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자 아슬란: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도다 ━ 이슬람의 기원, 진화 그리고 미래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도다 - 10점
레자 아슬란 지음, 정규영 옮김/이론과실천


2005년도판 서문

서문 - 유일신교의 충돌

중요한 사건들의 연대기

용어 해설


1. 사막의 성소 -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 반도

2. 열쇠의 보관자 - 메카의 무함마드

3. 예언자의 도시 - 최초의 무슬림들

4. 알라를 위한 싸움 - 지하드의 의미

5. 정통 칼리파 - 무함마드의 계승자들

6. 이슬람은 학문이다 - 이슬람 신학과 율법의 발전

7. 순교자의 발자국 - 쉬아주의에서 호메이니주의까지

8. 예배용 양탄자를 포도주로 물들여라 - 수피의 길

9. 동양의 각성 -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10. 메디나를 향해 느리게 나아가기 - 이슬람의 개혁


주해

색인




서문 - 유일신교의 충돌

21 유일신교의 충돌은 결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이슬람 제국이 기독교 세계의 영토로 팽창해 들어갈 때부터 십자군의 유혈 전쟁과 제국주의의 비극적 산물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태에 이르기까지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들 간의 관계를 특징짓는 적대감, 불신, 빈번한 폭력 사태는 서구 역사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주제 중 하나였다. 이슬람 세계에 반기독교적이고 반유대교적인 선전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매우 온건한 무슬림 설교자나 정치가조차 서구 전체를 십자군이라고 부르거나,' 유대인'을 음해하고 싶은 충동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23 종교적 독단론이 얼마나 쉽게 정치적 이념과 서로 얽힐 수 있는 지를 생각해볼 때, 현대 세계에 깊이 뿌리내린 유일신교 충돌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으로는 분명히 교육과 아량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웃의 종교에 대한 이해보다는 우리의 종교 자체를 더 완전하게 아는 것이 더욱 절실하다.


23 반드시 알아야 되는 것은 종교란 신앙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종교는 신앙의 이야기다. 종교란 신과의 신비로운 조우를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로 하나의 신앙 사회가 제공하는 상징과 은유의 제도화된 체계이다. 종교란 진실한 역사가 아니라 강물처럼 세차게 흐르지 않는 신성한 역사에 더 관심을 가진다.


23 실제로 종교가 탄생하는 것은 신성한 역사와 진실한 역사가 충돌하는 바로 그 순간이다. 신비롭고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모든 분류를 회피하는 신앙이 종교의 옹이투성이 가지에 얽히게 될 때 유일신교의 충돌은 일어난다.


1. 사막의 성소 -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 반도

37 사방이 나무 한 그루 없는 산으로 둘러싸인 메마르고 황량한 메카Mecca 계곡에 고대 아랍인들이 '카바Ka'ba(입방체)'라고 부른 작고 보잘것없는 한 성소가 서 있다.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순전히 돌로만 쌓은 이 구조물은 이제 모래에 거의 덮였고 지붕도 없었다.


37 이 성소의 비좁은 내부에 시리아의 달 신인 후발Hubal, 이집트인의 이시스Isis, 그리스인의 아프로디테Aphrodite에 해당하는 강력한 여신 알웃자al-Uzza, 나바트인이 기록 과 예언의 신으로 섬긴 알쿠트바al-Kutba, 기독교인의 예수와 성모 마리아Mary가 모셔져 있었다.


40 학자들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서기 6세기까지 진흙과 돌로 만든 이 작은 신전이 아라비아 종교 생활의 중심지였다는 것이다. 잘못 정의되어 사용되고 있으나, 무슬림들은 보통 이슬람 이전의 우상숭배 시대를 '자힐리야Jahiliyyah' 곧 '무지의 시대'라고 부른다.


40 무슬림들은 보통 자힐리야를 도덕적 타락과 종교적 알력의 시대로,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유일신 숭배를 저버려 아라비아 반도가 우상숭배의 어둠에 빠졌던 시기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자힐리야 이후에는 새벽에 먼동이 트듯이 예언자 무함마드가 7세기 초 메카에서 출현하여 유일신교의 복음을 전파하고 절대적 도덕규범을 설파하게 된다. 그가 신으로부터 받은 기적과 같은 계시들은 아랍인들의 우상숭배에 종지부를 찍었고, 무지의 시대를 전우주적인 이슬람으로 대치했다.


46 6세기 아라비아에서 유대의 유일신고monotheism는 우상숭배의 아랍인에게 결 코 이단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아랍인의 우상숭배는 전혀 다른 종교적 이념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교적 아랍인은 유대교가 자신들과 비슷한 종교적 개념을 단지 다르게 표현하고 있을 뿐이라고 이해했다 아랍인이 당시 아라비아 반도에 전파되어 있었던 기독교를 바라보는 관점도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50 근동에서 마지막 남은 우상숭배 지역인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 반도는 단일신교적 우상숭배가 주를 이루고 여기에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유대교가 혼재된 종교적 상황이었다. 아라비아 반도의 이 세 종교는 발상지로부터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역설적으로 교리나 의식을 참신하고 혁신적인 형태로 자유롭게 발전시킬 수 있었다. 특히 무지의 시대인 자힐리야의 종교 중심지인 메카의 활발한 다원론적 분위기는 대담하고 새로운 개념과 흥미로운 종교적 이론이 태동할 수 있는 터전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6 세기경에 태동하였으니, 바로 헤자즈 지방에만 약간 알려져 있던 '아랍유일신주의, 즉 하니피즘Hanifism이었다.


62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 사회와 연관시켜 볼 때, 앞에서 말한 전설들로부터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무함마드는 메카 시민이고 고아였다는 것, 젊어서부터 숙부의 무역 대상 일을 도왔다는 것, 카라반이 먼 지역에까지 빈번히 여행함으로써 기독교, 조로아스터 교, 유대교 부족들과 접할 수 있었다는 것, 무함마드가 메카에 퍼져 있던 하니피즘의 사상과 종교를 잘 알고 있었다는 것, 이러한 환경이 무함마드의 활동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 등이다. 실제로 초기 무슬림 전기 작가들은 하니피즘과 이슬람의 관계를 강조라도 하듯이 자이드를 세례 요한에 비유하고, 그가 "이스마엘의 자식들, 특히 압드 알무탈립의 자식 중에서 한 예언자가 나올 것"임을 예언 했다고 전한다.


2. 열쇠의 보관자 - 메카의 무함마드

71 실제로 메카인들은 무역 활동을 장악하기 위해 애를 썼다. 메카의 지도자 꾸사이와 그의 후손들은 종교와 경제를 불가분의 관계로 만듦으로써 카바와 그 순례의식에 연관된 종교-경제 체제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 새로운 체제에 전 헤자즈 지방이 참여함으로써 꾸라이쉬 부족은 경제, 종교, 정치적 패권을 누리기에 이른다.


72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 반도에서 부족 윤리를 지킬 책임은 부족의 '사이드Sayyid' 혹은 '쉐이크shaykh(언어적 뜻은 노인의 품성을 지닌 자)'에게 있었다. 쉐이크는 '평등한 사람 중 첫째'로서 만장일치로 선출되었으며, 공동체에서 가장 존경 받는 사람이자 부족의 세력과 도덕적 가치를 대표하는 우두머리였다. 높은 신분이나 지도권은 특정한 가문이 가지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쉐이크는 세습적 지위가 결코 아니었다.


79 결혼 후 40세가 될 때까지 거의 15년 동안 외부의 생활 방식과 내부의 믿음 사이에서 갈등하고 싸우다 보니 무함마드의 사고는 매우 불안정했다. 그러던 610년 어느 날 밤, 히라Hira 동굴에서 은둔하며 명상에 잠겨 있던 무함마드에게 자신의 인생은 물론 세계 역사의 행로를 영원히 바꾸는 사건이 일어났다.


88 신의 권능과 선량함을 강조한 초기 계시들에서 유일신교에 대한 엄숙한 선언이나 다신교에 대한 비판은 특별히 존재하지 않는다. 계시 초기에 무함마드는 선량한 알라가 어떤 분인지를 알리는 데 관심을 두었을 뿐, 얼마나 많은 신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 앞에서 말한 대로 무함마드가 살던 사회는 유일신교적 경향이 이미 상당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단일신교적(다수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중에서 한 신을 선정하여 믿음) 경향이 있던 사회였기 때문일지 모른다.


95 '알라의 사도'라고 선언함으로써 무함마드는 아랍인들의 권위에 관한 전통적 인식을 명백히 어기고 있었다. 무함마드는 관습에 의해 '평등한 사람들 중 첫째'의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와도 대등하지 않은 존재가 된 것이다.


95 무함마드에게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도다"라는 구절은 단순한 신앙고백 이상이었다. 이 선언은 카바는 물론 카바를 관리하는 꾸라이쉬의 권한 모두를 교묘하게 고의적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메카의 종교와 경제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므로 하나를 공격하는 것은 동시에 다른 하나에 대한 공격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3. 예언자의 도시 - 최초의 무슬림들

106 야스립에 새로 탄생된 공동체는 이슬람 역사상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예를 들어 후대의 무슬림 학자들은 예언자의 탄생일이나 첫 번째 계시 일이 아니라 무함마드와 이주자들이 이 농촌 연합체에 와서 새로운 공동체 사회를 구성한 해를 이슬람력의 원년으로 삼는다. 따라서 서기 622년은 히즈라력 1년(A.H. 1)이 되는 것이다. 또 이 사건의 중요성을 기념하여 과거 수세기 동안 야스립이라고 불리던 이 오아시스 마을도 이때부터 '메디나트 안 나비Medinat an-Nabi(예언자의 도시)' 또는 간단하게 줄여 메디나al-Medina(그 도시)로 불리게 된다. 그 후 1,500년 동안 이슬람 종교와 정치의 이상이 된 무함마드의 메디나 시대는 영원히 잊지 못할 신화가 된다.


114 꾸라이쉬 부족이 사회·종교적 패권을 행사하던 메카에서는 전혀 먹혀들지 않았으나 그런 영향이 거의 없었던 야스립에서 무함마드는 마침내 개혁을 실천할 기회를 잡았다. 움마라는 매우 독특한 공동체 속에서 무함마드는 일련의 급진적인 종교, 사회, 경제 개혁을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종류의 사회, 즉 아라비아 반도에서 그 유례가 없었던 사회를 수립할 수 있었다.


115 부족주의하에서 부족의 구성원이 되는 유일한 길은 그 안에서 출생하는 것이었지만, 무함마드의 공동체는 단지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신의 사도이다"라는 신앙고백만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른바 샤하다(신앙고백)는 사회·정치적 함축성을 지닌 신학적 진술이자 새로운 형태의 바이아(부족 구성원이 쉐이크에게 바쳤던 충성 맹세)였다. 무함마드에게 민족, 문화, 인종, 부족은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움마(공동체)는 전통적 부족과 달리 개종에 의해 무한히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게 되었다.


125 무함마드가 죽은 후 오래된 것은 분명하지만, 정확히 언제부터 움마의 대다수 여성들이 베일을 착용했는지 말하기란 불가능하다. 무슬림 여성들은 아마도 '움마의 어머니'로 존경받은 예언자의 부인들을 모방하여 베일을 착용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베일이 강제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무함마드 사후 수 세대가 지날 때까지도 베일 착용은 보편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무함마드 사후 일단의 남성법학자와 성서학자가 자신들의 종교와 정치적 권한을 이용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들은 무함마드가 부르짖은 평등주의 개혁의 결과로 상실했던 남성 우위의 지배권을 되찾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26 무함마드가 생존했을 때 그와 함께 걷고 이야기했던 최초의 무슬림 세대이자 무함마드의 동료였던 이들은 무함마드에 대한 기억을 근거로 법적, 정신적 결정을 내릴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무함마드의 말과 행동을 회상한 구전 이야기는 훗날 하디스hadith, 즉 무함마드 언행록의 출처가 되었다.


126 하디스는 꾸란이 다루고 있지 않은 내용에 관련된 이슬람 율법에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하디스는 초창기에 아무런 규제 없이 수집되는 바람에 모순이 많았고, 따라서 그 진실성에 대한 판단이 거의 불가능했다. 예언자 동료 세대가 늙고 사망함에 따라 상황은 더 악화되어, 이슬람 공동체는 '타비운Tabiun'이라고 불리는 무슬림 제2세대가 제1세대로부터 들은 이야기와 소문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


4. 알라를 위한 싸움 - 지하드의 의미

146 당시는 종교와 국가가 하나인 시대였다. 극소수의 훌륭한 신자들을 제외하면 어떤 유대교인, 기독교인, 조로아스터교인, 무슬림도 자신이 믿는 종교가 개인적이고 고백적인 신앙을 기본으로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들에게 종교는 인종이요, 문화요, 사회적 정체성이었다. 종교는 개인의 정치, 경제, 도덕을 규정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종교는 시민권과 같았다. 그래서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의 조로아스터교처럼 신성로마 제국에서도 기독교로 개종하려면 당국의 공식적인 허가와 법률적 절차를 필요로 했다.


147 이슬람의 지하드는 무슨 의미인가. 지하드의 글자적 의미는 '분투', '애씀', '큰 노력'이다. 종교적 의미의 지하드는 인간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모든 사악한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한 '영적 분투' 혹은 '영적 노력'을 의미한다. 이것은 보통 대지하드라고 불린다. 꾸란에서 "알라를 위하여"라는 구절이 나오면 지하드라는 단어가 언제나 따라 나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슬람에서 영적 순결이나 순수를 위한 내적 분투를 인류의 행복을 위한 외적 분투와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지하드는 흔히 '군사적 분투' 혹은 '압제와 폭정에 항거하는 분투'라는 이차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때의 지하드는 보통 대지하드에 대비하여 소지하드라고 불린다.


158 야스립도 이제 더 이상 농경 오아시스가 아니라 새로운 정치 권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야스립은 예언자의 도시, 즉 '메디나'로 불리게 된다. 바드르 전투 이후 헤자즈 지방이 두 개의 대립적 세력으로 나뉜 것은 어쩌면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 두 세력은 무함마드를 지지하는 집단과 꾸라이쉬 부족에게 충성을 유지하는 집단이었다.


167 이슬람 법에 따르면, 지즈야jizyah라고 하는 일종의 '보호제'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는 무슬림 세계의 사회·경제 제도를 공유할 기회와 종교적 자치를 누리는 것이 허용되었다. 무슬림들의 타종교에 대한 관용은 중세 스페인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났다.


169 예언자는 돌덩어리 앞에서 절하거나 경배하는 사막의 무지한 유목민이 아니었다. 그는 거의 50년 동안 아라비아 반도의 종교적 수도에서 살았고, 유대교와 기독교 부족들과 경제적·문화적으로 유대를 맺었던 상인이었다.


169 무함마드는 유대교의 기본 원리 정도는 잘 알고 있었으며, 유대인들이 예수를 예언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예수도 예언자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이 자신을 예언자로 인정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173 신성하게 계시된 성서로서 꾸란은 무슬림들에게 그것이 새로운 메시지가 아니라 "이전의 성서들의 확인"임을 반복적으로 상기시켜 주고 있다(12:111). 사실 꾸란은 모든 계시된 성서들이 "움 알키탑Umm al-Kitab" 즉 책들의 모서라고 일컬어지는 하늘의 책에서 유래했다고 전례 없이 주장했다(13:9). 이 말은 곧 무함마드 자신도 모세오경, 신약 성서, 꾸란이 모두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 관한 하나의 대화로서 읽혀져야 한다고 믿었다는 뜻이다. 아울러 한 예언자의 예언자적 각성은 영적으로 다른 예언자에게 전달될 수 있다고 이해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173 이 때문에 꾸란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 이렇게 말하도록 충고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에게 계시된 것을 믿으며,

또한 아브라함과 이스마엘과 야곱과 그 종족들에게 계시된 것을 믿으며,

또한 모세와 예수와 다른 예언자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믿나이다.

우리는 그들 중 아무도 구분하지 않으며

하나님께만 순종하나이다. (3:84)


173 무함마드가 '예언자들의 봉인' 곧 최후의 예언자임을 믿는 것처럼 무슬림들은 꾸란도 마지막 성경이라고 믿는다. 무슬림들은 과거의 성서들이 무효라고 주장하지 않으며, 오직 가장 완성된 성서가 꾸란이라고 주장한다. 세계 종교사에서 하나의 성서가 다른 성서들의 진실성을 인정한 사실은 놀라운 사건이다. 움 알키탑(성서들의 모서)의 개념은 훨씬 더 심오한 원리를 나타낸다.


177 꾸란(5:42-48)은 세 종교의 신학적 차이를 각 민족에게 각각의 "법과 길과 생활 양식"을 주고자 한 신의 의지로서 설명한다. 다만 무함마드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던 신학 적 차이는 무지와 실수로 만들어진 이단적 혁신이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삼위일체설이었다. 꾸란은 명백하게 설명한다. "신은 한 분이시다. 신은 영원하시다 그분은 낳지도 아니하시고 태어나지도 아니하시는 분이시다. (112:1-3)"


177 초창기만 해도 무함마드는 예수를 신의 가장 위대한 사도로 보았다. 꾸란에는 동정녀 마리아의 예수 출산(3:47), 그가 행한 기적들(3:49), 구원자로서 그의 정체성(3:45). 최후의 날에 행해질 인간에 대한 심판(4:159)이 짧지만 충분하게 설명되어 있다.


177 무함마드는 정교회 소속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원래 복음을 타락시켰다고 믿었다. 꾸란에는 무함마드의 이런 믿음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예수는 스스로 신이라고 주장하지 않았고 자신을 숭배하라고 말한 적도 없으며 오직 제자들에게 "나의 주님이시고 너희의 주님이신 하나님을 숭배하라(5:72)"고 명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184 마지막으로 무함마드가 꺼낸 것은 시리아의 후발 신 동상이었다. 무함마드는 아부 수프얀이 보는 가운데 칼을 뽑아 후발 신을 수 없이 내려쳤다. 우상은 곧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메카의 우상신들과 그들에 대한 우상숭배는 이런 식으로 영원히 종말을 고했다. 무함마드는 부서진 후발 신상 조각들을 새롭게 정화한 카바로 들어가는 문지방으로 사용했다. 카바 성소는 이때부터 '신의 전당'이자, 새 종교 이슬람의 요람으로서 알려지게 된다.


5. 정통 칼리파 - 무함마드의 계승자들

190 무함마드 사후 공동체가 당면한 가장 큰 도전은 부족들의 반란이나 가짜 예언자들이 아니라, 예언자의 말씀과 행동에 입각한 통일된 종교 체계를 어떻게 건설하느냐의 문제였다. 예언자의 언행은 기록된 것이 아니었고 거의 동료들의 기억에 의존하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 이슬람은 무함마드의 사망과 함께 완성되고 완벽해졌다고 보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예언자의 사망과 함께 계시가 끝난 것은 사실이지만, 632년 당시의 이슬람이 신앙과 의식 양면에서 완전한 체계는 분명 아니었다.


191 모든 위대한 종교들이 그랬듯이 "이슬람 사상의 출현, 이슬람 예배 양식의 확정, 이슬람 교리의 수립"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수 세대에 걸친 신학적 노력이 필요했다.


191 이슬람이 무함마드가 사망한 당시에도 여전히 자아 정립 과정에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632년까지 이슬람에 공인된 꾸란은 존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직 수집이나 기록조차하고 있지 않았다. 이슬람의 종교적 이념 역시 아주 초보적인 형태로만 존재했을 뿐, 의례나 법적·도덕적 행위에 관한 규정은 당시에 거의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내부의 분쟁이나 외부와의 전쟁 결과로 어떤 문제가 제기되면 예언자에게 해결해 달라고 부탁하면 되었다. 그러나 신의 뜻을 설명해줄 무함마드가 사망한 상황에서 움마는 문제에 봉착할 경우에 예언자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알아내야 했다.


194 세속적 권한만을 지닌 아부 바크르는 신을 숭배하는 방식이나 절차를 규정할 수 없었으므로, 이 역할은 울라마Ulama로 불리는 학자 집단에게로 돌아갔다. '학식 있는 사람들' '이란 의미의 울라마는 움마(이슬람 사회)를 올바른 길로 인도할 책임이 있었다.


194 성직자들과 학구적 신학자들이 순수하고 단일한 전통을 형성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이슬람의 교리와 의식을 형성하는 데 이들 울라마의 권한과 영향력은 지대한 것이었다.


195 칼리파들은 왔다가 가고, 국가 기관으로서 칼리파의 권한은 커지고 줄어들지만, 울라마의 권한과 그들의 종교적 권한은 세월이 흘러갈수록 계속 커가기만 했다. 이슬람에서 울라마의 역할은 긍정적이기도 했지만 적지 않은 경우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195 칼리파(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아부 바크르는 군사적 팽창을 통해 하나의 깃발 아래 이슬람 세계를 통일했고, 이슬람 세계의 황금기로 알려진 사회적 조화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 나갔다. 무함마드가 헤자즈 지방에서 뿌린 씨를 키워 방대한 제국으로 싹을 돋아나게 한 사람들이 바로 아부 바크르와 그의 직접 후계자들이었다. 이들 네 명의 후계자들을 가리켜 보통 라쉬둔Rashidun, 즉 '올바르게 인도된 사람들' 혹은 '정통 칼리파'라고 부른다.


196 모든 위대한 종교와 마찬가지로, 이슬람의 다양한 종교적 규범을 낳은 것은 예언자 없이 신의 의지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논쟁과 부조화와 유혈 분쟁이었다.


196 예수가 죽은 후 베드로의 구세주적 유대교, 바울의 헬레니즘적 구원 종교, 이집트인들의 영지주의, 그리고 동방의 신비주의적 운동에 이르는 모든 종교적 경향을 '기독교(그리스도교)'라고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한 것처럼, 무함마드의 사망 후 이어진 모든 종교적 경향을 '이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초기 이슬람은 초기 기독교처럼 교리상으로는 거의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무슬림 공동체 내부의 정치적·종교적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교리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 필요할 것이다.


212 무함마드가 생존해 있는 동안에 꾸란은 한 권의 책으로 집대성된 적이 없었고, 수집하려고 시도된 적도 없었다. 예언자가 계시의 내용을 말하면, 곧바로 무함마드에게 개인적 지시를 받은 새 학자 집단들이 열심히 암기했다. 이 학자들은 꾸르라Qurra, 즉 꾸란 독경사들로 불렀다. 꾸란의 계시 중에서 법률적인 중요한 내용들은 주로 동물의 뼈, 가죽, 대추 야자 잎의 엽맥 위에 단편적으로 기록되기도 했으나 아랍인들에게 기록은 드문 일이었다.


227 알리를 영웅이자 순교자로 만든 것은 그가 단순히 제4대 칼리파가 아니라 무함마드의 유일한 계승자, 아니 그 이상의 어떤 다른 존재라는 쉬아의 확고한 생각이다. 쉬아의 주장에 따르면 알리는 최초의 이맘Imam, 즉 지상 위의 신의 화신이다.


227 칼리파 직위가 처음부터 올바르게 인도된 지도자를 목표로 발전한 직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헤자즈의 작은 공동체로부터 서부 아프리카의 아틀라스 산맥과 인도 대륙의 동부 변방에 이르는 방대한 제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움마에 닥친 환경 변화의 산물로서 발전한 직책이었다. 따라서 칼리파의 역할과 움마의 성격에 관한 의견의 불일치로 무슬림 공동체가 결국 분열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228 알리가 죽은 후, 무아위야는 절대 권력을 독차지했다. 무아위야는 수도를 쿠파에서 다마스쿠스로 옮기고 왕조를 수립하여 칼리파를 왕으로, 움마를 제국으로 바꾸었다. 이른바 아랍 우마위 왕조는 661년부터 750년까지 약 100년 정도로,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존속했다. 그리고이 왕조는 아랍계 엘리트를 수적으로 훨씬 능가하는 비아랍계 개종자들(대부분 페르시아인)의 도움을 받은 압바스 왕조Abbasid Dynasty로 이어진다. 압바스 왕조는 무함마드의 숙부 알 압바스의 후예들에 의해 수립되었다. 압바스인들은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기고 우마위 가문을 전부 처형함으로써 우마위 왕조의 반대 세력이었던 쉬아의 지지를 규합했다. 그러나 결국 쉬아는 압바스 왕조의 정통성을 부인함으로써 무자비한 박해를 당하게 된다.


230 20세기 들어 칼리파의 역할과 움마의 성격에 관한 역사적 논쟁은 무함마드가 규정하고 정통 칼리파들이 발전시킨 이슬람의 종교·사회적 원칙을 현대적 헌법주의와 민주주의에 조화시키는 방법으로 변했다. 현대의 논쟁 역시 움마가 이슬람 초기 수백 년 동안 논전을 벌인 종교와 정치 문제에 깊이 뿌리 박혀있다.


6. 이슬람은 학문이다 - 이슬람 신학과 율법의 발전

238 한때 역사를 구성하던 신화와 제례가 권위 있는 정설(신화의 바른 해석)과 정례(의식의 정확한 해석)가 되었을 때 종교는 제도가 되었다. 기독교는 '정설적' 종교의 대표적 예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독실한 기독교인을 만드는 것은 주로 신앙에 의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 스펙트럼의 반대편 끝에는 본질적으로 '정례적' 종교인 유대교가 자리하고 있다. 유대교에서 독실한 유대교인을 만드는 것은 주로 율법에 따른 신자의 행동이다.


239 울라마는 실천이 신학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하므로 이슬람에서 정설과 정례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 즉 칼람Kalam으로 불리는 신학의 문제를 율법의 문제인 피끄흐fiqh와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241 첫 번째 기둥은 무엇인가. 메카의 무함마드가 규정한 최초의 무슬림 관습은 살라트Salat, 즉 예배이다. 이슬람에는 두 가지 종류의 예배가 있다. 하나는 두아du'a라고 하는데, 신자와 알라 사이에 개인적이고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지는 소통을 말한다. 다른 하나는 살라트로 하루에 다섯 차례, 즉 해 뜰 무렵, 정오, 오후, 석양 무렵, 저녁에 수행하는 의무적인 예배이다. 살라트는 '굽히다', '구부리다'. 혹은 '뻗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서 있기, 절하기, 일어나기, 앉기, 동쪽과 서쪽으로 바라보기, 엎드리기와 같은 요가 동작으로 구성되며, 모든 동작은 순환적으로 반복되고 꾸란의 특정한 구절이 함께 낭송된다.


242 두번째 기둥 역시 메카에서 무함마드가 활동하던 초기에 확립되었다. 아랍어로는 자카트라고 하는 의연금(혹은 자선금) 내기이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자카트는 공동체에 세금으로 내는 의연금이며 모아진 의연금은 가난한 사람의 생계와 복지를 보장하기 위해 분해된다. 자카트는 자발적인 십일조가 아니라 종교적인 의무사항이다.


242 움마가 방대한 제국으로 성장함에 따라, 자카트는 의무적인 자선에서 모든 무슬림에게 부과되는 국세의 한 종류가 되었다. 기독교인이나 유대인들을 포함한 비무슬림들은 이와는 성격이 다른 보호세. 즉 지즈야zizya를 내면 되었다. 칼리파 제도의 전성기에는 자카트를 군사적 목적에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이 때문에 제국의 여러 곳에서 봉기가 야기되기도 했었다.


243 세 번째 기둥은 한 달 동안 지속되는 단식(사움sawm)이다. 단식은 매년 라마단 달에 행해지는데, 예언자가 메디나로 이주한 후에 비로소 종교적 의식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244 네 번째 기둥은 연례적인 메카 순례, 즉 핫즈Haji이다. 모든 무슬림은 가능하다면 생전에 적어도 한 번은 메카에 순례하여 카바 신전의 성스러운 의식에 참여해야 한다.


246 위의 네 가지 의식, 즉 집단 예배, 자선금 내기, 라마단의 단식, 순례는 무슬림 공동체에 통일의 의미를 더해준다. 그러나 이 의식들은 모두 다섯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기둥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행위보다는 신념과 관계된 유일한 기둥 샤하다(신앙고백)는 어떤 의미에서 이슬람 개종의 시작이다.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신의 사도이시다" 이 놀라울 정도로 단순한 진술은 이슬람 신앙의 기초일 뿐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이슬람 신학의 전부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샤하다는 타우히드tawhid(신의 단일성, 통일성)라고 하는 고도로 복잡한 신학 교리를 인정함을 의미한다.


248 타우히드(유일신 숭배)가 이슬람의 토대라면, 그 반대인 쉬르크shirt(다신숭배, 우상 숭배)는 이슬람에서 가장 큰 죄악이다. 왜냐하면 쉬르크에 대해서는 용서가 없기 때문이다(2:116). 쉬르크를 가장 간단히 정의하면, 신과 다른 대상을 동일시하거나 신에게 다른 대상을 관련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타우히드처럼 쉬르크도 간단한 개념은 아니다. 다신교는 명백히 쉬르크이다. 왜냐하면 신이 하나임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신에게 인간적 속성을 부여하여 신을 의인화하는 것도 결과적으로 신의 영역을 제한하거나 한정하려는 시도로서 쉬르크에 해당한다.


250 운명예정론자들 스스로도 양분되었다 이들은 모든 인간 행위(구원을 포함하여)가 신에 의해 예정되어 있다고 생각한 급진적 자흐미Jahmites파와, 앞에서 언급한 법학자 아흐마드 이븐 한발의 추종자들처럼 인간사를 신이 주관하시지만 신이 정한 환경에 반응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라고 생각한 무리로 나뉘었다.


250 9세기와 10세기까지 결정론과 자유의지에 관한 논쟁은 두 가지 사상적 추세로 발전했다, 즉 무타질라Mu'tazilah 학파에 의해 아주 명쾌하게 소개된 '합리주의적 입장'과 아사리Ash'ari 학파에 의해 주도된 '보수주의적 입장'이다.


254 인간이 '기적'을 경험하는 매개체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아주 달라진다고 알려져 있다. 모세 시대를 예로 들면, 기적은 주로 마술을 통해 경험할 수 있었다. 모세는 지팡이를 뱀으로 만들거나 홍해 바다를 가르든가 하여 자신의 예언자적 사명을 증명해 보였다. 예수의 시대에 기적의 경험은 대부분 귀신 쫓는 의식을 포함한 치료로 바뀌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를 구세주로 믿었지만, 유대의 나머지 사람들은 예수를 방랑하는 치료사로 보았을 것이다. 가는 곳마다 예수는 마술이 아니라 환자나 절름발이를 치료함으로써 예언자임을 증명해 보여야 했다.


255 한편 무함마드의 시대에는 기적을 보여주는 수단이 마술이나 치료가 아니라 언어였다. 일반적으로 구전 사회에서는 언어에 신비한 힘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오디세우스의 방랑을 노래한 고대 그리스의 음유시인과 라마야나Ramayana의 성스러운 구절을 노래한 인도의 시인은 단순한 이야기꾼 이상의 존재였다.


256 문헌으로서 꾸란은 이슬람교의 토대 그 이상이다. 꾸란은 바로 아랍어 문법의 원천인 것이다. 진화하는 언어를 스냅사진처럼 생각해볼 때, 꾸란과 아랍어의 관계는 호머와 그리스어의 관계 또는 초서Chaucer(근대 영시의 창시자)와 영어의 관계와 비슷하다.


256 케네스 크래그의 표현대로 "최고의 아랍 사건"인 꾸란은 무함마드가 행한 유일한 기적이다. 이전에 왔던 예언자들처럼 무함마드도 계속해서 기적을 통해 예언자임을 증명해 보이라는 압력을 받았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도전을 받을 때마다 자신은 사도일 뿐이며, 그의 메시지가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기적이라고 주장했다. 12세기 신비주의자 나짐 앗딘 라지 다야의 말처럼, 한 시대로 끝난 다른 예언자들의 기적과 달리 무함마드의 기적은 "세상 끝날 때까지 남게 될" 꾸란이다.


257 무슬림들이 꾸란을 성서들의 모서(알움 알키탑)라고 생각하는 배경에는 꾸란이 영적으로 다른 성서들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 존재한다. 그러나 모세오경(토라)이나 신약 성서가 수백 년에 걸쳐 신과의 만남을 기록한 많은 저자의 책들로 구성된 것과 달리, 꾸란은 신으로부터 직접 내린 계시(탄질tanzil)로 간주된다. 무함마드는 실제로 신이 하신 말씀을 전한 것이며, 이 과정에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흐르는 수도관과 같은 존재였다. 아주 순수한 문학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꾸란은 신의 극적인 모놀로그(독백)이다.


257 꾸란은 신과 인간의 소통을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과 인간의 소통 그 자체이다. 신성한 합일성의 분할을 절대 금하는 타우히드 교리를 감안하면, 꾸란은 단순히 신의 말이 아니라 신 자체이다. 이것이 정확히 보수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한 내용이다.


257 꾸란은 신을 반영할 뿐 신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 합리주의자들의 주장이었다.


259 꾸란은 영원하며 창조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은 무슬림들 사이에 원래의 언어로부터 번역될 수 없다는 생각을 널리 퍼트렸다. 다른 언어로 번역된 꾸란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효과가 없으므로 꾸란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259 이슬람의 서예는 단순한 예술 형식 이상의 것이다. 왜냐하면 서예는 영원한 꾸란의 시각적 구현이며 신의 현존에 대한 지상 위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266 신빙성이 있든 없든 이슬람이 방대한 제국으로 확대되면서 발생하는 무수한 법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순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꾸란과 순나에서 명확히 다루지 않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다른 여러 가지 법원이 개발되어야 했다. 이 가운데 중요한 것이 유추, 즉 끼야스qiyas였다. 끼야스는 새롭고 낯선 법적 곤경에 처했을 때 당대와 무함마드 시대 사이에 유사한 점을 비교하는 방식이었다.


271 꾸란 학자들은 한 구절이 다른 구절에 의해 폐기되는 것을 나스크naskh(취소)라고 불렀다. 그 이유로는 신이 무함마드에게 사회 변화를 단계적으로 인지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움마가 새로운 도덕성에 점진적으로 적응하도록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스크의 존재는 신은 변하지 않을지 모르나 계시는 분명히 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272 무함마드의 죽음과 함께 계시도 끝났으나, 이것이 곧 움마가 발전을 멈추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15억 명에 육박하는 현대 이슬람 사회는 7세기 아라비아에 무함마드가 남겨놓은 작은 신앙 공동체와 거의 닮은 점이 없다. 계시는 끝났지만 꾸란은 아직도 생동하는 문헌이며, 반드시 그렇게 취급되어야 한다. 꾸란의 해석에 역사적 관점은 불필요하며, 따라서 무함마드 공동체에 적용된 것이 모든 시대와 모든 이슬람 사회에 적용된다는 주장은 합리적이라 할 수 없다.


7. 순교자의 발자국 - 쉬아주의에서 호메이니주의까지

286 카르발라의 기념 행사를 통해 공동체의 지도권을 예언자 가문에 돌리려는 정치적 목적을 가진 집단이 이슬람의 종교 분파, 즉 쉬아주의Shi 'ism로 변화되고 있었다. 쉬아주의는 카르발라 순교자들의 전례를 따라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여 압제에 대항하는 정의로운 신자를 이상으로 삼는 종교적 이념이다.


286 카르발라의 참회자 행동을 종교사에서 특이하게 보는 이유는 신화가 아닌 제례(혹은 의식)가 신앙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287 후사인의 자기 희생은 아브라함이 큰아들 이스마엘을 희생시키려고 했던 고사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논리적 종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쉬아는 아브라함이 시작하고 무함마드가 아랍인들에게 계시한 종교가 후사인의 순교로써 완성된 것으로 간주한다.


290 이슬람에서 이맘은 모스크에서 집단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이다. 반면 쉬아 이슬람에서는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분과에 따라 정해진 수의 이맘이 있고, 이들은 예언자의 합법적 계승자로서 그의 신성한 복음을 지키고 보관할 책임을 진다.


290 쉬아의 주장에 따르면 예언자는 신의 뜻에 따라 우리가 벗어나지 못하는 하늘처럼 영원히 창조물을 에워싸고 있는 신의 메시지를 의식하는 사람인 반면, 이맘은 예언자적 자각을 갖지도 못하고 이해할 이성적 힘도 없는 사람들에게 그 메시지를 설명해주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예언자는 신의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반면, 이맘은 인간에게 그 메시지를 해석 해주는 것이다.


291 예수는 구원을 설파했으나 교회를 건설한 사람은 베드로였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예언자 무함마드는 신의 메시지를 아랍인들에게 계시했으나, 그것을 실천한 사람은 그의 합법적 계승자인 알리였다. 그래서 쉬아의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다.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도다. 무함마드는 신의 사도이시며, 알리는 신의 (계시의) 집행자(왈리)이시다."


291 이맘은 신의 뜻을 집행하는 사람으로서 예언자처럼 무오류이며 죄를 짓지 않는다."죄를 짓게 되면, 부름받은 자의 정당성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쉬아는 이맘이 다른 인간들처럼 먼지로 창조된 것이 아니며 영원한 빛으로 창조되었다는 견해를 발전시켰다. 나아가 이맘은 다른 이맘으로부터 신비한 자각에 의해 비밀스러운 지식을 전수받게 된다고 알려져 있다.


8. 예배용 양탄자를 포도주로 물들여라 - 수피의 길

318 수피주의와 전통적인 종교적 신비주의 사이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신비주의가 그 '아버지의' 종교를 항구적으로 고수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수피주의는 이슬람에서 기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을 신의 지식을 직접 구하기 위해서 벗어나야만 하는 조개껍질처럼 바라본다는 데있다. 다시 말해 이슬람교는 수피주의의 서곡에 불과할 뿐 뚜렷한 중심 사상은 아닌 것이다.


319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대부분의 무슬림이 수피주의를 회의적 시각으로 바라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신을 헤아릴 수 없으며 그런 지식은 오직 궁극적 진실에 대한 직관적 인식에서 올 수 있다는 수피의 주장은 자연스럽게 종교 당국을 자극했다. 수피들을 회의적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내적 세계의 비밀스러운 지식을 탐구하는 데 샤리아(이슬람 율법)를 적용 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는 데 있다.


319 앞에서 지적한대로, 이슬람 율법은 신앙의 외적(자히르) 성격에 관심을 둔다. 그것은 양적이며 측량할 수 있다. 그러나 내적(바틴) 측면은 측량할 수 없으므로 종교 당국에게는 중대한 위협이 된다. 설상가상으로 수피들은 무슬림 공동체에서 이탈하여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유일한 종교적 권위를 피르(지도자)가 가짐으로써 울라마에게는 권한이 없었던 것이다.


9. 동양의 각성 -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374 사실 와하비주의는 타우히드(유일신)를 필요 이상으로 단순화시킨 개념에 불과하다. 와하비가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라고 말할 때의 의미는 알라만이 종교적 숭배의 유일한 대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이든 다른 대상을 숭배하는 행위는 쉬르크(다신숭배 혹은 우상숭배)로 간주된다. 압드 알와합은 여기에 피르(수피의 지도자), 이맘의 중재, 여러 종교 명절의 기념, 예언자 무함마드를 기리는 모든 행위도 쉬르크에 해당한다고 생각했다.


378 제1차 세계대전 말,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고 칼리파 제도가 붕괴하자 이븐 사우드는 메카와 메디나를 재정복하고 쉐리프를 또다시 추방했다. 무려 4,000여 명을 죽이고 와하비주의를 전 주민에게 보급한 이븐 사우드의 아들 압드 알 아지즈는 아라비아 반도를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이라고 명명했다. 카바 성소의 관리인, 즉 열쇠의 보관자(성소로 들어갈 수있는 열쇠의 보관자가 성소를 관리하는 사람이 된다)는 이제 나즈드 토착 부족과 그들의 근본주의 동맹자들이 맡게 되었다.


383 독일 인구의 거의 3분의 1이 사망한 이 무시무시한 전쟁의 뒤를 이어 기독교 신학은 종교개혁 이전 시대의 절대 교리에서 근대 초 다원적 교리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계몽사조의 상대적 교리로 이행했다. 이렇게 기독교가 그 시작으로부터 종교 개혁으로 발전하는 데는 15세기 동안의 부도덕적이고 유혈이 낭자한 묵시의 세월이 필요했다. 1400 년에 걸쳐 꾸란의 해석과 이슬람 법의 적용에 관해 벌인 뜨거운 논쟁, 신성한 통일에 호소하여 분열된 공동체를 조화시키려는 노력, 부족적 음모, 제1·2차 세계 대전을 거쳐 이 세계는 열 다섯 번째 세기에 접어 들었다.


10. 메디나를 향해 느리게 나아가기 - 이슬람의 개혁

395 메디나의 이상을 따라 이슬람 국가의 성격과 기능을 규정하려면 움마의 민족주의 구현이 필요하다. 가장 기본적 단계로, 이슬람 국가는 무슬림을 위해 무슬림이 통치하는 국가라야 한다. 이 국가에서는 가치관의 결정, 행동 규범, 법률의 제정이 모두 이슬람의 도덕률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동시에 메디나처럼 공동체에서 소수 집단의 신앙도 피해를 당하지 않고 완전한 사회·정치적 참여가 허용되어야 한다.


400 세속화는 "많은 책임이 성직자 당국에서 정치 당국으로 옮겨가는" 절차인 반면, 세속주의는 공적 생활에서 종교를 제거한다는 이념이다. 세속화는 사회가 점차적으로 "종교적 통제와 형이상학적이고 닫힌 세계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역사적인 발전을 의미한다. 세속주의 자체는 형이상학적인 닫힌 세계관으로서, 콕스는 "새로운 종교와 아주 흡사하게 기능한다"라고 보았다.


401 민주주의를 규정하는 것은 세속주의가 아니라 다원주의다. 민주국가가 다원주의를 정통성의 원천으로 하는 한, 어떤 규범적·도덕적 체계를 토대로 하여서도 수립될 수 있다.


401 이슬람은 어떤가. 이슬람은 오랫동안 종교적 다원주의에 충실해왔다. 무함마드가 유대인과 기독교인을 보호받을 사람들(딤미)로 인정하고, 이들의 성경이 원래는 하나의 성경(움 알키탑)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으며, 아브라함의 세 종교를 망라하는 단일한 움마(공동체)를 수립할 꿈을 꾼 것은 종교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 담이 쌓이던 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혁명적 사상이었다.


405 주권이 신에게 있지 않다면 어떤 국가도 이슬람적이라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주권이 성직자의 손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정의상 종교는 해석이기 때문에, 종교 국가에서 주권은 종교를 해석할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귀속된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어떤 이슬람 민주주의도 종교국가는 될 수 없다.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민주 정치가 아니라 과두 정치가 될 것이다.


405 예언자 시대부터 정통 칼리파 시대, 위대한 제국 시대, 술탄제 무슬림 세계에 이르기까지, 이슬람 신앙과 실천의 의미 및 중요성을 하나로 해석하는 데 성공한 시도는 한 번도 없었다. 사실 이란이슬람 공화국의 수립 때까지 세계 역사상 어떤 이슬람 국가도 한 사람의 꾸란 해석에 의해 통치된 적이 없었다. 이슬람 민주주의에서 발라야트 파끼흐, 즉 '법관의 감독' 개념도 감독 그 자체로 남아야지 법관에 대한 통제가 되어서는 안된다.


406 이슬람 민주주의는 국민 주권과 신의 주권을 조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신의 허락에 국민이 만족하는 것"을 조화시켜야 한다. 양자간에 상충이 있다면, 민주주의 현실에 양보하는 쪽은 이슬람 해석이어야 하며 다른 방식은 아니다. 신이 무함마드에게 최초의 계시 "읽어라!"를 내린 순간부터, 이슬람의 이야기는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의 사회·문화·정치적 환경에 부응하면서 끊임없이 유동적 상태에 있었다. 이제 이슬람은 다시 한 번 진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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