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야기I,II | 04 신과 철학자들-종교적인 중세 철학


세상의 모든 철학 - 10점
로버트 솔로몬 외 지음, 박창호 옮김/이론과실천



강유원: 철학이야기I,II | 2008

일시: 철학이야기I: 2008년 04월 07일 ~ 07월 28일, 철학이야기II: 2008년 09월 22일 ~ 12월 29일

교재 : 로버트 솔로몬 외(지음), 《세상의 모든 철학》, 이론과실천


강의 내용을 필사하지는 않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책 본문의 내용을 정리하여 올린다.


철학이야기 II

16강 09/22 근대철학의 시작, 루터

17강 09/29 르네상스 그리고 베이컨, 홉스, 마키아벨리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자크 르 고프, 《중세의 지식인들》



16강 09/22 근대철학의 시작, 루터

근대철학의 시작, 루터

278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사이의 분열은 철학적 의견의 불일치보다는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긴장에 의해 야기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방 교회의 경우에는 더욱 상처 깊은 분열이 일어났다. 그것은 바로 신교도에 의한 종교개혁이었다.


278 종교개혁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탁발수도승이었던 마르틴 루터(1483~1546년)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교회의 문 위에 반박문을 내건 데서 시작되었다.


279 루터의 가장 즉각적인 철학적 관심사들 중의 하나는 서양 전통의 영원한 문제인 악과 속죄의 문제였다. 사도 바울로 이래,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문제는 죄에 대한 용서였다.


279 루터의 95개 반박문은 특히 교회의 이러한 행태에 반대하기 위함이었다.


279 면죄부는 교회가 특정한 개인에게 죄의 사면을 보장하는 것으로서, 때로 기도나 의식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흔히 성직자들에게 돈을 주기 위해 이용되었다. 교회에 따르면, 면죄부는 한 개인의 죄를 없애주기 때문에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었다.


279 면죄부는 죽은 친척들의 죄를 없애는데도 사용될 수 있었다.


279 면죄부 판매에 가정되어 있는 생각은 (기도를 낭송하는 것이든 자선을 하는 것이든) 인간의 행동이 그의 구원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루터의 의견으로는, 이런 생각은 신에게 뇌물을 주거나 혹은 구원을 살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똑같았다.


280 루터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 육체적 욕망과 정신에 대한 갈망 사이에서 분열된 상태로 태어났다. 더욱이 그들은 죄인으로서 절대적으로 천벌을 받을 만하다. 신의 정의에 의해 그들은 지옥에 맡겨져야 한다. 중세의 가톨릭 신학과 비교하여, 루터는 죄의 심각성을 훨씬 더 강조하였으며 지상의 죄를 벌할 수 있는 신의 권리를 강조하였다. 루터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를 대신 받기 위하여 인간 의 모습으로 태어났으며,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간의 누적된 죄악에 대한 벌이었다.


280 중세 세계는 신을 최고의 존재로 보았으며, 신의 영원한 지위는 절대적 실체라고 강조하였다. 많은 스콜라 철학자들은 신의 신성한 지성과 자연 세계에 대한 지성적인 고안을 역설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중세의 사상가들인 둔스 스코투스와 오컴의 월리엄처럼) 루터는 신의 의지를 강조하였다. 루터에게 신은 근본적 의지에 차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루터는 구약성서가 그러는 것처럼 다시 신의 분노를 강조한다. 루터에 따르면, 인간 역시 의지에 차 있으며 한 개인 은 하나의 의지적 단일체이다.


280 루터가 말한 육체와 정신의 내적인 전쟁은 종국에는 절망에 이른다. 루터는 신의 율법은 안내의 지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죄인의 자만심을 부수고 그 절망을 견고하게 만드는 '망치'와 '모루'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절망은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죄인이 절망 속에서 무너질 때, 신은 그 안에서 속죄를 행하게 한다. 은총은 바로 그 절망의 순간에 찾아온다.


281 신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신의 사랑이 솟아 올라 세상을 지배하며, 그는 용서할 사람을 자유롭게 선택하여 은총을 베푼다. 신의 용서 덕택으로 우리가 신과 화해될 때, 우리는 은총을 받는 상태가 된다. 


281 구원에 대한 루터의 설명은 면죄부 관행에 대한 공격처럼, 인간 행위의 역할에 대하여 그리고 구원을 얻으려는 노력에 대하여 명백한 함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인간의 노력과 '선한 일들'은 구원에서 아무런 역할도 못하였다. 루터는 인간의 공덕이 신의 용서와 관계가 있다는 중세의 견해를 부정하였다.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 루터에 따르면, 인간은 오직 신앙에만 힘써야 한다. '신앙만이 가치가 있으며' '신앙이 축복을 만든다'는 구호가 루터 사상의 가장 기본적인 금언이다.


282 구원을 위해서는 신앙만이 중요하다는 루터의 주장은 또한 성사에 관한 가톨릭의 교리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성사는 신부나 주교의 중재를 통해 수행되는 의식으로서, 은총을 받으려는 사람들에게 은총을 부여하는 힘을 가진 것으로 믿어졌다. 가톨릭 교리는 성사가 은총을 받는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여겼을 뿐만 아니라 구원에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282 루터는 가톨릭 교리의 이런 두 가지 특성을 부정하였다. 그는 의식만으로 은총을 자동적으로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하고, 은총을 받을 사람은 그럴 만한 올바른 내면적인 마음을 지닐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다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서 명백히 드러나는 '내면적인 것'의 강조가 종교철학 전면에 나타나게 되었다.


282 신앙만이 요구될 뿐이었다. 


282 루터는 성사와 관련된 또 다른 가톨릭 교리도 마찬가지로 거부하였다. 그것은 바로 고해성사에서의 신부의 역할이었다.


283 루터에 따르면, 신앙을 가진 사람은 신과 올바른 관계에 있게 되며,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신이 그들을 구원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는 축복을 받는다고 하였다. 가톨릭 교리에 따르면, 구원받을 것을 가정하는 것은 주제 넘은 행동을 하는 죄이다. 하지만 루터는 신앙에 차 있는 사람은 신의 자비를 신임할 수 있고 그리고 신임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교도는 자신이 그리스도교도라는 사실을 뽐내거나 자랑스러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283 가톨릭교 안에서 굳어져버린 교회 조직의 성직자 계급으로부터 사제를 끌어내리기를 주장하였을 때, 루터는 구원의 보편적 가능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는 그러한 위기 질서의 필요성과 권위 모두를 부정하였다. 교황과 공의회 모두 종교적 문제들에 관해서 틀릴 수 있으며, 개인들은 신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사제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루터에 따르면, 다른 사람을 신과 조화되게끔 돕는 그리스도교도는 모두 사도들의 후계자이며, 사제가 아니라 오직 성서만이 종교적 문제들에 관한 궁극적인 권위일 뿐이다.


284 프랑스의 종교개혁가인 장 칼뱅(1509~64년)은 루터와 달리, 교회제도와 신학체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284 칼뱅은 예정설에서 죄에 대한 신의 역설적인 관계를 조목조목 설명한다. 


284 칼뱅은 신이 구원받을 사람들과 영원한 벌을 받을 사람들을 미리 선택해서 정해두었다고 주장하였다. 


285 성서가 신이 선민의 죄를 대속해주는 중심적인 수단이기는 하지만, 칼뱅은 신의 은총을 위한 매개체로서 교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반종교개혁, 에라스무스와 그 외 사람들

288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 사이의 전쟁은 그 후 6세기 동안 유럽을 분열시켜놓았으며, 매우 공격적이고 많은 분야에서 충돌을 야기하는 학문으로서의 근대 철학의 출현은 이 쓰라린 시기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을 것이다.


291 모어는 에라스무스와 더불어 교회를 통일하려는 운동을 벌였으며 그리스도교의 학문적 연구를 그리스 고전의 지혜를 향해 열어놓았다. 


291 다음 2세기 이내에 종교는 유럽인들의 삶을 지배하던 중심 역할을 잃게 된다. 




17강 09/29 르네상스 그리고 베이컨, 홉스, 마키아벨리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베이컨, 홉스, 마키아벨리, 그리고 르네상스

291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은 이미 르네상스에 의해 변화된, 개인이 강조되는 지적 배경에서 나타났다. 르네상스 혹은 '재생'은 르네상스를 열렬히 옹호하는 이들의 말처럼 '새롭게 시작된' 시대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재생, 열광, 그리고 실험의 시대였다. 


292 역사적 문맥에서 우리는,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앗아간 페스트(흑사병)가 지나가고 많은 것을 파괴한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백년 전쟁이 종식된 뒤에 따라온 흥분을 이해할 수 있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 는 그토록 무시무시했던 시기에서 벗어나 제자리로 되돌아 오는 시기로 볼 수 있다. 봉건제도는 거의 무너졌으며 새로운 상업주의와 모험심이 유럽을 지배하였다. 세련되고 교양을 갖춘 시민계급의 새로운 세속적 이상(理想)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292 중세와 근대를 가르는 단 하나의 경계선이란 없으며, 르네상스가 양쪽 시대 사이에 딱 맞아 떨어지지도 않는다. 교과서들은 편의를 위해 1500년에 금을 긋지만, 르네상스라는 전환의 시기는 14세기 중엽부터 적어도 1600년까지 걸쳐져 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철학상을 어떻게 분류하느냐 하는 실로 무익한 논쟁을 벌일 수도 있을 것이다. 르네상스는 우선 무엇보다도 하나의 문학예술 운동이었다.


292 인문학은 기술과 수학의 발전에 의해 촉진된 과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도 포함하고 있었다. 따라서 르네상스는 가장 극적인 과학혁명으로도 정의되어야 마땅하다.


293 르네상스는 실로 고전과 고전 철학으로의 희귀였다. 그럼에도 고대의 가장 유명한 인물, 즉 위대한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공격적이었다.


294 아리스토텔레스는 또한 정치학에서도 지배적이었고, 점차 사라져가는 그리스 도시국가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찬은 그러한 사회가 실제적이었거나 혹은 가능했던 시대 이후에도 오랫동안 하나의 이상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긍정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의 중심사상은 국가와 정부당국의 일차적인 목적은 도덕적 인간을 양육하는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정치와 덕, 정치적 수완과 윤리학은 함께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고귀한 견해가 거부된 것은 그다지 찬미할 만하지 못한 충격적인 르네상스의 한 특징이다.


295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르네상스의 가장 유명한 비판가들 중에서 3명만 언급하면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 년), 토머스 홉스(1588~1679년), 그리고 거의 1세기 전에 태어난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년)가 그들이다.


295 홉스는 이 중의 중요성을 지닌다. 첫째는 베이컨의 친구이자 동료로서 새로운 과학을 위한 이정표를 만든 또 하나의 인물이자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우주론에 대하여 철저히 비판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둘째는 가장 영향력 있는 근대 정치 이론을 설계한 사람들 중의 하나이자, 인간의 '자연적인' 사회성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거세게 반대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295 그의 악명 높은 논문인 『군주론』은 정치에는 어떠한 도덕도 없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전쟁 의 기』에서 그는 전쟁을 국가들 사이의 관계에서 통상적인 것으로 보았다. 마키아벨리는 국가는 갑자기 사태가 돌발해서야 훈련받지 않은 군대를 성급히 모을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준비하고 전략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고 하였다. 실로 마키아벨리와 홉스에 의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및 윤리학과의 결별은 궁극적으로는 과학에서 베이컨이 시작한 반란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었다


296 베이컨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경험보다 이성을 더 신뢰하였다.


296 그는 또한 자연에 대한 인간의 궁극적인 지배권으로서 과학을 옹호하였다. 이는 「창세기」에서 약속된 바로서, 신의 작품인 자연에 대한 연구이자 계시의 한 원천으로서의 마치 신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당한 일이었다.


297 과학자가 아닌 형이상학자로서의 토머스 홉스는 세계에 대한 순수하게 물질주의적이고 기계적인 모델을 발전시켰다. 즉, 세계는 단지 '운동하는 물질' 일 뿐이다.


297 홉스가 자신의 자연상태라는 모델을 말 그대로의 가설로서 의도했는지 아니면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기 위한 하나의 사유실험으로 의도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바에 따르면, 후자의 경우가 더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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