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20분 | 일본 근현대사 | 02 민권과 헌법 2


민권과 헌법 - 10점
마키하라 노리오 지음, 박지영 옮김/어문학사


Reading_20min_20140512_2

– 다루는 순서: 제1장 자유 민권 운동과 민중 – 제2장 ‘헌법과 의회’를 둘러싼 공방; 제3장 자유주의 경제와 민중의 생활 – 제5장 학교 교육과 가족; 제4장 내국 식민지와 ‘탈아’로의 길; 제6장 근대 천황제의 성립

–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학문의 권장>>: ‘평등’을 역설하고 ‘학문’을 장려했던 것은 민중의 客分意識을 불식시켜 ‘국민’으로서의 자각,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지니게 하기 위해서였다. 근대국가 건립의 매개로서의 학문과 국민교육으로 轉化

– 민권파는 객분의식을 가진 민중과 생각이 달랐다. “군대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한, ‘천하와 우락(憂樂)을 함께 하는’ 민권파에게 병역은 당연한 의무였다.”

– 민중은 “병역과 세금이 없는 ‘도쿠가와(德川)님의 세상'”을 바라고 있었다.

– “메이지 정부는 처음부터 명확한 국가구상을 세우고 거기에 따라 구축된 것이 아니라 도쿠가와 막부를 넘어뜨린 각 세력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었다.”

– 주요 대립 문제: 천황의 親政 문제, 헌법문제, 재정 문제

– 軍人勅諭(1882): 육·해군이 천황의 군대임을 명백히 한다. 軍政(인사, 병참, 보급, 행정)과 軍令을 분리하여 군령 부문(군 작전권, 예하부대 운용·배치·편성, 군수지원 책임, 작전 통제권)을 정부에서 떼어내 천황 직속으로 함으로써 천황과 군대의 관계가 심화되었다. ‘천황의 군대’ 성립.






후쿠자와 유키치, 《학문의 권장



지난 주에 이어서 《민권과 헌법》을 읽는다. 이 책은 지난 주에는 일본근대국가형성을 둘러싼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서 다시 말해서 민권과 헌법이라고 하는 것은 근대국가라는 체제의 기본적인 바탕이 되는 것인데 그것을 일본의 경우에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에 앞서서 근대국가에 관한 일반론을 얘기했다.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책으로 들어가겠다. 이 책은 6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장 자유 민권 운동과 민중, 제2장 '헌법과 의회'를 둘러싼 공방 그리고 제3장 자유주의 경제와 민중의 생활.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라고 되어 있다. 자유민주주의라고 하는 Liberal democracy는 생각해봐야 할 개념이다. -주의를 붙일 수 있는 것은 자유주의 liberalism이고, democracy는 정치체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니까 -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쨌든 제4장 내국 식민지와 ‘탈아’로의 길, 제5장 학교 교육과 가족, 제6장 근대 천황제의 성립 이렇게 되어있다. 


내용을 보면 제1장 자유 민권 운동과 민중이라는 부분이 헌법을 제정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의회가 성립하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일 테고, 그 다음에 제2장 ‘헌법과 의회’를 둘러싼 공방과 제6장 근대 천황제의 성립은 내용상으로는 연결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제3장과 제5장이 연결되고 그런 다음에 제4장 내국 식민지와 ‘탈아’로의 길은 일본이 근대국가 성립 이후에 어떻게 식민지를 침탈하는 제국으로 나아갔는가를 보여주는 내용이라고 하겠다. 다해서 6개의 장으로 되어있지만 크게 묶어보면 헌법성립의 전사라고 할 수 있는 부분과 2장과 6장이 체제에 관한 부분, 그리고 3장과 5장이 내국의 상황으로 묶이고, 4장이 대외정책 또는 외교로 볼 수 있겠다.


자유 민권 운동과 민중 부분을 먼저 보겠다. 민권 운동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시민권 운동을 생각하기 쉬운데 지난 번에 말했듯이 메이지유신 이후에 형성된 삼극체제가 있었다. 삼극이라고 하는 것은 첫째가 메이지정부, 둘째가 민권파, 세번째가 민중이다. 여기서 민권파가 바로 민권 운동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시민'과 유사하기는 하지만 일본이라고 하는 나라가 봉건적인 질서에서 근대국가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서양 중세로 말하자면 농노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客分이라는 용어로 불렀다. 객분의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곧바로 근대국가로 이행해 갈 수 있는 어떤 물질적인 정신적인 처지에 놓여있지 않은 사람. 요즘에 몇몇 시정잡배들이 같은 국민을 놓고 미개인이다 하는데 원리적으로는 생각이 미개할 수는 있다. 미개와 문명의 구별은 절대적이고도 상대적이라고 말했었다. 그 시정잡배들이 어떤 잣대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세금을 내고 병역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함에 있어서 근대국가에서는 객분이 아니라 국민이다. 미개라고 말할 수 없다. 


각설하고 민권파는 국가를, 즉 근대국가의 주체적인 국민이 되려는 시도를 전면에 내세운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민권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보면 된다. 다시 말해서 그 당시 일본 사람 전부가 민권 운동에 자신을 투신했다기 보다는 근대국가적인 의식을 가지고 근대국가에 걸맞은 체제와 그런 제도들에 앞장선 사람들을 민권운동의 주체라고 보면 된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런 사람들은 낡은 질서를 유지해보려는 정부 시책이 나오면 그것에 반발을 할 테고 동시에 객분 의식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민중들에게는 미개인이라고 비난을 했다. 민권의식이라는 것이 근대국가의 국민으로서의 의식을 갖자고 하는 것은 일본 근대화에서 빼놓고 갈 수 없는 한 사람이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 이 사람이 쓴 책에서 사상의 근원을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학문의 권장》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은, 여기서 말하는 학문을 근대학문을 가리킨다, 근대학문을 권장한다는 것. 후쿠자와 유키치가 《학문의 권장》에서 주장했던 내용은 한마디로 정리하면 '‘평등을 역설하고 '학문'을 장려했다. 평등이란 바로 근대국민의 국민으로서의 평등을 말한다. 


거듭 얘기하자면 세금을 내고 병역의무를 충실히 하는 것이 근대국민국민의 기본적인 의무다. 그런 다음에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 그런 사람들은 근대국민국가의 법 앞에서 평등한 것. 그리고 그 사람들이 그러한 어떤 물질적인 또는 신분을 벗어났으니 처지에 올라섰을 때 가져야 할 의식이 바로 국민의식이다. 그래서 《학문의 권장》을 읽어보면 여러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고 여러 주장을 발견할 수 있지만 국민으로서의 평등 그리고 민중의 객분의식을 없애고 국민으로서의 자각을 갖게 하는 학문이다. 이게 일본 근대화에서 사람들에게 중요한 의식을 갖게 한다. 그래서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본말이 전도된다고 할 수 있는데 국민국가라고 해도 국민이 주인이고 국민이 주권자이기 때문에 사실은 국민이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각오를 갖는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본말이 전도된 것. 그런데 후쿠자와 유키치의 이 책은 그런 각오까지 갖게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면 여기서 《학문의 권장》이라는 제목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조금 과잉해석을 해본다면 국민국가가 건립되었다. 그러면 국민으로서의 자각을 해야 한다. 그리고 국민으로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가져야 한다. 이런 의식을 갖게 하는 중요한 매개체로서의 학문이 되겠다. 그리고 이것을 '국민학교'를 통하여 전 '국민'에게 주입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국민교육'이 된다. 


'국문교육'이라는 말에 헌장을 붙이면 국민교육헌장이 된다. 이것이 근대화의 과정에서 꼭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아무리 근대국민국가가 중요하다고 해도 국가의 주권자는 국민이고, 국민이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하는 것이 의무는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병역의무가 있기 때문에 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그리고 그 주권의 토대에 되는 영토를 지키기 위해서는 국민 모두가 병역의무를 지게 된다. 그렇다 해도 그것을 목숨을 바치는 것까지 밀고 나아가서는 안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국가를 특정한 사람과 동일시 하여서 그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것이 아시아 태평양 전쟁 때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죽어간 일본 군인들의 의식이기도 하다. 그것은 근대국가의 의식이 아니다. 


민권파는 객분의식을 가진 민중과 생각이 많이 달랐다. 민중은 여전히 근대국가가 불편했다. 그래서 "군대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한, '천하와 우락(憂樂)을 함께 하는' 민권파에게 병역은 당연한 의무였다." 그래서 그들은 국민으로서의 권리, 국민주의적 운동을 시작하고 동시에 정부에 국민의 권리를 요구하고 더 나아가 국민으로서의 자각을 사람들에게 환기시키려고 했던 것. 두번째로 객분 의식을 민중이 바라던 것은 무엇인가. 에도시대, 즉 도쿠가와 막부시대가 오히려 그리웠던 것. 이 책에 따르면 "병역과 세금의 세상이 없는 도쿠가와님의 세상을 그리워했다." 상당한 충돌이 있었다. 조선은 노비들을 제외하면 병역과 세금의 의무가 있었다. 어떻게 보면 한국은 일본보다는 더 수월하게 근대국민국가로 체제를 이행할 수 있는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정부, 민권파, 민중 삼극 각각이 어떤 입장에 놓여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21 메이지 정부의 정치 자세에 대한 민중의 불만은 컸다. 세이난전쟁 중에도 도쿄의 목욕탕에서는 '이런 멍청한 세상이 언제까지 이어질까, 어차피 도쿠가와 님이 곧 다시 돌아올 거야'라고 누군가가 말하면 '그래, 그래'라고 응수가 돌아왔다.


40 누가 천하를 가지더라도 상관없으니 어찌 됐든 안심하고 밥만 먹을 수 있게 해달라는 서민의 생각은 단지 정치적 무관심일 뿐이며, 현재의 지지 정당이 없는 사람들의 정치감각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다.


41 소수의 '주인'만이 지배하는 신분제 국가에서 그 외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객분'에 불과하다. 객분은 국가의 운명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국내 문제뿐이라면 이 상태라도 좋지만, 외국과 전쟁이라도 일어난다면 '무지 무력한 소민'이라 '무기를 거꾸로' 들고 반란을 일으킬 걱정은 안 해도 '우리들은 객분이기 때문에 목숨을 바치는 일은 과분하다며 도망가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41 후쿠자와가 '평등'을 역설하고 '학문'을 장려했던 것은 민중의 '객분' 의식을 불식시켜 '국민'으로서의 자각, 국가를 목숨을 바칠 각오를 지니게 하기 위해서 였다.


42 메이지 초기의 민중이 간단하게 '천하와 우락을 함께 할 리가 없었다. 그것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 징병제에 대한 대응이었을 것이다.


44 군대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한, '천하와 우락을 함께하는' 민권파에게 병역은 당연한 의무였다.


45 '민권'이란 무엇보다도 '국민으로서의 권리'이며, 민권 운동은 대단한 '국민'주의적인 운동이었다. 그 때문에 자유 민권 운동은 정부에게 '국민의 권리'를 요구하는 한편, 민중의 '객분' 의식을 불식시켜 '국민으로서의 자각'을 환기시켜야 했다.


47 '인민 일반이 학정에 고통 받고 있다'며 다케바시 사건에 참가한 농민이 얘기했던 것은 단지 메이지 정부의 부정형으로서 병역과 세금이 없는 '도쿠가와 님의 세상'이 부상했던 것뿐이다.


48 연설화의 청중이 되었던 대부분의 민중이 민권 이론이나 국가 구상을 충분하게 이해하고 지지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민중이 바라는 것과 민권 운동이 지향하는 근대적인 국민 국가 간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렇지만 '반정부', '반권력'이라는 점에서 민중은 민권파를 열렬히 지지했다. 연설회장에서의 열광은 이질적인 것들이 부딪히면서 생성된 일종의 '충돌' 현상이었으며, 그 때문에 정부에게 큰 위협을 끼칠 수 있었다.


50 민중들 사이에 객분 의식이나 반정부 감정이 뿌리 깊게 남아 있었던 1880년 전후의 시기에 '국민'이라는 의식이나 '천황은 국민의 편이다'라는 관념을 침투시키고 나아가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은 정부가 아니라 오히려 민권 운동 쪽이었다.


50 요컨대 이 시기의 정치 구조는 메이지 정부와 민권 운동의 2극 대립이 아니라 민중을 포함한 3극 대립으로 보는 것이 실태를 제대로 파악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단순한 대립이 아니라 민권파와 정부는 대립하면서도 '근대국가의 건설' '민중의 국민화'라는 큰 틀을 공유하고, 민중과 민권파는 지향하는 방향은 달랐지만 '반정부'라는 점에서 뜻을 같이하여 정부에 큰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제2장 '헌법과 의회'를 둘러싼 공방. 여기서 재미있는 것이 메이지 헌법을 발포했던 메이지 정부가 처음부터 명확한 국가 구상을 세우고 그것에 따라 구축된 것이 아니라 도쿠가와 막부 세력을 넘어뜨린 각 세력들이 모여서 만들 것. 다시 말해서 근대국가체제라고 하는 것을 만들어가는데 이 사람들이 여전히 낡은 질서 위에서 사유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러다보니 정치적으로는 헌법을 구성하고 어떤 내용으로 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일단 있었고, 두번째로는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 주요하게 대립하는 문제로는 천황의 친정문제라든가 헌법에서 그것을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 그리고 재정문제가 나타나게 된다. 천황의 친정문제는 나중에 천황제를 살펴볼 때 구체적으로 보겠지만 일본에서 천황이 본격적으로 어떤 중요한 역사적 행위자로 등장한 것은 군인칙유를 보면 뚜렷해진다. 이것이 1882년에 공표된 것인데 여기서는 육•해군이 천황의 군대임을 명백히 하고, 군사작전권이나 예하부대를 배치하고 편수하는 작전통제권 등을 통괄하는 군령 부분을 정부에서 떼어내서 천황 직속으로 한다. 그럼으로써 일본 육군과 해군은 천황의 군대가 된다. 그리고 군정 부분은 인사, 병참, 보급, 행정인데 천황의 직속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천황의 전쟁 책임이 있느냐 하면 당연히 있다. 군령 부분이 천황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을 예를 들면 군령은 합동참모본부가 가지고 있고, 그것이 한미연합사령부 그리고 각군 작전사령부로 내려간다. 그리고 군정 부분은 한국에서는 각군 참모총장이 행사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한국은 군령과 군정이 분리되어 있다고 한다. 전시작전통제권, 평시작전통제권이 가끔 이슈가 되는데 그 이슈를 이해하려면 군령과 군정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하기도 하겠다. 이 부분은 제6장을 하면서 다시 이야기하겠다.


민권과 민중이라는 말이 오늘날 사용하는 용법과 다르기 때문에 의아할 수도 있겠는데 일본이라는 나라가 가지고 있는 체제 이행기에서의 독특한 성격들을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54 메이지 정부는 처음부터 명확한 국가구상을 세우고 거기에 따라 구축된 것이 아니라 도쿠가와 막부를 넘어뜨린 각 세력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었다.


55 중요한 대립 요소는 천황의 친정 문제, 재정문제, 헌법 문제 이 세 가지였다.


73 「군인칙유」는 천황이 직접 서명한 후, 태정대신을 거치지 않고 바로 육•해군경에게 하달되었다. 의회 개설이 불가피한 시점에서 육•해군이 '천황의 군대'라는 것을 명확하게 한 것이다.


74 다케바시사건이나 민권운동의 고양으로 쿠데타가 일어나거나, 정당이 군대를 움직일 수 있다는 위험성도 인식되었다. 그 때문에 군령 부문을 정부로부터 떼어 내어 천황 직송으로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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