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20분 | 중국정치사상사 | 13 백가쟁명(百家爭鳴)과 정치이성의 발전 1


중국정치사상사 선진편 - 상 - 10점
유택화 지음, 장현근 옮김/동과서


Reading_20min_20150406 : 중국정치사상사 선진편(上)-13

백가쟁명(百家爭鳴)과 정치이성의 발전 1

- 반고(班固)의 漢書(한서) 예문지(藝文志)에 기록된 책 목록을 보면 제자백가의 작품은 거의 백종에 이른다.

- 사마천은 사기에서 “백가의 術”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 사마담(司馬談)은 논육가요지(論六家要旨)에서 儒家, 道歌, 墨家, 名家, 法家, 陰陽家의 6가를 논하였고, 여기에 반고는 縱橫家, 雜家, 農家, 小說家의 4가를 추가하였다.

- 같은 학파 안에서도 파벌이 있었다. 이를테면 순자(筍子)는 大儒, 雅儒, 俗儒, 散儒 등으로 구별하여 자신을 드러냈다.

- 학파들의 사유대상은 천지, 만물, 인사, 고금에 이르렀다. 이로인해 그들의 저작은 백과전서의 성질을 띠고 있다. 예를들어 筍子는 철학, 정치학, 경제, 교육, 군사, 자연과학과 역사 등을 다루었다. “순자는 중국 고대의 사회관련 학문을 여러 가지 학문분과로 나눈 창시자의 한 사람”


따라서, “백가와 백과가 격랑함으로써 문제 하나하나마다 적게는 수 종, 많게는 수십 종의 다양한 견해가 제기될 수 있었다.”


참조: 바이시, 직하학 연구: 고대 중국의 사상적 자유와 백가쟁명


이 시기에 그렇게 많은 사상가들을 등장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1) 과거의 현실이 변화하였다: “백가쟁명은 바로 이 역사변동이 사람들의 인식 지평위에 그려진 것이다.”
철제 농기구를 사용함으로써 농업이 발전하고 여기서 조세제도와 곡록제(谷祿制 또는 봉록제俸祿制)가 등장하였다. 이는 봉건적 귀족 질서의 해체와 사인(士人)의 관료기용이 가능해졌음을 의미한다. “사인은 지식과 재능을 밑천으로 사회와 자유로운 교환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사회적 경쟁국면에 의해 조성된 지식과 인재에 대한 수요가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2) 각국의 정치변혁과 상호경쟁에 따라 정치가 이론을 필요로 했으며, 시의 적절한 전략과 정책에 대한 수요가 있었다.

3) 정치적 공간이 비교적 컸다: “지식인들은 각 나라 사이를 돌아다니며 자유로이 문제를 논의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상의 자유 —> 백가의 쟁명 —> 인식의 심화라고 하는 연쇄고리가 형성되었다.

권세와 도리의 상대적 이원화

백가는 각 학파마다 이상적인 상태로 설정한 것이 있었고, 이에 근거하여 현실정치를 논하였다. 이는 왕이 귀한가 사가 귀한가의 논쟁으로 전개되었다.
"전국시대에 권력과 인식의 이원화라는 조건과 분위기가 있었다는 것은 백가쟁명을 발전시키고 깊이있게 만드는데 아주 훌륭한 환경을 마련해주었다."









오늘은 전국시대에 등장하였던 여러 가지 사상과 학파들, 흔히 제자백가라고 부르는 학파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 이번주에는 백가쟁명의 등장배경이나 전반적인 얘기를 하고 다음 주에는 이것에서 전개된 사상을 이야기하겠다. 제자백가라고 하면 도가와 유가를 포함한다. 공자부터 시작해서 맹자, 순자, 자사와 같은 사람들 그리고 노자와 장자를 다 포함한다. 그래서 오늘은 이것이 어떻게 등장했는가를 보겠다.


제자백가에 대해서는 이 책은 많은 내용을 다루고 있지 않지만 이것을 집중적으로 탐구한 책이 있다. '직하'라고 하는 곳에 모여서 학단을 이루어서 연구했던 것을 직하학이라고 부르는데 최근데 바이시가 쓴 《직하학 연구》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확연하게 많이 다루고 있다. 상세한 내용을 이해하고자 하면 이것을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제자백가라고 할 때 과연 백 개의 학파가 있었는가. 한나라 역사를 다룬 반고(班固)의 漢書(한서) 예문지(藝文志)에 기록된 책 목록을 보면 제자백가의 작품은 거의 백종에 이르는 제자백가의 작품이 있다. 그래서 이것을 백가라고 부른다. 후대의 사마천은 사기에서 백가의 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렇게 백가지나 되는 학술이 있었는데 이것을 어떻게 분류하는가. 사마담(司馬談)은 논육가요지(論六家要旨)에서 儒家, 道歌, 墨家, 名家, 法家, 陰陽家(유가, 도가, 묵가, 명가, 법가, 음양가)의 6가로 나누었다. 반고는 縱橫家, 雜家, 農家, 小說家(종횡가, 잡가, 농가, 소설가)의 4가를 추가하여 10가를 말하고 있다. 이 각각의 학파 안에 파벌들이 있었다. 자기네들끼리도 또 나눈다. 이를테면 순자는 大儒, 雅儒, 俗儒, 散儒(대유, 아유, 속유, 산유)등으로 구별하여 자신을 드러냈다. 그래서 이런 구별들까지 한다면 백가가 될 것이다. 백가라는 것이 굉장히 많은 것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학파가 다양했던 만큼 학파의 사유대상은 이전에 등장한 사유대상이 모두 집약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천지, 만물, 인사, 고금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사유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그들의 저작은 대부분 백과전서의 성질을 띠고 있다. 대표적 예를 들어보면 순자가 쓴 《순자》를 보면 철학, 정치학, 경제, 교육, 군사, 자연과학과 역사 등을 다루었다. 그래서 유택화 교수는 "순자는 중국 고대의 사회관련 학문을 여러 가지 학문분과로 나눈 창시자의 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사람이 나와서 거의 모든 것을 다루었다. 이점을 저자는 "백가와 백과가 격랑함으로써 문제 하나하나마다 적게는 수 종, 많게는 수십 종의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 수 있었다."고 말한다. 참으로 바람직하고, 사상의 전면적인 논쟁의 장소가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백가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그렇게 많은 사상가들을 출현했는가를 궁금해할 수 있다. 역사적 배경은 무엇인가. 우선은 "백가쟁명은 바로 이 역사변동이 사람들의 인식 지평 위에 그려진 것이다." 사상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백가쟁명이 가능했던 것은 사상의 자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상의 자유 이전에 여건들이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저자는 역사변동이라고 한 것이다. 역사적 변동이라는 무엇인가. 철제 농기구를 사용함으로써 농업이 발전했다. 여기서 조세제도와 조세를 거두어서 관료들에게 월급을 주는 곡록제 또는 봉록제가 등장하였다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월급받는 관료가 등장한 것은 서양에서는 굉장히 최근의 일이다. 그런데 중국은 벌써부터 봉건적 귀족 질서의 해체되고, 사인(士人)의 관료로서 기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늘었다. 사인은 지식과 재능을 밑천으로 사회와 자유로운 교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사회적 경쟁국면에 의해 조성된 지식과 인재에 대한 수요가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주로 천자 한 명이 다스리던 시대에서 제후국으로 분열됨에 따라 각국의 정치변혁과 상호경쟁에 따라 정치가 이론을 필요로 했다. 지식인들은 각 나라들을 돌아다니면서 자유롭게 문제를 논의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하나의 연쇄고리로 살펴본다면, 먼저 사상의 자유가 있고, 자연스럽게 백가의 쟁명이 일어나고, 서로 활발하게 논의를 주고받으면서 인식이 심화되었다. 이처럼 사인 계층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넓어졌다.


모든것이 인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다는 것, 여기에 모든 것에는 극단적으로 군주에 대한 존재, 지위에 대해서도 새롭게 인식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예를 들면 장자는 장자를 큰 도둑이라고 말하기도 하였고, 맹자는 사람을 잡아먹는 금수와 같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일단 군주를 비판할 수 있었다는 것에 이르게 되면 논의하지 못할 문제가 하나도 없는 상황이다 라고 얘기할 수 있다. 그런데 누구나 다 모든 주제에 대해서 얘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떻게 우리가 알 수 있는가. 즉 인식 대상 앞에서 인식 주체가 평등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런 것을 불평한 사람들의 의견을 보면서 알 수 있다. 이를테면 공자는 예가 아닌 것은 보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움직이지도 말라라고 말을 한다. 긍정적으로 이해를 하면 예에 어긋나는 것은 보지도 말라는 것인데, 부정적으로 이해하면 예를 갖추지 않은 사람들이, 즉 공자가 보기에 예를 갖추지 않은 사람들이 말하고 움직이는 상황이 펼쳐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논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권세라는 것과 도리라는 것이 상대적 이원화의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가는 이상적인 정치를 하고 있는 상태를 설정하고, 현실의 왕이 합치할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정치, 즉 도가 있고, 왕이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도를 따르지 왕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주장했다. 백가는 각 학파마다 이상적인 상태로 설정한 것이 있었고, 이에 근거하여 현실정치를 논하였다. 이는 왕이 귀한가 사가 귀한가의 논쟁으로 전개되었다. 이점을 저자는 “전국시대에 권력과 인식의 이원화라는 조건과 분위기가 있었다는 것은 백가쟁명을 발전시키고 깊이 있게 만드는데 아주 훌륭한 환경을 마련해주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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