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다 게이이치: 청일·러일전쟁 ━ 일본 근현대사 3


청일.러일전쟁 - 10점
하라다 게이이치 지음, 최석완 옮김/어문학사


머리말-일본으로, 아시아로 5

제1장 초기의회 15

제2장 조약개정 45

제3장 청일전쟁 77

제4장 대만 정복 전쟁 131

제5장 청일 전후와 국민 통합 157

제6장 민우사와 평민사 203

제7장 러일전쟁과 한국병합 237

맺음말-‘빛나는 메이지’론과 내셔널리즘 299

저자 후기 306

역자 후기 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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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초기의회

17 '헌법 실시의 단행'이란 5개월 후인 11월에 열리는 제국의회 제1차 의회(이하, 제1의회)의 운영, 특히 역사상 최초의 민의에 따른 국가 예산의 성립을 의미한다. '저편에서 주시' 중인 구미인의 평가는 바로 이 점에 달려 있었다.


18 제1의회는 정부의 '군비 확장' 정책과 민당(자유민권운동 이래의 역사를 가지며 반(反)번벌을 내세우는 정당)의 '민력휴양' 요구가 서로 대항하여, 정부와 민당의 대립으로 물들게 된다. 그러나 그러는 가운데서도 정부와 의회는 아시아에서 입헌제가 성공할 수 있을지 여부가 '세계사'의 한 장면으로 주목받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20 제2세대인 이토 히로부미•야마가타 아리토모•이노우에 가오루•야마다 아키요시의 죠슈파와 함께, 구로다 가요타가•사이고 쓰구미치•마쓰카타 마사요시•오야마 이와오의 사쓰마파가 정치 경력을 쌓아 올렸다. 1890년대에 이들은 정권을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인재로 여겨지게 된다. 이 책에서는 그들을 명명할 때, 메이지 천황이 특별한 친임의 뜻을 표현한 칙유를 각각에게 내림으로써 성립한 '원로'와는 다른 의미에서, '원훈급'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8인의 '원훈급' 정치가가 어느 방향을 향하는지에 따라 구체적인 정치의 향방이 결정된다. 그들의 공적 지위와는 관계없이 '사실상의 권력'으로서 기능하던 것이 '번벌 정치가'의 실제 모습이었다.


제2장 조약개정

46 유럽•러시아와 극동 러시아 간 약 7,400킬로미터를 연결하는 시베리아철도 부설 계획은 1885년에 발표되었다. 1891년이 되어서야 러시아가 프랑스로부터 차관에 성공함으로써 착공이 가능하게 되었는데, 이는 8월에 체결되는 러프협약의 경제적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47 야마가타 아리모토는 러시아의 '시베리아 철도' 구상을 일찍부터 경계하였고, 그 완성은 일본의 위협이 될 것이라는 인식을 지속적으로 확대시키고 있었다.

  1) 군사의견서(1888년 1월): 현재의 세계 정세를 생각해 보건대, 아시아에서 영국과 러시아가 대립해서 동양에 일대 파란이 일어나기까지 수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사정이 이렇게 절박해진 것은 무엇 때문인가? 캐나다 태평양철도와 시베리아철도의 부설로 인해, 영국의 동양 항로가 단축되고 러시아 군대의 동방으로의 이동이 신속해지는 것이 그것이다.

  2) 외교정략론(1890년 3월): 우리나라 이익선의 초점은 실로 조선에 있다… 시베리아철도가 완공되는 날이 곧 조선에서의 多事가 일어나는 날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3) 군비의견서(1893년 10월): 러시아가 침략을 대외정책으로 삼아 사대에게 틈만 있으면 곧 이에 편승하려 한다. (중량) 시베리아 철도의 부설도 이를 위한 것으로 공사의 진척은 실로 동양의 위기를 가속화하는 것이다.

  4) 군비확충의견서(1895년 4월 15일): 현재 시베리아철도는 공사가 점차 진행되어 준공까지 수년을 앞둔 상황이 되었다.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5) 북청사변 선후책(1900년 8월 20일)

  6) 동양동맹론(1901년 4월 24일): 러시아가 만주를 노린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동양 철도의 부설, 여순 대련의 경영 등은 모두가 영구 점령을 염두에 둔 것이다.


48 시베리아 철도 계획이 발표된 지 3년 후에 최초의 지적이 있었고, 착공 전에 모두 두 차례에 걸쳐서 그 완공이 조선 등에 '다사'(전쟁을 말함)를 일으킬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①, ②). ③에서는 일본의 적국은 청이나 조선이 아니라 영국, 프랑스, 러시아라고 하였으며, 청일 전쟁 후인 ④에서는 '동양의 맹주'가 되기 위해서는 한층 더 군비를 확장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⑤, ⑥은 의화단 사건(북청사변) 후의 대응을 정리한 것이다. 이와 같이 야마가타의 의견서에는 주요 정세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시베리아 철도의 진행 상황이 고려되어 있었다.


49 에노모토 외상은 '시베리아 철도는 영국이 동양에서 보유 중인 특권을 박탈하는 무기'라고 보았다.


51 1911년에 시베리아 철도를 이용하여, 신바시-오사카-시모노세키-부산-하얼빈-리가-베를린 등을 연결하는 한 장짜리 표를 발매하게 된다.


51 1893년 10월 19일 러시아 정부의 시베리아철도위원회는 시베리아철도의 완성으로 러시아의 경제적 이익이 증대될 것에 주목하여, 중국과 일본에 대한 무역 확대 계획안을 만들어 위원회에 제출할 것을 장상에게 요구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신문은 '시베리아 철도가 러시아 상공업의 중심지와 동아시아의 풍요로운 나라들을 접근시켜, 우리나라 상공업에 큰 공헌을 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72 영국은 일본이 친영 정책을 전개한다고 판단하고 이번 기회에 매듭짓기로 하였다. 일본 정부도 타결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양국의 타협은 성립하여 1894년 7월 16일 영일통상항해조약이 조인되었다.


제3장 청일전쟁

78 1890(메이지 23)년 12월 6일 야마가타 아리모토 수상은 역사상 최초로 열린 제국의회에서 시정 방침 연설을 하였다. 15분 정도의 짤막한 연설로 추정되는데 '주권선' '이익선'이라는 특이한 용어를 사용하였다. 국경인 '주권선'뿐만 아니라 '주권선의 안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구역'인 '이익선'을 보호해야 한다. '예산에 반영시킨 것처럼 거대한 금액을 할애해서 육해군 경비에 충당'한 것은 바로 그러한 취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두 개념은 1889년 6월, 빈(Wien)대학의 교수 로렌츠 폰 슈타인(Lorenz von Stein)에게서 배운 '권세 강역', '이익 강역'을 알기 쉬운 말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78 민당이나 퇴역 장관 중 일부가 주장하던 소규모 국토방위군 구상을 배제하고, 외정을 가능케 하는 규모의 군비 확장 노선을 명확히 내세운 점에서, 야마가타의 연설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79 청일전쟁을 통해 '이익선'은 북쪽으로는 조선, 남쪽으로는 대만의 대안인 복건성으로까지 확대되어 두 개의 이익선을 갖게 되었다. 북진론과 남진론을 주장하는 근거이다. 1895년 제국 일본은 야마가타가 주장하는 ‘이익선’ 개념을 명확히 채택하고, 식민지 대만과 세력권 조선을 발판으로 이후의 50년 동안을 군사력 확대와 전쟁으로 나아간다. 그 전환점은 청일전쟁이었다.


80 지금까지의 경과를 고려하면 일본이 조선에 적극적으로 침투를 도모하지 않는 한, 청일 개전의 가능성은 낮았다.


84 국내 정치에 쫓기고 있던 이토 내각은 이를 타개할 방책 마련에 내몰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중의원에서는 제5의회의 해산을 '도리에 어긋나는 부당한 일'이라고 공격하는 내각 탄핵 상주안이 가결되어 있었다. 야마가타 후밀원 원장은 의회가 '망언과 폭언으로 더할 수 없는 본란을 일으켜서', 의회와 '국사를 논의하는 일은 도저히 바랄 수가 없다'고 이토에게 서간을 보냈다. 이에 '천하의 일심'을 집중시키는 '국사'로서 조선 문제가 등장했던 것이다.


91 농민군은 전주화약이 성립되어 해산했기 때문에 일본은 군사 4천 명을 계속 주둔시킬 합리적인 이유가 없어졌다. 오토리 공사는 구미 제국 공사의 의혹과 압박 속에서 청국과 조선의 철병 요구를 받았다. 오토리 공사가 계속 파병 중지를 요청하자, 6월 13일 무쓰 외상은 '만약 무슨 일도 하지 않은 채 또는 아무 곳으로도 가지 못한 채 끝내 그곳에서 허무하게 귀국하게 된다면, 몹시 체면이 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책이 달성되지 못한 것'이라면서, 한성에 진출한 군대가 ‘무슨 일'인가를 해줄 것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103 '녹두장군' 전봉준을 맹주로 한 동학 주력의 2차 무장 봉기는 10월 9일에 들어와서야 일어났다. 11월부터 다음 해 95년 4월 초순까지 동학농민군을 본격적으로 탄압했다. 탄압 부대의 주력은 11월 초순에 도착한 후비 보병 독립 제19대대 등 2,700명의 일본군이었다. 여기에 2,800명의 조선 정부군과 각지의 양반 사족 및 토호 등이 조직한 반동적인 민보군이 가담하였다. 촌 구석구석까지 수색하는 '토벌' 작전을 계속하여 서남단인 해남, 진도까지 몰아붙였다. 문자 그대로 섬멸이었다. 5개월 동안 농민군이 치룬 전투는 46차례, 농민군 참가 인원은 연 13만 4,750명으로 추정된다. 또 하나의 청일전쟁이었다.


104 병사들이 상륙해서 느낀 점은 우선 '불결'과 '악취'였다. '악취'를 맡는 것은 생활 문화를 배경으로 이질감을 느끼는 것으로, 시대를 막론하고 다른 문화와 조우할 때 느끼게 되는 공통된 체험이라 할 수 있다.


105 청일전쟁에 참가한 병사들은 1872년의 학제 발포 후에 태어났다. 그들은 학교와 군대라는 두 가지 교육을 통해서 '위성'과 '청결'을 철저히 익히는 경험을 이념적으로나(위생적인 것은 근대인이다) 신체적으로(우선 손을 씻고 식사를 하자) 거친 제1세대이다. 병사들은 극복해야 할 대상의 결함에 대해 누구보다 민감해서, '불결'과 '악취'의 이면에는 반드시 '뒤떨어진 문화'가 있다고 보았다.


106 일본의 군대는 청일전쟁부터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종료될 때까지 50년간 아시아를 계속해서 걸어다닌 셈이다. 청일전쟁은 그 시작을 알리는 전쟁이었다. 아시아를 걸어다니면서 우리는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역사를 묻는 의미가 여기에도 있다.


121 이 책에서는 개시 시점에 조선과의 '7월 23일 전쟁'도 고려하여, 광의의 '청일전쟁'을 1) 7월 23일의 조일전쟁, 2)협의의 청일전쟁(1894년 7월 25일 ~1895년 4월 17일), 3) 대만 정복 전쟁(1895년 5월 10일 ~ 동년 11월 30일)의 세 기간을 합한 것으로 규정하였다.


122 청일 전쟁은 청의 군사력이 약체라는 사실을 세계에 폭로하는 계기가 되었고, 동시에 열강에 대항할 수 있는 군사력이 아시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말았다. 이후 열강은 아시아에 대한 침략을 재개한다. 식민지 대만을 확보함으로써 '대일본제국'으로서 아시아에 등장한 일본도 이들과 연동하면서 제국주의의 아시아 침략을 확대해 간다. 19세기 말 이후에 찾아온 아시아의 위기는 청일전쟁에 의해 생겨난 것이었다.


제4장 대만 정복 전쟁

154 1897년에 [광일본문전] 전 2권을 간행했을 때에는 세계 각국의 언어를 '그 나라의 국어'라 한다고 설명함으로써, '국어' 용어와 개념을 선보였다. 청일전쟁이 가져온 '국민' 개념은 이념으로서 '국어'를 만들어 낸 것이다.


156 국어와 국자 문제를 논의하는 국어조사위원회는 1913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그 논의는 국어 교육과 신문계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쳐서 이윽고 1930년대에는 '대공아공영권어'를 추구하는 가운데 일본어 간이화론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제5장 청일 전후와 국민 통합

164 아시아를 구미 기준의 금이용권, 즉 세계 경제에 편입시켰으며 금융적 종속도 강화시켰다. 아시아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면서 '탈아입구'를 강제하는 금융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166 청일전쟁의 열매를 가장 잘 맛 본 것은 대영제국이었다.


제7장 러일전쟁과 한국병합

258 1902년 1월 30일에 영일동맹이 조인되었다. 내용은 1) 청국 및 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 2) 제3국이 참전한 경우에만 동맹국과 협동하여 전투할 의무를 진다는 사실상의 군사동맹이었으며, 동시에 일본이 한국에 특수 권익을 갖는다는 점을 영국에게 승인시키는 것이었다.


258 그림 7-4 러시아에 맞서는 일본(비고가 그린 그림엽서), 뒤에서 미는 것은 영국, 배후에서 지켜보는 것은 미국. 전쟁과 강화의 관계를 완벽하게 표현


265 러일전쟁은 양국에게는 싸우지 않아도 좋을 전쟁이었다.


277 전쟁과 강화를 동시에 관찰하고 경계하면서 지구전을 수행하되, 상화에 따라 어느 한 쪽으로 흔들이를 밀어붙인다는 위험한 각의 결정이었다. 전쟁 전의 단기적 전략 구상은 일찍이 없었던 전쟁 전개에 따라 산산이 부서지고, 강화로도 넘어갈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었던 것이, 1905년 4월의 일본 정부의 정확한 위치였다. 사태를 움직인 것은 5월의 동해 해전(일본해 해전)이었다. 일본 해군이 일방적으로 승리한다는 세 가지가 동시에 맞아떨어져야만 가능한 예상외의 사건이 현실이 됨으로써, 우려되던 전쟁의 지구화는 거의 사라졌다. 강화가 서둘러진다.


295 이념적으로는 헌법시행지이지만 각 조장을 구체적으로 시행하지 않는 이른바 '이법역'이 되기 때문에 헌법에 인정된 권리와 의무가 실제로는 발생하지 않게 된다. 20세기 초까지 훗카이도와 오키나오 현이 놓여 있던 위치와 동일한 내용이 조선에도 적용되게 되었다. 예를 들면 권리에서는 참정권, 의무에서는 징병이 조선 거주자에게는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헌법시행지로 인정함에 따라 의회의 발언권이 미치게 되었는데, 이는 조선을 성역으로 삼아 권력을 휘두를 생각이었던 데라우치의 구상과는 다른 결과였다.


맺음말 ­‘빛나는 메이지’론과 내셔널리즘

299 1945년까지의 일본 사회는 전쟁의 연속인 시대였다고 회고되는 경우가 많다. 이를 다른 말로 바꾸면 하나의 전쟁이 끝나면 전후가 오지만, 실은 그 전후가 머지않아 전쟁을 맞이하는 전전이었다는 말이 된다. 다음 전쟁이 돌연 찾아오는 것이라면 중간 시기는 전후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다음 전쟁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전전이라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이유에서 그와 같은 긴장의 연속을 사람들은 계속하고 있었던 것일까?


299 청일 전쟁을 통해 대만을 청으로부터 빼앗아 식민지로 만든 것은 이 전쟁의 본래 목적이 아니었다. 일본 단독이냐 또는 구미 열강과의 공동관리냐 하는 문제는 차지하고라도 조선을 지배하에 두는 것이 전쟁의 목적이었다.


300 일본의 조선 지배는 가혹하여 조선 민중은 압록강을 넘어서 중국 동북부(이른바 '만주지역')로 도망쳐 들어간다. 자립한 조선 민중이 '만주'에서 조선으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일이 일본의 과제가 되었다. 만주에 영향을 확대하여 조선 지배를 안정화시키는 일을 추구하게 되면서 군사적 해결도 선택 방안의 하나로 등장하는데, 그것이 1920~30년대의 일본의 모습이 되는 것이다.


300 그와 같은 전환점이 청일전쟁이었다. 군사력이 국가와 사회에서 커다란 의미를 갖게 되는 것도, 따라서 작은 나라 일본이라는 사회가 극적으로 변화하는 것도 이 시기였다.


303 식민지 대만과 조선에 대한 일본의 정책은 '발달한 일본'의 기술과 자본을 '뒤처진 지역'에 옮겨 놓는 것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구미와 같은 '극악한 식민지 지배'와는 다르다는 변명이, 20시가 말 이래 일본에서 확산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상세한 연구에 따르면 그러한 '변명'은 일소에 부쳐질 낮은 수준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경제사의 연구에서 보면 대만은 제당과 남진의 거점으로 개발되어, 일본 내지의 생활을 충실히 하고 국토를 팽창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역할을 담당했다. 단순한 개발책의 실시가 아니었다.


303 또 '발단한' '뒤처진'이라는 표현의 근저에는 차별 의식이 드러난다. 한국병합은 부패한 조선 왕조에 그 책임이 있다면서, 일본이 적극적으로 식민지화를 목표로 움직인 사실을 은폐하고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의견도 보인다.


304 1910년 이후의 일본은 대규모 식민지를 보유한 '대일본제국'이었다. 그곳에는 대일본제국헌법에 의해 수호된 '국민'과 그 보호 아래에 들어갈 수조차 없는 '국민'이 존재하였다.


305 근대 일본은 제국이라는 역사가 초래한 결과로서의 식민지를 왜 방기해야 하는지 라는 중대한 사상적 과제를 돌파하지 않은 채, 1945년의 패망이라는 이른바 '외압'에 의해 대만이나 조선을 손에서 놓게 됨으로써 안이하게 '식민지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렇게 된 역사적 경위를 곱씹어 숙고해 보아야만 한다. 그 출발점은 '청일전쟁에서 러일전쟁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역사를 확실하게 찾아가는 일은 생각할 재료를 발굴하고, 사고를 넓혀 비약시키는 모험 여행이기도 하다.


역자 후기

309 다음으로 더욱 주목할 것은 근대 일본의 대외 정책을 팽창주의 일변도로 해석하는 종래의 전통적인 시각에서 벗어난 점이다. 일본의 대외 팽창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조선의 지배를 놓고 벌어진 준비된 전쟁,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라는 시각은 찾아보기 어렵다. 천진조약은 조선 불가침과 영토 보전에 관한 청일의 양해가 성립했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일본이 적극적으로 조선 침투를 도모하지 않는 한 청일전쟁의 가능성은 낮았다는 것이다. 또 러일전쟁과 관련해서도 일본은 마지막까지 영일동맹과 러일협상을 동시에 성립시키는 다각 동맹•협상망의 성립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설명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외교정략론'을 극히 예외적인 군사모험주의로 평가하고, 러일전쟁 중의 조선보호권 획득 문제를 전쟁의 장기화에 대비한 포석으로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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