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파농: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 10점
프란츠 파농 지음, 남경태 옮김/그린비


2002년판 서문-알리스 셰르키 

1961년판 서문-장 폴 사르트르 


1.폭력에 관하여 

2.자발성의 강점과 약점 

3.민족의식의 함정 

4.민족문화에 관하여 

5.신민지 전쟁과 정신질환 

6.결론 


2002년판 후기-모하메드 아르비






49 민족해방, 민족 부흥, 인민에의 국가 반환, 연방 등등 어떤 이름을 갖다 붙이든, 아니면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 붙이든, 탈식민지화는 언제나 폭력적인 현상일 수밖에 없다. 어떤 수준에서 검토하든 - 예컨대 개인들의 관계에서건, 스포츠클럽의 새 이름에서건, 혹은 칵테일파티나 경찰이나 국립은행 또는 민영은행의 이사회 같은 곳에 있는 인간 군상에서건 간에 - 탈식민지화란 쉽게 말해서 어떤 '종'(種)의 인간을 다른 '종'의 인간으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과도기 같은 것은 전혀 없고 오로지 전면적이고 완전하고 절대적인 대체만 가능하다. 물론 새 민족의 부활과 새 국가의 수립에 관해서 그리고 그 외교관계와 경제적∙정치적 성향에 관해서 상세히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모든 탈식민지화의 초기적 특성인 일종의 백지상태에 관해서 이야기하기로 엄밀하게 규정했다. 그것이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해방된 그날부터 식민지 민중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것이 바로 이러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 성공의 여부는 사회구조 전체가 뿌리에서부터 변화되느냐에 달려 있다. 이런 변화의 중요성은 그것이 의도되고 요구되고 요청된다는 데 있다. 즉 그 변화의 필요성은 격렬하고 강렬한 원초적 상태로 식민화된 사람들의 의식과 삶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또한 그 변화의 가능성은 다른 '종', 식민지 모국인들의 의식 속에서는 두려운 미래라는 형태로 경험된다. 

세계 질서를 변화시키는 탈식민지화는 분명히 완전한 무질서의 상태이다. 그러나 그것은 주술이나 자연 현상의 산물도 아니고, 우호적인 협정의 산물도 아니다. 알다시피 탈식민지화는 역사적 과정이다. 그러므로 탈식민지화에 역사적 형태와 내용을 부여하는 운동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탈식민지화를 이해할 수도 없고 식별할 수도 없다. 탈식민지화는, 식민지 상황에서 배태되고 배양되었기 때문에 그 본성상 서로 대립적일 수밖에 없는 두 세력의 만남이다. 두 세력의 첫 만남은 폭력적이었다. 그리고 양자의 병존 - 즉 이주민에 의한 원주민의 착취 - 은 총검과 대포의 힘을 바탕으로 가능했다. 이주민과 원주민은 서로를 잘 알았다. 사실 이주민이 '그들'을 잘 안다고 말하는 것은 옳다. 원주민을 만들어 낸 것도 계속 만들어 내고 있는 것도 이주민이기 때문이다. 이주민이 살 수 있고 재산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식민지 체제 덕분이다.

탈식민지화는 결코 은근슬쩍 전개되지 않는다. 개개인에게 큰 영향을 주고 그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탈식민지화는 초라하고 보잘것없던 방관자들을 특별한 배우로 변화시키고, 그들에게 역사의 밝은 조명을 비춘다. 또한 탈식민지화는 그들의 존재에 새로운 인간이 가져온 자연스러운 리듬을 부여하며, 그와 더불어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인간성을 부여한다. 즉 탈식민지화는 새로운 인간의 창조인 셈이다. 그러나 이 창조는 어떤 자연적 힘의 소산이 아니다. 그동안 식민지화되었던 '사물'이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과정을 통해 인간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탈식민지화에서는 식민지적 상황을 철저히 의문시 할 것이 요구된다. 정학하게 말한다면, "꼴찌가 첫째가 되고"라는 유명한 문구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탈식민지화란 바로 그 문장을 현실로 옮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말한다면 모든 탈식민지화는 성공할 수밖에 없다.


113 유럽은 말 그대로 제3세계의 창조물이다. 유럽에 가득 쌓인 부는 저개발 민족들에게서 강탈한 재산이다. 네덜란드의 항구들, 보르도와 리버풀의 선창은 흑인 노예무역을 전문으로 한 덕분에 유명해졌다. 그러므로 어느 유럽 국가의 수반이 손을 가슴에 얹고 저개발국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겠다고 엄숙히 선언할 때 우리는 감사의 눈물을 흘려서는 안된다. 어히려 정반대로 우리는 "그건 단지 우리에게 지불해야 할 배상금일 뿐이야"라고 말해야 한다. 또한 저개발국에 대한 지원을 '박애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이 지원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즉 식민지 민족의 입장에서는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이며, 자본주의 열강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지불해야 할 대가라는 점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지성이 부재한 탓에 자본주의 나라들이 대가를 지불하기를 거부한다면, 그들은 자신들 체제 내의 가차없는 논리로 인해 곤경에 처할 것이다. 신생국이 사적 자본을 많이 끌어들이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현상을 독점의 입장에서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이유는 많다. 자본가들은 자국 정부가 식민지를 해방시키려 한다는 것을 알자마자 - 물론 그들이 가장 먼저 안다 - 그 식민지에서 황급히 자기 자본을 회수한다. 이 초특급 자본 도피는 탈식민지화에서 언제나 일어나는 현상이다.


153 투쟁이란 바로, 식민지 시대의 낡은 진리를 타파하고, 알지 못했던 측면을 드러내고, 새로운 의미를 끄집어 내고, 이러한 현실들에 의해 은폐된 모순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이다. 투쟁에 참여하고 투쟁 덕분에 그 사실들을 알게 된 민중은 식민주의로부터 벗어나 앞으로 전진하며, 신비화의 모든 책동을 경고하고, 맹목적 애국심에 대해 반대한다. 오직 폭력만이, 민중이 행사하는 폭력만이, 민중 지도부가 조직하고 교육하는 폭력만이 대중에게 사회적 진실을 이해하도록 할 수 있다. 그 투쟁이 없으면, 행동의 실천에 관한 앎이 없으면, 나팔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겉만 번드르한 행진을 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최소한의 재적응, 위로부터의 약간의 개혁, 휘날리는 깃발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 밑에서는 분화되지 않은 대중이 여전히 중세의 삶을 살면서 내내 제자리걸음만 할 뿐이다.


157 민족의식은 모든 사람의 내적인 희망을 아우르는 결정체가 아니며, 대중 동원의 즉각적이고 명백한 결과도 아니다. 그것은 속이 빈 껍데기 일뿐이고 원작의 치졸한 모작에 불과하다. 여기서 우리가 흔히 발견하는 문제점은 신생 독립국을 말할 때 흔히 국민을 종족으로, 국가를 부족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는 건물의 갈라진 틈과 같이 퇴행적인 과정을 보여주는, 민족적 노력과 민족 통합을 해치는 편견에 가득 찬 생각이다. 그러나 퇴행적 단계에 내포된 취약함과 위험성은 심각한 역사적 결과를 빚는다. 그 때문에 민족 부르주아지는 대중 행동을 합리화하지 못하고 대중 행동의 근거를 발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저개발국의 민족의식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그 전통적인 약점은 단지 식민지 체제가 식민지 민중을 억압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민족 부르주아지의 지적인 나태함, 정신적 빈곤, 뿌리깊은 세계주의적 사고방식의 소산이기도 하다.


206 저개발국의 부르주아 지도부는 민족의식을 황폐한 형식주의 속에 가둬버린다. 사람들이 계몽적이고 결실 있는 작업에 대규모로 투입될 때에만 그 의식은 구체적인 형체를 얻는다. 그런 다음에는 국가와, 정부가 들어선 궁전은 더 이상 민족의 상징이 아니다. 민족은 이 밝은 불이 켜진 빈 껍데기를 버리고, 들판에서 피난처를 찾아 새 삶과 힘을 얻는다. 민족의 살아 있는 표현은 민중 전체의 움직이는 의식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일관적이고 계몽된 행동이다. 집단적 운명의 구축은 역사적 차원에서의 책임을 맡는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정부 상태, 억압, 부족들 간의 반목과 봉건제의 부활이 있을 뿐이다. 민족정부가 진정 민족적이 되려면 민중에 의해, 민중을 위해, 그리고 버려진 자들을 위해, 버려진 자들에 의해 통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아무리 뛰어난 지도자라 하더라도 자신을 민중의 의지보다 중시할 수는 없다. 민족 정부는 국제적 평판에 신경쓰기 이전에 먼저 자국의 모든 시민들에게 존엄성을 돌려주고, 그들의 마음을 사고, 그들을 참된 인간으로 만들고, 의식과 주권이 공존하는 인간적인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


250 자아의 의식은 의사소통의 문을 닫는 게 아니다. 철학적 사상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에 따르면 오히려 자아의 의식은 의사소통을 확실히 보장한다. 민족의식 - 민족주의와는 다르다 - 은 우리에게 국제적 차원을 보여주는 유일한 통로다. 민족의식과 민족문화의 문제는 아프리카의 경우에 특별히 중요하다. 아프리카에서 민족의식의 탄생은 아프리카 의식과 정확히 동시대적으로 연결된다. 민족문화에 관한 아프리카의 책임 역시 아프리카 흑인 문화에 관련된 책임이다. 이러한 공동 책임은 형이상학적 원칙이 아니라, 식민주의의 침탈을 당하고 있는 아프리카의 모든 독립국은 포위된 국가, 즉 지속적인 위험에 시달리고 있는 약소국이라는 간단한 법칙을 자각하는 데서 비롯된다.

인간이 자신의 행위를 통해 알려진다면, 오늘날 지식인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자신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 수립이 올바르다면, 다시말해 민중의 의지를 담아내고 아프리카 민족들의 열의를 반영한 것이라면, 국가를 수립한 뒤에는 필연적으로 보편적 가치를 발견하고 장려하는 일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민족해방은 다른 나라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이 역사의 무대에서 제 역할을 하도록 이끈다. 국제적 의식이 살아나고 자라나는 곳도 바로 이 민족의식의 한복판에서다. 이 이중의 생성은 궁극적으로 모든 무화의 유일한 원천이다.


320 제3세계가 할 일은 인간의 새 역사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 역사는 유럽이 제기한 중대한 주제들과도 관련되겠지만, 유럽이 저지른 범죄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마음에 가장 끔찍한 범죄, 인간의 기능을 훼손하고 통일성을 파괴한 병리학적 범죄를 저질렀다. 그들은 또한 차별, 계층화, 계급에 의해 촉발되는 유혈의 긴장이라는 범죄를 공동체의 차원에서 저질렀으며, 마지막으로, 인류의 거대한 범위에서는 인종적 증오, 노예제, 착취, 무엇보다도 150억의 인명을 살상한 잔인한 대학살을 저질렀다.

그러므로 동지들이여, 유럽에 경의를 표하지 말자. 유럽에서 영향을 받은 국가, 제도, 사회는 창설하지 말자.

인류는 우리에게서 그와 같은 추잡하고 역겨운 모방 이외의 다른 것을 기대하고 있다.

아프리카를 또 다른 유럽으로 만들고 싶다면, 아메리카를 또 다른 유럽으로 만들고 싶다면, 우리의 운명을 유럽인들에게 맡겨도 좋다. 그들은 우리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들보다도 그 일에 관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인류를 한 걸음 전진하게 하고 싶다면, 인류를 유럽이 보여준 것과는 다른 차원으로 이끌고 싶다면, 우리는 새로운 발명과 발견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 민중의 기대에 맞추고 싶다면, 우리는 유럽 이외의 다른 곳에서 대답을 찾아야 한다.

나아가 유럽 민중의 기대에도 부응하고 싶다면, 그들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와 사상에 대해 때로 엄청난 혐오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동지들이여, 유럽을 위해, 우리 자신을 위해, 인류를 위해 우리는 새로운 각오를 다지고, 새로운 발상을 만들고, 새로운 인간을 정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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