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놀트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2 - 르네쌍스, 매너리즘, 바로끄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2 - 10점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백낙청 외 옮김/창비

목차

제1장 르네쌍스

제2장 매너리즘

제3장 바로끄




제1장 르네쌍스

1. 르네상스의 개념

14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자연적•자연과학적 세계상이 본질적으로 르네쌍스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세계상의 형성을 가능케한 새로운 방향정립의 계기를 마련한 것이 중세의 유명론(Nominalismus, nominalism)이다. 하나하나의 사물에 대한 관심이나 자연법칙에 관한 연구, 그리고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자연주의적 감각은 결코 르네쌍스에 이르러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다. 15세기의 자연주의는 하나하나의 사물에 대한 개체적 파악이 이미 뚜렷이 나타나고 있던 고딕적 자연주의의 계속에 불과한 것이다. 


15 르네쌍스에 의한 자연의 발견이란 19세기의 자유주의가 지어낸 것이다. 자유주의가 자연적이며 자연을 사랑하는 르네쌍스상(像)을 중세와 대비시킨 것은 무엇보다도 낭만주의에 일격을 가하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부르크하르트가 '인간과 세계의 발견'을 르네쌍스의 업적이라고 말할 때, 그의 이 테제는 동시에 19세기의 낭만적 반동과 이러한 낭만적 반동이 중세를 빌미로 해서 떠벌렸던 프로파간다적인 방어자세에 대한 공격이었던 것이다. 르네쌍스에 와서 자연주의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다는 이론은 권위와 위계질서의 정신에 대한 투쟁, 양심과 사상의 자유라는 이념, 그리고 개인의 해방과 민주주의 원칙이 15세기의 소산이라는 주의주장과 그 근원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19 지금까지 보아온 개인주의적•자유주의적•심미주의적•관능주의적인 르네쌍스 개념의 특징들 중 어떤 것은 전혀 르네쌍스에 적용되지 않는 것이며, 어떤 것은 르네쌍스와 중세 말기에 똑같이 해당하는 것들이다. 중세말기와 르네쌍스에 순전히 역사적 경계선에 의해서라기 보다도 오히려 지리적•국민적 경계선에 의하여 갈라지는 듯하다.


20그러나 중세 말기에 들어서면서는 서양의 일반적인 봉건제도와 유럽 전반에 걸친 기사제도, 그리고 하나의 중세적 교회와 그 위에 바탕을 둔 단일한 기독교 문화 대신에 지역적으로 국한된 경제•사회형태를 지닌 한 국가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거나 도시중심적인 시민계급과, 도시 또는 국가라는 단위의 매우 제한된 경제적 이해영역, 지방 군주에 의해 지배되는 정치적 분권주의, 긜고 지역마다 상이한 온갖 언어들이 등장하였다. 이때부터 민족적•종족적 개념이라는 것이 분화적 요소로 두드러지게 전면에 나타나게 되고, 아울러 르네쌍스는 지금까지의 단일한 유럽 문화에서 이딸리아의 국민정신이 분리되어 부각되는 하나의 특수한 형태라는 양상을 띠게 되는 것이다.


22 르네쌍스와 함께 일어나는 공간 개념과 예술관의 변화가 아마 가장 두르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전체와 관련을 짓지 못하고 제각기 서 있던 고딕적 무대장면들이 르네쌍스에 가까이 오면서는 갑자기 예술적인 환영을 만들어내는데 적합치 않다고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공간이란 여러 요소들이 합쳐진 것이고 이 요소들은 다시 분해될 수 있다고 믿고 있던 중세에는 한 연극에 나타나는 여러 무대장면을 그대로 병립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무대에 있을 필요가 없는 배우들까지도 공연이 다 끝날 때까지 그대로 무대에 머무는 것을 허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르네쌍스에 와서는 이와같이 주의력을 분산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지게 되었다. 


2. 꾸아뜨로첸또의 시민적 예술과 궁정적 예술의 감상자층

39 지오또는 이딸리아에서 지연주의의 최초의 거장이다. 르네쌍스 시대의 저술가 빌라니와 보까치오 그리고 바자리까지도 지오도의 충실한 자연묘사가 동시대인에게 끼친 엄청난 영향을 강조하고 있으며, 지오또의 예술양식을 그가 등장했을 당시 아직도 지배적이던 비잔띤풍 예술의 경직성 및 인위성과 대조하고 있는데, 이러한 생각은 모두 충분한 근거를 지닌다.


62 이러한 동질성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고도로 무목적적이고 비실용적인 예술의 독자성이 점차 인식되고, 그 독자성이 공예품의 기계적 성격과 대조되면서부터이다. 이때부터 서서히 미술가와 공예가가 동일인이던 상황은 변화하고 화가는 지금까지 농이나 벽판, 깃대나 안장방석, 집시나 항아리에 그림을 그릴 때와는 다른 의식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그는 주문자의 희망에 구속되지 않고 고객을 위한 생산에서 상품생산으로 전환했다. 이러한 전환이 예술애호가, 전문감상자, 수집가의 등장을 위한 예술가측에서의 선결조건이었다. 수요자측에서의 전제조건은 형식주의적•비실용주의적인 예술관, 즉 아직 소박한 형태이기는 하나 그래도 이미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새로운 예술관이다.


3. 르네쌍스 예술가의 사회적 지위

86 예술가들에게는 인문주의자가 그들의 정신적 가치를 인정해주는 보증인이었고, 인문주의자들은 미술을 그들의 정신적 지배권의 기초가 되는 이념을 효과적으로 선전하는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호 결합관계로부터 오늘날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된 통일적인 예술 개념이 비로소 생겨났는데, 르네쌍스 이전까지만 해도 이것은 생소한 개념이었다. 조형예술을 문예와 전혀 다른 의미로 생각했던 사람은 플라톤만이 아니라, 고대 말기나 중세에도 이를테면 학문과 문학 사이나 철학과 예술 사이보다도 조형예술과 문학 사이에 더 밀접한 관계가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93 여기에 이르러 예술가는 더없이 높은 지위를 달성하는데, 이에 비하면 지금까지의 예술적 자유라는 일체의 개념은 유명무실한 것이 된다. 이때 비로소 예술가의 완전한 해방이 이루어지고, 예술가는 르네쌍스 이래로 우리가 알고 있는 '천재'가 된다. 이제 예술가의 사회적 상승에서 마지막 전환이 이루어지는데, 예술작품이 아니라 예술가 자신이 바로 존경과 숭배의 대상이 되고 유행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95 예술이 이미 자기고백이 되고 또 바로 주관적 표현임으로 해서 일반적인 인정을 받게 된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예술의 객관적인 진리내용을 운위하였다. 개성의 힘과 개인의 정신적 에너지 및 자발성은 르네쌍스의 위대한 체험이었다. 이러한 에너지와 자발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서의 천재는 르네쌍스의 이상이 되었고 이를 통해 르네쌍스 사람들은 인간정신의 본질과 현실을 지배하는 그것의 위대한 힘을 인식하였다.


98 천재는 완전히 표현될 수 없다는 개념에서 한 발자국만 더 나가면 세상이 몰라주는 천재가 되고, 동시대인의 부당한 평가를 후세인들이 바로잡으리라는 호소가 된다. 그러나 르네쌍스인들은 이 한 발짝을 결코 내디디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성공하지 못한 예술가들이 호소대상으로 삼은 후세 사람들보다 예술이해가 더 깊어서가 아니라, 당시 예술가들의 생존경쟁이 비교적 격렬한 형태를 띠지 않았기 때문이다. 


105 박식다재는 실제로는 중세적 이상이다. 꾸아뜨로첸또는 수공업적 전통과 함께 이러한 중세적 이상을 계승했으나, 꾸아뜨로첸또가 수공업적 정신에서 멀어져 갈수록 이러한 중세적 이상에서도 멀어지게 되었다. 르네쌍스 후기에 이르면 한꺼번에 여러 예술분야에 종사하는 예술가는 점점 줄어든다. 그러나 인문주의적 교양이상과 '보편적 인간'(uomo universale)이라는 이념이 승리하게 되자 전문화에 반대하는 정신적 경향이 또다시 득세하게 되어 다재다능을 숭상하는 경향으로 발전하는데, 이때의 다면성이란 이미 수공업적 성격이 아니라 딜레땅뜨적 성격을 띤 것이다.


109 인문주의자들은 소유과 사회적 지위에 대한 특권을 요구한 최초의 지식인이었고, 지식인의 오만과 자존심이라는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하나의 현상도 실패에 대비한 그들의 심리적인 자기방어였던 것이다. 상류계층은 사회적 지위향상을 위한 인문주의자들의 노력을 처음에는 고무•촉진해주었으나 결국에 가서는 억제하였다. 일체의 구속에 저항하는 자존심 강한 고양계층과 근본적으로 정신생활과는 거리가 먼 냉철한 경제인들 사이에는 처음부터 일종의 상호불신이 존재하였다. 플라톤 시대의 사람들이 쏘피스뜨들의 사고방식이 내포하고 있는 위험을 정확하게 감지했듯이, 르네쌍스의 상류계급 또한 인문주의적 운동에 대한 그들의 공감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뿌리뽑힌 자들임으로 해서 실제로 하나의 파괴적 요소를 형성했던 인문주의자들에 대해서 의구심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4. 친꾸에첸또의 고전주의

115 르네쌍스 전성기의 예술에서 가장 특징적이고 또 이 시기 예술양식의 형성에 결정적인 것은 미껠란젤로는 거의 전적으로 그리고 라파엘로는 많은 부분을 바띠깐을 위해서 일했다는 사실이다. 르네쌍스 전성기의 '위대한 양식'(maniera grande)은 오로지 바띠깐을 위한 예술활동 속에서만 발전할 수 있었고, 다른 곳에서 형성된 여러 예술 경향은 이 '위대한 양식'에 비하여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예외없이 촌스러운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로마 이외의 어느 곳에서도 우리는 이처럼 고상하고 배타적이며 교양과 학식이 철저히 배어있고 또 세련화된 형식문제들만을 위해 철저하게 몰두하고 있는 예술양식을 찾아보기 힘들다.


117 15세기의 자연주의적 노력은 16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그 결실을 맺는 것이다. 그러나 르네쌍스의 양식사적 통일성은 15세기의 자연주의가 친꾸에첸또로 직접적으로 이어지면서 완성되었다는 사실에서뿐만 아니라, 르네쌍스 전성기에 와서 고전주의적 예술로 발전한 양식화의 과정 또한 이미 꾸아뜨로첸또 중엽부터 시작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고전주의의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모든 부분의 조화'라는 미(美)에 대한 구정은 이미 알베르띠에게서 공식화되었던 것이다. 그는 예술작품이란 전체의 미를 손상하지 않고서는 전체 작품에서 어떤 한 부분을 떼어낼 수도 없고 무엇을 첨가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123 전성기 르네쌍스의 예술은 완전히 현세지향적이다. 이 예술은 종교적인 소재를 표현하는 작품에서까지도 그 이상적 양식을 자연적 현실과 초자연적 현실을 대비시킴으로써가 아니라, 자연적 현실의 사물들 자체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 ― 이러한 거리가 말하자면 시작적 경험의 세계 속에서도 사회생활에서의 엘리뜨와 대중 사이에 있는 것과 같은 가치의 차등을 낳는데 ― 를 창조함으로써 달성하고 있다. 예술에서 보이는 조화는 현실생활의 모든 투쟁이 배제된 유토피아적 이상이며, 그것도 민주주의적인 원칙이 아니라 전제주의적인 원칙의 지배 결과로 생겨난 이상인 것이다.


124 중세에는 비감성적 정신과 비정신적 육체 사이에 서로 융화할 수 없는 대립과 가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대립이 시대에 따라 더 강조되기도 하고 덜 강조되기도 했지만 사람들의 사고방식에는 항상 현존해 있었다. 꾸아뜨로첸또에 이르면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사이의 중세적 대립관계가 의미를 상실한다. 이 시대에는 아직도 정신의 중요성이 육체의 아름다움과 무조건 결합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육체의 아름다움을 배제하지도 않고 있다. 이러한 긴장관계는 전성기 르네쌍스에 이르면 완전히 사라진다. 


127 르네쌍스 이후 우리들은 하나의 회화나 조각품을 단 하나의 통일된 관점에서 파악한 현실의 집약적 표현, 다시 말해서 광범위한 세계와 여기에 맞서 대항하는 하나의 통일체로서의 주체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관계로부터 생겨나는 하나의 형식구조로 이해하게 되었다. 예술과 세계 사이의 이러한 극대성은 때로는 약화되기도 하였지만, 그후로는 한번도 소멸되지 않았다. 바로 여기에 르네쌍스의 진정한 유산이 존재하는 것이다.


제2장 매너리즘

1. 매너리즘의 개념

137 매너리즘(Manierismus, mannerism)이 예술사 연구의 전면에 부각된 것은 최근의 일이기 때문에 아직도 우리는 흔히 이 개념의 밑바닥에 놓여 있는 부정적 가치판단이 타당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고, 그리하여 이 예술 양식을 아무런 선입견 없이 순수한 하나의 역사적 범주로 파악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고딕, 르네쌍스, 바로끄, 고전주의 등과 같은 예술양식의 명칭에서는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이들 명칭이 본래 지니고 있는 가치평가가 완전히 제거되지만, 매너리즘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어서 이 양식기의 위대한 미술가와 문인을 '매너리즘'이라고 규정하기에는 어느 정도의 저항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검토하고자 하는 예술현상의 설명을 위해 이 개념이 하나의 유용한 범주가 되려면, 순수한 예술양식으로서의 매너리즘이라는 개념과 흔히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뜻의 매너리즘적인 것을 완전히 분리시켜야만 할 것이다. 여기서 구분되는 양식 개념과 가치 개념은 물론 예술사 발전의 어느 단계에서는 서로 일치하기도 하지만, 개념들 자체는 거의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것이다.


137 고전기 이후의 예술을 몰락현상으로 보고 매너리즘의 예술제작을 거장을 노예적으로 모방한 기계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에 들어와서이며, 이러한 생각이 제일 먼저 등장한 것은 벨로니가쓴 안니발레 까라치의 전기에서이다. 바자리에게 '마니에라'(maniera)라는 말은 아직도 예술적 특성, 즉 역사적•개인적 또는 기술적으로 규정된 표현방식, 그러니까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양식'(Still, style)을 의미했다. 여컨대 그는 '그란 마니에라'(gran maniera, 위대한 양식, 장대한 양식 - 옮긴이)라는 말을 사용했고 이 말을 어디까지나 긍정적인 의미로 썼다. 라파엘라 보르기니도 이 말을 완전히 긍정적인 의미로 쓰는데 그는 몇몇 예술가를 두고 '마니에라'가 없다고 유감을 표명하고 있었으며, 여기에서 이미 근대적 의미에서의 양식(스타일)과 양식의 결여라는 구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니에라(매너)라는 개념을 가식적이고 진부하며 일련의 공식에 도입시킬 수 있는 성질의 예술양식이라는 관념과 처음으로 결부시킨 것은 벨로니와 말바지아 등 17세기의 고전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매너리즘과 더불어 근대 예술발달사에 등장하는 예술 양식상의 균열을 눈치채기 시작했고 1520년 이후의 예술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 고전주의로부터의 소외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141 매너리즘은 최초의 근대적 예술양식, 즉 문화적 문제와 직결되어 있으며 전통과 혁신의 관계를 이론적•합리적 수단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파악한 최초의 예술양식의 방향이기도 하다. 여기서 전통은 다만 너무 격렬하게 밀어닥치는 새로운 것, 즉 생의 원칙이자 파괴의 원칙으로 느껴지는 일체의 새로운 것에 대한 하나의 방벽에 불과하다. 매너리즘의 고전주의적 예술모방이 다가오는 혼돈으로부터의 도피이고, 매너리즘 형식에 나타나는 지나친 주관적•신경질적인 긴장은 형식이 삶과의 투쟁에서 무력해지고 예술이 영혼 없는 아름다움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표현이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매너리즘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142 뵐플림 역시 매너리즘을 자연스럽고 건강한 발전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방해요소, 말하자면 르네쌍스와 바로끄 사이에 등장하는 불필요한 간주곡쯤으로 생각했다. 내용과 형식, 미와 표현 사이의 갈등을 자기 자신의 절실한 문제로 체험해본 시대만이 비로소 매너리즘에 대해서 공정한 평가를 내릴 수 있고 또 르네쌍스 및 바로끄와 구분되는 매너리즘의 특성을 추출해낼 수 있다.


143 매너리즘은 이러한 공간의 르네쌍스적인 구조를 해체하고, 하나의 장면을 외면적으로만 서로 분리했을 뿐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서로 다르게 조직된 여러 공간부분으로 분해하여 표현하는 데서 출발한다. 매너리즘은 한 그림의 부분부분이 제각기 상이한 공간가치, 상이한 기준, 상이한 운동 가능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예컨대 한 부분에는 공간절약의 원칙이, 다른 한 부분에는 공간낭비의 원칙이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145 매너리즘이 당시의 정신주의적 예술방향과 육감적 예술방향의 갈등의 한 표현으로 생겨났다면, 바로끄는 자연발생적인 감정의 바탕 위에서 이와같은 갈등의 잠정적인 해소를 뜻하는 것이었다. '로마 약탈' 이후 바로끄적 양식 경향은 점차 매너리즘에 의해 밀려나게 되었고 그후부터 60여 년간은 매너리즘이 예술발전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2. 정치적 현실주의의 시대

161 1541년 레겐부르크 회의에서 꼰따리니의 종교화해 협상이 결렬됨으로써 카톨릭 개혁운동의 '인문주의적' 제1기는 종말을 고한다. 개명되고 인간적이며 관용적이었던 싸돌레또, 꼰따리니, 뽈레 들의 시대도 그 수명을 다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161 1542년에는 종교재판제도가, 1543년에는 출판검열제도가 실시되었고 1545년에는 뜨렌또 종교회의가 열렸다. 레겐스브루크에서의 실패는 카톨릭교회로 하여금 전투적인 태도를 취하게 했고 권위와 권력에 의해서 카톨릭의 재건을 기도하도록 만들었다.


161 이러한 발전방향의 전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예수회의 창설로서 이는 신앙심의 엄격주의와 교회적 기율의 모범이 될 것이었으며 전체주의 사상을 최초로 실현한 것이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원칙을 내걸고 나온 이 예수회는 현실 정치 이념의 최고의 승리를 뜻하는 것이자 이 세기의 정신적 기본 특징을 가장 날카롭게 표현해주는 것이었다.


162 정치적 현실주의의 이론과 강령을 최초로 전개한 사람은 니꼴로 마키아벨리이다. 그에게서 우리는 정치적 현실주의의 이념을 두고 씨름했던 매너리즘의 전 세계관을 이해하는 열쇠를 발견할 수 있다. 


163 지배자와 피지배자, 주인과 종,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존재한 이래로 언제나 힘있는 자와 힘없는 자를 위한 두 개의 상이한 도덕적 기준이 있어왔다. 마끼아벨리는 단지 이러한 도덕의 이원성을 사람들에게 의식시키고, 국가의 정사에서는 사생활과 다른 행동기준이 통용되며 무엇보다도 성실과 정직이라는 기독교적 도덕원칙이 국가와 군주의 행동기준을 절대적으로 구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정당화하려고 한 최초의 인물이었을 뿐이다. 서양역사에서 마끼아벨리즘의 이중도덕론에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중세의 문화를 둘로 분열시켰고, 유명론과 자연주의가 도래하게 한 '이중진리'의 학설뿐일 것이다.


173 르네쌍스에서 자연은 예술적 형식의 근원이었고, 예술가들은 자연에 산재해 있는 미의 요소들을 수집•정리하는 '종합'의 행위를 통해 형식을 획득하였다. 그러니까 예술의 패턴은 비록 주관에 의해 조직되지만, 그 원형은 이미 객관 속에 있었다. 매너리즘은 이러한 예술의 모사설을 파기한다. 새로운 이론에 의하면 예술이 '자연을 따라서' 형식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 자체가 '자연과 함께' 창조를 수행한다는 것이다.


178 예술가들의 이러한 신분상승과 상류층의 예술계 참여는 비록 우회적으로나마 개개 예술에서의 기술의 독자성을 지양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나아가서는 예술은 원칙적으로 하나라는 이론을 낳게 하였다. 페데리고 쭈까리나 로마쪼와 더불어 예술에 관한 저술에서도 직업적인 예술가들이 다시 전면에 등장하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대세는 역시 비직업적인 예술가들이 예술비평을 독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좁은 의미에서의 예술비평, 다시 말해 정도의 차는 있지만 작품 하나하나의 예술적 가치를 기술적•철학적 이론과는 독립하여 논하는 전문분야로서의 예술비평은, 물론 예술사의 다음 시기에 가서야 처음으로 중요성을 갖게 되지만, 그 시초에서부터 이미 비예술가의 전담소관이었던 것이다.


191 예술에서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그대로 모사한다든가 자신들의 사회적 환경을 묘사하는 것은 대체로 보수적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사회계층, 말하자면 사회에서 그들의 위치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억압되어 있거나 상승하려는 계층은 그들이 목적으로 설정한 생활상태의 묘사를 보기 원하지, 그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빠져나오려고 하는 현재 생활 상태의 묘사를 원하지 않는 법이다. 소박한 생활에 대해 감상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란 일반적으로 그러한 생활을 넘어서는 사람들이기 쉽다. 


3. 기사도의 두번째 패배

197 문학사에서 매너리즘을 본격적으로 분석•연구한 저서는 아직도 나와 있지 않으며 흔히는 마리니즘(Marinism, 17세기 이딸리아 시인 마리니에서 유래한 과장된 문체)이라든가 공고리즘(Gongorism, 17세기 에스빠냐 시인 공고리아 이 아르고떼풍의 멋을 부린 문체) 또는 그 비슷한 경향을 거론하는 데 여전히 머물고 있다. 그러나 이 방면의 본격적 연구는 의당 세르반테스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세르반테스에게서 우리는 현실에 대한 이중적인 감정, 현실과 비현실의 구분이 확연히 그어지지 않는 점 등말고도 매너리즘의 다른 여러 특징들, 때로는 우습게 때로는 고상하게 보이는 주인공의 이중성격 등을 가장 잘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203 셰익스피어가 군주제나 시민층 또는 하층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든지간에 그 자신이 그처럼 많은 이득을 보았던 국가적 흥륭과 경제적 번영의 시기에도 비극적인 세계관과 깊은 비관주의를 작품 속에 표현했다는 사실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의 강한 사회적 책임감과 세상일들이 그렇게 다 잘되어가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그의 확신을 잘 알 수 있다.


213 셰익스피어가 상대한 관객은 경제적으로나 신분 및 교양 면으로나 매우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즉 그의 관객 속에는 선술집을 찾는 사람들과 교양있는 상류계급 사람들, 그리고 특별히 교양이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완전히 무식하지도 않은 중산층 사람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런던 극장을 메운 관객은 지난날 유랑극장에 모여든 관객과는 전혀 성격을 달리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민중극장의 관객, 그것도 낭만주의자들이 말하는 포괄적 의미에서의 민중극장의 관객이었다.


217 엘리자베스 시대의 사람들은 마치 오늘날 우리가 영화관을 가듯이 극장에 갔고, 그리고 비록 그들의 정신적 요구가 서로 다를지라도 극장 공연에 대한 요구에서만큼은 근본적으로 같은 입장이었다. 상이한 계층을 모두 즐겁게 해주고 감동시켰던 공통적 기준이 바로 셰익스피어 예술을 낳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그의 예술을 가능케 하였고, 또한 셰익스피어 예술의 가치는 아닐지라도 그 특성을 규정했던 것이다.


제3장 바로끄

1. 바로끄의 개념

233 하나의 미술양식으로서 매너리즘이 전유럽에 골고루 퍼져 있던 분열된 생활감정을 반영한 것이라면, 바로끄는 본질적으로 좀더 동질적인 성격을 띠면서도 유럽 각 문화권에서 제각기 다른 형태로 나타난 세계관의 표현이다. 매너리즘은 비록 그것이 중세의 기독교적 예술보다 훨씬 좁은 범위에 한정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고딕과 같은 범유럽적 현상이었다. 이와 달리 바로끄는 국가나 문화권에 따라 서로 상이하게 등장하는 다양한 예술 경향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하나의 공통분모로 묶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234 17세기 예술이 총괄적으로 바로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바로끄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 18세기에는 아직도 그것은 당시의 고전주의적 예술이론의 관점에서 보아 무절제하고 혼란스러우며 기괴하게 느껴졌던 예술현상에만 적용되었다.


235 오늘날 우리가 아는 바로끄 예술의 새로운 해석과 새로운 가치평가는 주로 뵐플린과 리글의 업적이며, 이는 인상주의라는 예술사조의 수용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뵐플린이 만든 바로끄의 여러 범주는 인상주의의 여러 개념을 17세기 예술에 그대로 적용한 것에 불과했다.


236 뵐플린은 다섯 쌍의 대립 개념을 바탕으로 하여 그의 체제를 발전시키고 있는데, 각 쌍의 개념에는 각각 르네쌍스와 바로끄의 특징이 서로 대립되어 있고, 그중 단 한 쌍의 대립 개념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좀더 엄격한 예술관으로부터 좀더 자유로운 예술관으로 나아가는 발전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범주들을 열거하면 1) 선(線)적인 것과 회화적(malerisch)인 것, 2) 평면적인 것과 입체적인 것, 3) 폐쇄적인 것과 개방적인 것, 4) 명확한 것과 불명확한 것, 5) 다양한 것과 단일한 것이다. 


236 '회화적인 것'에 대한 추구, 즉 조각적이고 선적이며 견고한 형식으로 움직이는 것•부동하는 것•파악하기 힘든 것으로 해체시킨다든가, 제한이 없고 측정할 수 없으며 무한한 것의 인상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한계나 윤곽을 지워버린다든가, 지속적•정체적•객관적 존재를 생성이나 기능으로, 주관과 객체의 상호작용으로 변화시킨다는가 하는 것 ― 이것이 뵐플린의 바로끄 개념의 기본 특징을 이루고 있다.


238 뵐플린의 말에 따르면 "궁극적으로 바로끄가 지향하는 바는 화면을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독립적 세계가 아니라 그냥 스쳐지나가는, 그러나 관람객이 한순간이나마 참가할 수 있는 영광을 지니는 장면으로 보이게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화면 전체를 의도가 없이 그리 된 것으로 보이도록 할 것을 노리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바로끄 예술은 '영화적'이다.


241 어느 한 시기 전체를 지배하는 통일적 '시대양식'이라는 말을 우리는 결코 써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시대나 예술적으로 생산적인 사회그룹의 수효만큼이나 상이한 양식의 수도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주도적인 예술생산이 단 하나의 문화담당계층에 의해서 유지되었고 이들의 작품만이 보존되어 있는 시대의 경우에도, 그들 이외의 다른 계층의 예술생산품이 혹시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동시에 상실된 것은 아닌지를 검토해보아야 할 것이다.


2. 궁정적ㆍ카톨릭적 바로끄

245 16세기 말경, 이딸리아 예술사에는 하나의 두드러진 방향전환이 일어난다. 차갑고 복잡하며 주지주의적인 매너리즘이 물러나고 그 대신 관능적•감정적이고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양식인 바로끄가 들어선다. 이 양식은 전 시대의 정신귀족주의적 배타성에 대한 근본적으로 민중적인 예술관의 승리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지배적인 교양층이 주도하긴 했어도 좀 더 광범위한 대중을 고려한 예술관의 승리를 의미했다. 까라바지오의 자연주의와 까라치(Carracci) 일가의 주정주의는 바로 이러한 예술관의 두 방향을 지배한다.


246 르네쌍스와 중세에는 순수하게 종교적 목적을 위해 생산된 예술작품과 세속적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예술작품 사이에 많은 중간적 형식이 존재하였지만, 까라치가의 양식이 완성되면서부터는 그 둘 사이에 근본적인 분리가 이루어진다. 카톨릭교회의 그림은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가 확립되고 공식화되었다. 수태고지, 예수의 탄생, 세례, 승천, 십자가,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 정원사로서의 예수 그리고 그밖의 수많은 성서장면은 오늘날에도 성화의 일반적 모델로 남아 있는 하나의 형식을 획득하는 것이다.


3. 시민적ㆍ개신교적 바로끄

292 미술품 매매업의 형성과 독립화는 근대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발전은 무엇보다도 한 사람이 한 장르만을 취급하는 화가의 전문화를 초래했는데, 그 까닭은 화상들이 그들의 경험에 비추어 가장 잘 팔리는 종류의 그림만을 화가들로부터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어떤 화가는 동물화만을, 어떤 화가는 배경의 풍경만을 그리는 일종의 기계적인 분업이 생겨났다.


292 예술가들도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비개성적인 고객들을 위해 일하는데 익숙해지기 시작했는데, 이들 고객들에 대해 화가가 아는 것은 어제는 풍속화를 좋아했는데 오늘은 역사화를 구한다고 하는 정도 뿐이다. 미술품 매매는 또한 예술고객층을 동시대의 예술로부터 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화상들은 오래된 미술품을 즐겨 선전했는데, 그것은 이미 정확히 지적된 바와 같이 이러한 예술품들은 수적으로 한정되어 있고 따라서 값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말하자면 가장 위험성이 적은 투자대상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292 고객들이 미술가에게 주문하기보다는 화상에게서 그림을 구입하는 데에 익숙해지면 질수록 그림값을 마음대로 매길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드디어는 미술품 매매업에 의해 모사품이나 위조품이 시장에 범람하게 되고 이로써 진짜의 값이 마구 떨어지게 되었다.


296 루벤스가 이렇게 된 데에는 그의 예술적 재능 못지않게 조직가적 재능도 큰 역할을 하였다. 조직가로서의 재능이 없었더라면 그는, 그가 언제나 정확하게 처리하였던 물밀듯 밀려오는 그 수많은 주문을 다 완수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매뉴팩처의 작업방법을 미술생산의 조직에 적용함으로써, 그리고 전공에 따라 조수 화가들을 세심하게 선택하고 그들의 능력을 합리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이러한 주문들을 처리하였다.


296 라파엘로의 아뜰리에에서 먼저 철저하게 적용되었고 예술적 구상과 실제 작업을 근본적으로 분리시켰던 이같은 미술제작의 합리적 조직화는, 한 그림의 예술적 가치는 이미 초벌 그림에서 유감없이 발휘되고, 여기에 나타난 생각을 최종형태로 옮기는 일은 부수적인 의미밖에 가지 못한다는 생각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상주의적 예술관은 궁정적•고전주의적 바로끄의 이론과 실제에서는 지배적이었지만 홀란드 회화의 자연주의에서는 더 이상 통용되지 못했다. 홀란드의 자연주의에서는 예술가의 손에 의한 처리, 회화적인 필적과 화필의 터치, 그리고 화가가 캔버스에 직접 손을 댄 흔적 하나하나가 극도로 중요한 의의를 가졌고, 따라서 이러한 것들을 순수하게 지키려는 소망은 분업적 작업방법에 처음부터 한계선을 그었던 것이다.



298 렘브란트(1606~69)는 초상화가로서의 초기의 활동기를 거친 후 바로 루벤스의 노년기 양식에 해당하는 발전단계에 도달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회화를 직접적•개인적인 전달로 보았다. 다시말하면 현실을 모든 것에 혼을 불어놓고 모든 것을 자기화하는 시각의 산물이 되게 하는 '인상주의'의 형식, 그때마다 새로이 획득되는 어떤 근원적인 인상주의의 형식이 곧 회화라는 것이다. 


298 리글은 예술사를 크게 두 시기로 나누는데, 첫번째 원시적 시기에는 모든 것이 객체인 데 반해 두번 째는 현재적 시기에는 모든 것이 주체라고 한다. 이 명제에 의하면 고대에서 바로끄까지의 발전과정은 첫번째에서 두번째 시기로의 점진적인 이행과정에 불과하며, 17세기의 홀란드 회화는 일체의 객관적 사물이 주관적 의식의 단순한 인상이나 체험으로 보이는 현대적 상황으로 나아가는 도상에서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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