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사 | 34 Descartes의 방법론적 혁신과 주관성의 철학, Locke의 경험적 대상인식론


세상의 모든 철학 - 10점
로버트 솔로몬 외 지음, 박창호 옮김/이론과실천



2012.10 강의
33강: 근대철학 개관: Descartes, Locke, Spinoza, Newton / Hume, Rousseau / Kant / Fichte, Schelling, Hegel / Marx / Nietzsche / 자연과 자유, 유한자와 무한자
34강: Descartes의 방법론적 혁신과 주관성(cogito ergo sum)의 철학, Locke의 경험적 대상인식론, 인간의 뇌와 정신의 형성
35강: Spinoza의 방법론-형이상학-윤리학, Newton의 수학적 원리에 따른 자연철학
36강: Hume: 인과율 분석의 의의, Rousseau: ‘소유권 기반 사회’에서 ‘일반의지 기반 사회’로의 전환




20121012 34강: Descartes의 방법론적 혁신과 주관성(cogito ergo sum)의 철학, Locke의 경험적 대상인식론, 인간의 뇌와 정신의 형성


* 토마스 홉스 보충 설명
토마스 홉스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혼란한 자연상태(17세기 일반위기 상황)에서 유물론 체계를 정립하였고, 당시 시대는 왕과 귀족 그리고 신흥부르주아라는 집단간의 대립이 폭력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집단간의 대립이라고 하는 것은 개개인간의 대립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정치적 사회 속에 살아가는 인간들에게는 집단적으로 일어난다. 집단 간의 대립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것을 홉스는 집단 간의 대립으로 보지 않고 개인대 개인의 대립으로 보았다. 홉스의 위대한 점이 부식되는 지점인데 아직 사회과학이 없던 시대이기 때문이다. 홉스에게는 집단과 집단의 대립을 분석할 수 있는 툴이 없었다. 
집단 간의 대립을 개인대 개인의 대립으로 환원시키고 개인이 가지고 있는 conatus를 발견한다. conatus부터 civil society, 즉 state까지 나아간다. 

어떤 지점에서 홉스의 사상을 자유주의라고 말하는가
1. 집단 간의 대립을 개인대 개인의 대립으로 봤다는 점이 개인주의. 어떤 사태를 각각의 개인의 책임으로 환원시켜서 설명하려는것, 이것이 자유주의의 기본적인 태도. 
2. conatus에서 폭력이 벌어지는데 폭력상황에서 국가로 넘어가는 이 과정에 각각의 생명의 보존이라는 이익이 개입되어 있다. 개인의 이익을 보장해준다는 점에서 자유주의. 

홉스에서는 class cohesion(계급결집)을 보지 못했다. 홉스의 한계. 홉스 이후로 사회과학에서 기본적으로 사태를 바라볼 때는 계급결집을 가지고 본다. 계급결집의 외적인 유의미한 표상태가 파르타이(partei), 당(黨). 우리가 당파성, 당이라고 말할 때 뜻은 말그대로 집단.
자본주의 사회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 한해서 partei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의 구조적 위치로 나눈다. 생산관계에서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당을 나눌 수 있다는 뜻. 홉스가 말한 개인대 개인의 투쟁이 아닌 당대 당의 싸움이 벌어진다. 이것이 근대국가.

개인대 개인이든 당대 당이든 싸움이 벌어지는 것은 모두 폭력. 직접적인 물리적인 폭력의 의미에서 gewalt고, 계약을 맺어서 국가에다 자신의 자연권 natural right 를 위임했다는 위력으로서의 macht가 있다. 그러니까 gewalt와 macht를 총괄해서 가지고 있는 것, 이것을 권력, 권위라고 번역할 수 있다. 홉스가 권위까지도 통합해서 말했던 이유는 시대의 맥락을 봐야 하는데, 홉스의 시대는 교회의 권위가 있던 시대, 즉 교회의 돈을 털어내기 위해서 국가에게 권위까지 주는것.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교회의 권위가 없고, 국가가 가지고 있는 신화적 권위는 이미 털려나갔다. 그렇기에 간단하게 말할수있다. gewalt 폭력의 독점체. 그래서 막스 베버는 '국가는 폭력을 오로지 하는 덩어리다'라고 한 것. 홉스 시대에서 베버 시대로 오면 더 이상 그런 외부의 신화적 기원을 가진 권위는 없다. macht는 절차적 정당성으로 확보하면 되는 것.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국가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해주는 장치. 민주화는 끝났다는 말은 절차착 정당성은 확보되어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권위는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했다.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서 권력을 확보한 것. 그리고 당이라고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당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고, 그 당이 어떤 계급이 결집되서 이루어졌는가를 뚜렷히 드러내는 것이 근대국가가 할일이다. 국민 대통합은 기만. 당의 이름에다가 계급적인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 막스베버의 수준. 무소속 대통령이다라고 말하면 나는 국민 개개인 각각과 소통한다는 말인데 살아가기는 국민 개개인이지만 정치적 의미로는 국민 개개인은 없다. 

홉스가 가지고 있는 핵심적인 맹점은 conatus가 사실상 기초 원자단위라는 것.
홉스가 말하는 이 개인은 (데카르트, 로크, 이들 17세기 사상가들은 모두 개인주의 사상가들인데) 말 그대로 원자적 단위. 개인과 개인 사이의 다툼이라고 하는 것이 그대로 증폭되면, total sum 을 하면 사회의 다툼과 양이 같아질거다라는 것이 홉스의 착각. class cohesion이 일어나게되면 partei와 partei의 대립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과 개인간의 대립과는 다른 매커니즘으로 굴러가기 때문. 구조가 달라지면 phase shift(위상전환)가 일어난다. 
라인홀드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를 볼 것.

구조와 개별 행위자의 문제를 이번달에 집중적으로 다룬다.
데카르트, 로크도 개인의 문제를 얘기했고, 이 문제가 루소를 거쳐서 칸트로 가면 도덕적 책임과 세계 시민의 차원으로 번져간다. 본격적 의미에서 국가론으로 전개되는 것.
근대사회가 가지고 있는 핵심적인 특징은 출발점을 개인으로 삼는다는 점. 코나투스까지 분석한 그것을 홉스가 뚜렷하게 보여준다. 
홉스가 살던 시대는 지리상의 발견이 벌어지고, 약소국과 강대국, 제국주의 시대로 들어가는 시대인데 집단간의 대립, 구조와 행위자의 문제, 국가대 국가의 문제를 보지 못했다.
초국가주의의 논리에 관하여는 마라야마 마사오의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홉스는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영어판으로 옮긴 사람. 홉스는 여기서 사람사이의 쟁투만 보았다.  사실상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펼쳐보인것은 폴리스가 오늘날과 같은 국가는 아니어도 어쨌든 하나의 국가인데 폴리스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성향과는 무관하게 폴리스라고 하는 체제와 폴리스들 간에 분쟁이 발생했을때 어떻게 되는가 아테나이 슈마키아와 스파르타 슈마키아, 즉 동맹 단위에 붙었을때 어떠했는가에 대해 통찰할 수 있는 요소들이 많이 담겨있었으나 홉스는 그 지점까지는 읽지 못했다.


- 구조 속의 개별 행위자 
데카르트적인 개인, 로크적인 개인, 흄이 말하는 칸트가 말하는 개인, 이 개인들은 항상 구조 속에 살아가고 있는 개인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이들이 구조 속의 개별 행위자라는 것을알고 있는데 데카르트나 로크나 칸트나 이들은 모두 다 구조속의 개별 행위자라는 것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구조속의 개별 행위자를 가장 명료하게 드러낸 사람은 마르크스. 프랑스 혁명 3부작(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프랑스 내전)에서 명쾌하게 드러내 보였다. 헤겔이야말로 정치단위에서 위상전환, 개인 차원의 위상전환을 뚜렷하게 알았으나 구체적인 현실분석에서 써보지 못했다.


* 데카르트
흔히 우리가 로크, 버클리, 흄을 영국 경험론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한 덩어리로 묶을 수 있지 않다. 감각 경험을 중요하게 여겼다라는 점에서 경험론자이지만 감각 경험을 중요하게 여긴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목적에 따라 분류하면 다르게 된다. 마찬가지로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를 합리론 이렇게 말하는데 머릿속에서 구도를 지워고 버려야 한다.

<교재> 321 첫번째 문단, 근대 서양 철학의 아버지로 인전된 데카르트는 스콜라 철학적인 예수회 전통 속에서 성장한 훌륭한 과학자이자 수학자였다.
데카르트 철학의 기본 주제들은 철학의 많은 부분 혹은 대부분을 규정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수학과 기하학의 이용, 방법론의 가조, 철학과 과학의 연계, '상식'에 대한 의심, 지적겸손함('방법론적 회의')에 대한 주장, 확실성에 대한 탐구, 그리고 확실성은 수학과 기하학의 증명 어디서든지 발견될 수 있다는 확신등이 포함되어 있다.
321 철학에서 수학을 이용하는 데 대한 그의 신념과, 그가 설정하여 뒤은 수세기에 걸쳐 이어져온 협소한 철학의 패러다임에 대해 우리는 적절히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엄밀한 학을 정초하기 위해서 방법론도 가장 엄밀한 수학을 가지고 했다. 수학과 기하학을 합해서 해석 기하학을 창시한 사람.
데카르트의 이런 방법론을 사회과학의 영역까지 펼쳐서 보이겠다고 한 사람이 프랑스 계몽주의, 콩도르세.
독일 계몽주의는 프랑스와는 다른 맥락이다. 칸트가 계몽철학의 완성자다라고 말할때는 독일 계몽주의 의 맥락에서 말하는 것.

- 데카르트의 지성사적 맥락 
당시 상황 위 3가지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1. 카톨릭 교회의 권위적인 특성이 여전했다. 
 2. 새로운 과학이 발흥하고 있었다.
 3. 17세기 일반위기의 대표적인 사건인 종교전쟁

322 데카르트가 처해있던 상황의 세번째 양상은 종종 무시되었다. 그의 저작들은 침학하고 방법론적이지만, 데카르트는 유럽에서 진행 중이던 종교전쟁에 격심한 혼란을 겪었다. 몽테뉴는 관용을 권하였고, 데카르트는 이성을 권하였다. 
322 지적 자율성, 즉 우리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였다.
322 데카르트의 철학은 우리 각자에게 우리가 믿는 것의 진실성을 우리 스스로 확립할 것을 요구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은 수학을 활용하여 확실히 진리를 세우라는 뜻이다.

324 이러한 기본적인 진리에 대한 데카르트의 증명은 수학적 방법을 사용한 것으로 시작된다. 
324 데카르트의 원대한 연역의 핵심은, 전제로 사용될 의심할 수 없는 공리일 것이다. 그 공리는 바로 그의 유명한 명제인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이다.

329 데카르트는 이 문제에 대하여, 한 개인은 정신과 육체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실체의 결합이라는 의문스러운 명제로써 답하였다.
330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은 수세기 동안의 지적 발전, 또 과학의 진보와 개인의 자율성에 대한 새로운 존중의 산물이었다. 정신과 육체의 구별은 물질 세계와 관련된 하나의 영역을 과학에 제공하였다.

- 학문 방법론을 새로 세웠다.
결정적인 중요점은 당대의 철학적 방법론으로 여겨져 있던 스콜라의 철학의 방법을 확실하게  폐기하고 수학이라고 하는 엄밀한 학의 방법론으로 삼겼다. 엄밀한 학으로서 철학이라고 하는 이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생리학과 천문학에서 확실한 certain 성취를 이룬 방법론을 가져왔고, 그런 것들은 case by case로 연구를 해야 하는 것으로 경험자료를 근거로 하여 확실하게 공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해석기하학까지 이런 세 가지 학문을 학문 방법론으로 삼게되었다.

- 주관성의 철학이 전개되었다.
방법론적 혁신에서 나온 것이 방법론적 회의, 확실성을 얻기 위해서는 의심을 해봐야 한다.
의심을 계속해나가다 보면 의심을 하고 있는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해서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고 이것이 주관성 철학이 전개되는 출발점.
이 의심을 하고 있는 존재가 누구인가, 나. 이게 바로 근대적 주관성. 주관성이라는 개념이 과거와는 다르게 정리되는 것. 세계 한가운데 내가 있다는 자각이 생겨났다. 홉스는 내가 나를 자각한다기보다는 개인을 분석해서 그 안의 충동을 찾아냈을 뿐 완전한 의미에서 주관성 철학이라고 말할 수 없고, 개체성(개별, 낱개)의 철학이라고 말한다.

내가 뭔가 대해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문득 이 생각을 하고 있는 '나 이외에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내가 생각할 수 있다.
대상의식에서 자기의식으로 전환. 즉 객관적 대상에 대한 사유를 자기에 대한 사유로 전환시키는 것.

- cogito ergo sum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라틴어는 주격이 동사변화 안에 포함되어있어서 나는 이란 마을 쓰지 않아도 된다)
내가 나에 대해서 생각을 하면 그때 나의 존재가 나에게 자각된다. 
나의 생각과 내 육체적인 존재는 물리적으로 구별되는데 일단 이 뭔가를 생각하는 사람이 나라는 것을 확보해야 한다. 내가 나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않으면, 즉 이것을 하고 있는 사람이 나라는 것 달리말해서 자기의식, 자기정체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그 어떤 사유도 의미있는 것이 될 수 없다는 것.

나라는 자각, 나라는 자기의식이 모든 의식과 행위의 출발점이다. 대상의식과 사회적의식 전에 자기 의식이 있어야 인간은 하나의 존재로서 사회 속에서 독립적 자율적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

인간의 정신세계라고 하는 것은 바깥에 있는 물질세계와 신이 우리에게 부여해준 능력과는 무관하게 인간에게 고유한 정신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정신세계에서 찾을 수있고, 그 인간의 정신세계가 있음으로해서 그 각각의 개인이 가지고 있는 정신세계를 승인함으로 해서 인간의 자유와 책임성 영역에 대한 것을 자각하는 바탕이 된다.

개인의 자율성, 자율성의 확보 근거로서의 cogito.
진리를 알게되는 인신론적인 출발점으로서 나의 사유, 실천 철학적인 책임성의 근거로서의 나의 정신
헤겔은 철학사 강의에서 '철학이 이성으로부터 자립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알고 있는, 또한 자기의식이 진리의 본질적 계기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자립적인 철학에 착수한 사람이 데카르트이다. 근대의 사상과 교양은 데카르트에서 시작되었다.' 라고 했다.

홉스의 경우, conatus는 불수의운동(不隨意運動). 우리 뜻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책임이 없는 것. 
정신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즉 cogito를 통해서 나의 정체성을 확보 한다는 의미에서 cogito ergo sum을 내놓은 것.
이렇게 해서 나의 사유와 존재가 확정되면 외부 사물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간다. 외부 자연의 확실성은 사실 확보 할 수 없다. 결국 보장체계로서의 신을 도입. 외부세계의 확실성은 신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 로크
우리 앎(知)의 원천으로서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바깥에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 같은 사람은 선천적인 이성이 있어서 합리론, 로크는 외부에서 들어온 경험들이 우리 인식을 만들어낸다 해서 경험론.
우리가 가진 선천적인 이성이나 경험 모두 기본적으로 인간의 힘으로 얻어낸 것들을 말하는 것이며, 합리론나 경험론이나 앎의 원천이 어디있느냐에 대한 차이만 있다. 
경험은 앎의 원천이다. 인간의 정신은 백지와 같아서(tabula rasa) 외부의 인상을 받아들여 그것들이 우리에게 들어오면 경험이 된다는 것이 로크의 경험론.
오늘날 이미 다 폐기되어 버린 논의다. 

- 버클리
존재는 지각된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지각된 것 뿐이다. 사물 그 자체는 아니다. 
(근데 왜 이것을 가지고 있지? 하나님이 주셨네...)
버클리 <새로운 시각 이론에 관한 시론> 철학사 적으로 관심있는 사람만 읽어 볼 것.(신 존재 증명에 관한한 이보다 더한 뻘짓이 없다...)

경험론을 계속 밀고나가면 회의주의에 빠져버린다. 어떤 수를 써도 사물 그 자체 내부로 파고들수가 없기 때문.
우리가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데이터는 사물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걸러진 것 뿐이니까 이것이 확실하다고 믿을 수없다. 결국 믿을 것이 없다는 것. 경험론이 회의주의, 정반대로 가버린다. 
결국에는 경험론이 버클리에게는 비물질주의로 빠져버려서 신을 옹호하게 되고, 또 비물질주의 즉 관념 밖에 없다, 회의주의로 빠고, 신까지 믿지 않으면 데이비드 흄처럼 무신론적 회의주의로 가버리는 것.
그렇다해도 로크는 앎의 원천인 경험을 얘기했고, 일정 정도는 베이컨의 전통을 계승했고 그렇기 때문에 개별 사회로부터 보편적인 원리를 끄집어 내는 방법을 세웠다. 이 방법이 볼테르에의해 수입되어서 프랑스 계몽철학에 영향을 미친다.

* 오늘날 인간의 인식능력에 대한 연구
데카르트, 로크를 통해서 오늘날의 우리가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인간이 무언가를 안다고 하는것 그리고 그 이전에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능력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 그리고 외부의 데이터가 우리에게 올때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대한 관심사가 생겨났다.
데카르트에게 제기된 문제 1) 자기의식이 없는 사람은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 2) 앎의 원천과 그 원천들로부터 들어온 데이터들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이것이 철학에서 문제가 되었다. 지금(현재)은 문제되지 않는다. 로크의 백지 이론은 틀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해서 아는가를 생각해 봐야한다.  

- 학습과 경험은 한계가 있다. 
경험에 의해서 학습을 할 수 있지만 인간의 학습능력은 신경, 즉 뉴런의 제약을 받는다. 다시말해서 우리 인간은 학습을 할 수는 있지만 학습을 하는데 필요한 선천적인 능력들은 일정한 정도로 제약이 있다. 동시에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적인 환경 속에서 살아오면서 외부자극이 인간의 신경의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다. 신경적 제약에서 학습을 한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신경적 제약이라는 것은 유전적 통제 아래 있다는 것. 
뇌가 학습을 하는데에는 유전적 통제 아래 진화하였고, 후생적인 요인과 행동에 바탕을 둔 학습을 통해서 이 뇌가 섬세하게 다듬어진다. 인간의 뇌는 체계적이면서 동시에 복잡하고 자동 처리되는 부분을 가지고 있다. 뇌는 체계적인 복잡성과 자동처리 능력을 가지고 있고 선천적인 제약조건도 가지고 있고 자연선택에 따라서 진화된 일반화된 능력도 있다. 다시 말해 존로크가 말했던 완전한 백지상태라는 것은 틀렸다. 이런 것들은 칸트 같은 사람들은 '이성의 선천적 형식'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의 정신이 있다고 하는 뇌는 물질적인 덩어리에 불과하다. 
여기서 문제가 생겨났다. 그렇다면 데카르트의 cogito는 어떻게 되나 물질적인 덩어리에 불과한 뇌가 자기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인가.
1) 물질이 생각을 하는가? 2) 그 생각은 한군데서 통제하는가 3) 생각하는 자신을 생각하는 힘은 어떻게 생기는가
이런 것을 해명하는 것이 데카르트, 로크, 칸트의 인식론을 대신하는 현대의 논의들. 
마이클 가자니가의 <뇌로부터의 자유>를 꼭 읽어야 한다.

- 인간의 뇌
물질이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만들어지는 것. 
1. 뇌는 영역특수성이다. 영역별로 관장하는 지식 종류가 다르며, 한 군데서 통제하는 게 아니다. 수백만개의 달하는 국소처리장치들이 있어서 처리를 내리는 지식의 종류가 다르다. 
2. 좌뇌는 인간의 의지에 따른 행동들을 처리하는 지적인 기능, 추론을 하는 곳이다. 
3. 우뇌는 불수의운동, 자연발생적 해동, 수동적으로 데이터를 받아들이기만 하는곳이다.
4. 뇌는 반응은 상황에 맞게 하나씩 꺼내어 지는 것이며, 하나의 통합된 자기의식은 없다. 늘 분열 상태.

우리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첫째로 하나의 통일된 정신을 통제하는 통일된 기제는 없다. 
우리에게 들어온 데이터들, 외부에서 들어온 정보데이터는 기본적으로 그것을 사후적으로 해석하고 처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다시말해 추론이라고 하는 것은 인과적 추론이 대표적이다. 인과적 추론을 통해서 일반이론을 만들고, 이것을 통해서 새로운 정보를 쉽게 처리하며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생존에 도움이 된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정신이 형성되었다고 하는 것은 아주 오랜세월동안 진화적 과정의 일부로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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