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사 | 38 Kant의 실천철학, 목적론과 사변철학으로의 端初


세상의 모든 철학 - 10점
로버트 솔로몬 외 지음, 박창호 옮김/이론과실천



2012.11 강의
37강: 계몽철학의 완성자로서의 Kant, 구성설적 인식이론
38강: Kant의 실천철학, 목적론과 사변철학으로의 端初
39강: Hegel 철학의 형성과정, Hegel의 Front, 철학의 목표로서의 ‘삶의 통일(Einheit des Lebens)’
40강: Hegel의 형이상학: 유한자와 무한자의 통일, 무한자의 입장으로 올라섬; 철학사 공부 이후의 공부, 선생에게 이쁨받는 학생되는 법





20121116 38강: Kant의 실천철학, 목적론과 사변철학으로의 端初

칸트의 실천철학 안에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이런 사람들에게서 제기되어왔던 거의 모든 기본적인 문제들이 거의 다 집약되어 들어가 있다.

칸트 이후로는 사회과학이 발달했기 때문에 더 이상 이런 철학적인 관점에서 이 문제들을 논의하는 것이 쉽지 않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런 논의들을 하는 것이 신선해 보일정도이다. 이를테면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를 보면 다루고 있는 주제들에 사회과학적 논의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 더 이상 철학자들이 칸트처럼 순수한 의미에서의 철학적 논의, 순정철학에서의 행복, 윤리적 덕이라든가 이런 논의 들을 하지 않게 되었다. 


칸트는 구성설적 인식이론을 내놓으면서 그 인식이론 자체가 보편성, 보편적 인간이성이라고 할 때 보편적이라는 말을 확보하기 위해서 대상 세계가 가지고 있는 실체성을 끝까지 탐구해서 얻어내려는 것을 포기하고 인간이 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어온 감각 경험들이 하나의 일괄성있는 인식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고 하는 오성의 선천적 범주들을 제시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보편성을 확보했다. 그런데 사실 대상하고는 무관한 것, 그래서 인식의 보편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사실상 대상이 가지고 있는 실체성을 획득하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대신 인간은 자연법칙을 만들어내는 입법자로서의 일종의 제2의 창조자로서의 위치에 올라갔다.


칸트철학에서 돌이켜 생각해봐야 할 것이 무엇이냐하면 인간의 인식이라는 것도 머릿 속에 일어나는것이지만 그것도 하나의 행위, 인식도 행위다. 당연히 인식주관, 인식대상, 형식 이런 몇 가지 요소들만 가지고 규정할 수 없는 아주 복합적인 사태 일반이 된다. 똑같은 대상을 두고도 사람들마다 알아내는 것이 다르고, 태도도 다르다. 안다는 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굉장히 복잡해진다. 즉, 안다는 것은 굉장히 복합적인 사태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서 도덕적인 행위도 마찬가지로 일종의 행위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볼필요가 있다. 도덕적 행위라는 것이 과연 얼마만큼의 보편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의문을 마음속에 품고 있어야 한다. 


이런 것들을 염두해 두고 논의를 시작해 보자.



* nihil ex nihilo 니힐 엑스 니힐로

nihil ex nihilo 부터 시작한다. 무로부터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희랍시대부터 있었던 아주 오래된 격언이다.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태는 원인이 있다. 자연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반드시 선행하는 원인을 가진다


자연이라는 필연성을 따라 최초의 원인을 찾아가다 보면 무한소급이 일어난다. 그래서 최초의 원인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동의 원동자' 라고 했다. 여기서 자연에 관한 탐구도 한계에 직면한다. 자연의 현상이라면 그럴 수도 있으나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는 어느 한 지점에서 누군가에게 행위의 원인을 넣어놔야 한다.


- '귀책성' 

책임을 돌린다는 뜻이다. 귀책성이라는 단어 하나로 도덕철학이 성립하는 것이다. 도덕은 행위에 책임을 지는 태도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도덕철학과 법철학하고 맞물리는지점이 여기에 있다.

귀책성이라고 하는 것이 칸트가 특별히 강조한 개념이기도 한데 칸트는 인간의 행위라는 것은 '절대적 자발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인간의 행위는 자유라는 영역에서 시작되는데 자유라고하는 영역은 '절대적 자발성'의 영역에서 시작한다.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절대적 자발성이다. 또한 생각해보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연적 존재, 신체 자체가 자연 생물, 그러니까 우리는 자연에 속해있기도 하다. 인간은 자연종으로 살아가기고 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절대적 자발성으로서의 자유를 가지고 행위의 귀책성, 행위의 책임을 져야하는 존재이다 동물들에게는 없는 것. 


어떤 사람들은 인간을 순전한 의미에서 자연적 존재라고 설명하는 사람이 있다. 사회생물학자. 1차원적인 설명으로 절대적 자발성이라는 계기가 절대로 있을 수가 없다. nihil ex nihilo라는 원칙에 지배를 받는 인간인 동시에 절대적 자발성이라고 의미에서 자유를 가진 행위의 귀책성에 대해서 고민하는 인간, 이 두개의 서로 이질적인 측면들을 어떻게 조화시킬것인가가 칸트철학에서 그리고 우리에게도 가장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자연이라고 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서 그것으로부터 자유를 설명하려는 시도, 또는 인간은 오로지 절대적 자발성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가진 모든 자연적 측면을 억누르고 그것을 가지고 통제해야하는 시도 모두 잘못된 것이다.

자유의 차원과 자연의 차원은 전혀 다른 차원이며 이 다른 차원을 조화 시키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 칸트 철학의 태도이자 기본적인 문제 설정 구도이다.


그러면 이렇게 자연과 자유라는 문제 설정 구도가 생겼으 이것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칸트가 인간을 어떻게 봤는지 생각해보자

 

 * 인간성의 세 가지 측면

칸트가 보기에 인간은 그 자체로는 자연적 존재이지만 (여기서 이전의 철학자들과는 다르게 또는 루소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왔다는 뚜렷하게 보여주는 지점이 있는데) 인간이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자연성을 벗어나게 된다.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칸트의 논의를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갈 때에야 귀책성, 도덕적 책임감을 갖게 된다. 사람은 자연적 존재인데 사람들이 모여서 사회를 형성하면 도덕적 책임감, 또는 사회적인 의무가 생기고 그래서 인간은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전화(轉化)하고, 변화한다.


자연적 존재임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적 존재, 자연적 존재로서 혼자 살 때는 동물성을 인간의 특성으로 갖지만 사회적 존재로서 살아갈 때는 퍼스털리티, 인격성을 갖는 것이다. 퍼스널리티을 인격성으로 번역하는데 사실 동양철학적 의미에서 내면의 인간의 품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되고 공공영역에서 그 사람이 보여주는 성품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서양 사람이 퍼스널리티라는 단어를 쓰면 공적 영역, 사회적인 인격을 말한다.


칸트는 인간을 세계의 차원으로 봤다. 칸트의 인간학.

1. 생명체, 동물성으로서의 인간

동물성의 소질이 있다. 이게 없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 반드시 필요한 부분

2. 이성적 추론을 하는 영역

생명체이면서 동시에 이성적 존재자의 측면이 있다.

이성적 추론을 하는 영역(도덕적 행위/판단보다는 아래에 있는 것)

3. 이성적이면서도 동시에 귀책성을 자각하는 존재자로의 인간이라는 측면


칸트의 도덕론을 알려면 <실천이성비판>을 읽으면 가장 좋고,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를 봐도 된다.

실천철학의 논의에서는 핵심적으로 이해를 해야하는 부분이 3번째인 귀책성이다.

귀책성을 자각하지 못하는 존재자는 칸트는 '물건'이라고 불렀다.

행위에 대한 귀책능력이 있는 주체는 인격자. 

귀책성이라는 사회적 삶 속에서 생기는 것으로 원인을 인간 개인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귀책성이라는 개념이 걸쳐 있는 영역이 인간 개인만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 걸쳐있는 것. 논의자체가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사회과학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다.


* 인간이 하는 행위의 구분

칸트가 보기에 인간이 하는 행위는 3가지가 있다.

조금 전에 설명한 것이 인간의 차원, 이번에는 인간의 능력을 보자면

 

1. 기량 Geschicklichkeit: 기술적인 것 

2. 수단 Klugheit : 기량을 사용하는 실묭적 지침

3. 지혜 Weisheit: 도덕적인 것

기술적인 것과 실용적인 것은 묶을 수 있다.


인간은 기술적 Geschicklichkeit 측면, 기술을 이용하는 실용적 지침으로서의 수단적 Klugheit 측면 그리고 도덕을 자각하고 도덕적인 행위를 이끌어내는 지혜Weisheit의 측면을 갖추고 있다. 인간의 능력은 기술적으로든 실용적으로든 지혜의 측면에서든 좋음 Good을 만들어낸다. Good이라고 하는 단어가 쓸모있음 Usefulness 도 되지만 도덕적으로 선함도 있다. 좋음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플라톤의 논의가 다시 나타난 것. <국가>,<향연>에서 좋음에 대해서 논의한 플라톤.


기술적이고 실용적인 것은 조건적 좋음을 만들어 내고, 도덕적인 지혜는 절대적 좋음을 만들어 낸다.

학문을 나누자면 기량에 관련된 것은 개별과학이나 기술과학을 들 수 있고, 수완(수단)에 관련된 것은 실용적 인간학을 들 수 있다. 실용적 인간학은 우리가 인간을 어떤 의도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에 대해서 어떤식으로 행위할 것인가 이런 준칙을 조언하는 학문이다. 칸트는 도덕철학을 최상의 학문으로 놓고 실용적인 학문에 속하는 실용적 인간학, 역사학을 하위에 두었다.


<세계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 제7명제에서는 루소가 말한 것처럼 '인간이 최고의 도덕적 지혜를 외면한다면 인간을 악하게 만드는 문명을 버리고 차라리 야만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루소가 말한 고귀한 야만인 개념은 사회속에 살고 있는 인간 집단이 도덕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차라리 야만 상태에서 사는게 낫다는 뜻이다. 제7명제는 <인간불평등기원론>을 거의 차용한 부분으로 루소가 끼친 영향이 집중적으로 들어나는 부분. 학문과 예술에 의해서 인간은 많이 개화되었는데 도덕적 교화가 부족하다고 썼다. 이렇게 보면 칸트가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 궁리를 하다가 인간 능력의 종류를 이야기하고 그 중에 도덕을 결단하는 지혜를 가장 최상위에 놓았음을 알 수 있다. 칸트에게 있어서는 절대적 좋음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나타났다. 

여기서 문제가 제기될 수있는데 플라톤을 떠올려야 하는데 그 절대 좋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갑자기? 갑자기 문제가 나오는 것. 칸트 인식이론에 따르면 절대적인 것을 알 수 없다. 여기서 인식이론이 도덕론 때문에 박살날 위험에 처했다. 플라톤 이래로 계속 제기된 문제인 절대적인 것과 조건적인 것 사이의 매개를 어디서 만들어낼 것인가. 플로티누스를 떠올려보면 정신과 물질이 있고 그  사이에 영혼이 제3의 것으로 있다. 매개자, 메탁쉬의 문제가 다시 제기 되는 것. 

어떻게 하면 윤리적인 절대적 덕과 우리가 현실적으로 살아가는 좋음을 조화시킬 것인가, 윤리성과 현실적 행복의 결합이라고 하는 문제가 여기서 제시된다. 


어느 지점까지는 절대적 올바름과 도덕과 도덕의 원칙주의·형식주의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어느선부터는 현실적으로 이 도덕을 어떻게 하면 구현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부분이 있다. 일단은 흄과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을 배제하면서 칸트는 순수형식이성이라고 하는 원리를 세운다. 이 것은 원칙주의, 동기주의 윤리학. 하지만 동기주의로 시종일관하지는 않았다. 칸트는 루소가 도덕세계의 뉴턴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칸트의 이중 세계관이 생겨난다. 물질세계를 설명할때는 뉴턴의 이론을 받아들이고, 정신세계는 물질세계와 독자적으로 절대적 자발성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다시말해서 감각적 세계 modus sensibilis, 지성적 세계 modus intelligibilis라고 하는 두 개의 세계가 있게된다.

modus sensibilis는 자연과학으로 탐구할 수 있는 세계이고, modus intelligibilis는 정신의 세계, 절대적 자발성으로서의 자유가 작동하는 사회이다.


윤리와 현실적 행복의 겹합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면 칸트의 이중 세계에 대해서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지성적 세계에서는 오로지 절대적으로 올바른, 절대적 자발성에 따라서 움직여야 한다라고 하는 순수 이성의 의식, 형식적 실천원리가 작동한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하면 이런 형식적 실천원리에 근거한 올바름을 실현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즉 행복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가의 문제. 이 두개가 결합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칸트는 형식적 실천원리에 대응하는 실질적 실천원리에 대해서도 생각을 한다. 그래서 형식적 실천원리에 해당하는 것을 정언명법이라고 부르고 실질적 신천원리는 최고선이다라고 부르게 된다. 

'너의 내면의 동기가 도덕적이라면 결과에 관계없이 도덕적인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칸트의 기본적인 태도. 그러면 윤리성의 측면에만 매달려 있는 세계, 그것이 바로 형식적 실천원리, 그렇게 되면 현실적으로 구현하는데 문제가 있다. 그래서 칸트는 실질적 실천원리를 도입하는데 그것의 목표는 최고선. 최고선은 윤리적인 덕과 행복이 결합된 것을 말한다. 칸트의 윤리학에서 동기주의적 윤리만 이야기하는것은 칸트 윤리학의 절반 밖에 안된다.


책을 보면 <실천이성비판>, <윤리 형이상학의 기초> 이 두 개의 책에서는 형식적 실천원리, 윤리적 덕, 윤리성을 강조한 저작들이다.

(<윤리 형이상학의 기초>, <윤리 형이상학>는 전혀 다른 종류의 도덕철학을 얘기하는 책)

무엇이 착한 것인지 무엇이 좋은 것인지를 현실 속에서 구별해 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래야 착한 행위를 할 수 있다. 좋은 것을 현실 속에서 구별해 낼 수 있는 능력, 뒤나미스, 즉 힘이 있어야 한다. 형식적 실천원리만 가지고 있으면 현실적으로 올바른 행위에 의해서 느껴지는 충족감을 얻을 수 없다. 그러면 뭔가가 덧붙여져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목적을 찾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행위를 하는데 그 행위가 어떤 목적을 위해서 행해지는가에 따라서 도덕성이 결정되는 것. 선한 목적을 찾아내는 능력이 이 실천이성에게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었을때 비로소 실질적 실천원리가 형성되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부터 이 둘의 결합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목적'. 어떤 목적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똑같은 수단도 도덕적인 것이 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이제 '목적'이라는 개념이 나타나면서 인간의 자연적인 차원하고 자유의 측면이 갑자기 겹합되기 시작했다. 


이 목적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탐구한 것이 <판단력 비판>. 목적이라는 것을 탐구할때 비로소 인간은 도덕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연적 성향도 극복해 낼 수 있다. 이를테면 훌륭한 일을 위해서 내 생명을 바치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자연성에 어긋나는 일이다. 내 몸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용납이 안되나 목적이 숭고하다면 용납이 되는것. 절대적 자발성으로 자기의 자연성을 폐기시키는 것이다. '대의를 위해 몸을 바쳤다'라는 것을 칸트식으로 말하자면 최고의 목적을 위해서 자신의 자연성을 절대적 자발성을 통하며 페기시켰다라고 말할 수 있다. 목적이 나타남으로서 자연성의 측면과 도덕성 측면이 목적 아래 두어 전체가 체계를 갖추게 된다. 


<판단력 비판>을 쓰고 나서 7년후에 책을 내놓는데 그것이 <윤리 형이상학>이다.

( <실천이성비판> -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 <판단력비판> - <도덕형이상학>이 짝을 이루는 셈)

<윤리 형이상학>에서 칸트는 형식적 실천원리를 폐기한다. 다시말해서 동기주의 윤리학이 여기서 폐기되고, 실질적 실천원리 개념을 도입한다. 그래서 인간의 실천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삶의 최종적인 목적, 사회의 최종적인 목적을 인식하고 평가하는 실질적인 기능이 된다. 결국 처음에 칸트가 제시했던 감각의 세계와 지성의 세계 이분법이 사실상 폐기되는 것이다.


실천이성·도덕적으로 판단하는이성은 플라톤적인 최고의 좋음을 알아야 한다. 그 초월적인 이념에 따라서 최고의 좋음을 알아야 하고, 그것을 가지고 최고선에 이르기 위해서 현실세계를 나름대로 구성을 해야 한다. 실청이성이 하는 일은 초월적인 것을 알면서도 동시에 현실 세상도 아는 것이다. 다시금 이렇게 윤리 형이상학의 논리로 재 규정된 칸트의 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다시금 서양철학에서 등장한 제3의 것이 된다. 


칸트가 말하는 실천은 '이성을 실천적으로 사용하는 것인데 현상 세계에서 순수이성의 이데아를 실현하는 것' 이때 실천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칸트가 인식이론에서 성립했던 이성이 아니다. 칸트는 우리의 이성은 감각 기관을 통해서 들어온 것을 구성하는 정도면 된다고 했는데 이제는 초월적인 것도 알아야 하는 것이 되었다. 이를 이성의 사변적Spekulative 사유라고 했다. 


유한자와 무한자의 통일을 고민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해결해야겠다하는 것이 해겔의 철학. 그래서 해결철학을 사변철학이라고 하는 것. 

헤겔 입장에서 사변이라고 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유한자와 무한자의 관계를 사유하는 태도이고, 칸트는 마지못해 인정은 하지만 적극적으로 이것을 논의해야 할까 하는 문제가 되는 것. 사변적 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미묘한 뉘앙스가 있다.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자연세계의 논리와 정신세계의 논리를 구별할 줄 아는 것이 이성이었다면,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절대적 자발성으로 착하게 사는 결단을 선택하는 능력, 우리의 삶의 최종적 목적을 인식/설정하고, 현실적으로 적절하게 실행하는데 필요한 수단을 평가하는 능력이 이성이 된다.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이성의 통제적 사용이었다면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이성의 사변적 사용. 그러므로, 사변적 이성철학의 출발점은 칸트이다.

 

사회적인 차원에서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목적론이라는 것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는데 자칫 잘못하여 아무나 목적을 설정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버리면 독단적 형이상학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있다. 신의 의의를, 올바름을 구현하기 위해서, 목적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가.그렇지만 목적이 없다면, 순수한 칸트적인 의미에서 형식적 실천원리만 가지고 살수는 없다.


최고선이라고 하는 것은 행복과 윤리적 덕, 이것을 하위에 구성요소로 가지는 것이다.

이제 최고선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가 제기되었는데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를 봅시다.


B136. 이제 여기에서 우리는 일종의 독특한 의무, 즉 인간의 인간에 대한 의무가 아니라, 인류의 그 자신에 대한 의무를 갖게 된다.

>> 인류의 그 자신에 대한 의무 = 도덕적 의무, 도적적 의무는 인간과 인간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모여서 사는 공동체를 상정할때만 생긴다.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 도덕적 의무는 사회적 차원에서 생겨나는것.


곧 모든 유의 이성적 존재자는 객관적으로, 이성의 이념 안에서, 어떤 공동의[공동체적] 목적을 위하여, 곧 공동의[공동체적] 선으로서의 최고선을 촉진하도록 규정되어[사명 지워져] 있는 것이다. 

>> 이 목적을 찾는 힘이 형식적 실천 원리에 더해지면 실질적 실천원리가 되는 것. 목적이라는 것이 사실은 공동체의 목적이라고 하는 것. 


그러나 최고의 윤리적 선은 개개 인격이 그 자신의 도덕적 완전성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고, 

>> 즉, 아무리 각각의 개개인이 도덕적 완전성을 위하여 노력한다고 해도 최고선에 이를 수 없고 


바로 그 같은 목적을 위하여 개개 인격들이 하나의 전체 안에서, 선량한 마음씨를 가진 인간들의 하나의 체계로 통합할 것이 요구된다. 최고의 윤리적 선은 이러한 체계 안에서만 그리고 이 체계의 통일을 통해서만 성사될 수 있는 것이다.

>> "인간들"이라는 것이 포인트. 최고선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사회적 차원에서 인간이 살아가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을 때에만 의미있는 개념이라는 뜻이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칸트의 인간의 제1 차원에서 이야기했듯이 동물성의 차원이 있다. 인간의 정신상태는 신경간·세포간 상호작용으로 생겨난다. 인간의 행동을 조정하는 조정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예측불가능한 시스템. 그런데 워낙에 많은 신경다발이 있기 때문에 예측이 불가능하고 다시말해서 인간의 정신상태는 결정론의 영역이 아니다. 인간의 정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 뇌신경다발의 상호작용이라고 하는 것이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에 물질로 환원시킬 수 없는 것. 그렇다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유의지나 도덕은 개인의 두뇌의 신경세포 차원으로 설명할 수 없다. 결국 수많은 뇌, 수없이 많은 사회 구성원들의 상호작용으로 나오는 것이다. 오늘날의 과학적 설명도 그렇다. 개인차원에서 도덕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 훌륭하냐 아니냐를 가지고는 윤리적 덕과 행복의 최고선을 말할 수 없다는 것. 이 논의를 사회적 차원으로 가지고 가야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동물성을 극복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래서 개개인의 심성을 갈고닦는 것보다 그 사회가 얼마나 구조적으로 도덕적인가에 초점을맞춰야 한다. 다시말해서 자기의식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 타자를 의식하기 시작할 때 사회적 의식으로 넘어가는 것. 도덕적 인간이 도덕적 사회로 갈 수도 있는 것. 이렇게 하면서부터 삶자체가 구조적으로 전환되면서 이제 새로운 종류의 도덕들이 요구되는 것. 그 과정에서 사회적 교류라고 하는 생활 세계가 생긴다. 그렇게 해서 생긴 사회적 교류는 사람에 귀책성을 요구한다. 바로 책임감.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사람이 새로운 차원으로 구조적으로 올라서게 되면 다른 종류의 의식을 갖게된다는 것인데 특히 칸트는 귀책성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 차원에서 주어진다고 봤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모방 행동, 착한 짓도 배운다. 그리고 생태지위를 재구성해서 사회적인 제도를 따라서 제도에 걸맞는 사람이 살아남게 되면 사람들이 누구나 다 그런 성향에 맞도록 행위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루소가 말한 질적인 변화, 소유권 기반사회에서 일반의지 기반사회로 전환을 이뤄내려면 어쨋든 이 사회가 일반의지에 복종하는 사람이 많아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 제도적으로 그런 가치가 그런것들을 존중하는 제도들이 만들어져야 한다. 문제는 처음이 어렵다는 것. 처음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사실은 이것에 혁명적인 무언가가 필요하다. 사람에게 공평성이라는 것이 중요한 행동원리가 되도록 해야 하고, 또 사회적 생활을 하면서 인간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고 그 정신에 따라서 삶이 이루어지니까 그것이 또 다시 개개의 유기체가 사회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래서 누군가가 또는 어떤 집단이 그 이기심의 악순환, 즉 소유권기반사회에서 일반의지사회로 넘어갈 때 누구나 다 인간은 공평성과 이타적 행위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자립할 수 있도록 누군가가 어떤 사람이 또는 어떤 집단이 그 밑 돌을 하나 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 위에다가 또 다른 사람이 놓아야 한다. '저 집단이 손해 보면서도 그렇게 하는 구나..'가 아주 중요하다. 


목적을 찾는 힘, 사회적차원을 고려한다고 하는 것이 바로 칸트가 우리에게 남겨준 아주 중요한 성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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