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P. 샌더스: 사도 바오로 ━ 그리스도교의 설계자 | 그리스도교를 만든 3인의 사상가


사도 바오로 - 10점
E. P. 샌더스 지음, 전경훈 옮김/뿌리와이파리



제1장 바오로의 사명과 선교

제2장 바오로의 생애

제3장 선교 전략과 메시지

제4장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이들의 부활

제5장 신학적 전제: 유일신 사상과 하느님의 섭리

제6장 믿음에 의한 의로움: 갈라티아서

제7장 믿음에 의한 의로움: 로마서

제8장 그리스도론

제9장 율법

제10장 행위

제11장 이스라엘과 세계의 구원: 로마서 9장-11장


옮긴이의 말

출처 및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색인






제1장 바오로의 사명과 선교

10 바오로는 논쟁돼왔던 주제들(유다인들의 율법은 계속 유효한가? 하느님의 계획에서 이방인들이 맡을 몫은 무엇인가? 율법을 포기한다면 어떠한 행위 기준이 적용돼야 하나?)과 관련해 다른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에 맞서는 자신의 논지와 함께 유다인과 그리스인 모두를 향한 하느님의 의지가 담긴 거룩한 계획과 이 계획 안에서 그 자신이 해낼 역할을 자세히 기록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쓴 바를 편지 형태로 로마에 보냈는데, 이것이 훗날 서구 역사에 가장 영향력 있는 문서 중 하나가 되는 '로마서'다.


12 그는 "이방인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직'을 수행하는 자였으며, 이는 이방인들을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으시는 제물"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15:16). 이에 대해 바오로는 다만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자신을 통해 이루신 일이라고 말할 따름이다(15:18).


제2장 바오로의 생애

26 바오로가 자신이 박해하던 바로 그 운동의 사도로 변신한 때는 기원후 33년경이다. (사도행전에 기술된 것처럼)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 위에서였든, (갈라티아서를 토대로 추론해본 것처럼) 다마스쿠스 안에서였든, 하느님은 그에게 그리스도를 계시했다. 사도 행전의 저자에 따르면, 바오로는 이 계시를 하나의 밝은 빛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이 빛으로 한동안 앞을 보지 못하게 됐다고 했다(사도행전 22:6-11). 그러나 바오로 자신은 다만 "하느님이 당신의 아드님을 계시해주셨다"고만 말하고 있다(갈라티아서 1:16). 다른 곳에서는 밝은 빛이 아니라, 부활해 승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주장한다(코린토1서 9:1). 바오로는 이것을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난 예수를 목격한 것과 동일시했으며, 이러한 생각은 그 자신이 예수의 제자들이었던 본래의 사도들과 동등하다고 보는 근거가 됐다(코린토1서 9:1, 15:8). 하느님이 그를 부른 것은 그리스도를 섬기라는 것만이 아니라 특별한 과업, 곧 이방인들의 개종(갈라티아서 1:16)을 이루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이후 30여 년에 걸쳐 그가 벌인 활동의 전부가 됐다.


41 당연하게도, 때때로 그는 재림보다 먼저 죽게 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어떤 경우든 바오로는 그의 앞에 놓인 수백 년의 역사를 예측하지도 못했고, 또 자신의 편지들이 이후의 역사를 형성하는데 어떤 몫을 하게 될지도 알지 못했다. 바오로의 편지들은 한 제자의 손으로 대략 기원 후 90년경에 묶였고, 편집이 끝나 출판돼 나오자 그리스도 이들에게 어마어마한 영향과 충격을 몰고 왔다. 바오로가 그의 편지들을 썼을 때 그러했던 것처럼, 2세기 또는 그 이후 시대에 그의 편지들을 읽게 된 많은 이들 또한 신학 논쟁에 말려 들게 됐다.


42 그리스도교 신학을 다시 기술하려 했던 주요 작업들은 흔히 바오로 서간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곤 했다. 5세기의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러했고, 16세기의 마르틴 루터가 그러했으며, 20세기의 칼바르트 Karl Barth도 그러했다. 바오로 자신이 훌륭한 논객이었기 때문에 그의 편지들은 그리스도교의 다른 형태들을 공격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와 바르트는 분명히 바오로를 그들 자신의 관점에서 다시 읽고 자신들이 처했던 환경에 맞추어 해석한 사람들이다.


제3장 선교 전략과 메시지

49 여기서 바오로는 예수의 부활과 그에게 속한 이들이 닥쳐올 "진노"에서 벗어나 구원 받으리라는 약속을 강조하고 있다. 신자들에 대한 구원의 약속은 단순히 중요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매우 시급한 것이었다. 바오로는 당시에 살아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도 여전히 살아 있으리라 예상했으며(데살로니카1서 4:14-18), 이것은 지금의 세대를 마무리 지을 사건이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구원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멸망할 것이다.


50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 교의 메시지들이 강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 하느님은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 (2)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혔으되, 이는 인류를 위한 은혜였다. (3) 그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 하늘나라에 올랐다. (4) 그는 곧 다시 올 것이며, 그에게 속한 이들은 그와 함께 영원히 살 것이다. 바오로의 복음은 다른 이들의 복음과 같이 (5) 높디 높은 윤리와 도덕 기준에 따라 살아가라는 훈계를 포함하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온전하고 흠 없이 지켜주시기를 빕니다(테살로니카1서 5:23).


52 그바오로의 설교가 사도행전에 기록된 베드로의 설교와 다른 점은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시간이지나면서 이 주제는 퇴색해갔다. 이에 따라 사도행전의 저자는 틀림없이 베드로의 설교를 수정했을 것이다.


54 고대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불멸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앞에 제기한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하느님이 이 사람을 하늘나라로 들어 올렸으며, 주님으로 지명했는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라고 물었을 것이다. 바오로는 그 자신이 부활한 주님을 보았던 환시와 그분에게 받은 자신의 사명에 기대어 증언했다(코린토1서 9:1,15:8). 많은 이들이 바오로의 말을 믿었고 예수를 그들의 구원자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제4장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이들의 부활

60 바오로는 주님이 돌아올 때 신자들이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살아남아 구원되리라고 말했다. 그전에 신자들이 죽는다는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바오로는 살아남은 이들에게 편지를 써서 죽은 이들 또한 주님의 재림을 맞게 되리라는 확신을 주려 한다. 그는 테살로니카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확신을 통해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않기를 바랐다(테살로니카1서 4:13). 이러한 확신의 근거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섰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에 있으며, 따라서 그에게 속한 이들 또한 죽더라도 생명을 얻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64 바오로는 부활한 예수를 숨 쉬고 걸어 다니는 능력을 회복한 시신이나 유령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예수를 부활의 "맏물"이라 보았고(코린토1서 15:20),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와 같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부활한 육체가 "물질적인" 몸과 같으리라는 생각을 부정하고, "영적인 몸"이 되리라는 의견을 견지했다(코린토1서 15:44-46). '물질적이지 않은 몸'이란 걸어 다니는 시신이란 생각을 배제하며, '영적인 몸'이란 유령이란 생각을 배제한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예수 자신의 경우처럼, 사람은 살아있었을 때와 부활하고 난 뒤에도 한 개인으로서 연속성을 지닌다. 바오로는 이를 설명하고자 씨앗에 비유했다.


68 우리는 여기에서 바오로가 죽으면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음을 볼 수 있다. 개념적으로, 이것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일어나리라던 탈바꿈 또는 부활에 대한 기대와 다르다. 우리는 여기에서 영혼의 불멸성이라는 고대 그리스 사상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집단적이기보다 개인적인 현상이다. 개인이 죽으면 그의 영혼이 하늘로 오른다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산 이와 죽은 이를 가리지 않고 모든 신자들의 무리가 탈바꿈하리라는 것이 아니다. 바오로는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개념들을 양자 택일의 문제로 여기지 않고, 간단하게 둘 모두 받아들여 버렸다. 그가 죽는다면, 그는 곧장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종말 때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그를 데려가셔서 다시 함께 있게 될 터인데, 이때는 이전과 달리 탈바꿈한 상태의 그를 데려가시는 것이다.


제5장 신학적 전제: 유일신 사상과 하느님의 섭리

73 바오로는 유대교에서 두 가지 중요한 신학적 관점을 물려받았다. 첫째, 단 하나의 신, 하느님만이 있다. 둘째 바로 이 하느님이 세상을 다스린다. 이 두 관점에 따르면 역사란 하나의 인형극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많은 유다인들이 유일신 하느님 외에 이 세상에 있는 다른 힘들에 대해서도 생각했으며, 또한 인간은 선택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하느님의 다스림이 보통 매우 큰 규모로 행사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궁극적으로 이 세상은 하느님이 의도한대로 바뀌어 갈 것이라고 말이다. 일반적으로 유다인들은 하느님이 일상의 삶에도 손쓰실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그 소소한 일들까지 전부 반드시 하느님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78 바오로의 인간학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인간학과 달리) 물려받은 죄라는 개념이 들어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바오로가 아담에 호소함으로써 보편적인 범죄를 증명하려는 것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


78 아담의 죄는 바오로 자신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인류가 죄스럽고 죄지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또한 일부 그리스인들과 유다인들이 저지른 흉악한 죄들도 바오로 자신이 제시하듯 모든 인간들이 죄의 노예가 되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79 전 인류가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받아야 한다는 결론을 바오로는 계시로 받아들였으므로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죄에 속박당해 있는 상황의 보편성을 뒷받침하는 논거들은 이 계시를 합리화하려는 시도들이었던 셈이다.


88 죄에 관한 논의에는 바오로의 사상 전체를 가로질러서 더 강력하게 작동하는 신학이 있다. 하느님은 세계를 창조하셨고 역사를 주재하시며 그 밖에 다른 것은 모두, 죄 그 자체까지도 하느님의 의지에서 따라 나오며 그에게 지배되고 그의 목적을 위해 쓰인다.


제6장 믿음에 의한 의로움: 갈라티아서

99 루터는 세상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바오로와 무척 다르게 보았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죄인이라고 느낀다는 사실이 루터의 마음을 크게 자극했다. 그는 죄에 대한 가책으로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나 바오로에게는 죄의식이 없었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회심해서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기 전의 바오로는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데 없는 사람"이었다(필리피서 3:6).


103 그들이 이해한 보편적 구원이란,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교 분파로 완전히 개종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는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심, 모세의 율법, 메시아 예수의 죽음을 통한 구원을 모두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바오로는 하느님이 이방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다만 이스라엘의 하느님과 구원자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바오로의 입장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105 그는 자신이 비꼬는 투로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들이라 불렀던 베드로, 야고보 및 요한과 합의에 도달했다. 합의 내용에 따르면 바오로는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를 계속하고, 베드로는 계속해서 사도들의 수장으로 유다인들에 대한 선교를 계속하며, 바오로의 이방인 개종자들은 예루살렘 교회에 돈을 기부해야 했다(갈라티아서 2:1-10).


106 이방인들이 여전히 이방인이라서 유다인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을 완전하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면, 이는 실제로 그들에게 유다인이 되라고 강제하는 것과 같다. 바로 이 점에서 바오로는 베드로를 비판하고 있다(2:14). 첫 번째 충돌 이야기에서 "거짓 형제들"이 티토에게 '강제로' 할례를 베풀려 했다는 걸 기억할 것이다. 이번에는 같은 종류의 강제 행위로 베트로가 비난받고 있다.


123 할례 자체는 문제가 아니므로, 마치 그것을 중요한 문제인 양 다뤄서는 안된다.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해서도 안 된다. 구원받으려면 할례가 꼭 필요하다고 할 경우, 이는 곧 유다인이 됨으로써 구원 받는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꼭 필요했던 것이 아닌 것처럼 된다. 바오로는 이렇게 주장한다. "율법을 통하여 의로움이 온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돌아가신 것입니다"(갈라티아서 2:21).


124 만약 유다인이 됨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면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과 바오로를 부르신 일 모두 필수적인 일은 아니게 된다. 그러므로 유다인이 되는 것은 필수적이지 않으며, 이방인들이 유다인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저주받아 마땅했다.


124 갈라티아서에서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이 본질적으로 뜻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유다인이 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며, 원래 착실한 유다인이었던 사람들조차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특히 2:15 참조).


제7장 믿음에 의한 의로움: 로마서

135 바오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구원받을 자들 사이에 들 수 있는 자격을 얻는 데 유일한 요구 조건이라고 주장했다. 유다인들의 율법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 다. 이것이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의 의미다.


148 이 모든 논의를 정리해 나타내는 방법을 하나 더 꼽으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란 '멸망할 사람들에서 구원받을 사람들로 옮겨진다'는 의미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동은 개인이 변화해 그리스도가 그 안에, 그를 통해 살게 된다는 것과 관련 있다. 바오로의 이 어려운 수동태 동사 "의롭게 된다"가 더 깊은 차원에서 의미하는 바는 한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제8장 그리스도론

154 바오로는 죄라는 힘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사람은 죽어서야 죄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 생각에 따라 그리스도의 죽음을 해석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나누고 그 결과로 속박에서 벗어난다. 그리하여 그들은 죄의 힘에서 자유로워져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게 된다.


161 유다인과 이방인들 모두 죄 안에 갇혀 있었다. 하느님은 모든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려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이 일들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는 여러 다른 방식들로 쓰여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바오로의 삶과 신학 속의 위대한 확신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은 온 세상을 구원하고자 활동하셨다. 그런데 인간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은 이를 어떻게 실행하실 것인가? 바오로는 사실상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그분을 믿어라. 그 분은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그분이 하고 계신 일을 아신다.'


제9장 율법

178 바오로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셨으며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왜 그렇게 하셨는지를 물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유다인이 되어 율법을 받아들이는 것이 하느님께 구원 받으려면 거쳐야 할 형식 요건이 아니라는 새 계시가 그에게 내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계획에서 율법은 대체 어떤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란 말인가?


178 계명은 생명을 약속했다. 그러나 그의 새로운 견해에 따르면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이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느님은 전 인류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받도록 하셨으므로 하느님이 그들에게 율법을 주심으로써 구원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 게 된다. 그러나 그분은 율법을 주셨다.


182 '어떻게 신이 예전에 내려주신 질서가 새로이 내려주신 질서와 관련되는가?'하는 구체적 논점이었다. 곧, 유일하시고 선하시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이 이제 자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그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는 조건만으로 모두 같이 구원하려 하셨다면, 그 이전에 율법을 주시면서 의도하셨던 것은 도대체 무엇이 란 말인가? 바오로의 주된 설명은 율법은 단죄하기 위해 주어졌다는 것이다.


183 결국 바오로는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시도해본 뒤, 하느님의 섭리라는 교의를 유지하기로 결정한 듯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이 죄와 불순종이더라도 모든 일은 그분 뜻에 따라 일어난다.


제10장 행위

220 성령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자신의 메시지가 신자들 사이에서 카리스마적 은사를 지나치게 과시하는 결과를 낳았을 때, 그는 그러한 행위에서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정확 히 분석하고, 그리스도인들이 고유하게 지녀야 할 품성인 사랑에 대해 감동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사태에 대처했다. 그래서 그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유대교 원칙과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룬다는 새 원칙에 기초해 윤리 행위에 관한 규율의 초석을 제시할 수 있었다.


제11장 이스라엘과 세계의 구원: 로마서 9장-11장

224 믿음은 하느님을 믿는 일반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구체적 헌신을 의미한다. 바오로는 예수에 대해서 알지 못했을 아브라함을 성경에 나타난 강한 믿음의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긴 하지만, 그가 생각한 당대의 믿음이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믿음이 온 뒤로는"(갈라티아서 3:25)이라는 구절은 그리스도가 왔었다는 사실을 가리키며, 그와 베드로가 공유하는 믿음이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었다. 유다인들이 대부분에게 이러한 믿음이 없다는 사실은 '실존적'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바오로는 개별적 인간 존재들의 운명에 대해 걱정했으며, 특히 이 경우엔 그의 '혈족'이 걱정의 대상이었다.


225 그는 하느님의 전체 계획에 대한 질문에 서둘러 답해야 했다. 만약 그 계획이 먼저 유다 민족을 구하고, 그다음 그리스인들을 구하는 것이었다면(로마서 1:16,2:9), 여기엔 무언가가 빠져 있었다. 바오로의 이방인들은 이미 준비돼 있었지만, 오히려 유다인들에 대한 베드로의 선교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도입부에 표현된 바오로의 고통은 여기에서 비롯한다. 그들은 구원에서 누락될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선택 또한 아무 소용없게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242 우리는 그의 다양한 응답들을 지배하고 있는 심층 원리들을 명백히 보게 된다. 하느님은 선하시고 자비로우시며 역사를 자신의 손 안에서 주관하신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부르셨고 율법을 주셨다. 하느님은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바탕에 깔린 이 가정들과 가정들을 밀고 나가는 바오로의 열정은 폭발적인 재능 및 격렬한 논쟁과 짝을 이루어 그를 진지하고 설득력 있는 종교 사상가로 만들어 준다.


옮긴이의 말

243 바오로는 유대교 안에서 시작된 그리스도 운동을 그리스도교라는 정식 종교로서 성립시킬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그는 생전의 예수를 만난 적도 없고 오히려 예수의 제자들을 핍박했던 인물이지만 극적인 환시를 통해 부활한 예수를 만난 뒤 누구보다 열렬한 예수의 사도가 되어 그리스도교를 전파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지닌 사람이었고, 유대교에 정통했던 바리사이였을뿐 아니라, 당시의 국제어였던 그리스어를 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244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세상 누구든 의롭게 되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깨달음 덕분에 바오로는 유대교라는 민족 종교의 틀을 벗어나 세계 보편 종교로서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초석을 놓고 전 세계를 향한 선교 활동의 발판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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