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사 | 36 흄: 인과율 분석의 의의, 루소: 소유권 기반 사회에서 일반의지 사회로의 전환


세상의 모든 철학 - 10점
로버트 솔로몬 외 지음, 박창호 옮김/이론과실천


2012.10 강의
33강: 근대철학 개관: Descartes, Locke, Spinoza, Newton / Hume, Rousseau / Kant / Fichte, Schelling, Hegel / Marx / Nietzsche / 자연과 자유, 유한자와 무한자
34강: Descartes의 방법론적 혁신과 주관성(cogito ergo sum)의 철학, Locke의 경험적 대상인식론, 인간의 뇌와 정신의 형성
35강: Spinoza의 방법론-형이상학-윤리학, Newton의 수학적 원리에 따른 자연철학
36강: Hume: 인과율 분석의 의의, Rousseau: ‘소유권 기반 사회’에서 ‘일반의지 기반 사회’로의 전환



20121026 36강: Hume: 인과율 분석의 의의, Rousseau: ‘소유권 기반 사회’에서 ‘일반의지 기반 사회’로의 전환

소개할 책은 피터 싱어 <다윈주의 좌파>, 최정규 <이타적 인간의 출현>
근대 사회에서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사회철학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오늘날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사회철학을 읽을 때 보완해서 읽어야 하는 몇가지 주의점들을 생물학이나 경제학에서 얻어올 수 있다면 무엇을 얻어올 수 있겠는가, 사회사상과 생물학, 정치사상과 생물학, 또는 사회정치사상과 정치학 이런 것들의 접점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철학이라는 학문이 과거에는 다르게 이를테면 과거에는 헤겔 <법철학>은 국가학, 즉 경제·윤리·정치·법학이 포괄적으로 들어있는데 오늘날은 그렇게 안한다. 헤겔이나 데카르트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런 학자들은 주변 학문들의 관심을 놓치지 않았고 또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철학으로 통합하려는 노력을 많이 했다. 이는 바로 주변 학문의 대한 관심을 끊임없이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에는 그렇게 하지 앉는다. 사실 철학이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답을 못하는 것은 철학이 원래 고상한 학문이고 원래가 그런것이 아니라 철학자들이 게을러서 그런 것이다. 그런점에서는 철학사, 사상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런 책을 읽어야 한다.

<이타적 인간의 출현>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게임이론에 관한 책이다.
홉스적인 의미에서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어떻게 행동하는가는 내부에 있는 코나투스만으로 설명 할 수 없고 중요 포인트 중 하나가 '인간은 상대적인 존재'라는 것. 인간에게 가장 심각한 환경은 인간이며, 현대사회에서 들어와서는 자연환경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보다도 더 중요한 건 타자라고 하는 존재가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 그리고 인간집단이 모여서 만들어낸 제도, 제도적 장치, 관심, 규범 이런것들이 사회적 환경인데 이런 사회적 환경이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이 있고,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인간의 본성만 알아서는 인간의 사회적인 행위를 설명할 수 없다. 바로 그런 지점에서 게임이론이라는 것이 큰 소용이 있다. 
'이타적 인간의 출현'이라는 것은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가 항상 손해와 이해를 따져가면서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를 증명해 보이려는 노력. 자존심이 중요한 요인이 될 수 도 있고, 공정성에 대한 요구는 본능적으로 갖고 있다. 

<다윈주의 좌파>를 번역한 사람이 최정규 교수.
다윈주의 좌파 해제를 보면 이타적 인간의 출현의 맺음말이 들어가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알아야 좌파들도 좀 더 나은 사회적인 계획 프로그램을 내놓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쓰여진 책. 얇지만 핵심적인 내용이 모두 들어가 있다.

어떤 사회적인 이슈가 제기되었을 때 항상 생각은 그 이슈의 근원으로까지 내려가서 그 밑바탕에 놓여있는 철학적인 기초가 뭐냐를 따져 물은 다음에 자기나름대로 학문적인 경로를 거쳐서 현실적인 경로가 뭘까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

루소의 책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책세상고문고, <사회 계약론>은 펭귄클래식코리아를 읽으면 된다.

오늘은 데이비드 흄, 루소를 한다.

* 뉴턴과 스피노자주의가 남긴 것
- 뉴턴
만유인력의 법칙이라는 말보다는 '보편중력의 법칙'이라고 쓰는 것이 사태를 더 정확하게 가리키는 말이다.
지구 위에 있는 물체의 운동을 설명한 갈릴레오의 운동법칙과 우주에 있는 물체들이 어떻게 운동하는 가를 알려주는 우주의 물체운동에 관한 케플러의 법칙 이 두 개가 뉴턴에게는 선행하는 연구 성과, 이 두 개를 통합해서 설명하려는 시도가 이게 바로 보편중력의 법칙이다.
보편중력의 법칙만 말했으면 그냥 훌륭한 것인데 중요한 건 보편중력의 법칙을 수학으로서 표현한다고 하는 것, 이것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지구상의 물체를 포함한 우주의 모든 물체가 수학적 관계로 표현되는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이게 핵심. 
수학적 관계로 표현한다고 하면 질적인 측면은 담을 수 없고, 양적인 측면만 담을 수 있다. 동시에 수학적 관계라는 것은 결국 등식 관계, 좌변과 우변을 가지고 있는 관계, 필연적인 관계라는 것. 인과법칙에 따라 지배된다는 것.
뉴턴은 물론 궁극적인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따져 묻지않았다. 운동이 어디서 시작되는가를 묻지 않지만 어쨌든 어디선가 원인이 있었겠지로 시작하여 어디선가 시작된 운동은 반드시 결과를 내놓기 마련이고 결과를 잘 살펴보면 그것이 수학적인 관계로 표현되는 선행하는 원인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뉴턴에서 아주 중요한 게 모냐면 인과법칙이라는 것이 있고 수학적인 법칙으로 움직여 간다는 것이 뉴턴의 성과
이게 바로 뉴턴적 세계관이다.

- 스피노자
인간이 영원의 상하에서, 무한자의 입장에 서서 무한자의 눈을 가지고 이성적인 지적인 직관을 가지고 세계를 바라보면, 이 세계가 곧 무한자의 물질적인 측면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스피노자주의다' 말하면 크게 3가지 측면이 있다. 사실 18세기까지만 해도 '저놈스피노자주의야' 그러면 굉장히 경멸적인 말이었다. 
1. 인식론. 즉 신의 입장에 서서 이성적 지적 직관을 통해서 세계를 파악한다.
2. 형이상학. 세계 속의 실체는 신 하나일 뿐이고 신은 동시에 자연이기도 한다. 자연이라는 것은 유일한 실체인 신의 속성이자 신이 겉으로 드러난 양상에 불과하다는 것 일반적으로 유한자라고 여겨겨온 인간이나 자연만물들이 다 신의 한 속성에 불과한 것. 무한자와 유한자가 '무차별적으로 통일로서의' 동일철학. 
동일철학이라는 단어가 나중에 독일 관념론에 쉘링에게 다시한번 나타난다. 그러기 때문에 쉘링의 동일철학이라고 하는 것, 쉘링과 똑같은 철학적 출발점을 가졌던 사람이 헤겔인데 헤겔의 철학도 기본적으로는 동일철학. 
인간의 지위라고 하는 건 성서에 보면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고 '지구에 대한 지배권을 줬다. 위계질서가 있었다.
근데 갑자기 인간이든 동물이든 세계일반이 신의 속성이다고 하면 모든 것이 올라가 버린 것. 경멸적인 말로 쓰일 수 있었던 것.
3. 윤리학. 다시말해 인간은 자연에 내재한 신의 일부. 그리고 신은 철저하게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이 법칙은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증명된 윤리학' 기하학적 질서에 따르고 있다. 필연적인 법칙을 의미하는 것. 논리적인 것이고 당연히 인간은 이 질서의 일부니까 그대로 따라갈 수 밖에 없고 그대로 따라 가면 행복한 것.
그러면 우리가 자유의지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은 기하학적 질서에 따르는 법칙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자유의지가 없고 신의 필연성만이 지배하는 세계. 
자유의지는 없고 신의 필연성에 그대로 복종하는 것이 경건한 것이고 그 경건함이 행복함, 에우다이모니아.
스피노자의 경건주의는 무시무시한 새디즘

17세기 일반위기를 겪어온 사람들, 17세기의 인간을 바라보는 태도와 18세기의 인간을 바라보는 태도가 아주 다른데 17세기 일반위기를 겪어온 사람들에게는 안심이 주어진 것. 질서잡힌 우주, 즉 코스모스에 인간이 속한다면 거기서 인간이 행하는 어떤 고민도 무의미한 몸짓이고, 이 코스모스를 벗어나는 것은 굉장히 두려운 일. 이 질서잡힌 뉴턴적 세계, 우주안에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 신의 노예로서 살고 있는 것이고, 절대로 무너뜨릴 수도 없고 바꿀수도 없는 발견만 할 수 있는 법칙. 우주의 법칙을 바꿀수가 없다.

지금 우리는 뉴턴적 물리관이 아닌 뉴턴적 세계관은 아직도 우리에게 유효하다.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원리를 잡고 계산해보려는 태도, 절대로 법칙을 벗어나는 것을 용인하지 않으려는 태도. 그 체계에서는 비록 그 신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적인 의미의 신은 아니라고 해도 굉장히 거역할 수 없는 힘. 그 신이 죽어마땅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니체.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 기독교에 대한 반감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이런 질서잡힌 우주, 체계 이런것들에 근거한 안일한 삶을 질타하는 데서 나온 것. 그래서 니체가 근대적 형이상학의 전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니체의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의 범 스피노자주의에 들어가는게 쉘링하고 헤겔까지 에 대한 전복이 되는 것.
선행하는 근대철학의 맥락이 없으면 니체가 가지고 있는 힘을 찾아내기 어렵다.


스피노자주의와 뉴턴주의가 남긴 것이 있는데 이것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기 시작한다면 가장 먼저 제기되는 반론은
인과율에 대한 반론이 된다. 

* 흄의 인과율 분석
흄하고 로크하고 버클리하고 기본적으로 인식론에 대해서 다루는 기본적인 매커니즘은 impression, 즉 인상에서 idea 관념으로 가는 것, 이것을 experience 경험이라고 말한다. 경험이라는 단어를 지극히 좁은 의미로 쓰는 것.
외부로부터 impression 이 들어와서 idea를 얻게 되는데 우리가 현재 문제삼고 있는 idea는 인과율이라는 idea.
인과율이라는 idea를 주는 impression은 무엇인가를 흄은 묻는다. 

공부합니다라고 할대, 공부라고 하는 아이디어를 주는 외부의 사물은 없다. 공부는 추상개념. 인과율도 추상개념.
다시말해서 추상명사와 구체적인 사물을 지칭하는 명사가 구별이 되는데 인과율이라고 하는 것은 추상명사. 인과율에 해당하는 외부의 임프레션이 없다.

인과율이 과연 어떤 자연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아이디어를 알던 모르던 원래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냥 우리 머리속에 만들어진 하나의 경향성 일뿐인가 '그랬으면 좋겠네' 인가. 사실은 '그랬으면 좋겠네'에 가까운 것. 인지심리학에서 밝혀낸것. 좌뇌에서 사태를 정당화하는 것. 흄은 선구적인 업적이 있다.

인과율은 왜 생겨나는 것인가? 
1. 자연적인 thing이 있는가 아니면 우리 머릿속에 만들어진 경향성 propensity에 불과한가?
>> 우리 머리속에 만들어진 경향성인것 같다.
2. 그렇다면 우리 머리속에 이 경향성은 왜 일어나는가?
>> 일단 어떤 두개의 물체가 공간적으로 굉장히 가까이 붙어있으면 인과관계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것 같다(공간적 인접성)
꼭 그것들이 필연적으로 연결 고리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떤 일이 일어나면 꼭 그다음 일이 일어난다. 원인이고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즉, 이어지는 사건, 이것을 우리가 인과라고 하는 것 같다. 
눈으로 보이지 않아도 사람들이 이런 일이 벌어지면 반드시 이런일이 일어난다는 생각을 계속하다보면 
논리적인 필연성이 있다고 하는 것 같다.

다시말해서 흄의 대답이 공간적 인접성, 시간적으로 이어지는 사건, 필연적인 연관 이 세가지를 얘기한다.
그러면 또 묻는다. 필연적인 연관은 어떤 경우에 일어나는가?
반복적으로 되풀이해서 일어나면 우리는 필연적 연관관계로 생각하기 쉽다.

반복적 재발이 눈으로 보이기는 하는데 눈으로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 머릿속에 있는 아이디어 까지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흄은 우리에게 인과율이라고 하는 여러가지 사태를 분석해본 다음에 결론은 객관세계에 있는 thing이 아니라 우리머리 속에 있는 경향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인과율 분석을 마무리 짓는다.

인과율은 근대사회에서도 과학적인 탐구나 일상생화을 뒷받침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것이 자연이 늘 그러하다, 필연적인 연관관계에 있다, 즉 이런 것들이 인과율이 있어야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부정되면서 객관적인 face 즉 factual knowledge  사실적 지식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다고 믿고 있는 belief 믿음에 불과하다고 우리가 지금까지 철썩같이 그러하리라고 여겨져왔던 것들이 사실은 필연적인 지식이 아니라 개연적인 지식에 불과하다고 말하게 된 것. 그러면서 흄이 선행하는 철학자들의 논의에 균열을 내놨다.

칸트가 읽고 충격을 받았다. 이러다가는 자연과학이 제자리에 설수없겠구나 그래서 칸트는 자연과학을 기본적인 학문의 위치에 올려놓아야만 다른 학문들이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흄에 의해서 무너뜨려진 기본적인 원리를 다시 복구하려는 시도를 하게되는데 그게 바로 순수이성비판.
근데 여기서 흄의 논의를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필연성으로서 인과율을 가지지 못하고 개연적 지식으로서의 확률정도만 가지고 있으면 큰일이 일어날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반드시 모든 지식은 선천적으로 필연적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우리는 경험세계를 살면서 우리가 그냥 경험적인 인식을 통해 받아들인 지식 위에다가도 얼마든지 세계를 단단히 구축할 수 있다. 그러니 꼭 인과율이 틀림없어야 한다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도 아니고 세계를 학문을 제대로된 토대 위에 구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말해서 흄이 인과율의 의미를 끝까지 분석해낸 이유는 사실상 인간이 선천적으로 필연성에 관한 인식을 가질 수 있는가를 끝까지 따져 묻는 행위였는데 꼭 그것을 따져 물었어야 했느냐를 우리가 한번 물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나중에 칸트할때 다시 볼 예정.


* 루소
<학예론>, <인간불평등기원론>, <사회계약론>, <에밀>
 
<학예론>
학문과 예술이 발달함으로써 인간이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이 기본적인 관점. 
문명이 인간을 타락시킨다. 문명을 만들어 내는 기본적인 체제가 사회, 즉 사회가 인간을 타락시킨다.
 
<인간불평등기원론> 인간이 타락을 했는데 따져보니까 궁극적인 원인이 소유에 있다는 것. 즉, 사회적 경제적 역사적 차원에서 인간 불평등을 찾아 보는 것.

<사회계약론> 이미 자연으로 돌아갈 수는 없고 어떤 사회를 만들면 이것을 극복하고 살수 있겠는가, 이런 사회를 만들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 사회계약론

<에밀> 새로운 종류의 인간은 어떤 사람으로 교육시켜야 하는가를 다룬책.
<학예론>부터 시작해서 <에밀>까지가 하나의 문제의식을 연결되어 있다.

<학예론>, <인간불평등기원론>이 비판적인 저작들이라면 <사회계약론>, <에밀>은 적극적인 대안들.
당대 18세기에서 사상사적 전환기에서 가장 뚜렷한 관점을 제시한 책들이다.

-사상사적 전화기에서 고전 읽기
루소<인간불평등기원론>과 <사회계약론>, 칸트<실천이성비판> 헤겔<법철학>, 마르크스<공산당 선언>을 묶어서 읽어봐야 한다.

- 루소 사상
17세기 일반위기를 넘기고 살만한 사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이기심은 잘 계몽하고 계도를 하면 그런 이기심이야말로 집단 이익의 원천이 될 수 있겠구나, 즉 아담스미스적인 생각이 되어 있었다. 루소는 계몽주의자가 아니다. 볼테르, 디드로와는 다르다. 

루소의 저작들에서 생겨난 가장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이 문명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인간사회에서 심각한 불평들을 야기했고 불평등을 넘어서 진보야 말로 인간에게 불행의 근원이 되고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 
당대의 주류사회에서 거슬려서 문명을 비판했다. 토마스 모어와 같이 <유토피아>로 제시한 것이 아니라 루소는 원인을 따져 물어가면서 인간불평등 기원론, 사회를 어떻게 만들것인가를 물었던 것.

사실 18세기의 사상가들은 현실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평등을 기정사실로 간주해왔고 그것이 어떻게 정당화되는 것을 따져 물었다.
디종 아카데미에서 제기된 문제는 '인간들 사이의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고 그것은 자연법에 의해 정당화 되는가'였는데, 질문을 잘 봐야하는데 디종 아카데이에서의 물음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고 루소가 답을 제시한 것이다.
루소는 기존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이 질문을 받아들였고 기존의 사람들은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사회가 불평등을 야기하는 것이며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 문제의 근원이 있다고 하는 했다. 

18세기 계몽주의자들 디드로, 볼페르, 흄 이런 사람들은 사람들이 모여서 사회속에 모여서 살면 행복해지고 혼자있을 때는 일으킬수없는 활기를 획득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생각이 그대로 이어지면 온화한 상업론이 되는 것.

루소는 그 당시 흄이라든가 이런 사람들이 말했던 사회에 모여서 살면 사람들이 행복해진다는 것 자체를 근본적으로 의심하고 결국 인간의 불평등이라고 하는 것은 이기심, 즉 소유권을 증진시키려는데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불평등의 기원이 사회에 있다면 불평등을 해결하려면 사회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루소는 불평등의 기원이 사회에 있는데 불평등의 해결책을 사회계약이라고 말했다. 이런 사회를 만들자는 것. 

불평등의 근본적인 원인은 사회, 그런데 루소가 이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내놓는 해결책도 사회. 모순 아닌가?
한번 스스로 의문을 가져봐야 한다. 

불평등의 기원으로서의 사회계약, 불평등의 해결책으로 말하는 사회계약 에서 말하는 사회는 종류가 다른 종류의 사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쉬운 대답.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말하는 사회는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사회계약론>에서 말하는 사회는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를 기본적으로 파악을 해야한다
그러면 이 사회, <인간불평등기원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내부에서 새로운 사회계약을 만들어내는 수 밖에 없다. 불평등의 기원으로서의 사회 안에서 불평등의 기원의로서의 사회를 전복하기 위한 사회계약을 그안에서 끄집어 내야 한다. 굉장히 어려운 과정. 다시말해서 자신이 살고있는 사회에서 그 사회를 전복하는 구상.

홉스는 비자유주의적 사회에서 살고 있으면서 그 사회를 전복하는 자유적인 사회를 구상했다
칼슈미트는 자유주의적 사회에서 살고 있으면서 비자유주의적 사회를 구상
루소는 불평등의 기원으로서 사회에서 사회 있으면서 그 불평등의 기원을 전복할 수 있는 사회 계약을 그 사회에서 구상
플라톤 <국가>를 보면 그 사회에서 살고 있으면서 그 사회를 전복하는 사회를 구상.

불평등 사회를 ①번, 해결책의 사회를 번이라고 할때, 번에서 번으로 가려면 총체적으로 무언가를 전환해야 한다.
다시말해서 번에서 사는 사람들이 사회를 대하는 방식이 완전한 의미에서 뒤집어져야만, 차원전환이 일어나야먄 번으로 들어 갈 수 있다. 
번,번사회를 다른 말로하면 번은 소유기반사회가 되는 것이고 번은 일반의지 기반사회가 되는 것.
즉 소유기반사회에서 일반의지 기반사회로의 질적전환을 어떻게 이룩할 것인가가 루소 사상에서의 핵심문제.

- <사회 계약론>
[6장 사회계약에 관하여]
'공동의 힘으로 각 구성원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보호해 주는 결합 형태, 즉 각자가 전체와 결합되어 있지만 자기 자신에게만 복종하게 하면서 이전과 다름없이 자유롭게 남아 있게 하는 그런 결합 형태를 찾아내는 것.'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문제로 사회계약이 그 해결책을 제시해 준다. 

>> 각자가 전체와 결합되어 있지만 자기 자신에게만 복종하게 하면서 이전과 다름없이 자유롭게.. 어려운 문제다. 개체와 공동체의 이율배반 문제가 있다. 
사회자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의지가 있고 그 의지에 모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복종하면서 나아가면 스피노자주의와 같이 되는데, 이것에에 빠지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오로지 자유주의적인 것도 아니면서 전체의지도 항상 관철되는 판타스틱한 요구를 루소가 제기한 것. 이 문제가 이후 전체와 개인차원을 동시에 고려되어야 하는 문제가 되어 버렸다. 즉, 새로운 문제가 시작되었다. 홉스에서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욕구 보존의 충동으로부터 시작해서 그것이 사회로까지 단선적으로 하나의 원리를 가지고 움직였으나 루소는 사회와 전체를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개인와 전체를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던 것.

[7장 주권자에 관하여]
사실, 각 개인은 인간으로서 개별적 의지를 갖고 있지만, 이는 그가 시민으로서 갖고 있는 보편적 의지와는 상반되거나 다른 것이다. 그의 개인적인 이익은 공동의 이익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로 그에게 말할 수 있다. 절대적이며 태어나면서부터 독립적인 그의 존재는 자신이 공동의 이익에 대해 갖는 의무를 무상의 기여 행위로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무상의 기여 행위를 하지 않음으로써 타인들이 입을 수 있는 손실은, 그것을 위해 자신이 치러야 하는 부담보다는 가벼울 것이다. 또한 그는 국가를 이루는 정신적인 인격을 그것이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관념적 존재로 간주함으로써, 시민의 의무는 이행하려 들지 않은 채 시민권만 향유할 것이다. 그것은 부당한 행위로, 그 행위가 진척되면 결국 통치체의 파멸을 초래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계약 속에는 그것이 빈 공식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보편적 의지에 복종을 거부하는 자는 누구나 집단 전체에 의해 복종을 강요당할 것이라는 약속이 암묵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그 약속만이 다른 약속들의 효력을 발휘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민에게 자유롭도록 강요하는 것 외의 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각 시민을 조국에 바침으로써 그를 모든 개인적 종속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조건, 즉 정치조직의 형태와 기능을 만들어내는 조건이며 시민으로서의 약속들을 합법적이게 만드는 유일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 조건이 없을 경우 시민으로서의 그 약속들은 터무니없고 압제적인 것이 되어, 엄청나게 악용되기 쉬울 것이다. 

>> 의무는 수행하지 않으면서 권리만 향유하는 사람을 막기 위해서는 공동체 보편 의지에 복종을 하게 한다. 그런데 그렇게하는 것이 시민에게 자유로운 상태를 강요하는 것이다.. 말이 안되고 있다. 루소는 이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지 못했다. 
<이타적 인간의 출현>을 보면 이렇게 해결하려고하는 경제학자들의 시도가 나온다. 루소의 '사슴 사냥 게임' (Stag Hunt Game) 어떻게 하면 자기의 이익도 추구하면서 동시에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가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정치철학의 문제.  이익을 다시 define 하는 것. 이익이 무엇인지를 재정의하고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공정성을 건드리고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고, 제도적인 장치속에서 사람들이 자연적인 성향을 사회적인 환경으로서 통제하고 그것에 적용할 수 있도록 틈새를 만들어가는 것.  루소는 이 문제를 제기했다. 

루소는 소유권 기반사회를 일반의지 기반사회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는데 그렇게 하려면 먼저 사회구성원들간의 상호작용에 영향을 미치는 법이나 규칙이나 관습, 이런 제도를 강력한 평등주의적인 방향으로 밀고나면 가능하다. 
첫번째는 제도를 잘 만든다. (루소는 제도가 아닌 일반의지로 표현했다 용어의 한계) 루소의 아디이어 개체와 전체간의 이율배반을 동시에 해결하 수 있는 제도, 이문제를 고민해서 나름대로 고민해서 답을 내놓은 사람이 헤겔.
오늘날에 제도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헤겔은 객관적 정신, 또는 객체화된 정신으로 표현했다.
객관적 정신체를 통해서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 제도를 통해서 사람들을 강력한 도덕적인 선택을 하도록 이끄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두번째는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공정함이라는 것이 중요한 행동원리가 되게 하는 것, 그리고 공평하지 않은 제안에서 대해서는 자신의 몫을 포기하면서까지도 이것을 징계하려고 하는 것 이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인간에게는 공정성에 대한 본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공정성에 대한 본능을 계속해서 북돋아주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면 일반의지가 해결될 수 있다. 이것이 오늘날의 해답. 

공정함에 대한 인간의 거의 본능적인 선호를 이끌어주는 법·규칙·관습, 헤겔의 용어로는 객체화된 정신, 제도 이것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 이것이 사실은 소유권 기반사회에서 일반의지 기반사회로 넘어가는 사회의 질적전환을 이루는데 핵심적인 대답을 내놓을수있을것이고 여러분도 이 문제를 고민하는데 이타적인간의출현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후의 사회철학들은 기본적으로 개인과 공동체라고 하는 이 기본틀안에서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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