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죠 히로시: 영락제 ━ 화이질서의 완성


영락제 - 10점
단죠 히로시 지음, 한종수 옮김/아이필드

저자 서문

제1장 중화라는 이름의 세계

제2장 대명제국의 탄생

제3장 황통의 장래

제4장 찬탈로 가는 계단

제5장 역사의 전복

제6장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제7장 천명의 소재

제8장 쿠빌라이를 넘어서

제9장 화이질서를 총괄하는 자

제10장 영락제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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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서문

11 대몽골전의 전진기지인 북경을 분봉 받은 한 왕이 수만의 병사를 이끌고 남경을 함락하고 황위를 힘으로 빼앗았다. 그는 젊은 조카 건문제에 과감히 반기를 든 지 4년 만에 전투에서 승리하고 제3대 황제에 즉위했다.


12 그때 1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치세 기간 동안 10만 명을 피의 제물로 바친 아버지 주원장과 본질은 다를 바 없었다. 잔인하고 의심이 많은 성격 역시 비슷했다. 이렇듯 초기의 명나라는 비할 데 없이 잔혹한 두 황제를 두게 된 것이다.


13 현대 중국의 민족문제를 반영하는 견해인데, 여기에서 영락제가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사실이 아주 중요하다.


13 아마도 철저하게 내향적으로 비친 주원장과는 달리 중화의 위엄을 해외에 크게 떨친 영락제의 적극적인 대외정책에 대한 평가 때문일 것이다.


13 근대화에 성공함으로써 자신감이 붙은 중국에서 1990년대 이후 영락제의 전기가 계속 나오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13 14, 15세기 무렵의 중국과 이에 휘말린 동아시아 각 나라들의 관계를 축으로, 영락제 시대를 재현하고 그에게 부여된 역할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제1장 중화라는 이름의 세계

15 중화라는 말이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후한에서 삼국시대 사이에 생겨난 조어인 듯하다. 그 이전인 서주(西周) 대에는 하夏, 화華, 제하諸夏, 화하華夏. 중국中國, 중주中州, 중토中土 같은 호칭들을 사용했다.


16 화華는 '화려하다'는 뜻에서 문화가 우월하다는 뜻으로 바뀌었다. 결국 제하諸夏, 화하華夏는 중국문화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호칭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중국, 중주, 중토는 자국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지리적 관점에서 나온 호칭이다.


17 이렇듯 다른 계통의 관념이었던 '화(하)'와 '중'이 그대로 결합되어 '중화'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17 그들은 중화를 둘러싼 사방을 동이東夷, 서융西戎, 북적北狄, 남만南蠻이라고 해서 이른바 '이적夷狄'이라는 이름으로 배치하고, 스스로를 그들과 구별해 중화세계의 우월성을 지켜 나갔다.


18 중화는 이적이 있어야 비로소 중심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이 중화사상을 다른 이름인 '화이사상華夷思想'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18 중국이 그들과 다른 점은, 단순히 중화와 이적 간의 차별에 머물지 않고 중국을 위에 두면서 양자가 공존하는 세계를 하나의 사상으로까지 끌어올렸다는 데 있다. 그러 사상을 형성하는 데 큰 공헌한 것은 다름 아닌 차별을 조장하는 데 앞장선 유가 사상이다.


19 중국 사상을 근간을 이루는 '천명사상天命思想'이 중화와 이적을 연결하는 역할을 해냈다.


20 오복도는 중화 천자의 위엄이 미치는 지역을 천자를 중심으로 5단계의 네모 반듯한 모양으로 묘사한 것이다. 천자에게 복속하는 정도에 따라 5단계로 나누어서 나타낸 개념도라고 보아도 좋다.


21 천하의 중앙에 위치한 전복은 천자가 직할하는 기내이고 그곳 주민들은 경작에 종사하면서 천자가 쓸 물품을 마련한다.


22 천자의 덕에 감화되고 중화의 예와 도를 받아들이면 이적도 중화의 민과 동일하게 간주했기 때문이다.


23 이적이라도 예와 의를 알면 중화의 백성이 되고 중화의 백성조차도 예와 의를 실추시키면 이적으로 취득되었다. 중화사상에는 차별의 논리와 포용의 논리가 늘 동전의 양면처럼 세워져 있었다.


24 중화사상의 화이질서는 국제정치에서 중국의 왕조들과 주변의 국가-민족들 간의 '책봉'으로 구체화되었다.


25 화이질서는 당나라 때 더욱 완성된 형태로 기능했다. 세계제국이라 일컫는 당나라는 절대적인 무력과 경제력과 정치력으로 동아시아세계에 군림했다.


29 양국 간의 관계를 보면, 요나라와 송나라와는 형제관계인데 비해 금나라와 남송은 군신관계로 규정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송나라는 국제질서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할 만한 정치력도 군사력도 지니고 있지 못했다.


30 13세기 초, 새롭게 몽골족이 대두해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 전역을 통일했다. 이로써 중화와 이적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이적이 중화를 지배하는, 고금에 전례가 없는 경천동지할 대사건이었다.


제2장 대명제국의 탄생

38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의 최동남부에 있는 이른바 '기아의 스텝지대'에 갑자기 페스트(흑사병)가 발생했다. 페스트는 서쪽으로 진행해 1347년에 콘스탄티노플에 도달했고 곧 유럽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일설에는 유럽인 3천4백만명, 다시 말해서 3명 중 1명이 이 병에 감염되어 죽었다고 한다.


39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과 서쪽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자연재해로 엄청난 인명을 잃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42 원나라 말기의 반란 세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동서의 홍건군으로 대표되는 종교적 색채를 띤 집단들이다.


42 다른 하나는 종교색이 거의 없는 방국진과 장사성 같은 무리다.


43 가장 큰 성공 요인은 그가 강남의 요지인 남경에 근거지를 두고 세력을 확대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44 송나라 이래로 강남 지방의 경제적 발전은 이미 원나라 대에 최고의 절정에 올라 있었다. 이를 놓치지 않고 시류에 편승한 것이 주원장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었다.


46 군웅할거의 쟁패전은 장사성 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종국을 맞이하게 되었다.


46 지정28년(1368) 정월 3일, 주원장은 남경 남쪽의 환구에서 장중하게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새 왕조의 황제로 즉위했다. 국호는 대명大明, 연호는 광대한 무력, 즉 홍무洪武로 정했다.


47 이 시점에서 명 왕조의 경역은 북으로는 황하 이남, 남으로는 복건성 정도여서 중국 전역의 지배와는 거리가 멀었다. 무엇보다도 대도에 아직 원나라가 건재해 있어 강적을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51 몽골, 색목인은 중화의 족류는 아니지만 같이 하늘과 땅 사이에 생명을 받은 자들이다. 예와 의를 알고 신민지 되고자 원하는 자들이 있다면 중화의 민과 똑같이 잘 돌보고 길러야 한다.


51 일반적으로 한족 국가를 말할 때 한족만의 단일 민족국가를 떠올리기 쉽지만 이전부터 중국 역사상 그런 나라는 없었다. 명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52 중화의 회복은 이념적으로 사실에 비춰보아도 한족 국가의 부흥은 아니었다. 중화의 민이 당연히 주인인 중화를 이적에게 회복시켜 명나라와 함께 새로운 중화의 세계로 중국을 재생시키는 것, 이것이 중화의 천자 주원장에게 부여된 커다란 과제였다.


59 관료는 황제의 면전에서 서 있지 못했고 알현 할 때에도 매우 굴욕적인 예법이 강요되었다. 무릎을 꿇고 양손을 땅바닥에 댄 다음 이마가 땅에 닿게 3번, 이것을 한 세트로 3번 되풀이하는 '삼궤구고두'의 예는 주원장 때 시작되었다.


63 현실세계의 황제-관-민의 질서는 명나라 초기에 철저하게 고정화되었다. 주원장은 사람마다 각자의 계층과 신분에 맞게 위치를 정해주고 자신의 권력과 법률로 이 질서를 유지시키려고 했는데, 원나라를 대신해 중화의 새 천자가 된 주원장에 의해 타율적이고 강제적인 유교질서가 만들어진 것이다. 유교 세계가 중국적 논리에 의해 점령되어 역설적으로 순화된 모습을 띠게 되는데, 이것이 전제국가 명나라의 실체였다.


65 흔히 명나라의 해금을 말할 때 국가가 무역의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 민간의 자유로운 교역을 금지했다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그러나 이 견해는 건국 초기의 사정을 무시한 큰 오해다. 해금의 본 목적은 민간교역 금지가 아니라 해안의 소요를 평정하고 대내적인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67 조공제도와 조공무역과 해금이 일체화되어 명나라의 독자적인 대외 시스템인 '해금=조공시스템'이 형성되었다.


68 상품 유입에 따른 상품경제의 발전이 명나라의 통치기구를 흔들어대지 않을까 하는 점도 하나의 요인일 것 같다."


68 정책의 밑바탕에 자연경제의 붕괴에 대한 우려가 깔려 있었던 것은 거의 틀림없다.


68 이런 이유를 포함해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역시 명나라라는 국가의 만족할 줄 모르는 통제 욕구 때문일 것이다.


68 명나라는 동아시아의 종주국이라는 입장에서 해상을 숙정하고 모든 대외관계를 주변 국가들의 조공이라는 한 가지로 묶어버린 것이다. 시박사의 폐지와 이에 따른 조공제도, 조공무역, 해금의 삼위일체가 그 결과였다.


71 중화제국의 존립근거인 천명사상과 화이사상은 명 초기에 이르러 비교가 불가능한 전제국가를 탄생시켰다. 명나라는 국내적으로는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전제 지배를 관철하고, 대외적으로는 명나라 중심의 화이질서로서 주변국가의 행동을 규제했다. 천하질서와 화이질서가 교차하는 축 위에서 명나라 황제가 중화와 이적의 세계를 총괄했던 것이다.


제3장 황통의 장래

82 '제왕 분봉'이라는 극히 사적인 관계에 기초한 이 체제는 남경에 수도를 둔 명나라만의 특이한 포진이었다.


85 제왕 분봉체제는 애초부터 피할 수 없는 하나의 모순을 안고 있었다. 중앙집권화와 황제권의 강화는 명나라 중앙정부가 지향한 방침인데, 뭐라고 해도 그것에 역행하는 '분권화'의 위험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주원장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황제와 왕들은 부자관계였으므로 아들들이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주원장은 장군들에게 군사권을 맡겨서 생기는 위험성을 육친의 연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제4장 찬탈로 가는 계단

107 삭번정책은 뒤에 언급하겠지만 왕들의 번국을 없애버리는 정책으로, '연왕의 반란 = 정난의 변'을 유발해 건문정권을 붕괴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126 확실히 여러 왕들 중에서도 연왕의 위협은 두드러졌다. 최연장자로서 북방 방위에 전념하면서 실전을 통해 키운 그의 군사적 탁월함이 부담이 되었으므로 건문정권의 제왕 정책은 당연히 연왕을 표적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건문정권이 연왕에게서 군사력을 빼앗고 그의 봉국을 없애버리는, 이른바 '삭번'으로 치달린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제5장 역사의 전복

139 연왕, 즉 훗날 영락제의 65년 생애에서 40세부터 43세까지 걸쳐 있는 정난의 변이 큰 전기가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가 이 내전에서 승리해 명나라 3대 황제가 되고 22년간의 재위 기간 중 여러 가지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영락의 성세'라는 시대가 등장하게 되었다.


제6장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188 천하 제일의 문인에게 정중한 즉위의 조를 기해한 영락제에게 '연적찬위'(연나라의 도적이 제위를 빼앗다)라는 네 글자로 답했다.


188 방효유의 순난을 표현할 때 '10족이 희생되었다'고 말한다. '9족'이라는 말은 흔히 사용되지만 '10족'이라는 표현은 생소하다. 아버지 쪽으로 4, 어머니 쪽으로 3, 처가 쪽으로 2 일족을 합한 '9족'에, 친구와 제자와 동문을 합쳐 '10족'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 말은 방효유의 비극에 빗대 만들어진 말이다.


190 찬탈과 살육의 오명을 어떻게 씻어낼 것인가? 영락제는 극심한 혹박에서 도망치고 싶은 숙명과 평생 대치해야만 했다.


제7장 천명의 소재

198 《문헌대성》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유서는 영락제의 방침에 따라 경(經, 유교 관련서적), 사(史, 역사서와 지리서), 자(子, 유교 이외의 제자백가), 집(集, 문인들의 문집)에서 천문, 의학, 점복, 기예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를 망라한 엄청난 분량의 책자였다.


199 이렇게 수집한 여러 서적들은 모두 2,169명의 스태프의 협력을 받아 태조가 정한 《홍무정운》의 운 순서대로 배열해 약 3년만에 완성되어 황제에게 바쳐졌는데, 영락 5년 11월이었다. 모두 합치면 22,877권에 11,095책으로 완성된 이 방대한 유서는 연호를 기념하기 위해 《영락대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200 영락제가 모든 전적을 '총서'가 아니고 '유서'의 형식으로 하나로 정리한 것은 어쩌면 '성스러운 제작자'가 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204 영락13년(1415)에 간행한 《사서대전》 《오경대전》 《성리대전》이라는 세 《대전》이 그것이다.


205 이런 조잡한 대용물이 국정교과서가 되어 사상의 통일을 꾀했으니 뜻있는 지식인들은 도저히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206 영락제는 《대전》을 편찬함으로써 주자학을 공인된 체제교학으로 삼아 국가의 정치이념을 확립하려고 했다.


207 영락제가 내정 면에서 거둔 성과는 이데올로기 방면에만 머물지 않았다. 실무 면에서도 그 자신이 공부를 더해서 전제체제를 강화해 나갔다. 그 중에서도 특히 후세에 영향을 미친 것은 다름 아닌 내각제도의 개설과 환관의 중용이었다.


210 《명사》의 <환관전>에는 환관들이 출사, 원정, 감군, 분진, 간첩 같은 분야에서 큰 권한을 쥐게 된 것은 모두 영락 시대부터였다고 기술했다. 영락제는 환관을 외국에 사절로 임명하기도 하고(정화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때로는 군대의 감시역이나 진수관으로 전국에 파견했다. 그 중에서도 환관에 대한 영락제의 신임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악명 높은 특무기관 '동창'이었다.


제8장 쿠빌라이를 넘어서

214 당초 태조는 북방의 몽골족과 동남 해안의 왜구를 사정권에 넣고 전수방위라는 국방체제를 확립했다.


214 정난의 변에 따른 국내의 혼란은 단지 국토의 황폐화만 초래한 것이 아니라 국방체제 자체에도 동요를 불러오게 되었다.


215 북쪽 지역 왕들의 방위 기능에 마비가 생기면서 핍색해있던 몽골족의 세력이 회복되었다. 두 번째는, 해안쪽의 해금과 해방 체제가 이완되면서 밀무역이 활발해지고 왜구들의 난동 조짐이 나타난 것이다.


215 즉위와 동시에 남북 양쪽에서 국방체제를 고쳐 세우는 일은 영락제의 시급한 과제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218 영락제가 이렇게까지 조공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그 하나는 주변국들과 군신관계를 맺어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218 영락제의 경우 여기에 더욱 특별한 사정이 더해졌다. 다른 것이 아니다. 찬탈의 오명을 불식시키기 위해 일부러라도 천자의 형상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다.


219 군사적인 면에서도 되도록 평정을 하되 적극적으로 조공을 재촉하는 정책에 따라 명나라 중심의 화이질서가 점점 확립되어 갔다.


230 영락제가 추진했던 적극적인 대외정책 가운데 유달리 눈에 띄는 것은 환관 정화를 총사령관으로 한 남해원정이다. 실로 그 규모부터 전무무후한 이 원정은 영락3년(1405)에 시작해 선덕8년(1433)까지 29년간 7차례 행해졌다.


231 정화의 원정 사업이 위대한 점은 규모의 크기도 크기이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을 행한 시기에 있다. 15세기 초는 '대항해시대'보다 1세기 앞선 시기이다.


231 이런 획기적인 대사업이 15세기 초반에 집중되었다가 그 후 갑자기 중단된 이유는 무엇일까?


232 지금은 일반적이고 대체적인 해석이 나왔는데, 한마디로 정리하면 해외무역의 확대 발전이 목적이었다는 것.


234 영락제에게는 무역은 부차적이었고 조공이라는 의식 자체에 의의가 있었다.


235 영락제가 원한 것은 무역으로 얻는 이익이 아니라 사이가 조공을 하는 '영락의 성세'였다.


235 정화의 원정은 당시 중국사회의 요청에 따른 것이 아니라 영락제의 특수한 사정에 기댄 측면이 컸다.


제9장 화이질서를 총괄하는 자

250 무엇이 영락제를 이토록 몰아세웠을까? 오해를 무릅쓰고 감히 말하자면, 한마디로 미칠 만큼 중화의 천자가 되겠다는 그의 정념에서 촉발된 사태였을 것이다.


251 영락22년, 5차 친정의 귀로에서 영락제는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 몽골의 진중에서였다.


252 친정에 대한 집념처럼 영락제가 정열을 지속적으로 불태운 사업이 하나 더 있었다. 다름 아니라 중화와 이적을 통합하기 위해서 천자의 수도를 건설하는 것, 그의 근거지인 북평(북경)으로 천도하는 일이었다.


제10장 영락제의 유산

283 영락제는 태조가 지향했던 전제 지배를 국내외에서 철저하게 추구한 것에 불과했다. 말하자면 명나라 초기라는 시대를 '졸라맸던' 까닭에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명나라 초기 체제의 완성이었다.


283 국가는 그 후에도 가능한 한 이 체제의 강화에 급급했고 애써 전제체제를 유지하려고 했다.


283 국가와 사회의 정치적 역량을 토대로 명나라 초기에 성립된 이 체제는 완성과 동시에 국가와 사회의 괴리를 필연화시키고 말았다.


283 해금=조공시스템도 홍무와 영락 시기를 지날 무렵부터 사회경제의 발전에 비례해 밀무역이 활발해지고 이를 견디지 못한 국가는 명나라 말기에 해금을 완화하게 된다.


저자 후기

292 부제에서 표현했듯이 영락제의 진가는 외정 면에서 두드러졌다. 내정을 중시한 주원장의 정책과는 얼핏 보면 단절된 듯 보인다.


292 그가 확립한 체제는 중국 국내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에도 '근대' 이전의 사회를 규정하게 했다. 좋건 나쁘건 중국의 영향을 받은 주변 국가들은 영락제 시대에 명나라를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에 편입되어 그 구조 안에서 행동하도록 강제되었다.


293 해금=조공무역체제는 명나라만이 아니라 이후 청나라도 답습했고 주변 여러 나라에 영향을 미쳤다. 조선과 안남에서도 해금이 채택되었고, 일본도 에도 시대에 '쇄국'이 실시되었다. 쇄국이 해금의 결과라는 것은 지금은 상식이 되었다. 이런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를 지배한 시스템의 완성은 영락 시대에 이루어졌던 바, 이 대목에서 영락이라는 시대가 지닌 무게의 느낌이 와 닿는다.


문고판 저자 후기

295 이 15년 동안 학계의 추세는 확실히 달라졌다. 당시에 비주류에 속해 있던 근대 이전의 대외교류사와 국제관계론이 지금은 연구의 주류를 점해 매년 많은 성과물이 나오고 있다.


296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논할 때 중국을 중심으로 한 '화이질서'는 이제 상투적인 단어가 되었고, 이 구조 속에서 국제질서를 분석하는 작업이 명·청사 분야에서 왕성하게 진행되고 있다.


297 이런 가운데 영락제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된 것이 '화이일가華夷一家'라는 단어였다. 일반적으로 화이일가는 다민족 복합국가인 청나라의 통치이념으로 알려져 있고 지금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299 영락제의 위대한 점은 화이일가를 단순히 관념상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현실 국제정치에서 실현시켰다는 데에 있다.


302 옹정제의 화이일가든 건륭제의 중외일가든 모두 그 기원은 영락제가 선언한 화이일가에서 나왔다.


역자 후기

304 생각해보면 영락제만큼 우리나라와 인연이 깊은 중국 황제가 있을까 싶습니다.


304 연왕 시절에는 사자로 명나라를 방문한 왕자 이방원을 만났고, 황제가 되어서는 역시 사자로 온 세자 양녕대군과 대면한 바도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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