에 대해 말할 것이 없다. 그것 자체로 완결되는 것이다. 글은 이렇게 짧고 간결하면서도 규모있고 체계적으로 써야 한다. 로버트 레드포드가 감독한 <흐르는 강물처럼>란 영화를 보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방법이 다른게 아니다. 아들이 글을 써오면 아버지는 아들에게 글의 분량을 절반으로 줄이라 한다. 그 과정을 반복하고 반복한다. 글 잘 쓰는 방법이 다른 게 아니다. 절반으로 줄이는 것이 글쓰기의 비법이다. 그렇게 줄이고 줄여서 한 마디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방금 읽었던 문단을 글쓰기의 전범으로 삼아야 한다. 이 글을 자세히 뜯어보면 형용사가 없다. 형용사가 없이 써야 개념의 정의가 머리 속에 뚜렷하게 새겨진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가치는 고려해야 할 대상이 굉장히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주관의 의지와 감정의 요구는 객관적으로 측정이 불가능하다. 실재적 또는 관념적 대상의 위계 역시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척도가 없다. 즉 가치론은 학문적으로 규명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분야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철학에서 최후까지 남겨놓을 수 있는 분야가 이 분야가 아닐까 한다.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니 헛소리를 계속한다 하더라도 남의 비난이 적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서 가치론에 포함된 분과가 있는데 바로 문화철학이다. 나눠준 영문 텍스트가 문화에 대해 다루고 있다. 문화가 무엇인가? '인간이 인간에게 가치있는 것을 산출하는 활동과 그 산물'이다. 문화의 정의 안에 '가치'라는 말이 들어갔으니 문화가 가치론에서 다뤄볼 만한 주제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래는 가치와 존재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다룬 것이다.


"가치와 존재가 일치한다고 보는 견해는 그 기원이 플라톤의 이데아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데아는 참된 존재 즉 진실재라고 하거니와, 이 이데아에는 '선의 이데아'를 최고의 이데아로 하는가치적 서열이 있으므로 당연히 존재에도 그와 일치하는 가치적 서열이 있게 된다. 이에 가치는 존재와 일치하게 된다. 그러나 선은 존재를 초월한 것이요, 존재의 원형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가치는 존재와 일치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가치가 더 우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형이상학에도 가치론적 관점이 깊이 침투되어 있다. 그의 완전현실태란, 곧 '목적에 도달한 상태, 완성된 상태'를 의미하거니와, 적어도 신의 현실태란 완전한 목적, 선한 목적에 도달한 완전현실태일 것이므로, 여기에서도 신을 정점으로 하는 존재의 서열은 곧 가치의 서열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가치value와 존재fact.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가장 높은 이데아는 선의 이데아이다. 이 같이 이데아는 가치의 서열이 있다.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가치적 서열을 정당화하는 것으로서 선의 이데아의 서열이 성립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따라서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가치는 존재와 일치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가치가 더 우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위라는 것은 이데아가 현실존재를 초월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플라톤에게는 가치가 현실존재와 관계가 있지만 현실을 초월하여 바깥에 있다. 유념해야 할 것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과는 다른 세계에 혹은 현실세계 안에도 우리가 보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옳고 그름의 기준과 레벨이 객관적으로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인생을 함부로 살지 못한다. 적어도 여기에 철학공부를 하겠다고 모인 사람들은 이들과 같은 가치기준이 있다. 그냥 사는 게 가치있게 사는 것이 아닐 것 같다는 의구심에 여기까지 온 사람들 말이다. 돈 버는 것 이외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가치있는 것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죽어도 못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 아무런 생각없이 산다고 치부하기 쉽지만 그게 아니다. 이 사람들도 나름대로 가치판단을 하고 산다. 이들과 우리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정신적이고 초월적인 가치관을 중시하는데 비해 이들은 자연주의적 가치관에 무게를 두는 것일 뿐이다. 다음 문단을 보자.


"그리스와 중세의 철학자들이 가치와 존재를 동일시하였으되 대체로 가치우위의 입장에서 존재를가치에 의하여 규정하려고 했다면, 근세의 소위 자연주의적 가치론자들은 가치와 존재를 동일시하면서도 오히려 가치를 존재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으로 본다. 자연주의적 윤리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홉스는 생명의 자기보존이라는 원리에 입각하여 인간의 욕구의 대상이 되는 것이 선이요,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악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주의적 전통은 그대로 벤덤이나 밀의 공리주의와 스펜서의 진화론적 윤리설에 계승되었다."


자연주의적 가치론의 핵심원칙은 욕구의 대상이 되는 것이 선good이라는 것이다. Good이란 단어에는 '좋음'이란 뜻도 있고 '선함'이란 뜻도 있다. 이것이 모이면 재화goods가 된다. 즉 좋은게 선한 것이다. 이것이 자연주의적 가치론의 핵심이다. 이로부터 파생되어 나오는 것이 공리주의다. 공리주의는 "사람들이 욕구desire하는 것이 가치있는desirable 것'이라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면 사회적인 선함을 어떻게 아나?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을 얼마나 원하는지, 몇 명이나 원하는지 조사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공리주의의 출발점이다.


현대사회에서 자연주의적 가치론의 특징이라면 그것이 가치라고 생각할 수 없을만큼 본능에 가깝게 흡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주의적 가치론이 먼 옛날부터 있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자연주의적 가치론의 토대를 이루는 욕망은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근대 이후에 힘을 얻게 된다. 홉스의 자연주의적 가치론은 정말로 굉장히 근대적인 관념이다. 그러니 자연주의적 가치가 서양에 있어서 고대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 조선시대에는 자연주의적 가치론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다. 그것과 정반대되는 유학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그것을 사회체제로 완벽하게 구현해 놓았다. 여기에 가치론의 논의가 중요한 이유가 있다. 한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간주하는 가치가 그 사회의 사회질서로써 객관화된다. 자연주의적 가치론에 기반해 있는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우리들은 부를 추구하는 것이 나쁘다는 생각을 갖기 힘들다. 그러나 만약에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죄수들의 수갑을 황금으로 만들어 버린다면 가치의 위계가 정반대가 되는 것이다. 한 사회 구성원의 가치관이 어떠한가에 따라 그것을 뒷받침하는 객관적 제도 자체가 큰 영향을 받는다. 자연주의적 가치론은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적 정황이다. 그것에 적응해서 살 것인지 아니면 초월해서 살 것인지는 개인의 결단의 문제로 넘어가겠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치와 존재에서 가치 우위에 있는 입장인 반면에 홉스, 밀, 벤담은 존재 우위에 있다. 무엇이 우위에 있다고 말하든 간에 이들은 가치와 존재가 서로 관계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점은 같다. 이제 가치와 존재가 분리되는 것을 알아보자. 가치는 가치고 존재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는 근대에 나타난 중요한 현상이다. 즉 Fact와 value의 분리인데, 이것은 흔히 자연과학에서 주장하곤 하는 것이다.


"가치와 존재와의 분리를 주장하는 견해는 자연의 가치적 서열을 분석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한 근세의 자연과학적 사상에서 그 맹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갈릴레오나 뉴우튼의 자연과학은 자연으로부터 가치를 분리하고 몰가치적인 입장을 확립하는 데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가치와 존재와의 일치를 주장하는 근세의 자연주의적 경향에 대항해서 처음으로 양자를 엄밀하게 구별한 것은 휴움과 칸트라고 할 수 있다. 휴움은 도덕철학에 있어서의 사실과 당위와의 혼동을 지적 경계했으며, 칸트는 권리문제와 사실문제를 구별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덕법칙과 자연법칙을 구별했던 것이다."


가치와 존재를 엄격하게 분리한 철학자는 칸트이다. 칸트철학에서 존재의 영역으로부터 가치를 이끌어내선 안 된다. 칸트 인식론에서 우리가 무엇을 안다는 것은 fact에 대해 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실천이성비판>>에서 주장하듯이 그것은 안다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결단하여 요청해야 하는 것이다. 가치를 fact로부터 이끌어 낼 수 없는 것이다. Lotze라는 사람이 있다. 칸트는 권리문제와 사실문제를 구별하고 도덕법칙과 자연법칙을 구별하는데, Lotze는 당위sollen와 존재sein으로 구분한다. 이것이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의 분리로 이어진다. 내 지도교수는 나와 맞담배를 피우신다. 보통사람들은 이게 싸가지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내 지도교수는 그것이 싸가지와 무관한 문제라고 생각하신다. 여기서 싸가지는 도덕판단의 영역이다. 일종의 위계인 것이다. 이런 것이 좁으면 좁을수록 그 사람은 쿨하고 리버럴한 사람이다. 이로부터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자유주의가 나온다. 볼테르가 말하는 것처럼 "나는 당신의 말을 전혀 찬성하지 않지만, 만약 당신이 당신의 발언으로 인해 권력으로부터 억압받는다면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울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리버럴이다. 한국에서 리버럴을 외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리버럴하지 않는지는 겪어보면 안다.


"고대 그리스에 있어서 소피스트들은 퓌시스에 대하여 노모스를 대립시키고 도덕. 종교.법률.제도.관습 등을 노모스에 정위시킴으로써 가치 상대주의의 입장에 섰다. 이에 대해서 소크라테스, 플라톤의 노력이 절대적 가치를 확립하려는 데에 있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특히 이데아설에 의하면, 이데아는 곧 가치요, 이 가치는 인간의 요구와는 관계없이 존재하는 무시간적 절대적 실재라고 한다. 또 그리스 말기의 회의론자들의 가치 회의주의에 대해서는 스토아 학파의 자연법이론이 가치 절대주의로서 대립한다. 참된 법은 자연과 조화되는 보편적 항구불변적 이법이라고 하는 자연법의 개념 가운데에는 가치 상대주의의 입장이 명확하게 표명되어 있거니와, 이러한 자연법 사상은 로마와 중세를 거쳐 근세에까지 계승되어 온 것이다."


"가치는 언제나 객관과 그에 대한 주관의 의지적 감정적 요구와의 상관관계에 있어서 성립하는 것이므로, 가치판단을 내림에 있어서 우리는 반드시 객관의 실재적 요인과 주관의 심리적 요인을 다같이 고려해야 할 것이다. 만일 가치판단의 객관적 타당성을 강조한 나머지 주관적 요인을 전연 도외시한다면, 그러한 가치판단은 이미 가치판단이 아니라 사실판단이요, 과학적 판단이라 할 것이다. 원래 과학은 객관이 주관에 대해서 가지는 관계를 전연 도외시하고 단지 개개의 객관 사이의 상호관계를 구명하는 데에만 전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과학적 사유는 일체의 주관적 경험으로부터 객관적 세계를 유리시켜서, 그것을 어디까지나 주관과는 독립된 객관으로서 고찰할 수가 있게 된다. 그러나 과학적 사유가 그처럼 객관적 세계와 그것을 사유하고 평가하는 주관과의 필연적 관계를 사상할 때에, 가치판단은 성립할 여지가 없다. 과학의 세계는 가치도 위계도 없는 하나의 사실의 세계요, 따라서 베버의 말과 같이 과학은 몰가치적인 것이다."


위의 문단은 자연과학에 대해 다루고 있다. 자연과학은 베버의 말처럼 몰가치적이 것이다. 자연과학이 몰가치적이라는 말은 달리 말하면 자연과학은 가치중립적이라는 말이다. 즉 가치판단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자연과학자들은 자신이 가치와는 무관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연과학자들도 내심 가치판단을 하고 있고 그들이 행위 자체가 이미 사회 속에 들어와 있다. 오늘날은 파브르의 시대처럼 독자적으로 실험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황우석 사태에서부터 이미 이런 사고의 문제점이 드러난다. 과학은 윤리적인 것과 무관하며 그저 발전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황우석 사태에서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홍성욱 교수의 <<과학은 얼마나>>(서울대출판부)을 한 번 읽어보라. 과학은 얼마나 사회적인가, 과학은 얼마나 가치중립적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과학사회학을 공부하기 이전에 이 책을 읽어보면 과학이 사회적인 토대 위에 서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치 그 자체가 절대적으로 존립하는 객관적.실질적인 것이건 또는 평가작용 등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비로소 성립하는 주관적. 상대적인 것이건 가치의 문제는 그 실현과 뗄 수 없는 관계에서 문제되는 것이요, 이점에서 그것은 단순히 있는 사실 그대로의 존재를 다루는 존재문제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할 것이다. '사실'은 벌써 단순한 '있음'을 넘어서 '있어야 할' 것인바 목적을 전제하며, 따라서 '있어야 할 것'의 탐구인 '당위의 학'이' 있는 것'의 탐구인 '존재의 학' 과 구별되어 성립된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우리 행위의 규범 내지 인생의 궁극목적에 관한 '당위의 학'인 윤리학이 하나의 '학'으로 성립된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실현함이 마땅한 최고의 목적, 또는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별한 기준이 될 도덕법칙이 무엇이냐는 데 대하여는 고래로 윤리학자들간에 하나도 일치된 견해가 없을 정도로 각양각색이었으나 무어는 그런 목적이나 법칙의 발견에 관한 방법론을 기준으로 종래의 윤리설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누었다. 즉, 형이상학적 윤리설, 자연주의적 윤리설, 직각론적 윤리설이 그것이다. 형이상학적 윤리설이란 형이상학을 바탕으로 하여 전개된 이설로, 내용에 있어서는 학자마다 여러가지 견해 차이를 드러내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공통된 입장을 취하는 윤리설이다: 1) 윤리학의 기본원리를 이끌어 내는 바탕으로서 형이상학적 원리를 사용한다. 2) 형이상학적 진리로부터 윤리학적 진리가 논리적으로 추리된다. 3) 최고선을 형이상학적 언어로 기술한다. 형이상학적 윤리설에는 예컨대, 이데아만이 영원한 실재라는 형이상학설을 토대로 하여, 인간적인 선은 되도록 이데아에 접근함 또는 이데아를 모방함이라고 단정한 플라톤; 질료와 형상, 가능태와 현실태라는 두 쌍의 원리로 설명되는 목적론적 세계관을 기초로, 인간의 최고선은 이성의 기능을 완전하게 발휘하는 것이라고 결론한 아리스토텔레스; '신 즉 자연'으로서의 우주는 필연의 세계라는 형이상학설로부터 인간의 고요한 행복은 만상을 '영원의 상하에서' 직관하여 모든 정념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되는 데 있으며, 이는 곧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낸 스피노자 등의 윤리설이 있다."


플라톤은 이데아만을 영원한 실재로 상정한 뒤 자신의 형이상학적 윤리설을 전개한다. 이데아에는 최고선의 이데아가 있다. 그렇다면 플라톤은 이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이는 증명된 것이 아니라 플라톤이 가정한 일종의 제1전제이다. 플라톤의 이데아설은 어떻게 이데아론을 내놓게 되었을까라고 논의하는 것은 철학자가 하는 일이 아니다. 벌린 같은 사상사가들이 하는 일이다. 철학하는 사람들은 이데아가 어떠한 논리에서 출발하였는가 밝히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이데아는 최고로 선한 것이며 인간이 모방해야 마땅한 것인데 인간은 이데아가 될 수 없으므로 먼저 이데아가 무엇인지 알아야 된다. 그러므로 이데아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 플라톤의 인식론이 되겠다. 플라톤의 경우는 이데아에 대한 인식론이 바로 윤리설이 되는 것이다. 서양철학은 아는 것이 먼저다. 알면 끝나는 경우가 많다. 이데아를 알았으니 당연히 실천할 것이라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지행합일이다. 이는 왕양명의 지행합일과는 다른 개념이다.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의 기능을 완전하게 발휘하는 것이 최고선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이 가진 이성의 기능을 불완전하게 발휘하는 것은 최고선이 아니다. 그러니 선한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최대한 최고선에 가깝게 가야 한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나오는 것이다. 반복하고 반복하면 습관이 된다. 여기서 어떤 것이 선한 것인지를 알아내는 기준이 있을 것이다. 그걸 알아내는 것이 phronesis(숙고)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아무리 개인이 열심히 숙고한다 해도 그가 선한 목적을 가진 공동체에서 살지 않으면 선할 수 없다. 그래서 선한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정치학과 인간이 선해지기 위한 윤리학이 연결된다. 이렇게 보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목적론적인 윤리설을 주장하는 셈이다. 이것이 형이상학적 윤리설이다.


This confront us with the question: How can ideas conceived for coping with the problems of one time remain meaningful at a later epoch?

이로 인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마주하게 된다: 어떤 시대의 문제에 대결하기 위해 구상된 이념이 어떻게 해서 다음 시대까지 의미있는 것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가?


이전의 내용은 대강 이렇다. 이념은 그것의 토대를 사회적 컨텍스트에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일단 이념이 성립되고 나면 사회적 컨텍스트와는 무관한 속성을 가진다. 그 시대가 지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다. 제사를 지내는 이유가 뭘까? 우리가 자연주의적 가치론에 입각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니다. 무엇인지 뚜렷하지는 않지만, 제사라고 하는 행위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이념을 만들어낸 컨텍스트가 소멸했어도 이념은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정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겨났던 이념이 나중 시대까지 남아있는 것이 바로 문화이다. 전라도 음식을 삭힘과 절임의 미학이라고 하는데 그게 옛날에는 습하고 더운 기후에 적응하여 음식을 보존하기 위한 방편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게 오늘날까지 남아서 문화가 된 것이다.


If indeed a rigid line divides the necessary and eternal from the historically contingent, ⋯ the particular events, achievements and ideas of an earlier generation hold little meaning for a latter one

만약 필연적이고 영원한 것과 역사적으로 우연한 것 사이를 나눠주는 견고한 선이 있다면, ⋯ 특정한 사건, 성취, 그리고 이전 세대의 이념들은 나중 세대에게는 거의 의미가 없을 것이다.


필연적이고 영원한 것과 역사적으로 우연한 것 사이를 나눠버리면 이전 세대에서 만들어진 이념들은 그 시대에 완전히 해소되어 버릴 것이다. 그런데 이것들이 여전히 남아서 우리에게 어떤 작용을 한다. 뒤프레는 여기에서 세대에서 세대로 지속되고 있는 것이 문화라고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즉 문화라는 것의 핵심은 세대에서 세대로 전수되는 지속적인 무엇이다. 그러면 '10대 청소년 문화'를 과연 문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문화는 세대에서 세대로 전수되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10대 청소년 문화'라는 술어가 담고 있는 것은 '10대 청소년들의 액션일반'에 지나지 않는다. 문화라는 말을 함부로 쓸 것이 아니다.


Each culture possesses an ideal identity within which these ideas have their place and, as Ernst Cassirer pointed out, the task of the philosophy of culture consists in seeking to understand how the elements that compose it form a system, organic whole.

각각의 문화는 이 이념들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는 이상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카시러가 지적했듯이, 문화철학의 과제는 문화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어떻게 해서 체계 혹은 유기적 전체를 이루고 있는지를 이해하려는 탐구에서 성립한다.


문화는 세대에서 세대로 전수되는 이상적 정체성이다. 그러므로 문화를 구성하는 핵심은 이상적 정체성이다. 자본주의 시대에는 문화가 없다. 단지 상품일 뿐이다. 상품에는 이상적 정체성이 없기 때문이다.


Cultures, like living beings, possess a unity of their own. This unity enables successive generations to build up a collective identity.

문화는, 살아있는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그 자체의 통일성을 유지한다. 이러한 통일로 인해 계속되는 세대들이 집단적 정체성을 구축할 수 있게 해준다.


세대에서 세대로 건너가는 집단적 정체성이 문화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문화에는 가치판단이 공유되어야 한다. 그러니 문화가 문화철학으로 넘어가면 논의의 폭이 넓어질 것이다. 세대와 세대 사이에 공유되는 집단적 정체성도 살펴야 하고, 필연적이고 영원한 것과 역사적으로 우연한 것 등 따져봐야 할 것이 많다. 문화라는 술어가 쉽게 쓰일 수 있는 단어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Premodern metaphysics had neither a need nor a place for a philosophy of culture. ⋯ In modern philosophy, however, the human subject plays a central part in the constitution of meaning. The fact that this subject exits and thinks in time thereby assumes a philosophical significance.

전근대적 형이상학은 문화철학에 대한 요구도 여지도 갖고 있지 않았다. ⋯ 그렇지만 근대철학에 있어서 인간주체는 의미를 구축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주체가 시간 안에 존재하고 사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철학적인 의의가 있다.


왜 근대 이전 형이상학에서 문화철학을 다루지 않았는가? 문화는 앞서 정의했듯이 가치를 산출하는 행위와 그 산물이다. 근대 이전에는 가치를 산출하는 인간행위가 없었다. 모두 신이 만들어 놓았다. 인간은 그것을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근대에는 모든 가치가 상대화된다. 그러니 문화철학이란 개념이 근대 이후의 형이상학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 문화라는 것은 어떤 기능을 하는가?


The primary function of culture is to provide a society with the norms, values, and means needed for coping with the conditions of its existence. Through their various engagements with nature, humans subdue nature's otherness. The domestication of nature begins when humans start naming things.

문화의 첫번째 기능은 사회에게 그 사회의 존립조건을 대처하기 위한 규범, 가치, 그리고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다. 자연과의 다양한 결합을 통하여, 인간은 자연의 타자성을 굴복시킨다. 자연을 길들이는 것은 사람이 사물에 이름을 붙일 때 시작된다.


조지프 페인터라는 사람이 쓴 <<문명의 붕괴>>(대원사)를 보면 멸망하는 문명에서는 지도계층들의 도덕성이 굉장히 빠르게 타락한다. 그것이 사회가 붕괴하는 토대가 된다. 단순히 경제적 요소만으로 문명이 붕괴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본다면 북한사회는 진작에 무너져야 마땅하다. 북한이 무너지지 않은 이유는 주체사상이라는 일종의 강력한 뽕에 모두가 취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뽕이 그 사회의 존립조건을 대처할 수 있게 해주는 규범, 가치, 수단이다. 마지막의 멋드러진 구절, "자연을 길들이는 것은 사람이 사물에 이름을 붙일 때 시작된다"은 대개 김춘수 시인의 시를 떠올릴 텐데, 이것은 사실 성서에 나오는 구절이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이 아담에게 사물에 이름을 붙일 권리를 준다. 자연을 길들이는 것이 아담에서 시작한 것이다. 이로부터 유추해 볼 때 서구적 사유의 기본은 자연을 대상화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는 동아시아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서구만의 독특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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