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20분 | 07 발칸의 역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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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20분 | 발칸의 역사 3 [원문보기]

Posted on 2016년 10월 10일


발칸의 영토와 주민들

지리

이베리아 반도를 지켜주는 피레네 산맥이나 이탈리아 반도의 통로를 지켜주는 알프스 산맥과 달리 발칸 산맥은 외부의 침입을 막아주지 못하여 북쪽과 동쪽으로부터 접근하고 공격해오는 데 쉽게 노출되어 있다.

발칸 내부의 교통망이 발달하지 않았으며, 강들도 항행에는 유리하지 않은 반면 외부와의 연결은 수월하다.

지리적 조건이 교역과 통신에 불리하므로 행정권을 행사하는 데 어려움이 있고 이는 통치비용의 문제와 직결된다.


농촌의 생활세계

특유의 생활세계를 가지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 지배 이후 기존의 토착지주가 사라졌으나 제국 지배 2~3세기 이후에는 자율적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도시화

오스만 정부는 15세기말 공공단지를 조성했고, 지배 초기에는 발칸의 도시화 정도가 전반적으로 높았다.

“도시는, 국가가 세금을 징수하고, 교역을 관장하고, 소금과 같은 생활필수품의 전매권을 확보할 수 있는 행정의 중심지”

진정한 근대 산업도시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잘 정비되고 관리된 도로의 부족, 관료주의라는 장애, 인쇄매체와 과학지식의 확산을 금하는 종교적 제약, 마케도니아의 정치투쟁






페르낭 브로델의 《지중해의 기억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상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하



오늘은 제1장 발칸의 영토와 주민들을 읽겠다. 양이 40페이지쯤 되는데 이 책이 대체로 각 챕터가 40페이지정도씩 된다. 그래서 중요한 챕터는 두번으로 나누어서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한번에 하려고 한다. 1장을 펴면 페르낭 브로델의 "산맥이 우선이다" 라는 말이 나온다. 산맥, 중요하다. 《발칸의 역사》 다음에 읽으려 하는 책이 《지리의 힘》인데 이 책에서는 산맥의 힘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특히 한반도가 우리는 험악한 산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해양에서 대륙으로 나아가거나 대륙에서 해양으로 나아갈 때 거칠 것 없는 산맥이 없다, 장애물이 되는 산맥이 없다고 얘기하고 있다. 새삼스럽게 한반도라는 지형을 다시 보게 된다. 


발칸이라는 지형은 어떠한가. 지리정보를 다시 보면 발칸 산맥의 위치는 유럽과 아프리카의 지리적 경계를 따라 생겨난 것인데 "이베리아 반도에서 동쪽의 남동부유럽 산맥으로 굽이쳐 흐르다 나중엔 소아시아 및 중앙아시아 산맥과 이어진다." 발칸 산맥의 남쪽이 이른바 발칸 지역인데 "기름진 농토도 적거니와 토양도 척박하고 비도 자주 오지 않아, 북쪽의 상황과는 아주 판이하다." 이베리아 반도를 지켜주는 것은 피레네 산맥이고 이탈리아 반도의 통로를 지켜주는 것은 알프스 산맥과 피레네 산맥과는 달리 "발칸 산맥에는 외부의 침입을 막아주는 장벽이 없어 북쪽과 동쪽으로부터 접근하고 공격해오는데 쉽게 노출되어 있다." 이게 발칸 지역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지리적 요건이다. 북쪽은 서유럽 지역에서 오는 것이고, 동쪽은 오스만 투르크 지역에서 오는 것. 발칸 지역이 끊임없이 분쟁 지역으로 될 수 밖에 없는 가장 중요한 지리적 요건이 바로 "북쪽과 동쪽으로부터 접근하고 공격해오는데 쉽게 노출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발칸 반도는 "반도 내 지역들보다는 오히려 반도 외곽 지역과 교신하기가 더 용이할 때가 많다." 그런 점을 잘 봐야 할 것 같다. 크로아티아 달마치야의 해안도시인 두브로브니크 이 지역은 크로티아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륙에 있는 베오그라드보다도 베니스와 더 밀착되어 있다. 즉 바다를 통한 교역이 더 잘되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발칸반도 안의 지역들끼리는 서로 연결이 잘 안되는 대신에 외부하고는 더 쉽게 연결이 잘되어 있다. 굉장히 중요한 지점. 그리고 이 지역에서는 당연히 수분이 거의 고갈되어 지형이 매우 메말라 있기 마련이고, 가장 비옥하다고 알려진 평원도 가뭄을 겪는다. 그리고 지중해성 기후대이기 때문에 여름이면 강이 말라붙어 암석투정이의 계곡이 그대로 드러난다. 가장 중요한 건 유럽의 그 어느 지역보다도 가뭄이 심한 곳이다 라고 되어 있다. 발칸반도 그러면 그리스, 예전에 희랍철학을 말할 때 아테나이, 소아시아의 밀레토스, 왜 그리스 철학이 밀레토스에서 시작되었나를 말할 때 지리적인 여건이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등장한다. 아테나이 같은 경우는 발칸 지역에 속해있다기 보다는 지중해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페르낭 브로델의 《지중해의 기억》을 읽어보면 지중해가 과연 이 지역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그런 점에서 발칸 반도에서 중요한 건 발칸 산맥. 그리고 하천이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 까닭은 현대 이전만 해도 육로보다는 수로를 통한 운송이 비용도 싸고 편했"다. 예전에는 그랬는데 발칸 지역은 과연 그러한가. 그렇지 않다. "서유럽의 라인강과 론강, 동류럽의 비수아강과 드네프르강에 비견할 만한 하천이 하나도 없다. 발칸의 강들은 모두, 겨울에 퍼붓는 억수보다 더 많이 쏟아질 경우에는 물살이 너무 빠르거나, 그렇지 않으면 가까운 해안선을 벗어나 하염없이 구불구불 흐르기 때문에 항행에 부적합해, 사바강, 바르다르강, 알리아크몬강과 같은 주요 하천도 교역과 통신에는 제한적으로만 이용되고 있다." 라고 했다. 강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육로로 뭔가를 하기 어려울 때는, 육지를 통해서 문명이 교역되기 시작된 것은 전 인류의 역사를 보면 최근에야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강이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했는데 발칸의 강들은 "교역과 통신에는 제한적으로만 이용" 되었다는 것을 꼭 유념해야 한다. 


43 수백만 년에 걸친 지구 지각 판의 움직임으로 지중해 유역에는 유럽과 아프리카 사이의 지리적 경계를 따라 일련의 산맥이 융기, 형성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산맥은 서쪽의 이베리아 반도에서 동쪽의 남동부유럽 산맥으로 굽이쳐 흐르다 나중엔 소아시아 및 중앙아시아 산맥과 이어진다.


43 이 산맥의 남쪽은 기름진 농토도 적거니와 토양도 척박하고 비도 자주 오지 않아, 북쪽의 상황과는 아주 판이하다.


43 이베리아 반도와 이탈리아 반도의 통로를 지켜주는 이 산맥과 달리, 발칸 산맥에는 외부의 침입을 막아주는 장벽이 없어 북쪽과 동쪽으로부터 접근하고 공격해오는데 쉽게 노출되어 있다.


43 발칸 반도는 반도 내 지역들보다는 오히려 반도 외곽 지역과 교신하기가 더 용이할 때가 많다.


44 발칸 반도는 비그늘효과로 유럽의 대륙성 기후대에 나타나는 수분이 거의 고갈되어 지형이 매우 메말라 있다.


44 전체적으로 볼 때 발칸 산맥 동쪽의 연평균 강수량은 산맥 너머 서쪽의 연평균 강수량보다 10인치에서 20인치 정도가 낮고, 그 때문에 가장 비옥하다는 평원도 연례행사처럼 매년 가뭄을 겪는다.


45 지중해성 기후대는 여름이면 강이 말라붙어 암석투성이의 하상과 계곡이 그대로 드러난다.


46 하천도 산맥만큼이나 번영에 중요한 요소였다. 그 까닭은 현대 이전만 해도 육로보다는 수로를 통한 운송이 비용도 싸고 편했기 때문이다.


46 하지만 남동부유럽에서는 서유럽의 라인강과 론강, 동류럽의 비수아강과 드네프르강에 비견할 만한 하천이 하나도 없다. 발칸의 강들은 모두, 겨울에 퍼붓는 억수보다 더 많이 쏟아질 경우에는 물살이 너무 빠르거나, 그렇지 않으면 가까운 해안선을 벗어나 하염없이 구불구불 흐르기 때문에 항행에 부적합해, 사바강, 바르다르강, 알리아크몬강과 같은 주요 하천도 교역과 통신에는 제한적으로만 이용되고 있다.


그 다음에 오스만 제국 지배 시기의 발칸의 교통망을 보더라도 이 책의 48페이지쯤 되면 철도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로마제국으로부터 풍부한 도로망을 물려받은 오스만제국은 여관, 대상숙사, 타타르 정부 사자의 말 대기소와 숙소 역할을 한 역참을 이용해, 효율적인 우편제도를 개발했다. 하지만 18세기 무렵 이 제도는 잦은 지체와 말 부족 현상으로 붕괴에 직면했다." 이렇게 되어있다. "19세기 중반 도로 사정은 이제 너무도 열악해져서, 일각에서는 오스만 정부가 정책적으로 일부러 도로를 황폐하게 만들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기에 이르렀다."고 되어있다. 오스만 제국 지배 시대 교통망이 굉장히 열악했다는 것. 이것은 다르게 말하면 행정적 처리와 관련된 세금 징수 같은 것이 수월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지형이 좋지 않고 그에 따라 도로가 원만하지 않고 강도 항행에 적당하지 않다 보니 행정권이 행사하는데 굉장히 어려움이 있다. 그러면 당연하게도 통치비용이 많이 들어간다. 그래서 52페이지에 보면 "발칸 지역은 늘 유럽의 경계지에 위치해 있는 이 같은 지형상의 특성 때문에, 어느 나라고 권한을 행사하는 데 많은 비용을 들었다." 중요한 부분이다. 통치에 굉장히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 


48 로마제국으로부터 풍부한 도로망을 물려받은 오스만제국은 여관, 대상숙사, 타타르 정부 사자의 말 대기소와 숙소 역할을 한 역참을 이용해, 효율적인 우편제도를 개발했다. 하지만 18세기 무렵 이 제도는 잦은 지체와 말 부족 현상으로 붕괴에 직면했다.


49 19세기 중반 도로 사정은 이제 너무도 열악해져서, 일각에서는 오스만 정부가 정책적으로 일부러 도로를 황폐하게 만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52 발칸 지역은 늘 유럽의 경계지에 위치해 있는 이 같은 지형상의 특성 때문에, 어느 나라고 권한을 행사하는 데 많은 비용을 들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이 책에서 발칸이라는 지역이 가지고 있는 지리적 특성을 살펴보고 이것이 교통망의 발전에 어떤 역할을 했는가 그리고 그에 영향을 끼친 것이 통치 비용을 증가시키는데 큰 작용을 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통치비용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를테면 한국 같은 경우 예전에는 지방도시들은 지금은 많이 발전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수도권에서 얼마나 가까운가 먼가에 따라서 그 지역이 가지고 있는 이점들이 다르다. 접근성, 교통을 통해서 얼마나 접근하기가 수월한가가 중요한 작용을 한다.


그 다음에 53페이지를 보면, 저자가 소제목을 달아줬으면 좋았을 텐데, 인구문제에 대해서 나온다. 인구문제다 라고 하면 포함되는 건 질병 문제이다. 현대적인 공중보건이 널리 보급되지 않았을 때는 인구문제와 질병문제, 다시 말해서 전쟁과 역병, 기아 이런 것들이 인구문제와 중요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을 유념해 둘 필요가 있다. 저자는 "발칸의 진정한 위기는 17세기에 찾아왔다" 이렇게 말하는데  "남동부 유럽은 특히, 정정 불안, 끝없는 전쟁, 빈번한 역병, 기아라는 복합적 재난이 한꺼번에 밀어닥쳤다."라고 말하고 있다. "역병은 한 도시의 인구를 절반 혹은 그 이상을 앗아갔으며, 그것은 발칸이 근동에서 서유럽으로 질병이 이동해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생겨난 일이었다." 발칸이라는 곳이 유럽과 근동의 중간에 있기 때문에 역병이 발생해도 그 역병의 중간지대에 있었다는 것. 그렇게 하다보니 19세기말, 20세기 초에 되어서야 비로소 역병으로부터 문제가 회복되었다는 얘기를 한다. 이런 인구가 어느 정도 있어야 하는데 먹고 살기가 어렵다 보면 사실 발칸 반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미국으로 많이 이민을 갔다. 그러다보니 인구가 줄어들고 인구가 적다보면 산업이 발전할 수가 없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이 지나고서야, 급속한 경제 성장, 재개된 이주, 산업화를 통해 돌파구를 찾게 되었다."고 얘기를 한다. 발칸의 인구문제라고 하는 것도 이 지역이 가지고 있는 지리적 요건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55 발칸의 진정한 위기는 17세기에 찾아왔다. 그때는 유럽의 어느 곳이고 어렵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남동부 유럽은 특히, 정정 불안, 끝없는 전쟁, 빈번한 역병, 기아라는 복합적 재난이 한꺼번에 밀어닥쳤다.


55 역병은 한 도시의 인구를 절반 혹은 그 이상을 앗아갔으며, 그것은 발칸이 근동에서 서유럽으로 질병이 이동해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생겨난 일이었다.


57 발칸의 '고용 불안'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지나고서야, 급속한 경제 성장, 재개된 이주, 산업화를 통해 돌파구를 찾게 되었다.


그에 이어서 발칸 지역들의 농촌 생활 세계라는 것이 있다. 58페이지부터 나오는데 나름대로는 발전하고 있기는 했지만 오스만 제국의 지배 시기 전에는 아주 더딘 더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온 농촌 생활을 하고 있었다.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보면 페리클레스가 이를테면 스파르타에 대항해서 장기전을 끌고 나아가려고 하면서 농촌 지역에 있는 사람들을 아테나이 도시로 이주시킨다. 그런데 이주할 때 농촌에서 온 사람들이 들고 들어오는게 문짝을 떼어가지고 왔다는 얘기가 있다. 발칸의 역사를 읽으면서 그때의 삶, B.C 5세기 무렵의 삶을 그대로 거의 유지했던 게 아닌가 하는 황당한 생각도 잠시 해봤다. 오스만제국 지배 이후로 농촌 공통체가 변화가 된다. 왜냐하면 기독교인 지주들이 그리스인, 슬라브인, 프랑스인, 베네치아인, 카탈로니아인 이런 지주들이 농민들을 가혹하게 다스리고 있었는데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게 되면서 이런 토착 지주들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 그래서 이렇게 되면서 오스만 제국의 문서상으로는 "무슬림 공통체의 소유"가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지배한 지 2,3세기가 지나자 새로운 난관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서구 유럽 경제는 새로운 상업 금융, 식민지 교역, 사유재산 증진, 제조업 성장의 방향으로 옮겨가고" 있었으나 "오스만 제국 전체 세수의 3분의 2가량을 차지하던 발칸"은 여전히 발전하고 있지 않았던 것. 그래서 여전이 이 세금을 농민들이 부담하고 있었고, 오히려 옛 토지제도가 사라지게 되었다. 


60 앞선 세기의 기독교인 지주들 ─ 그리스인, 슬라브인, 프랑스인, 베네치아인, 카탈로니아인 ─은 날이 갈수록 농민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는데, 오스만제국이 싹쓸이를 해준 것이 바로 이 지배계급이었다.


61 오스만제국의 문서에는 그것이 이런 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정복할 때 레야(농민) 소유였던 땅은 이제 무슬림 공동체의 소유가 되었다.


62 하지만 지배한지 2,3세기가 지나자 오스만제국도 여러 새로운 난관에 직면하게 되었다.


62 서구 유럽 경제는 새로운 상업 금융, 식민지 교역, 사유재산 증진, 제조업 성장의 방향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63 오스만 제국 전체 세수의 3분의 2가량을 차지하던 발칸이야말로 이 같은 반벙어리 리바이어던에게는 필요 불가결한 요소였고, 이 세금의 절반을 농민이 부담하고 있었다.


그런 다음 19세기 이후의 산악 공동체는 또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발칸 지역에서 산악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 교통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에 산적들이 많았고, 현금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양가죽이나 양모 제품 등을 마을에 내다 파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그들의 생존수단도 점차로 도시로 옮겨가게 된다. 오스만제국 시대의 도시는 어떠한가. "15세기 말, 오스만 정부는 도시생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단호한 정책을 취했"는데 이런 정책들 중 대표적인 것이 공공 건물 단지를 지었다는 것. 그래서 "오스만 지배 초기, 도시화 정도는 전반적으로 높았고 살로니카와 두브로브니카 등의 해안가 교역 도시들도 번창했다." 원래 비잔틴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이 1600년 무렵에는 유럽 최대의 도시가 되었다. 오스만제국은 도시의 발달을 장려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국가가 세금을 징수하고, 교역을 관장하고, 소금과 같은 생활필수품의 전매권을 확보할 수 있는 행정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오스만제국이 도시를 중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산업화를 이루지는 못했다. 즉, 근대화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73페이지에 있는데 "잘 정비되고 관리된 도로의 부족, 관료주의라는 장애, 인쇄 매체와 과학 지식의 확산을 금하는 종교적 제약, 마케도니아의 정치 투쟁이 격화되면서 날로 심해지던 사회적 혼란 등이 산업화와 기업농의 발달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잘 정비되고 관리된 도로의 부족"은 발칸의 지리적 여건 때문에 생겨난 것이고, 오스만 제국의 관료주의가 심각한 것이었다. 종교적 제약이라는 것은 이슬람, 기독교만이아니라 관습적 제약도 있다. 한국사회에서도 인쇄 매체와 과학 지식의 확산을 금하는 종교적 제약은 없으나 사상적 제약은 없다. 뭔가 새로운 지식을 가지고 해보려 해도 관습적인 것들, 학벌주의 이런 것들 때문에 혁신이 일어나기 어렵다. 치폴라의 《대포, 범선, 제국》을 하면서도 중국에서 대포나 범선이 개량되지 못했던 까닭을 얘기할 때도 거론한 바 있다. 종교적 제약이라고 하는 것은 관습적 제약이라는 말로 바꾸어서 이해하여도 될 것이다. 어쨌든 오스만제국이 도시를 중시했음에도 이른바 근대화되지 못했다는 것은 발칸 지역의 도시가 현대적인 근대적인 산업도시가 생겨나지 못했고 그것이 산업화로 가는 요소가 없는 것으로 귀결되겠다.


68 이들은 현금으로 세금을 내어 화폐 경제의 요구에 일찌감치 익숙해졌다. 그리하여 가축, 양가죽, 양모 제품, 치즈 등을 마을 시장이나, 20세기 초까지 발칸 교역의 원동력이 된 대단위 연례 정기시에 내다 팔았다.


69 15세기 말, 오스만 정부는 도시생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단호한 정책을 취했다 도시민들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를 제공할 요량으로 고위 관리들에게 재원을 마련해 공공건물 단지 ─ 대상 숙사, 지붕 덮인 시장, 공중목용탕, 모스크와 학교, 병원, 수도 등 ─ 를 조성토록 한 것이다. 


71 오스만 지배 초기, 도시화 정도는 전반적으로 높았고 살로니카와 두브로브니카 등의 해안가 교역 도시들도 번창했다. 1600년 무렵 콘스탄티노플은 유럽 최대의 도시였다. 


71 국가가 세금을 징수하고, 교역을 관장하고, 소금과 같은 생활필수품의 전매권을 확보할 수 있는 행정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72 오스만이 지배한 도시들이 진정한 산업화를 이루지 못했다면, 제국 내에서 기업농이 발달하지 못한 것도 이와 똑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요컨대 잘 정비되고 관리된 도로의 부족, 관료주의라는 장애, 인쇄 매체와 과학 지식의 확산을 금하는 종교적 제약, 마케도니아의 정치 투쟁이 격화되면서 날로 심해지던 사회적 혼란 등이 산업화와 기업농의 발달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76페이지를 보면 "19세기 발칸에 일어난 대중 민족주의"가 얘기가 있다. 마조워의 이 책은 각각의 챕터가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챕터에서, 가령 지금 읽고 있는 1장에서는 발칸 전체를 발칸 영토와 주민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고 이런 식으로 되어있다. 그러니까 챕터 1장에서 읽은 내용이 2장에서 되풀이 되고 하는 경향이 있다. 발칸 사람들이 대중 민족주의라는 것이 등장하면서 농민들이 주체가 되었다. 81페이지를 보면 발칸인들에게는 마을이 곧 조국이었는데 이제 이런 고립된 집단성이라고 하는 것이 19세기 무렵부터는 다른 방식으로 변해나갔다. 그러면서 현대화 과정을 겪게 되는 것. 


76 19세기 발칸에 일어난 대중 민족주의는 오스만제국에 일어난 이 같은 드라마틱한 경제·사회적 변화의 관점으로서만 이해가 가능하다.


81 발칸의 마을들은 수세기 동안 주요한 정치, 행정, 재정, 군사적 단위로 농촌 주민들의 집단적 삶을 구성해왔다. 발칸인들에게 '조국'은 곧 '마을'이었으며, 마을의 대표는 국가의 고위 인사나 타인들 앞에서 주민을 대신해 발언하는 대변자였다. 하지만 이 같은 고립된 집단성은 19세기 무렵부터 주민도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방식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1장에서부터 19세기 얘기가 나오고 2,3장에서도 19세기 얘기가 나온다. 통사가 아니라 발칸의 역사를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얘기하면서 어떤 측면에서 시대를 보는가 하는 방식으로 쓰여졌음을 염두에 둔다면 1장에서 읽은 내용들이 2장에서도 되풀이해서 나오기 때문에 처음에 잘 이해가 안되더라도 어쨌든 참고 끝까지 읽는 것이 이 책을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다음 주에는 국가 성립 이전의 발칸을 하도록 하겠다.





책읽기 20분 | 발칸의 역사 4 [원문보기]

Posted on 2016년 10월 17일

국가 성립 이전의 발칸(1)

여기서 ‘국가’는 ‘근대 국민 국가’를 가리킨다. ‘어떤 나라의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자신에 대한 첫번째 식별 규정으로 선택하는 사람들

근대국가 성립 이전의 발칸 사람들에게 첫째 규정은 ‘마을’이었다. 종교와 언어 등도 그들을 규정하였다.


현대 발칸사는 주로 민족주의적 애국자들의 자손들이 썼다. 여기서 ‘민족’은 근대국가 성립을 위하여 동원된 기준.


오스만 제국의 발칸 지배가 가진 특징

“독립적이면서도 공존하는 종교제도” —> “미증유의 종교적 관용”

기독교도들은 정치적 권리가 없었으나 zimmi(보호받는 민족)으로 규정되었고, 정부관료로 출세하려는 기독교도는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보스니아 무슬림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모국어인 슬라브어를 썼고, 무슬림인 진니나의 알리 파샤도 투르크어가 아닌 알바니아어와 그리스어를 썼다. 크레타의 무슬림 농민들은 그리스어를 쓰면서, 그들 대부분의 조상인 기독교인들만큼이나 크레타의 서사시 에로토크리토스Erotokritos를 즐겨 읽었다. 에디르네 일대 투르크족 중심지를 벗어난 외곽 지역에서는 투르크어가 도심에서만 쓰는 행정 언어로 역할이 축소되었다.”






폴 콜리어, 《엑소더스》



오늘은 제2장 국가 성립 이전의 발칸 부분을 읽겠다. 여기서 국가 성립 이전의 발칸 이렇게 말을 하면 국가는 근대국민국가를 가리킨다. 이 말은 국민이라는 것이 먼저이다. 내가 이 나라 국민이다 이런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특정한 지역에 모여서, 영토에 모여서 국가를 성립시키면 근대국민국가이다. 근대화 이런 말을 하면 산업이 발전하고 물질문명이 발전하는 것을 말하는데 근대화는 꼭 그런 의미에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서구에서 신성로마제국이라든가 중세,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나는 프랑스 사람, 독일 사람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경우에 국민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고, 국민의식이 있게 되면 국민국가가 있게 된다. 그런데 국가 성립 이전의 발칸 그러면 그런 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해서 국가가 성립되지 않았다는 것. 


우리는 이런 상황에 처해있지 않았기 때문에 잘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삼국을 통일했다고 하는 신라 이후로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계속 단일한 국가 아래에서 살고 있었다. 지역 공동체의 소속감이 강하다 해도 이 사람이 한국 사람이라고 하는 것,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의식을 버리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일종의 역사의 연속성을 가지는 것. 일본 제국에 의해서 36년간 식민지가 되었다고 해도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 국권이 조선왕조를 다시 세운다는 것은 아니었다 해도 국권을 회복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만큼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국민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어도 국민 의식은 가지고 있었던 것. 그렇게 생각해보면 이 발칸 지역 사람들은 국민 의식을 아직 가지고 있지 못했다고 보면 본다.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후진적인 사람들이거나 의식이 뒤떨어진 사람들이냐 그건 아니다. 주의해야 하는 지점이다. 


제1장에서 보면 오스만제국 지배 시기에 도시화가 진행되었음에도 근대화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근대화되지 못했다는 것은 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근대 국가가 성립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발칸의 마을들은 수세기 동안 주요한 정치, 행정, 재정, 군사적 단위로 농촌 주민들의 집단적 삶을 구성해왔다"라는 말도 있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근대국가의 국민의식을 가지고 있기 전의 발칸 사람들에게는 너의 조국이 어디냐 그러면 곧 마을,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이 곧 조국이다. 말 그대로 홈랜드. 이게 바로 민족주의가 태동하기 이전 시기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국가 성립 이전의 발칸을 유심히 봐야하는 이유가 뭐냐. 국가 성립 이전에는 자기들 스스로를 어떤 사람들로 규정했는가가 중요한 것. 오스만제국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신민이라고 말은 할 수 있었지만 이 사람들이 자기의 정체성을 무엇으로 규정했는가 술탄의 신민이면서도 기독교도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종교의 차이는 있으나 느슨하게 제국아래 생활을 했었다. 그러니까 무엇보다도 근대국가가 성립하기 이전에 발칸 사람들을 규정하는 제1규정은 기독교도다, 이슬람교도다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오스만제국의 지배가 끝나고 물론 외세의 영향이 컸지만 발칸 지역에서 근대국가를 성립시키려고 했던 사람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국가를 성립시키려고 했겠는가. 그때 등장한 것이 민족주의다. 세르비아 사람, 크로아티아 사람, 이런 것. 마크 마조워 책에는 인종이라고 많이 쓰이고 있는데 인종이라기보다는 민족이겠다. 그때 이후로 발칸의 역사는 민족주의적 애국주의자의 자손들이 쓴 것. 그 사람들은 종교적 정체성을 일단 부정하고, 종교적인 정체성을 내세우면 무슬림도 살고 있기 때문에 나라를 성립시키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민족을 내세우면서 같은 민족 안에 들어있는 사람들을 먼저 범주화하고 그 다음에 종교를 따졌을 것이다. 그러나 오스만제국의 지배하에 있을 때는 그런 종교도 사실 국가적 정체성을 만드는데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겠다.


91 발칸의 역사는 주로 위에 언급한 민족주의적 애국자의 자손들이 썼다.


17세기 이전의 발칸에서는 민족주의가 주민의 정체성의 중요한 규정은 아니었다. 그 무렵에 17세기 이전 도나우강 남부의 로마속주는 더러 게르만족이나 훈족의 침입을 받아서 붕괴하기도 했지만 그냥 토착주민들이 살고 있었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슬라브족이 대규모로 남하하기 시작하면서 알바니아 토착민들은 남하한 슬라브족과 쟁투를 벌이면서 알바니아 토착민들은 산속으로 피신하게 되고, 튀르크어족에 속하는 불가리아 사람들 또한 슬라브어를 채택하게 되고, "마케도니아는 20세기 초까지도, 시골마을에서는 슬라브어를 쓰고 도시에서는 그리스어를 쓰는 기본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일단 17세기 이전 발칸에서는 민족구성이 엉켰다는 것이 첫째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여러 종교가 공존하고 여러 언어가 공존하는 상황은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슬라브족이 비록 기독교로 개종하기는 했지만 모든 지역에서 비잔티움 정교회를 믿은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같은 언어를 사용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볼 때 그리스어를 안다는 것은 학문이나 종교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특별히 자기가 어떤 종교에 헌신해서 살아야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 나쁜 것일수도 있고 좋은 것일수도 있는데 다양성이 공존한다는 점에서는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지나치게 다양성이 많으면 사람들 사이에 자칫 사소한 사건이 벌어지면 아주 극단적인 서로를 말살하려는 것으로 가기 쉽다. 


92 발칸의 민족지 구성은 기본적으로 17세기에 형성된 이래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17세기 이전 도나우강 남부의 로마 속주는 게르만족과 훈족의 침입, 습격으로 붕괴하였다.


93 발칸 지역 토착민들은 땅과 권력을 놓고 이 신흥 세력과 투쟁을 버렸다. 알바니아에서는 거의 모든 곳이 슬라브어 정착촌으로 변모해가는 와중에, 토착민들은 산 속으로 피신해 그들만의 톡특한 언어를 지켜갔다.


93 슬라브족을 지배하던 튀르크어족의 불가리아인들은 결국 자신들이 지배하는 민족의 언어를 채택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마케도니아는 20세기 초까지도, 시골마을에서는 슬라브어를 쓰고 도시에서는 그리스어를 쓰는 기본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폴 콜리어라는 사람이 쓴 《엑소더스》를 보면 이민자들이 많이 들어오면 그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크게 극단적으로 두 가지의 정책이 있을 수 있는데 하나는 동화정책이 있다. 이를테면 프랑스처럼 히잡을 금지한다던가 하는 극단적인 동화정책을 쓸 수도 있고, 또는 다문화정책을 써서 그 사람들의 문화공동체를 그대로 인정해주는 정책을 쓸 수 있다. 그런데 그 어떤 것도 한계가 있다. 동화정책을 쓰면 정체성을 하나로 뚜렷하게 해서 국민국가를 형성하는데 유리하기도 있지만 동시에 걸핏하면 싸움이 일어나기 쉽다. 반면에 다문화정책을 쓰면 정체성을 하나로 모으기는 어렵지만 그런 악질적인 정책이 생겨나지 않는 좋은 점이 있다. 《엑소더스》는 추천하는 책으로 한번쯤 읽어봤으면 하는 책이다. 


16,17세기 발칸지역에 그런 것은 없었다. 다양성이 일단 중시되었고 16세기에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기독교도들도 굉장히 많았다. 간단히 말하면 오스만제국이 느슨한 지배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느슨한 지배를 유지했음에도 기독교들이 이슬람으로 개종을 했는가 이유는 현실적인 이유. 우선 정부 관료가 되어서 출세를 하려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01페이지를 보면 아주 이 지역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 있다. "오스만 유럽에서는 인구의 태반 ─ 80퍼센트는 될 것이다 ─이 기독교도로 남아 있었다. 심지어 이슬람이 침투한 농촌 지역에서조차 투르크어는 힘을 쓰지 못했다. 보스니아 무슬림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모국어인 슬라브어를 썼고" 무슬림 그러면 아랍어를 쓰는 것 같지만 아니다. 보스니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무슬림인데도 슬라브어를 썼다는 것. 또 같은 무슬림인데도 "잔니나의 알리 파샤도 투르크어가 아닌 알바니아와 그리스어를 썼다". 또 "크레타의 무슬림 농민들은 그리스어를 쓰면서, 그들 대부분의 조상인 기독교인들만큼이나 크레타의 서사시 에로토크리토스를 즐겨 읽었다." 크레타가 아주 상징적인다. 전통적으로는 그리스지역이니 그리스어를 썼다. 그런데 종교는 무슬림이다. 그리스어를 쓰는 무슬림인데 자기네들이 오래 전부터 전승받은 서사시를 읽었다. 코란이나 성서만큼이나 서사시를 읽었다는 것. 또 "에디르네 일대 투르크족 중심지를 벗어난 외곽지역에서는 투르크어가 도심에서만 쓰는 행정 언어로 역할이 축소되었다." 도시지역에서만 투르크어를 썼고, "보스나 세라예(사라예보), 스코페, 소피아 같은 도시들은 거의가 이슬람 일색이었고," 소피아는 비잔틴 제국의 수도였는데 거기는 이슬람 일색이었고, "기독교 해역에 속하는 오스만 지배하에 투르크어를 사용하는 섬들도 독일어를 쓰는 도시들만큼이나, 슬라브어 사용 지역인 동유럽에서 제 역할을 다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머리가 엉킨다. 하나의 종교와 언어로 규정할 수 없을만큼 복잡하다. 그래서 오스만제국이 가지고 있는 지배방식을 잘 이해해야 하는데 오스만제국은 그리스정교회도 용납을 했다. 무슨 종교를 믿던 간에 세금만 납부만 잘하면 기독교 관습을 존중해줬고 그들이 무슬림으로 개종을 하면 정부 관료로 출세할 수 있게 해줬다. 또 정교회 총대주교는 오스만제국의 충실한 시녀역할을 했다. 


101 오스만 유럽에서는 인구의 태반 ─ 80퍼센트는 될 것이다 ─이 기독교도로 남아 있었다. 심지어 이슬람이 침투한 농촌 지역에서조차 투르크어는 힘을 쓰지 못했다. 보스니아 무슬림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모국어인 슬라브어를 썼고, 무슬림인 잔니나의 알리 파샤도 투르크어가 아닌 알바니아와 그리스어를 썼다. 크레타의 무슬림 농민들은 그리스어를 쓰면서, 그들 대부분의 조상인 기독교인들만큼이나 크레타의 서사시 에로토크리토스를 즐겨 읽었다. 에디르네 일대 투르크족 중심지를 벗어난 외곽지역에서는 투르크어가 도심에서만 쓰는 행정 언어로 역할이 축소되었다. 보스나 세라예(사라예보), 스코페, 소피아 같은 도시들은 거의가 이슬람 일색이었고, 기독교 해역에 속하는 오스만 지배하에 투르크어를 사용하는 섬들도 독일어를 쓰는 도시들만큼이나, 슬라브어 사용 지역인 동유럽에서 제 역할을 다했다.


그러면 기독교도들이라 해서 탄압을 받았는가. "짐미, 즉 '보호받는 민족'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제국에 충성을 다하며 세금만 잘 납부하면 그들 관습에 따라 스스로 통치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게 간단히 말하면 종교적 자치권을 확실하게 부여했던 것. 108페이지를 보면 "남동부 유럽은 국가가 아닌 정교도의 상징들로 규정되었다." 독립적이면서도 공존하는 종교제도는 "독립적이면서도 공존하는 종교제도는 오스만 통치 기구의 기본 방침" 이게 참 중요한 포인트이다. 그것이 바로 "미증유의 종교적 관용"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 것이 오스만제국 지배의 중요한 포인트라고 하겠다. 근대국가가 성립하기 이전의 발칸은 어떤 곳이냐. 한마디로 말하면 정치적으로는 오스만제국 아래 있었다. 그러나 오스만제국은 미증유의 종교적 관용을 베푸는 종교적 제도를 가지고 있었고, 세금만 잘 납부한다면 그 종교가 어떤 것이든 크게 간섭을 하지 않았다. 물론 오스만 제국의 관료가 되려면 이슬람으로 개종을 해야 했는데 그 개종도 강요된 것이 아니고 출세를 원하는 기독교도들은 개종을 하였다. 그렇다면 기독교도라 해도 또는 무슬림이라 해도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정해진 것이 아니었다. 


104 기독교도들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짐미zimmi, 즉 '보호받는 민족'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제국에 충성을 다하며 세금만 잘 납부하면 그들 관습에 따라 스스로 통치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108 남동부 유럽은 국가가 아닌 정교도의 상징들로 규정되었다.


109 독립적이면서도 공존하는 종교제도는 오스만 통치 기구의 기본 방침이었다.


110 그 점은 특히 유럽 다른 지역의 지배 체제와 비교할 때 미증유의 종교적 관용을 베풀어준 지배 체제하에서는 진실이었다.


민족구성은 17세기 이전에 슬라브족이 남하하면서 복잡하게 변했지만 그렇지만 슬라브족이 슬라브어를 모든 지역에서 관철시킨 것은 아니라는 점. 그것 또한 주의해서 봐야 할 지점이다. 한국사람들은 국가라는 체제 하에서 살아온 것이 아주 오래되었기 때문에 이런 다양성의 상황을 잘 용납하기 어렵다. 심지어 한국인의 핏줄을 받았다고 여겨지는게 틀림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한국어를 잘 못하면 한국사람 아니네 한다. 그런데 한국사람이네 아니네 이렇게 말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가.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지역의 역사를 알아서 뭐하겠나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사람이 살아가는 형태라고 하는 것이 과연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을까, 꼭 국가라는 하는 정체성이 이 모든 것을 규정하는 것일까, 이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보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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