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고전강의 | 02 오이디푸스왕 4


오이디푸스왕 안티고네 외 - 10점
소포클레스 외 지음, 천병희 옮김/문예출판사


강유원, '인문고전강의' 

일시: 2013년 2월7일 – 12월 5일, 매주 목요일 오후 7시30분 – 9시30분(총 40주)

장소: 과천시정보과학도서관


* 강의 목차

20130321 07강 오이디푸스왕(1)

20130328 08강 오이디푸스왕(2)

20130404 09강 오이디푸스왕(3)

20130411 10강 오이디푸스왕(4)







20130411 10강 오이디푸스왕(4)

'자기'라는 개념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오뒷세우스에게 있어서 자기라고 하는 것은, 만일 칼륍소의 청을 받아들여서 거기서 살았으면 인간의 자기가 형성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칼륍소라는 여신에게 낙점을 받아서 형성되는 것. 그것은 사실 자기가 아니다. 자기라는 말은 온전히 내 것인 것을 가리킬 때 쓴다. 오뒷세우스는 결국에는 내가 나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같은 마음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내가 나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228 353행 테이레시아스: 바로 그대가 이 나라를 더럽히는 불경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말을 테이레시아스가 했는데 오이디푸스는 지금 자기한테 하는 말인지 모른다. 왜냐 오이디푸스는 만인 중에 으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한번도 그 자리에서 내려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겸양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오이디푸스가 저지른 하마르티아 Hamartia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캐릭터에서 나오는 것. 그 캐릭터가 바로 오만함 Hybris. 휘브리스가 하마르티아의 원인이다.


228 354행 오이디푸스: 그따위 말을 내뱉다니, 어쩌면 저토록 뻔뻔스로울 수가 있을까!

그러고도 어디서 그 벌을 면하리라고 생각하는가?


228 356행 테이레시아스: 벌써 면했습니다. 나의 진리 속에 나의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이디푸스에게 완전하게 맞서는 것. 주인공인 오이디푸스 다 보니 테이레시아스가 상대적으로 덜 조명받는 점이 있는데 테이레시아스가 되게 중요한 인물이다. 테이레시아스가 세게 나갈 수록 오디도 세게 나간다. 이 사람은 장님이기 때문에 신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사람. 사람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코로스장 같은 경우는 말이 왔다 갔다하기도 하지만 테이레시아스는 신의 목소리. 절대언명이다. 그 누구도 테이레시아스에게 대적할 수 없다. 초반에 이렇게 둘을 붙여 놓고 나서 나중에 오이디푸스를 무너뜨리고 나면 위기가 절정에 달해보인다. 나중에 무너지기 시작하면 나중에 오이디푸스는 사람들에게 연민마저 불러일으킨다. 연민이 일어나면 카타르시스가 일어나면서 드라마의 효과는 극대화된다. 그러면 넘겨보자.


229 362행 테이레시아스: 그대는 그분의 살해자를 찾고 있으나 그대가 바로 그분의 살해자란 말입니다.


여기서 진실을 말한다. 그런데도 오이디푸스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230 379행 테이레시아스: 크레온이 아니라 그대 자신이 그대의 재앙입니다.


단테가 <신곡>을 쓸 때는 연옥이라는 교리가 발명된지 얼마 안되었을 때이다. 연옥은 제2차 리옹 공의회 1200년대 후반부. 연옥이 발명된지 얼마 안되었는데 단테가 <신곡>을 씀으로써 연옥이 널리 퍼지게된 것. 가톨릭에서 연옥의 개념은 단테의 공헌이 크다. 자크 르 고프 <연옥의 탄생>을 보면 나와 있다.


오이디푸스와 테이레시아스가 얘기하는 와중에 코로스가 개입한다.


232 405행 코로스장: 우리들이 생각하기에, 저분의 말씀이나 그대의 말씀이나

오이디푸스여, 모두 노여움에서 나온 말씀 같습니다.

하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한 말씀들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신의 명령을 가장 훌륭하게 이해할 수 있겠는지 궁리하는 일입니다.


테이레시아스와 오이디푸스가 너무 심하게 맞부딪치고 있으니 화를 가라앉혀라 이런 뜻이다. 싸움은 그만하고 나라의 역병을 몰아내고 테바이의 질서를 되찾아야 하는데 어떻해야 하면 좋겠는지 묻는다. 그런데 테이레시아스는 코로스장의 말을 과감하게 처내버린다. 테이레시아스는 절대적 저스티스를 시행하라고 명령하는 것. 여기서 코로스장의 얘기는 현실적인 대안을 찾자는 것인데 테이레시아스는 쳐내버린다.


232 413행 테이레시아스: 그대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테이레시아스는 장님인데 오이디푸스한테 이렇게 말하는 것은 너는 나보다 못하다는 것. 오만함이 극치에 이르러 있는 오이디푸스한테는 감당하기 어려운 말인 것이다. 그래서 오이디푸스는 참을 수가 없고, 여기서 부터 오이디푸스의 분노가 뿜어져 오른다. 게다가 테이레시아스의 말 끝트머리를 보면 


233 426행 테이레시아스: 그러니 크레온과 나의 전언을 실컷 조롱하구려.

죽어야 할 인간들 중에 일찍이 그대보다 더 비참하게

마멸될 자는 달리 아무도 없을테니 말입니다.


약을 팍 올린다. 최후 통첩. 이런 말을 기억해 두자. "죽어야 할 인간들 중에 일찍이 그대보다 더 비참하게 마멸될 자는 달리 아무도 없을테니 말입니다."


233 429행 오이디푸스: 저자에게서 이런 말을 듣고도 참아야만 한단 말인가?


그래서 오이디푸스는 절대로 입밖에 꺼내서는 안되는 질문인 3번째 질문을 제기한다. 


234 437행 오이디푸스: 사람들 중에 누가 나를 낳았단 말인가?


영어판을 보면 who is my father? 굉장히 직설적이다. 이렇게 결정적인 말들을 영어판과 대조해서 읽어보면 한국어로 번역했을 때 알지 못하는 뉘앙스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영문판을 사라고 한 것.


234 430행 테이레시아스: 오늘 이 날이 그대를 낳고 그대를 죽이게 될 것입니다.


this day will bring your birth and your destruction = 오늘이 너의 탄생과 파멸을 가져올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인간으로서 대단하다고 말하는 것은 이런말을 들으면 보통 물러서는데 오이디푸스는 들이받아버린 것. 오이디푸스적인 인간이라는 하는 말은 오뒷세우스적 인간이란 말보다 훨씬 더 어떻게 보면 장엄하다. 오뒷세우스은 꽤가 많은 사람. 오이디푸스는 알고도 들이받아 버리는 것. 자신이 이 사태를 끝가지 밀고 들어가면 파멸에 이를 것을 알면서도 밀고 가는 놈. 이게 바로 아주 네거티브한 의미에서 비극이다.


비극의 1번 개념이 자신의 파멸을 알고도 그 파멸을 향해 온몸을 던져버리는 것. 이것이 서구에서 비극적 인간의 전형적인 개념. 이 개념을 보면을 받아들여서 쓰는 놈들이 니힐리스트. 니체의 <비극의 탄생>은 이런 개념을 분석한 것이다.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장엄하긴 한데 가만히 보면 비극적 요소가 숨어있다. 종말론이 원래는 조로아스터교에서 생긴 것이고, 히브리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멘탈리티는 희랍에서도 있는것. 비극적인 니힐리스틱한 이런 멘탈리티가 있기 때문이다.


birth와 destruction, 탄생과 파멸을 동시에. 서로 정말로 대립되는 말인데 this day 같은 시간에, 정반대되는 것이 완전히 모순되는 것이 있을 수 없는데 오이디푸스는 이것이 가능한 놈이다. 오이디푸스의 존재 자체가 모순의 공존이 가능한 놈이니까. 그래서 오이디푸스가


234 439행 오이디푸스: 온통 수수께끼 같은 모를 소리만 하는구나!


234 440행 테이레시아스: 수수께끼를 푸는 데는 그대가 가장 능한 사람이 아니던가요?


테이레시아스가 조롱을 하며 퇴장하고 코로스가 나타나서해서 첫번째 정립가가 시작한다.


236 코로스(첫번째 정립가 436~512행)


첫번재 정립가는 내용이 오이디푸스를 낳은 랍다고스 가문의 얘기가 나오고 우2 511행까지는 사실들에 관해서 얘기한다. 그 다음에 크레온이 등장한다. 크레온의 대사를 가만히 살펴보면 한마디로 이제부터는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지 다 알게 된다. 그럼 이제부터 무엇을 규명해야 하냐면 오이디푸스가 파멸에 이르게 된 이유. 오이디푸스가 파멸에 이르게된 것은 하마르티아 때문이다. 오이디푸스가 잘 알지도 못하고 죄를 저지르게 된 것은 오만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이 오만함을 이제부터는 착착 증거를 내서 보여줘야 한다. 다시말해서 지금부터 사건이 해소되어가는 국면에 들어선다. 첫번재 정립가가 끝나고. 크레온이 나오면서부터 오이디푸스의 성격분석이 시작된다. 코로스장과 크레온이 주고받는 대화가 있다.


240 523행 코로스장: 노여움을 이기지 못해 그런 비난을 하신 것이지

진심에서 그러신 것은 아닐 겁니다.


이런 말들을 가만히 보면 오이디푸스는 노여움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 오이디푸스는 기본적으로 휘브리스가 있기 때문에 남이 자기에게 뭐라고 하는 것을 이겨내지 못한다. 코로스가 하고 있는 말이 중요한 이유가 이런데 있다. 가만히 들어보면 사건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실마리를 툭툭 던져준다. 오이디푸스 가 다시 등장하고, 둘이 쭈욱 대화를 하는데 오이디푸스가 크레온을 몰아붙이는 과정. 결국에는 오이디푸스가 크레온하고 대립을 하는데 크레온은 테이레시아스처럼 진리를 갖고 있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오이디푸스에게 결정적인 말은 못내린다. 크레온이 제기할 수 있는 최강의 극강의 대응책은 무엇인가.


248 630행 크레온: 이 도시에 대해서는 내게도 권리가 있습니다. 그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크레온은 시민으로서 하는 말. 테이레시아스는 시민이 아닌 절대 진리를 갖고 있는 인간. 이 말은 일단 <오이디푸스 왕>이라고 하는 드라마 제목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영어로는 Oedipus the King. 희랍어는 Oidipous Turannos. 참주, 폭군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왕이라고 번역을 하면 안된다. 왕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느슨하고 가치판단이 들어가지 않은 개념. 그래서 Turannos 오이디푸스는 도시가 폴리스인데 폴리스에 대한 권리가 자기에게 있다고 계속 얘기한다. 


반면 크레온이 나에게도 이 도시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말하는 것은 시민으로서 말하는 것. 그런데 다음에 읽을 <안티고네>를 염두해 둔다면 크레온이 바로 이 말을 다시 아들에게 듣는다. 폴리스 사람들 말을 귀울이지 않는 자는 더 이상 왕이 아니다. 랍다코스 가문의 모든 남자들이 죽으니까 크레온이 왕위에 오른다. 크레온이 여기서는 굉장히 건전한 상식을 가진 폴리스 시민으로서 발언을 하지만 Turannos를 향해 간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이 이 지점은 이 말이 현대의 우리에게는 그런가 보다 하지만 그 당시 아테네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유의미하게 받아들여졌을 것. 이랬을 때 드라마를 보고 있는 관객들은 감정이입이 되면서 빨려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 적극적으로 오이디푸스에 대해 죽어야 마땅한 놈이라고 하는 감정이 생길 것.


<헬레니카>를 보면 민주정이라는 체제에 폄하하고 업신여기는 자는 가만 안놔둔다. 바로 처형. 그래서 체제가 어떻게 변하든간에 참주정이든 민주정이든 그 폴리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명을, 최소한 그 생명이라도 보장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어야 하겠다. 그것을 확보하는 것이 굉장히 심각한 문제였는데 그게 확보가 안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개입해서 평화가 찾아온 것. B.C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마케도니아 지배를 받기 시작한 때까지 굉장히 민감한 시기였다.


희랍사람들이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다투고 그 와중에 아테네는 항구파와 읍내파가 다툰다. 항구파가 민주정이고 읍내파가 참주정인데 플라톤의 대화편 <국가>를 보면 소크라테스가 페이라이에우스 항구에 내려가서 거기서 폴레마르코스를 만나서 얘기한다. 항구는 민주파의 거점. 폴레마르코스와 그의 동생 뮈시스와 같은 사람은 나중에 30인 참주정에서 다 목이 잘린다. 플라톤이 <국가>을 썼을 때는 처형당한 것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다. 읽을 때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코스, 케팔로스가 다정하게 얘기할 사람이 아닌 것. 실제로 역사적 상황속에서는 참주정파와 민주정파가 죽고 죽였다. 소크라테스는 참주정파의 한 패거리로 몰려서 민주주의의 적으로 몰려서 죽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하면서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다투면서 패가 한없이 갈라진다. 그 와중에 알키비아데스와 같은 애들은 스파르타로 튀었다가 다시 왔다가 한다. <향연>을 읽는 사람들은 배신자 알키비아데스를 다 알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 


우리나라를 아테나이로 치면 종북이니 뭐니하며 절멸시키려고 한다. 내전 안의 또 내전이니 상황이 심난한 것. 이런 상황에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나와서 해결하는 수 밖에 없다. 알레산드로스 대왕아 제국을 만들면서 분쟁이 끝난다. 그나마 그때는 자기네 나라의 운명을 어찌저찌 할 수 있는 시민이었는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나오니까 나라의 체제에 대해서 아무런 발언도 할 수 없는 신민이 되어버린 것. 대한민국이 건국된지 60년 되었는데 조선으로 따지면 세조 때. 세조가 죽고 나니 성종. 경국대전이 완성되었다. 조선이라고 하는 나라는 이념이라도 만들어졌는데 지금의 우리나라는.. 


종북이라는 말자체가 그런 말을 꺼내서 상대를 몰아붙이고 하는 자체가 몰역사적인 태도. 적어도 이 땅에 살고 있는 한에서는 적과 아군을 가르면 안되는데 내부에서 적과 아군을 구별해버리면 답이 안나오는 것. 그것을 확보하기 위해서 헌법이 있는 것이고, 헌법적 가치를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헌법을 만든다고 하는 것이 서양에서도 최근의 일인데. 헌법의 역할이 이것이다. 헌법적 가치라는 것이 사상의 자유, 이 땅에 살고 있는 한, 투표를 하는 한은 또는 네가 안찍은 놈이라도해도 대통령이 된 이상 그것을 수긍하는 한, 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문제 삼지 않겠다는 것이 헌법. 이것이 확보가 안된 상태로 계속 왔고, 이것이 확보가 되기 시작한 것이 2차 세계 대전 이후의 민주정치다. 2천년도 넘겨 걸린 일. 굉장히 오래걸렸다.


원심정제 原心定罪. 마음의 원천을 두어서 죄를 정한다는 말이다.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되기 전에는 한반도에서도 계속해서 통용되었던 죄목. 중국에서도 그랬다. 한나라 태조 유방이 한신을 잡아 족칠 때도 이 죄를 물었다. 실제로 반란을 일으킨 자보다도 가만히 있던 한신이 큰 벌을 받았다. 이게 있는 한은 헌법적 가치가 있을 수 없다.


여기에서는 크레온이 폴리스적 가치를 주장하고 있는 것을 유심히 보기 바란다.

660행으로 넘어가자. 코로스가 애탄가를 부른다. 기본적으로 오이디푸스가 가지고 있는 분노. 성격의 분석이라고 하는 것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러다가 오이디푸스가 자기 아버지 라이오스 왕을 죽인 사건을 해명하기 시작. 


256 738행 오이디푸스: 오오 제우스 신이여, 그대는 내게 무엇을 행하기로 결정하셨나이까?


여기서부터 이 드라마의 반전이 시작된다. 여기가 드라마의 딱 절반이라고 보면 된다. 이게 오이디푸스의 입으로 제우스 신에게 물었다. 이때부터 오이디푸스가 휘브리스를 벗어버리기 시작하는 것.  이제까지 그렇게 잘난척하더니 이제야 제우스 신을 찾는다. 곧  오이디푸스의 희브리스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것은 곧 드라마 반전이 시작된다는 것이고, 그를 파멸로 이끄는 것. 약자가 되어가는 오이디푸스를 밟는 재미. 안타갑게도 밟히는 시작이 이오카스테. 


256 739행 이오카스테: 어째서 이 일이 오이디푸스여, 그대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거죠?

257 740행 오이디푸스: 아직은 내게 묻지 말아요. 라이오스가 어떤 체격을 갖고 있었으며

남자로서 얼마만큼 성숙했었는지 말해봐요.

257 741행 이오카스테: 키카 컸고 흰머리가 갓 나기 시작했으며

외모는 그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흔히 이 부분은 이오카스테가 약한 확신이 들어간 들어간 것이라고 주석이 된다. 여기서 이오카스테는 사실 무너졌다고 볼 수 있다.


257 740행 오이디푸스: 나야말로 불행하도다! 방금 내 자신을 무서운 저주 속으로

내던져놓고서도 그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니 말이오.


그래서 오이디푸스의 입에서 도저히 나오지 않을 것 같지 않은 말인 제우스 신을 찾는 것이 나왔는데 그다음을 보면 768행


259 768행 오이디푸스: 부인이여, 내 자신이 너무 말을 많이 하지 않았나

두렵소이다. 그래서 그자를 보고 싶어하는 것이오.


테이레시아스에게 한말, 크레온에게 한말이 이제 다 자기한테 돌아오는 것.  그런데 이오카스테는 


259 770행 이오카스테: 그자는 올 거예요. 하지만 왕이여, 그대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이 무엇인지 나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궁금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거짓말하기 위해서 물어보는 것. 이미 이오카스테는 불긴한 예감을 거의 확신한 상태.

결정적인 대화를 보면 820행


262 820행 오이디푸스: 그리고 이러한 저주를 나에게 내린 자는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자신이었던 것이오.


영문판 206 페이지 And all these curse I - no one but I brought down these piling curses on myself!

아까 테이레시아스가 저주의 말을 남겨놨는데 이 사실을 오이디푸스가 깨달은 것. 나에게 이 모든 저주를 나에게 내린 자는 바로 자신이라는 것.


지금 오이디푸스가 자기 그누구도 아닌 나 라고 했다..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긍극적인 원인이 나라는 것을 자기 입으로 실토하게 되었다. 이제 자기에 대해서 확증을 해나가기 시작. 여기서는 같은 마음이 필요없다. 객관적인 사태로서 자기를 확증하는 것. 누구하고도 같은 마음이 되지 못한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눈을 찌르는 것. 한사람이라도 호모프로쉬네가 있었으면 눈을 찌르지 않았 것. 애초부터 오이디푸스는 그 누구와도 같은 마음으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회복할 것이 없는 것이다. 회복이라는 것이 일단 뭐가 있어야 하는데 애초에 없었다. 오이디푸스는 인생은 다리를 건너와서 불태워버리고 혼자 살아온 것. 같은 마음이라는 것은 페넬로페와 오뒷세우스처럼 마음이 조금이라도 이어져 있어야 하는데 원래 아니었으면 확인이 안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보아도 출발점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원래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밖에 나가서 까불다가 다시 하느님으로 돌아온다는 것이 되는 것. 그것도 구조는 같은 마음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신따위가 어딨어 하면 영원히 방황하는 것. 회복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현대인들은 믿음의 최소근거가 없다. 여기 도서관에서 같은 책을 읽은 기억이 공유된다. 같은 책이 중요한 것. 


나중에 오이디푸스가 눈을 찌른다. 희랍사람들에게 눈이 멀었다는 건 산송장이 된다는 뜻. 그렇기 때문에 오이디푸스는 그 누구하고도 호모프로쉬네를 할 수 없다. 그 누구하고도 공통의 그라운드 위에서 설 수 없다는 것을 확연히 깨닫고 스스로 무너져가는 것이다. 이런 확인 과정 자체가 바로 오이디푸스 파멸의 과정이다. 


264 코로스(두 번째 정립가 864~910행) 


265 872행  좌1: 그 법도 속에서 신은 위대하시고 늙음을 모르시도다.


코로스가 신을 찬양할 때는 항상 대조적인 효과가 있다. 그 다음에 우1을 보자.


265 873행 우1: 오만은 폭군을 낳는 법. 오만은

시의에 맞지도 않고 유익하지도 않은 부로

헛되이 자신을 가득 채우고 나서

꼭대기로 기어 올라갔다가

가파른 파열 속으로 굴러 떨어지니


곧바로 오이디푸스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얘기한다.


267 910행 코로스: 신들에 대한 공경도 사라져 가고 있나이다.


이번 코로스는 신들에 대한 찬미와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경멸로서 집약할 수 있다. 신들에 대한 공경도 사라져 가고 있나이다 라고 말하고 나서 곧바로 이오카스테가


267 이오카스테가 양털실을 감은 나뭇가지와 향을 들고 궁정으로부터 등장.


향을 들고 나온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67 911행 이오카스테: 나라의 어른들이여, 나는 이 나뭇가지와

향의 제물을 손에 들고

제신들의 신전을 찾아가기로 결심했어요.

오이디푸스가 온갖 고통으로 그의 마음을 지나치게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오. 그이는 분별있는 사람처럼

새 일을 옛 일에 의해 판단하려 하지 않고

누구든지 무서운 일을 말하는 자에게 자신을 내맡기고 있어요.

내가 충고해도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기에 

뤼케이오스 아폴론이여, 여기 가장 가까이 계시는 그대를

이러한 애원자의 표정을 들고 찾아왔나이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서든지 무마해 보려는 이오카스테의 노력. 사태는 이미 기울어져가고 있고. 걷잡을 수 없이 가파르게 가는게 간다. 그것을 도대체 막아낼만한 힘도 없을 사람이 애절하게 막아보려고하고 있으면 가파르게 내려가는 것에 대한 가속력이 훨씬 더 강하게 느껴질 것. 그 역할을 하는 이오카스테. 


그것에 바로 이어서 코린토스에서 오이디푸스 왕을 찾는 사자가 왔다. 오이디푸스와 사자가 대질하면 사태가 끝나버린다. 사자와 오이디푸스가 얘기를 하는데 사자는 오이디푸스에게 오이디푸스가 자기 아버지로 알고 있는 코린토스의 왕이 죽었다는 것을 알려주러 왔다.기쁜 소식이 사실 기쁜소식이 아니다.


279 1050행 오이디푸스: 드디어 그것이 밝혀질 때가 왔도다.


279 1051행 코로스장: 생각건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앞서 그대가 보고 싶어했던 

농부, 바로 그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 듯합니다.

그 일이라면 여기 계시는 이오카스테께서 가장 잘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280 1055행 오이디푸스: 부인이여, 그대는 방금 우리가 부르러 보낸 그자를

알고 있소? 이 사람이 말하는 자가 바로 그자요?


280 1056행 이오카스테: 이 사람이 말하는 자가 누구면 어때요? 조금도 심려하실 것 없어요.

그따위 말은 일고의 가치도 없어요. 다 부질없는 짓이여요.


이오카스테는 앞에서 막연하게마 약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여기서와서 확신을 하게 된다.


208 1058행 오이디푸스: 이러한 실마리를 잡고서도 내 자신의 출생을

밝히지 못하다니, 그럴 수는 없는 일이오!


여기서 오이디푸스는 가만히 있으면 될텐데 밀고 간다. 이게 오이디푸스다.


280 1060행 이오카스테: 제발 부탁이니 그대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신다면

이 일을 추궁하지 마셔요. 괴로워 못 견디겠어요.


208 1061행 오이디푸스: 염려 말아오. 내가 노예 어머니의 아들, 아니 삼대째 노예로 드러나더라도

그대는 결코 나쁜 가문에서 태어난 것으로 밝혀지지는 않을테니까.


지금 이오카스테가 말을 계속 보자. 강도가 계속 강해진다. 


280 1062행 이오카스테: 하지만 내 말을 들어요, 부탁이여요.

280 1066행 이오카스테: 나는 호의에서 그대에게 가장 좋은 것을 말씀드리는 거여요.

280 1068행 이오카스테: 그대가 누구신지 결코 알게 되지 않기를!

280 1072행 이오카스테: 다른 말은 앞으로 영원히 하지 않을 거여요.


281 이오카스테 궁전으로 퇴장

281 1073행 코로스장: 어찌하여 부인께서는, 오이디푸스 여, 격렬한 슬픔에 사로잡혀

달려가시는 것입니까? 저 침묵으로부터 재앙의 폭풍이 터져 나오지나 않을까 두렵나이다.


코로스장이 진짜 얄밉다. 이오카스테의 운명을 예견하고 있다.


282 1075행 오이디푸스: 터질 테면 터지라지! 설사 내 혈통이 미천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알고 싶은 내 소원은 변함이 없을 것이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알고 싶은' 이다. 오이디푸스적 인간이라는 말을 쓸 때 뭔가를 알고 싶어하는 인간으로서의 오이디푸스가 있다. 내가 그것을 안 다음에 그 자리에서 파멸한다 할지라도 알아야 하겠다는 인간. 그런 인간만이 <파우스트>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영혼을 팔겠다는 것. 순수욕망. 그 어떤 맥락도 배제하고 알고 싶다는 그 자체로 충동되어 가는 인간. 그것이 파우스트이다. 


알고 싶다는 것. '순수'라는 말이 있다. 착한으로 이해하기 쉬운데 서구 사상사에서 순수라는 말이 나오면 '주변의 상황과 모든 맥락을 배제한' 이라는 뜻이다. 칸트 <순수이성비판> 이런 말들을 잘 이해하는 못하는 이유가 순수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함축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오뒷세우스 같으면 꽤가 많은 오뒷세우스이기 때문이 이렇게 안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같은 마음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고, 여기서 오이디푸스는 모든 것을 잘라내고 알고 싶은 마음/욕구를 가지고 밀고 들어가는 것. 이 둘을 밀고 가는 힘이 다르다. 알고 싶은 내 소원 . 그 자리에서 순수과학이 생겨나는 것이다. 서구에서 순수학문이다라고 말하면 그런 것은 파토스적 고려가 없는 학 그 자체를 추구하는 것. 그것이 순수학문.


그런 단계를 거쳐서 인생의 쓴 맛을 보고 마이너코드를 겪어가면서 파토스가 몸에 붙고, 정신이 말하자면 닫히고 상처나고 덧나고 이런 과정을 거쳐서 우리가 가진 것이 오뒷세우스적인 정신에 이른 자들이 학문의 세계에 들어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나치 독일의 의사. 그런 사람들이 복무하는 것. 무라카미 하루키 <약속된 장소에서>의 오옴 진리교의살인가스를 살포한 과학자들. 그런 사람들이 순수한 사람들. 그것 자체로 인생을 리셋하고 싶은, 포맷해서 돌려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그러니까 현실세계에 대한 아무런 대안도 없이 자기의 대안을 만드려고 한다. 무서운 사람들.


그 다음에 코로스의 세번째 정립가. 그 다음에 오이디푸스가 자기를 내다버린 목자와 얘기를 한다. 그렇게 해서 목자와 오이디푸스의 대질이라고 하는 것이 나왔을 떄  1179행에서 오이디푸스가 


289 1179행 목자: 나리, 그 애가 가엾여서 그랬습니다. 나는 그가 그 애를 

다른 나라로, 자기 나라로 데려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애를 구해 가장 큰 불행을 가져왔습니다. 만일 그대가

이자가 말하는 그 사람이라면, 알고 계십시오, 그대는 불행하게 태어났습니다.


290 1185행 오이디푸스: 모든 것이 이루어졌고 모든 것이 사실이었구나!

오오 빛이요, 내가 그대를 보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이 되기를!


이것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최종적인 확증. 이게 이제 앞으로 오이디푸스가 저지를 일에 대한 스스로의 예견. 이렇게 해서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최종적으로 자기 모습을 확인하고

그 다음에 이오카스테가 죽는다.


295 1270행 사자: 그분께서 부인의 옷에 꽂혀 있던 황금 브로치를 빼들고는

그것으로 자신의 두 눈알을 푹 찌르며 대략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너희들은 내가 겪고 내가 저지른

끔찍한 일들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너희들은 보아서는 안 될 사람들을 충분히 오랫동안 보았으면서도

내가 알고자 했던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했으니

앞으로는 어둠 속에 있을지어다!"

이런 노래를 부르며 그분께서는 손을 들어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씩이나 자신의 눈을 찌르셨습니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찌른 것은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가장 기본적으로는 신에 대한 저항을 의미한다. 자기 운명을 이렇게 만들어놓은 신을 저주하는 것. 그 다음에 이어지는 코로스 애탄가는 말 그대로 애탄가, 연민으로 가는 것이다. 1300행 무렵에서부터 연민. 여기서 점차 연민이 가는 것이고, 연민이야말고 카타르시스가 시작되다.


297 1298행 코로스(애탄가): 오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무서운 운명이여,

일찍이 이 눈으로 본 것 중에 가장 무서운 운명이여!


여기서부터 카타르시스가 시작되었는데 코로스와 오이디푸스가 주고받는 대화가 좌2를 전후해서 있다.


299 1327행 코로스: 오오 그대 무서운 일을 저지른 분이여, 어떻게 감히 그처럼

자기 눈을 멀게 할 수 있었나이까? 어떤 신이 그대를 부추겼나이까?


299 1329행 오이디푸스: 친구들이여, 아폴론, 아폴론 바로 그 분이시다.

내 이 쓰라리고 쓰라린 고통이 일어나도록 하신 분은.

하나 이 두 눈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가련한 내가 손수 찔렀다.

보아도 즐거운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할진대

무엇 때문에 보아야 한단 말인가!


'내가 손수 찔렀다' 중요한 부분이다. 오이디푸스가 가지고 있는 절대의지. 아킬레우스는 절대 신에게 거역하는 이런 말을 못한다. 소포클레스의 이 <오이디푸스 왕> 드라마는 굉장하다. 드라마 전체를 보면 아이스퀼로스는 감히 이런 짓을 못한다. 우리는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희랍사람들은 이런 모이라, 즉 운명에 대해서 거역하지 못한다. 


우리가 서양 근대 사상을 읽을 때 잘 이해가 안되는 게 중세 철학을 잘모르면, 중세 그 시대를 겪어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읽지 않으면 안되는 것. 기본적으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있어야 근대철학을 이해할  수 있다.


드라마의 성격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핵심적인 문자을 골르라고 한다면 '내가 손수 찔렀다.' 이렇게 되니까 오이디푸스는 완전한 허무주의자가 된 것. 신에게 거역해서 자기 눈을 찌른 놈이다. 


301 1367행 코로스: 나로서는 잘하신 일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대에게는 장님으로 사느니 죽는 편이 더 나을테니 말입니다.


301 1670행 오이디푸스: 내가 한 일이 가장 잘한 일이 아니라고

내게 가르치지 말고 더는 내게 충고하지도 말라.


여기서 코로스 역할이 사태를 더 악화시키거나 부추기거나 하는 역할. 이렇게 말했으니 이 오이디푸스는 더이상 건드릴 수 없다. 그런데


307 1470행: 크레온의 시종들이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를 데리고 돌아온다.


이 부분이 결정적으로 연민으로 들어가는 것. 자식들이 돌어오니까 오이디푸스가 말을 길게 한다. 그중에서도 1485행을 보면


308 1485행 오이디푸스: 그 자신이 태어난 바로 그곳에서 너희들의 아비가 되었구나.


자기 입으로 말하기 참으로 민망한 말을 오이디푸스가 눈에서 피를 흘리며 말을 한다고 생각해보라. 이 부분이 결정적으로 최후의 연민. 그리고 코로스가 마지막


311 1524행 코로스: 오 조국 테바이여, 시민들이여. 보라, 이분이 오이디푸스디푸스다. 

그는 유명한 수수께끼를 풀고 권세가 당당했으니

그의 행운을  어느 시민이 선망의 눈으로 보지 않았던가!

보라, 그가 얼마나 무서운 고뇌의 풍파에 휩쓸렸는지를. 

그러니 우리의 눈이 그 마지막 날을 보고자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는 

죽어야 하는 인간인랑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기리지 말라. 

삶의 종말을 지나 고통에서 해방될 때까지는


'삶의 종말을 지나 고통에서 해방될 때까지는' 이게 바로 희랍에서 가장 중요한 속담 중 하나인 '고통이 인간을 지혜롭게 한다', 파테이 마토스(pathei mathos), 고전 드라마 읽어서 이보다 나은 말을 발견하기 어렵다. 사실은 아이스퀼로스가 먼저 했다. <아가멤논>176행에 나오는 말, '그분께는 인간을 지혜로 이끄시매, 고뇌를 통하여 지혜를 얻게 하셨으니 그분께서 세우신 이 법칙은 언제나 유효하도다


<아가멤논>, <오뒷세이아>, 그리고 <오이디푸스 왕>의 저변에 놓여있고 관통되고 있는 메세지가 바로 pathei mathos. 겪음을 통해서 뭔가를 얻으려고 하지 않는자는 날로 먹으려는 놈이다. 

다음 주 2주 동안 <안티고네>를 읽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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