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이치사다: 옹정제


옹정제 - 10점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차혜원 옮김/이산


미야자키 이치사다: 옹정제


첫머리에

1장 고뇌하는 노황제

2장 개가 되고 돼지가 되라

3장 그리스도에 대한 맹세

4장 천명을 받들어

5장 총독 삼인방

6장 충의는 민족을 초월한다

7장 독재정치의 한계


- 참고연표

- 옮긴이의 말

- 찾아보기




첫머리에

25 청조의 지배자는 만주에서 흥기한 이민족으로 한인이 아니다. 태조와 태종 2대의 황제는 만주에서 살았고 3대째의 순치제가 명 왕조 멸망의 뒤를 이어 서기 1644년 베이징에 입성하여 중국 전체를 통치하였다. 순치제의 아들이 4대 강희제이고 강희제의 아들이 옹정제이므로 옹정제는 건국 초부터 따지자면 5대째이고 청조가 베이징에 입성한 이후부터 헤아리면 3대째가 된다. 왕조가 홍할지 쇠할지는 대체로 3대째 정도에 결판나므로 옹정제는 청조에서 가장 중요한 갈림길에 서있었다고 할 수 있다.


26 만약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나서 여기에는 온통 중국에서 일어날만한 일들만 기술되어있을 뿐이라는 느낌을 받았다면 나의 의도는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역사학은 과거의 세계로부터 끊임없이 예상 밖의 사실을 끄집어내어 소개함으로써 지금까지 무심히 형성되어 버린 역사의 이미지를 고쳐 나가는 것을 임무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1장 고뇌하는 노황제

32 이아거야말로 청조에서 최초이자 마지막 황태자이며 두 번 황태자가 되었다가 두 번 폐위된 불행한 운명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넌더리가 난 후대 청조의 황제들은 두 번 다시 황태자를 세우지 않았다.


32 기존의 관례를 깨고 생전에 후계자를 지명하여 황태자를 세워도 황족이나 대신들 누구 하나 불평하지 못하였던 것은 청조가 이미 완전히 중국화되어 중국식 독재 군주권을 확립시키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33 강희제가 황태자의 신상을 지나치게 배려한 나머지 세상에서 일류의 군자들, 곧 완고하기만 한 도학자 노신들만을 가려 뽑아 황태자 지도의 역할을 맡겨 측근에 두었던 것이 실패의 첫 번째 원인이었다.

 

33 강희제가 자식 사랑에 눈이 멀어 황태자에게 정치상의 밀실 공작을 용납하였던 것이 두번째 커다란 실책이었다. 황태자는 어느새 대단한 정치 보스로 커버린 것이다.


2장 개가 되고 돼지가 되라

53 중국 고유의 오랜 관습에 따르면 천자의 이름은 절대 쓰면 안되는 것이었고 이를 입 밖에 내는 것도 문자로 쓰는 것도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처럼 외경의 대상인 천자의 이름을 형제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신하가 된 자들이 자신의 이름자로 쓰는 것은 허용 될 수 없었다.


53 중국식 독재 황제에게는 형제도 없다. 관념적으로는 있을지 모르지만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황제 앞에 나서는 순간 형제라도 모두 신하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54 밝아오는 정월 초하루, 연호도 바뀌어 옹정 원년(1723)이 되었다. 새 황제는 마흔 여섯 살, 장년기를 더부살이 신세로 헛되이 보냈지만 그 대신 세상의 쓴맛과 단맛을 모두 맛본 사려깊은 군주라는 소문이 돌았다.


3장 그리스도에 대한 맹세

98 홍성기의 청조를 중심으로 한 만주 민족의 기풍에는 원래 후진 민족 출신의 벼락 출세자들에게 보이는 결점이 많이 보이지만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이전에 패권을 잡았던 요, 금, 원 왕조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던 장점을 갖고 있었다. 무력은 몽골의 칭기즈 칸에 뒤떨어지지만 질서를 사랑하는 단결심, 협동체에 바치는 희생정신은 훨씬 뛰어났다.


99 강희 말년의 황자들의 분규나 옹정제의 수누 일가에 대한 탄압 등은 만일 원 왕조 지배 하에서라면 당장 내란과 모반으로 비화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원나라는 이런 까닭에 중국 전 영토를 지배하고서도 겨우 90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청조에서는 일단 천자가 즉위하여 군신의 명분이 정해지면 굳이 무력을 써서까지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황족은 없었다.

 

100 옹정제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그 해결방안을 찾았다. 이는 더욱 현실적인 방법으로 제왕의 입장에서 취한 해결책이었다. 종래 중국의 어떤 제왕도 해내지 못하였던 훌륭한 정치를 행하고 일찍이 중국 역사가 경험하지 못하였던 공정한 사회를 건설해서 만민이 안심하고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하겠다.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청조의 군주에게 특별히 내린 임무이다. 이 임무를 완수함으로써 청조와 만주인은 중국인한테는 물론이고 하늘의 칭찬을 받게 될 것이며 그 일가는 자손 만대까지 이어질 것이다. 이것이 옹정제의 확고한 신념이었고 거의 종교적인 신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황제는 이 신념을 당시의 만주인 특유의 성실함과 강한 인내심으로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4장 천명을 받들어

106 명청 교체의 혁명은 중국식으로 말하자면 이른바 천명이었다. 지금까지 하늘의 명을 받아 중국을 지배하고 있던 명 왕조가 타락함으로써 천명이 명을 떠났고 청조에게 새로이 중국 백성을 통치해야 한다는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만주인이 중국에 들어와 한화되기 시작하면서 천명이라는 보편적 사고방식도 수입되었다. 옹정제도 물론 이를 믿었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만주의 아부카이 칸이나 중국의 천은 궁극적으로는 같은 하늘이며 만주인에게 은혜를 베풂과 동시에 중국인에게도 혜택을 주는 존재였던 것이다.

 

124 옹정제의 거실은 이렇게 해서 지방관이 올린 글에 황제가 붉은 붓으로 답장을 보낸 후 다시 되돌아온 문서, 이른바 주비유지로 가득 차 있었다. 뒤에 황제는 이 중에서 정치에 참고가 될만한 것들을 뽑아 출판하였다. 적과 흑의 2도 인쇄로 검은 글씨는 신하가 올린 주접의 원문, 붉은 글씨는 황제가 붉은 붓으로 고치거나 다시 써넣은 부분이다. 이것이 바로 『옹정주비유지』라는 112책에 달하는 책으로, 옹정제가 심혈을 기울여 정치에 매진한 결정체이며 또한 황제가 얼마나 힘써 노력하였는지를 보여주는 기념비이기도 하다.

 

128 실제로 옹정제는 여유가 없었다. 강희제는 정치에 싫증이 나면 강남의 풍경을 예찬하며 여러 번 운하를 건너 쑤저우나 항저우까지 유람에 나섰다. 건륭제도 이를 따라 하였지만 옹정제는 단지 베이징 근교에 있는 시산의 별장에 가끔씩 가는 정도였을뿐 그 이상은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여하튼 일에 쫓기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를 쉬면 하루 분의 일이 밀려 다음에 더 고생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천자 자신이 이런 식이었으므로 지방관들에게도 무익한 여 행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129 천하의 정치를 위해 13년을 하루 같이 일하고 또 일하였다. 이렇게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천명에 대한 자각이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이렇게 하는 것이 결국은 만주족 전체, 그리고 선조 때부터 닦아 온 청조의 기초를 태산처럼 안정시킬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였다.

 

5장 총독 삼인방

160 여기서 한 가지 남는 문제는 옹정제가 지방 장관과의 서신왕래를 통해 지방의 정치를 논의하였는데 과연 이 방법으로 지방의 실정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곧 편지 쓰는 기교의 우열에 의해 옹정제의 눈이 현혹되지 않았을까 의심할 수 있다. 분명 그런 경향이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 다.

 

161 시종 일관 실용주의를 중시하며, 아부하는 문장이나 알맹이가 없는 말을 극도로 혐오하였던 옹정제는 작문으로 속일 수 있는 천자는 아니었다. 또한 옹정제는 지방관의 상주문에만 의존하였던 것이 아니라 특기인 밀정 파견이라는 별도의 방법으로 지방의 실정을 파악하였기 때문에 황제를 속이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163 『옹정주비유지』 112책은 옹정제의 지방정치에 대한 고심의 결정체이며 황제 개인의 사상과 정치 방침을 살펴볼 수 있는 동시에 당시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가장 신뢰할만한 귀중한 사료이다. 또 문장도 대단히 재미있어서 아무리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을 정도다.


7장 독재정치의 한계 

196 청조가 베이징에 들어와 400여 주를 다스리는 주인이 되었을 때, 거기서 성격이 다른 두 개의 신문화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중국인의 한문화와 예수회 선교사가 들여온 서양문화였다. 냉정하게 바라볼 때 서양문화가 한문화보다 몇 단계 앞서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강희제는 서양문화의 애호가였다. 그는 늘 선교사를 궁중에 불러 수학과 물리학을 강의하도록 하였고 한 때는 이들에게 라틴어를 배우려고까지 하였다.

 

196 옹정제는 이에 반해서 한문화의 애호가였다. 옹정제에게는 중국을 완전무결하게 통치하는 것이 지상 과제였다, 그의 행동과 신념은 모두 여기에서 출발하고 있다. 중국을 통치하기 위하여서는 중국식의 독재 군주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서 독재 군주제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것은 한문화 이외에는 없다.


199 옹정제의 이상을 끝까지 파고 들어가 보면 관료란 단지 사무를 위하여 부리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관료들은 문화생활도 할 수 없고 문인 취미에 젖는 것도 불가능하며 보다 중대한 문제는 자손을 위하여 재산을 축적해 둘 수 없게 된다. 이대로는 사회의 특권 계급으로 남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옹정 제에게 특권계급이란 존재는 본디부터 불합리한 것이었고 특권이란 오로지 천자 한 사람의 독재권을 가리키는 것이며 천자 이외의 만민은 모두 평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지방의 천민들을 해방시켰던 것이다.

 

206 청조 말이 되면 중국인은 청조가 이민족 출신임을 망각하였고 만주인 역시 자신이 한인과 달리 만주인의 자손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만주인이라는 역사상의 위대한 민족이 한민족 속에 흡수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중국 사회에는 옹정제가 걱정한 것과 같이 건강하지 못한 현상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하루 하루 더 심각해졌다.

 

207 만약 강희시대의 관대한 정치가 그대로 건륭시대의 관대한 정치로 이어졌다면 관료계의 부패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청조 말기 관료사회의 부패는 아마도 이보다 100년은 앞서서 나타났을지 모를 일이며 청조는 서양 문화의 침략이 있기 전에 이미 내부에서 붕괴하였을 것이다. 건륭시대는 청조의 영토가 최대의 범위에 도달한 정점이었지만 건륭제의 무공이나 후세에 남긴 문화사업도 옹정시대의 민간의 경제력 향상과 풍부한 물자의 축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역사는 경박하게도 종종 그늘에 숨겨진 공로자의 존재를 간과할 뿐만 아니라 세론에 부화뇌동하여 비난을 가하기조차 한다.

 

212 중국에서 수천 년 동안 전제군주제가 지속되어 온 것은 군주제가 어느 정도의 유연성을 갖고서 시대의 진보에 적응하며 발달해 온 덕분일 것이다. 만일 군주제가 아무 이상도 없이 완전히 자의적이고 무원칙하게 움직였다거나 딱딱한 껍질처럼 고정된 채 백성을 억압하기만 하였다면 아무리 참을성 많은 중국 민중이라도 이를 타도하고 새로운 정치양식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역사에서는 이른바 명군이라는 존재가 나타나 끊임없이 군주제의 이상과 실행방법을 고쳐나갔고, 따라서 대중으로부터 무언의 신뢰를 이어갈 수 있었다.


213 옹정제의 독재정치는 그야말로 그 정점에 위치한다. 이렇게해서 독재제를 신뢰하게 된 민중은 독재제가 아니면 다스려질 수 없도록 틀지워지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 민중에게는 참으로 슬픈 일이다. 이점에서 말하자면 옹정제의 정치는 그야말로 선의에 넘치는 '악의의 정치'라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선의에 넘친 악의의 비극은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며, 지금도 거대한 역사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이 글을 공유하기

댓글(0)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