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20분 | 일본 근현대사 | 04 다이쇼 데모크라시 4


다이쇼 데모크라시 - 10점
나리타 류이치 지음, 이규수 옮김/어문학사


Reading_20min_20140915_4

–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를 세계사의 맥락에서 살펴보면서 과연 진정한 데모크라시 시기였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 유럽대전(제1차 세계대전) 이전 시기의 유럽의 상황: 산업자본주의와 국민국가의 결합과 그에 이은 ‘국민제국’시대

– 국민국가 간의 경쟁(“great-power rivalry”)이 가속화되면서 대중동원 논리가 등장하고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의 ‘생활공간’(Lebensraum), 아시아·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亜共栄圏) 등으로 전개


– 국민국가간 전쟁의 참혹함: 국민국가간 경쟁은 국가제도·정치·경제의 혁신으로 이어지고, 이러한 발전의 동력이 공업력과 연계되면서 유럽대전이라는 재앙으로 터져나왔다.

– 유럽 국민국가들은 공업력이 가져다 줄 파괴의 위력을 예측할 수 없었고, 그에따라 파괴의 막대함을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전쟁을 억제할 수 있는 강력한 국제기구를 만들어내지도 못하였다. 이 당시 외교정책이었던 세력균형 정책은 항상 위험을 안고 있었다.

–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 1780 – 1831)의 전쟁론은 이러한 태도를 보여준다: “전쟁은 단순히 정치적 행위일 뿐만 아니라 진정한 정치적 수단이고 정치적 접촉의 연속이며 정치적 접촉을 다른 수단으로 실행하는 것이다.”(Der Krieg ist eine bloße Fortsetzung der Politik mit anderen Mitteln.(전쟁론Vom Kriege, I, 1, 24)

– 동아시아 국가들은 공업력과 정치·경제를 결합시키는 ‘근대화’에 이르지 못한 상태였고, 그에 따라 일본이라는 ‘국민제국’의 약진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지난주까지 4권 《다이쇼 데모크라시》을 읽었다. 오늘은 4권을 마무리하면서 데모크라시라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의 일본이라는 나라의 국내생황과 세계사적인 맥락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를 크게 3가지로 나눈다고 했다. 1905년 러일전쟁 강화반대운동부터 시작해서 1912~13년 제1차 호헌운동까지의 시기가 제1기이고, 두번째가 제1차 호헌운동부터 1918년 쌀소동까지의 시기이다. 쌀소동이 별거 아닌 것 같아도 먹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에 굉장히 큰 사건이다. 한국에서도 해방 후 쌀 문제가 굉장히 심각해서 대규모 소요가 일어났었다. 이것이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쌀 문제가 중요한 문제다. 그 다음에 제3기는 쌀소동부터 1924년의 제2차 호헌운동까지의 시기이다. 그러고나서 1931년 만주사변이 터지고 나서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는 끝난다. 1905년 러일전쟁 강화반대운동부터 1931년 만주사변까지를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라고 보는데 가만히 보면 이 시기에 세계사의 중요한 사건이 하나 일어나는데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전쟁이 벌어진, 우리가 흔히 제1차 세계대전이라고 부르는 사건, 즉 유럽대전쟁이 벌어진다. 유럽대전쟁이라는 말에서 느낄 수 있듯이 이 시기에 벌어진 전쟁은 세계대전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물론 일본도 참전국 중 하나이고 제1차세계대전의 성과를 속된 말로 따온 나라 중에 하나인데 그렇다 해도 세계대전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유럽대전쟁이 일본에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먼저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생각해보면 하나의 국가로부터 또는 자기가 속해 있는 사회집단으로부터 전적으로 철저하게 독립된 개체로서의 개인이라고 하는 존재가 있을 때에야 개인에 대한 자각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근대라고 하는 시대를 살아갈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갖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데모크라시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데모크라시였는가를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데모크라시는 민주주의, 민주정이라고 번역하는데, 고대 희랍의 민주정이라고 하면 그때 말하는 민주정은 다수가 지배하는 민주정이라고 했다. 1인이 지배하는 왕정, 소수가 지배하는 귀족정. 사람의 숫자에 따라 1인 지배냐, 소수 지배냐, 다수 지배냐에 따라 통치체제를 나누고, 그것에 따라 법을 가지고 하는가, 무법적으로 하는가에 따라 성격을 나눈다. 그런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정치체제를 나눌 때 지배자의 숫자를 가지고 정치체제를 나눈다고 할 때 사실은 그 체제의 성격을 뚜렷하게 보여주지는 않는다. 플라톤이 《정치가》에서 보면, 물론 《국가》, 《법률》에서도 다루고 있지만, 통치체제가 제대로 된 것인지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지배자의 숫자에 따른 분류가 아니라는 것. 고대 희랍에서 민주정은 어쨌든 다수가 지배하는 통치체제를 가리켰다. 근대사회에 들어서 민주정은 다수의 지배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다수가 어떤 존재들인가 역시 중요하고 본질적인 문제일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인, 개체로서의 개인이 확립되고, 그 개인이 하나의 보편적인 규범, 그 어떤 외부의 압력이나 상황에도 굴복하지 않는 보편적인 규범을 스스로 정립하고, 국가에 맞설 수 있는 자각을 가질 때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인이 성립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에 과연 그런 것이 성립되었는가는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두번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이때 일본은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1930년대 들어서면 도시 거주 비율이 50%가 넘어서면서부터 도시화, 산업화가 진행되고 근대산업사회라고 말하게 되는데, 산업자본주의라는 것과 국민국가 이것이 결합되면서 이른바 근대의 레짐이 형성된다. 이 국민국가가 예전의 로마제국이나 몽골제국과는 다르게, 그 나라들을 제국이라고 불렀는데, 국민국가가 생겨난 다음에는 제국은 아니다. 흔히 지배자의 야망이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는 형태를 띠었기 때문에 20세기에 등장했던 식민지를 가진 제국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국민국가이면서 식민지를 쟁탈하려고 나서는 그런 형태를 띠게 된다. 그것의 씨앗이 일본의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였던 때에 세계사적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이것을 국민국가이면서 제국주의를 추구한다는 뜻에서 국민제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영국이나 프랑스나 모두 산업자본주의와 국민국가가 결합되면서 근대국민국가가 성립한다. 각 나라가 식민지 쟁탈전을 벌인다. 지정학적으로 보면 굉장히 가까이 붙어있었는데 그 나라들이 식민지 쟁탈전뿐만 아니라 서로 강력하게 다툼을 벌인다. 그래서 강대국 간에 파워게임을 벌인다. 그런데 그 때 파워게임이라고 하는 것은 몇몇 지도자들이 나타나서 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간의 경쟁으로 된다. 그래서 그런 국민국가들 사이의 경쟁이 국가 제도나 정치경제의 혁신으로 이어지고, 거기에 산업주의에서 전개되어 나온 진보동력이 연계되면서 서로 가까운 땅덩어리에 있는 나라들끼리 굉장히 격렬하게 맞부딪치게 된다. 그런데 자기네들이 산업자본주의의 성과에 따라서 성립시켜놓은 스스로 힘을 잘 몰랐다. 이런 상태에서 전쟁을 하게 되면 어느 정도의 파괴가 될지 잘 몰랐다. 


다시 말하면 그 이전에는 전쟁이 벌어져도 대량으로 사람이 죽어가는 일은 없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마음 속에는 예전 전쟁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는데 막상 전쟁을 해보니 사람들이 가진 힘이라는 것이 예전과는 다른 것이다. 공업력이 가진 힘을 예측할 수 없었고 막대한 파괴력을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전쟁을 억제해야겠다는 절실함도 없었다. 그리고 강력한 국제기구를 만들어 내지도 못했다. 그것이 유럽대전 이전의 유럽의 상황이다. 그리고 외교라고 해봐야 과거의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전개되었으니 그때의 정책은 세력균형정책 정도였다. 그래서 클라우제비츠가 쓴 《전쟁론》을 보면 "전쟁은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대신에 전투로 하는 정치다" 이것이 전쟁을 가볍게 보는 태도이다. 그런데 전쟁은 다른 수단의 정치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베르사유 체제 같은 것도 나온 것. 그것이 우리가 여기서 갖고 있어야 할 통찰력이다. 이때가 바로 일본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와 겹친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일본을 제외하고는 공업력도 없었고, 정치경제를 결합시키는 이른바 근대산업자본주의에 이르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러니 일본이라는 나라의 비록 위로부터의 근대국가를 이룩했다고 하지만, 근대국가를 성립시킨 일본이라고 하는 나라의 약진이 두드러질 수 밖에 없었다. 서양에서는 그렇게까지 참혹한 전쟁이 벌어질지 예측하지 못한 상태였고,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이 국민제국으로 발돋움한 상태가 바로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이다. 그러면 국민국가가 성립하면서 서로 경쟁을 하게 되면 국민들끼리 경쟁을 하게 된다고 했는데, 국민들을 동원해서 국민국가 간에 전쟁을 하려면 그 논리가 필요가 된다. 우선 국민을 결집시켜야 하니, 뿔뿔이 흩어져있던 대중을 국민으로 결집을 시킨다. 그리고 이 국민을 동원하는 단계에 들어서면서부터 대규모의 대중동원논리가 만들어지게 된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애국이라는 말이 나온 게 된다. 그러니 '나라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사실 19세기가 되서야 등장한 것.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가족을 사랑하고, 주변 공동체를 사랑하는 것은 쉬운데 나라를 사랑하기는 어렵다. 대중을 국민으로 만들고, 그들을 동원해서 국민국가의 싸움이 되는데 그것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독일에서는 인종주의적인 편견과 결합하여 히틀러가 주장한 생활공간의 논리, 그리고 일본에서는 대동아공영권의 논리가 나온다. 이런 것이 국민국가이면서 제국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국가의 대중동원논리의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사실 일본은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를 거치면서 아직 자각적인 개체로서의 개인 의식을 갖지 못한 상태였고, 그에 따라서 이 사람들을 결집시켜서 대동아공영권을 만들어 낸 것. 그것이 아시아 태평양 전쟁까지 가는 것이다. 결집을 위해 핵심적인 구심점으로 삼았던 것이 천황이다. 만주사변 이후 사람들의 감정은 일거에 거국적이 되었고, 1930년대 전시동원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것이 바로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성과가 없었음을 알려주는 사건이다. 중요한 맥락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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