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 요코: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 일본 근현대사 5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 10점
가토 요코 지음, 김영숙 옮김/어문학사


머리말-5

제1장 만주사변의 4가지 특질 15

제2장 특수권익을 둘러싼 공방 45

제3장 무너진 세 개의 전제 81

제4장 국제연맹 탈퇴까지 125

제5장 중일전쟁으로 193


맺음말-261

저자 후기 267

역자 후기 269

연표 272

참고문헌 274

색인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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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7 고노에 후미마로 관계문서 가운데 「현 시국의 기본적 인식과 그 대책」(38년 6월 7일자)이라는 제목의 사료가 있다.


7 다음과 같은 중일전쟁관이 보인다. '전쟁의 성질 ━ 영토침략, 정치·경제적 권익을 목표로 하지 않으며, 일본과 중국의 국교 회복을 저지하고 있는 잔존 세력의 배제를 목적으로 하는 일종의 토벌전이다.' 중국과 전쟁을 하고 있는 와중에 전쟁의 성질을 마치 비적 토벌전 같은 싸움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9 쌍방이 상대 국가에 대해 국제 불법행위를 했다고 주장하면서 스스로 취한 강력조치가 보복이기 때문에 위법이 아니라고 서로 논쟁하는 두 나라, 그것이야말로 1930년대 일본과 중국의 모습이었다.


10 이 책은 만주사변의 기원을 1920년대, 필요한 경우 러일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한편, 중일전쟁을 독자적으로 해결할 길이 사실상 소멸되는 1940년 10월의 대정익찬회 성립까지를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답하고자 하였다. ① 만몽 특수권익이란 무엇이었나? ② 두 가지 체제를 둘러싼 각축은 1920년대의 중국을 어떻게 변화시켰나?


제1장 만주사변의 4가지 특질 

16 1931(쇼와 6)년 9월 18일 밤 10시 20분, 중국 동북부(만주), 요녕성 심양(봉천)에서 가까운 류타오후(柳条湖)에서 남만주철도의 노선 일부가 폭파되었다. 관동군 참모 이시하라 칸지(石原莞爾) 등에 의해 1929년부터 주도면밀하게 준비해 온 작전이 여기서 실행된 것이다.


17 이 장에서는 만주사변이 가지고 있던 형태상의 특질을 밝혀 본서 전체의 도입부로 삼고자 한다. 만주사변은 ① 상대국 지도자의 부재를 틈타 일으켰다는 점, ② 본래는 정치간섭이 금지된 군인에 의해 주도된 점, ③ 국제법에 저촉된다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국제법 위반이라는 비난을 피하도록 계획된 점, ④ 지역 개념으로서의 만몽의 의미를 끊임없이 확장시키고 있다는 점, 이 4가지 특질을 가지고 있다고 보인다.


30 그들이 가장 염려한 것은 열강, 특히 미국의 간섭이었다. 간섭을 피하기 위해서도 단기간에 전 만주를 군사적으로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30 그때 그들이 사변이 발발하기 2년 전인 1929년에 일어난 중소분쟁을 귀중한 사례로서 주시했음은 거의 확실할 것이다.


35 '만몽'이 어떤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본인들에 의해서였다.


37 러일전쟁 후 1907년 7월 30일, 제1차 사이온지 킹모치 내각에 의해 조인된 제1차 러일협약 부속 비밀협약에 의해 일본과 러시아는 철도와 전신에 관해 남만주는 일본, 북만주는 러시아의 세력범위로 한다는 것을 상호 인정했다.


43 중국 측이 지방행정제도를 정비하는 기회를 통해 일본 측은 자신이 동부 내몽고라고 부르는 지역을 확대 해석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남만주와 동부내몽고를 가리켰던 개념이 동삼성과 열하성, 차하얼성의 두 성을 포함한 지역개념으로 변모하였다.


제2장 특수권익을 둘러싼 공방

46 제1차 세계대전 후 영국·미국·프랑스 등의 열강과 더불어 일본은 독일과 러시아의 급속한 체제 변화를 응시하면서 전후의 동아시아와 태평양을 둘러싼 경제 질서 재편에 나섰다. 재편 과정에서는 전전이나 전쟁 중 일본이 해당 지역 사이에 구축한 정치적·경제적 지위 또한 당연히 새롭게 정의해야 했다.


47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으로서는 한국 병합도 남만주와 동부 내몽고의 세력범위화도 동아시아에서 당시의 열강인 영국·미국이나 러시아 등의 동의나 승인이 있을 때 비로소 실현 가능했다.


47 채권국인 서구 열강의 의향에서 그동안 일본이 자유로웠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불평등조약과 외채 두 가지는 일본의 외교정책을 장기에 걸쳐 근본적으로 규정했으리라.


55 특수권리란, 주로 조약에 의해 인정되어, 타국에는 실제로 균등하게 적용될 수 없는 전유권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55 국가에 있어서 그 시설·경영의 성회가 국가 정책상 중요성을 가지며 따라서 상대국 혹은 제3국이 이를 침해하는 경우 국가의 힘을 가지고 대항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의 중요한, 시설·경영상으로 나타나는 경제적 및 정치적 발현 현상, 이것을 특수이익이라 부른다.


58 특수한 지위라고 하는 경우도 일본의 우선권이나 독점권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일본과 남만주가 지리적인 접근성으로 보아 특수한 이해관계에 있다는 인식을 표명한 것이었다.


63 미국은 일본이 '중국에서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우월한 이익(paramount interests)을 갖고 있다'고 언명할 수는 없다고.


69 이상 3국 차관단 교섭 경과를 돌아보면, 만몽에서의 일본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게 하려는 일본 측의 주장에 대해 영미 쪽은 일관되게 반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73 워싱턴 회의는 동아시아 해역에서의 영국·미국·일본의 해군확장경쟁에 종지부를 찍고, 대전 후의 중국에 대한 열강의 경제 진출 경쟁에 관한 최소한의 규정을 정했다. 그러나 유독 만몽에 대해서는 무엇 하나 새로운 결정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79 요시자와는 만주는 러일전쟁에 대한 보상이므로 일본과 특수관계를 갖는다고 보았다.


79 옛날에는 승인을 받았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육군과 비교하여, 옛날에도 승인을 받은 적이 없었고 지금도 없다고 생각하는 아리타는 보다 철저하다.


제3장 무너진 세 개의 전제

82 관동군 막료들은 어떠한 경위로 만몽 영유론을 꿈꾸게 되었을까? 이러한 생각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그 전 단계로서 그때까지의 체제를 안정시켜온 몇 가지 전제조건이 무너져야 할 필요가 있다.


82 첫째로 일본의 만몽권익은 조약에 기초를 둔 확고한 것이며, 신4국 차관단 등에 의한 보증도 있으므로 누가 동삼성을 지배하든 누가 중국정부의 중심이 되든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던 시데하라 외교이다.


82 두 번째로, 장작링을 통한 망몽 지배의 안정성이다.


83 세 번째로 총력전 시대에 일본이 직면해야 할 전쟁 준비의 여러움이다.


98 두 개의 체제 사이에서 동요한 국민정부를 워싱턴 체제 쪽으로 끌어당기기 위해 영국과 미국은 워싱턴 체제의 경제적 룰을 변용시켰다. 그것은 중국에 대한 내정불간섭 정책을 취하는 시데하라 외교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일이 되었다.


112 벌군과의 전투를 위해 봉표를 남발하고 일본인 상공업자에게 타격을 입혔던 장작림 정권, 남경의 국민정부와 싸우기 위해서 동삼성에서도 2.5%부가세를 징수하기 시작한 장작림 정권에 대한 일본 측의 분노는 뿌리 깊었다.


120 유럽식 국가 총동원형 총력전 준비는 일본의 경우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할 필요도 없다, 러시아는 혁명 후의 권력 투쟁 중이며 아직 약체로서 북만주에서 물러나 있으니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는 두 가지에 이시하라 논리의 핵심이 있었다.


120 일본이 해야 할 전쟁은 나폴레옹의 영국전처럼 '전쟁에 의해 전쟁을 양성해야 할 것'이며, '점령지'의 징세 물자 병기에 의해 출정군을 자활하도록 해야 한다.


124 이시하라라는 존재가 당시 사회에서 가졌던 의의는 세계공황을 맞아 군사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전쟁이 있을 수 있다고 단언하며 지구전은 두렵지 않다고 국민을 설득하는 선동성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국방비 부담 경감에서 오는 경제효과 때문에 군축에 찬성해 온 사람들은 '일본 내지에서 돈을 한 푼도 지불하지 않고'도 전쟁이 가능하다는 선동을 통해 조용히 이시하라에게 빠져들게 되지 않았을까?


제5장 중일전쟁으로

254 국민이 중일전쟁을 지지한 이유 중 하나는 속전속결로 중국을 타도할 수 있다는 전망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255 대체 무엇을 위해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것은 당연하리라.


255 그것에 대한 노고에 내각의 대답이 1938년 11월 3일의 '동아신질서' 성명이었다. 동아신질서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공공연히 정통성을 주장할 수 없게 된 제국주의·식민지주의를 대신할 설명 형식의 필요성과 워싱턴 체제적 협조주의의 부정이라는 모티브 사이에서 지식인에 의해 구상된 자기 설들의 논리였다고 할 수 있다.


맺음말

261 쇼와 전전기 일본에서 국방사상 보급운동 등을 통해 국민을 끌어들이고 선동하여 만주사변에 대한 지지를 얻은 육군 등이 정말로 지향한 것과 선동 과정에서 국민 앞에 강조된 논리 사이에는 사실상 간극이 있다.


261 이시하라 칸지가 바란 것은 ①아직 소련이 약체였을 때, ②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되어 있을 때, ③일본과 소련이 장래에 대치하는 방위 라인을 중소 국경의 천연 요새까지 북으로 서로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261 만주는 장래 미국과의 전쟁 보급기지로서도 필요했다. 그러나 국민들에게는 그것을 감추고 조약을 지키지 않는 중국, 일본상품을 보이콧하는 중국이라는 구도로 국민의 격렬한 배외 감정에 불을 붙였다.


263 사이토는 ①동양 평화를 위해 싸우는 성전이라는 정부의 설명은 성립할 수 있는가, ②장개석을 상대하지 않고 통치 능력에 의문이 있는 왕조명을 상대하는 전쟁 해결은 가능한가, ③ '중일전쟁은 가장 노골적인 침략전쟁'인데 왜 정부는 무배상을 말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263 국민은 사이토 연설을 지지하였으며, 요시미 요시아키의 『풀뿌리 파시즘』에 따르면 3월 중의원 의원에서 제명된 사이토 앞으로 많은 격려 편지가 쏟아졌다고 한다.


264 육군이 중국에 전면으로 맞섰을 때 독일을 매개체로 하는 미국과의 전쟁이 잉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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