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20분 | 일본 근현대사 | 04 다이쇼 데모크라시 3


다이쇼 데모크라시 - 10점
나리타 류이치 지음, 이규수 옮김/어문학사


Reading_20min_20140908_3

– 1920년대 사회개혁의 네 가지 조류

1) 민본주의자에 의한 정당 정치의 확대와 민의의 존중

2) 사회주의 운동의 복권

3) 일본과 천황을 전면을 내세워 ‘国体’에 입각한 개조를 추구한 국가주의 단체

4) 종래의 통치 방식을 변경하여 국가에 의한 사회의 전면적 개조를 시도한 국가 정책


– 국체론의 기타 잇키(北一輝): 国家改造案原理大綱(1919), 日本改造法案大綱

– 기요하라 사다오(清原貞雄): 国体論史(1921) 국체론의 계보와 해석의 개요. “하나의 중심점을 향해 국민이 위집(蝟集)하여 견고한 국가를 만든다.” “‘근간’인 ‘야마토 민족’을 ‘반석’으로 삼으면, 새롭게 ‘부속된 민족’인 조선과 타이완에 대해서는 ‘권위와 은혜’로 응대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 대공황 시기 입안된 사회정책: 요시노 신지(吉野信次)와 그의 심복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기시는 東京帝国大学法学部를 졸업한 후 商工省에서 사회정책을 입안하고 시행. 후에 満州国 총무청 차장을 지냄.

– “이들 관료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운동 주체인 ‘민중’(노동자와 농민, 여성들)의 요구를 포섭하고 국가 주도로 사회개조를 실천할 수 있는 정책을 입안하여 실현하려고 노력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그 자체가 사회적인 통합의 논리를 품고 사회를 통제하려는 움직임을 만들어 낸 것이다.”

– 기시는 기타 잇키에 심취하기도 했으나 관료로서의 길을 걸으면서 산업합리화 정책, 경제개발계획 등을 근간으로 국가기구에 의한 사회통제의 기틀을 세웠다.


– “만주사변 이후 사람들의 감정은 일거에 거국적이 되었다.”

–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통해 사회운동과 정당정치 쌍방에 변용과 비판이 제기되었고,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종언(終焉)’을 알리기 시작했다.”

– “1930년대에는 전시동원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에서 유독 우리가 유념해서 봐야 하는 점은 이 시기에는 일종의 백가쟁명처럼 사상이 많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사회'라는 개념이 만들어지려면 그 개념 이전에 그 개념이 지칭하고자 하는 현실적인 뭔가가 있어야 한다. 과연 서구에서 society라고 하는 것이 일본에서는 있었는가를 생각해봐야 하는데, 사회라고 부를만한 집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얘기했던 것처럼 단나슈라든가 잡업층이라든가가 있으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의 제도적인 장치로서 국가와 구별되는 집단이 생활세계 속에서 이익을 공유하고 자기네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집단적으로 뭔가를 행동하고 규약을 만들고 낸다. 이런 집단, 결사체가 일본에서는 있었는가. 행정조직에 의해서 동원되는 신하와 백성, 즉 신민은 있었지만 과연 그러한 집단은 있었는가라고 한다면 그것은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런데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에 들어서서 1920년를 전후로 해서 사회라고 부를만한 집단이 생겨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것이 데모크라시라는 말이 처음에 과연 이 시기를 가리키는 적절한 말이었는가는 의문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을 생각해보게 되는 기회이기도 할 것이다.


사회개혁의 네 가지 조류라는 말을 쓰는데 첫째는 민본주의자에 의한 논의의 계속과 진전이라 해서 정당 정치가 확대되고 민의를 존중하는 태도들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그 다음에 사회주의 운동의 복권. 사실 socialism라는 것이 성립하려면, 사회주의는 일단 근대국가의 일원화된 행정체계에 의해서 사회가 움직여가는 것을 부정하는 태도가 있다. 즉 사회주의 운동이 전개되려면 결사체가 있어야 한다. 일본이 과연 그 전통이 있었는가. 물론 일본은 숙련을 중시하는 장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아주 씨앗이 없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 결사체가 과연 독자적인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는가, 또는 메이지유신 이전에 도쿠가와 막부 시절에도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조금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나온 조류는 일본과 천황을 전면을 내세워 국체에 입각한 개조를 추구한 국가주의 단체들이 등장한 것. 국수주의자들이 등장한 것이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국가와 시정촌 등을 종래의 통치방식을 변경하여 새로운 방책을 통한 사회를 재편성하려는 시도이다. 이것은 이른바 관주도의 사회개조 정책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130 1920년 전후 시기에는 네 가지 사회개조의 조류를 확인 할 수 있다. 첫번째는 민본주의자에 의한 논의의 계속과 진전이다. 


130 두 번째는 대역사건 이후 활동을 봉쇄당한 사회주의운동이 복권되었고, 또 기존의 차별 받던 사람들 스스로가 목소리를 내면서 개혁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세 번째는 일본과 천황을 전면에 내세워 '국체'에 입각한 개조를 추구한 국가주의단체가 결성되었다. 더불어 네 번째는 국가와 시정촌도 종래의 통치 방식을 변경하여 새로운 방책을 통한 사회의 편성을 시도했다.


현대 일본에서는 '민본주의자에 의한 정당 정치의 확대와 민의의 존중'은 전후 민주주의에서 계속해서 진전되었다고 할 수 있고, 사회주의운동은 전후 아시아 태평양 전쟁 이후 전개된 상황을 보면 썩 잘된 것 같지는 않다. 그 다음에 국체에 입각한 개조를 추구한 국가주의 단체들은 아직도 남아있다. 그리고 국가와 시정촌을 재편성하려는 시도, 즉 '위로부터의 사회개혁'은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에 등장했는데 21세기 한국에서도 이것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 두어야 한다. 


덧붙여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국체'에 입각한 개조를 추구한 국가주의 단체, 사상적인 바탕으로는 기타 잇기라는 사람이 있다.  국가개조안원리대강(国家改造案原理大綱)이라고 하는 것을 1919년에 내놓았고 이후에 일본개조법안대강(日本改造法案大綱)로 개편해서 다시 내놓았다. 또 기요하라 사다오라는 사람이 국체론사(国体論史)를 1921년에 내놓는데 이런 것들은 국체론의 계보와 해석의 개요를 담고 있는데 거의 환단고기 수준. 핵심적인 내용은 "하나의 중심점(황실)을 향해 국민이 위집(蝟集)하여 견고한 국가를 만든다." 그리고 "근간인 '야마토 민족'을 '반석'으로 삼으면, 새롭게 '부속된 민족'인 조선과 타이완에 대해서는 '권위와 은혜'로 응대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145 세 번째 조류의 대표적인 논자인 기타 잇키가 1919년 상하이에서 집필한 국가개조안원리대강(国家改造案原理大綱)(이후 일본개조법안대강(日本改造法案大綱))은 '영미의 자유주의'를 비롯해 마르크스와 크로포트킨의 사상도 결국 '민족사상의 개조화'라고 인식하고, 자신의 대강도 '일본 민족의 사회혁명론'으로서 사회개조를 위한 조류의 하나로 위치지웠다.


145 기요하라 사다오가 집필하고 내무성 신사국이 펴낸 국체론사(国体論史)는 쌀소동 이후 동향에 대한 우파로부터의 대응이었다.


145 기요하라에게는 '하나의 중심점(황실)을 향해 국민이 위집(蝟集)하여 견고한 국가를 만든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146 기요하라는 '근간'인 '야마토 민족'을 '반석'으로 삼으면, 새롭게 '부속된 민족'인 조선과 타이완에 대해서는 '권위와 은혜'로 응대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말했다.


1920년대 공황이 다가오면서 사회계획을 도입해서 국가 주도의 통제를 통한 개조를 주도한다. 이때 등장한 관료가 요시노 신지와 그의 심복 기시 노부스케가 중심적으로 정책을 담당하게 된다. 그래서 이들 관료들이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운동 주체인 민중(노동자와 농민, 여성들)의 요구를 포섭하고 국가 주도로 사회개조를 실천할 수 있는 정책을 입안하여 실현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이 말하자면 국가 주도 사회 개조 정책이다. 일본에서 이것을 하려고 한 것. 이 사람들이 나중에는 만주국을 세워서 국가 주도의 개조를 해보려고 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에서 나타났던 사회개혁의 네 가지 조류에 대해서 유심히 봐두어야 할 필요가 있는데 한국현대사를 파악하는데 흥미있는 시사점을 던져주지 않을까 한다. 다른 한편으로 하마구치 내각에서는 사회를 통제하려는 움직임을 관료들이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전쟁 상태를 전제하지 않은 사회 통제 정책의 원형이 생겨나기도 한다. 기시 노부스케는 한때 기타 잇키에 심취하기도 했으나 관료로서의 길을 걸으면서 산업합리화 정책, 경제개발계획 등을 근간으로 국가기구에 의한 사회통제의 기틀을 세웠다. 그리고 이런 국개 개조의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수립하고 강력하게 실현해 나아갔다.


265 하마구치 내각에서 산업합리화정책을 추진한 것은 상공성이었다. 1925년 3월 농상무성이 농림성과 상곡성으로 분리 설치되었다. 국장인 요시노 신지와 그의 심복인 기시 노부스케가 중심적으로 정책을 담당했다. 


266 이들 관료들은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운동 주체인 '민중'(노동자와 농민, 여성들)의 요구를 포섭하고 국가 주도로 사회개조를 실천할 수 있는 정책을 입안하여 실현하려고 노력했다. 


267 다이쇼 데모크라시 그 자체가 사회적인 통합의 논리를 품고 사회를 통제하려는 움직임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런 사회개혁의 흐름들은 만주사변을 겪으면서부터 소멸된다. 만주사변 이후 사람들의 감정은 일거에 거국적이 되었고,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통해 사회운동과 정당정치 쌍방에 변용과 비판이 제기되었고,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종언(終焉)'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1930년대 대일본제국이라는 기치 아래 전시동원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크게보면 네 가지 조류 중 네 번째는 국가에 의한 사회 재편성 시도인데 이것은 일종의 짬뽕이라면,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에 민간 영역에서 나타났던 세가지 사상의 흐름은 첫째가 민본주의, 둘째가 마르크스 사회주의, 세째가 국수주의(국체론)이다. 이 국체론이 향후에 파시즘으로 전개된다.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미완의 것이다 라고 얘기했던 것처럼 파시즘으로 전개되기는 하지만 일본 파시즘도 독일의 나치즘이나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비하면 이것도 미완의 파시즘이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 이후에 데모크라시도 미완이고 파시즘도 미완이다. 어떤 것을 완성시켜나갈 것인가가 일본 현대 사회의 주요한 과제가 된다. 파시즘을 완성시켜나가면 일본은 끝나는 것이고, 데모크라시를 완성해 나아가는 것이 나아가야 할 역사의 방향인데 과연 어떨지.


285 관동대지진을 거쳐 1920년대 후반의 양상을 개괄하면 민본주의,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 국수주의라는 세 가지 주장의 정립을 지적할 수 있다.


287 만주사변 이후 사람들의 감정은 일거에 거국적이 되었다.


289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통해 사회운동과 정당정치 쌍방에 변용과 비판이 제기되었고,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종언(終焉)'을 알리기 시작했다.


291 성과를 지키지 못하여 '다이쇼 데모크라시에도 불구하고'라는 국면과 운동의 논리가, 상황 속에서 통합과 타협으로 이행되어 버린 '다이쇼 데모크라시 때문에'라는 쌍방의 요소를 지니면서, 1930년대에는 전시동원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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