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쩌화: 중국정치사상사 3 ━ 수당송원명청


중국정치사상사 3 - 10점
류쩌화 지음, 장현근 옮김/글항아리



제1장 수당 황제들의 성숙하고 완비된 군도론君道論

제2장 수당 시기 불교와 도교의 정치사상

제3장 수당 유학의 부흥과 정치 철학의 새로운 변화

제4장 당말오대唐末五代의 정치사상: 군주 정치에 대한 반성과 균평均平 이상의 동경

제5장 북송 시기 정치 개혁, 왕권 강화의 정치사상

제6장 송대 리학의 정치 철학, 정치 가치, 정책 사상

제7장 남송의 사공事功 사상과 등목鄧牧의 이단 사상

제8장 요遼, 서하西夏, 금金의 통치 사상

제9장 원元대 ‘용하변이用夏變夷’ 사조와 리학의 관학화

제10장 명대 통치자들의 전제집권 강화 정치사상

제11장 왕양명王陽明의 심학 및 그 후학들의 정치사상

제12장 동림당인東林黨人의 시폐 관심 정치사상과 충군의 정치심리

제13장 청 초 봉건 사대부 집단의 자아비판 사조

제14장 청淸대 전기 제왕들의 정치사상: 절대 군권의 수호

제15장 공자진龔自珍과 고전 정치 사유의 종결


저자 후기

옮긴이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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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수당 황제들의 성숙하고 완비된 군도론君道論

18 수당과 양송兩宋은 고대 정치사상 발전의 중요한 단계다. 선진 사상의 특징을 발단, 분화, 쟁명이라 하고, 양한과 위진 남북조 시상계의 주요 경관을 일존, 다원, 융합의 상호 작동이라고 한다면, 수당과 양송 사상 발전의 전체 추세는 종합, 심화 겸용이었다고 하겠다. 수당 시기에도 다원과 쟁명은 여전히 사상 문화의 영역에서 사람의 의지에 의해 바뀌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정치사상의 각도에서 본다면 수많은 중대한 이론 문제가 결론을 얻고 심화되었다. 유교, 불교, 도교의 이론 형태가 모두 심각한 변화를 통해 수많은 사상문화적 성과를 얻게 되었다는 것은 대부분 인정하는 바다. 수당 여러 황제의 군도론君道論은 바로 이와 같은 사상 문화 발전의 큰 추세 가운데 첫 번째로 중대한 성과다.


20 수 문제로부터 당 현종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제왕도 엄격한 종법 계승 제도에 입각하여 구오의 지존에 오른 경우가 없었다. 왕위를 둘러싼 투쟁, 시기, 살육이 끝없이 이어지고 찬탈과 시해, 탈적의 재앙이 빈번히 발생했다. 어쩌면 이와 같은 원인 때문에 제왕 가운데 영재들이 배출되었던 것일 수도 있다. 당 중종과 예종이 범용하고 어리석은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범상한 무리가 아니었다. 수당의 여러 황제는 대부분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다. 그들은 정치적 성취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통치 사상, 치국 방법 및 정책과 책략 방면에서도 다양한 창조적 견해를 드러냈다. 그들은 책을 써서 주장을 세우기도 하고 혹자는 경서, 형률, 예전에 대한 주소 작업을 관장하여 이론 체계를 갖춘 치국 방략을 제출하기도 했다.


24 "천도는 특별히 누구를 친애하지 않고 오직 덕이 있는 사람을 돕는다"는 관념은 수당 시기 주도적 지위를 차지했던 제왕 관념이었다. 이와 같은 제왕 관념으로 보건대 천명은 개방성을 갖추고 있으니 제왕은 반드시 도가 있어야 하고, 덕이 있어야 하고, 공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천명이 바뀌게 되어 왕위는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것이다. 수당 황제 대다수는 '혁명' '선양' '탈적'으로 구오의 용상에 올랐다. 그래서 특히 공과 덕을 강조했다. 수 양제, 당 태종, 당 현종 등 탈적으로 주상이 된 사람들은 더욱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의 공과 덕을 논증했다.


26 군권의 신수와 제왕의 성명을 충분히 긍정한다는 전제 아래, 수당 시기 제왕 관념이 더욱 강조한 점은 바로 제왕이 사람들의 주인이고, 뭇 서인에게 일방적으로 요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공중의 이익을 대표하는 자라는 것이었다. 수 양제는 "천하가 한 사람을 받드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천하를 주재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당 태종도 "한 사람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지 천하가 한 사람을 받드는 것이 아니"라는 논점에 찬성한다. 이와 같은 제왕 관념으로 보건대 군주는 천하의 주인이며, 정치의 최고 주체다. 다만 군주는 천하 중생들의 권익을 대리할 뿐이지 사적으로 자기 한 사람이나 한 성씨만을 위해서는 안 되고, 무턱대고 민중을 착취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이론적으로 이는 군권 제한으로 보인다. 이런 말이 표면적인 문장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제왕들이 이를 인정했고 뭇 신하가 동조했다는 점에서 실제 정치에 여전히 일정한 의의를 지니는 것이었다.


30 이른바 군도君道란 제왕의 전범이다. 중앙 집권 정치 체제하에서는 황제가 "한 번 기쁘면 천하가 봄날 같고, 한 번 노하면 천하가 가을 같아진다." 군주됨의 도는 바로 치국의 도다. 그래서 군도는 치도라고도 부른다. 군도는 사실상 군주 정치의 역사와 교훈의 총결이고 귀납이며 추상이다. 이론화 이상화된 군주의 행위 규범이기도 하다. 군도는 실제에서 출발하여 확립된 최고의 정치 목표이자 기본적인 정치 원칙이며, 통치 계급의 정치의식이 집결된 총체이고, 그렇기에 정치 가치와 제왕술을 내포한다. 그 근본 목적은 왕권의 완비와 강화다.


45 민은 역사적 범주의 하나다. 전국이후의 문헌에서 민은 일반적으로 봉건 시대 군, 신(관료), 민이라는 3대 사회 등급 가운데 최하층에 속하는 부류의 사람들을 지칭한 말이었다. 봉건 법전에 따르면 민은 또 양, 천의 구분이 있었고, 그 가운데 양인은 평민 지주와 자경농을 포함했다. 강대한 성씨의 호족이나 부유한 상인이 설령 향리를 횡행하고 일방의 갑부가 되었더라도 정치적 공명을 얻을 방법을 찾지 못하면 서민과 다룰 바 없었다. 따라서 엄격히 말해서 민은 계급 개념의 하나라기보다 정치적 지위에 따라 구분된 사회 등급 개념의 하나다.


54 "하늘의 자식으로서 군주는 유덕하고 은혜로운 가르침을 베풀어 백성의 부모가 되며, 이렇게 하기 때문에 천하가 귀의해오는 것이다." 이렇게 종법 윤리를 가지고 정치를 규범 짓는 방법은 군민 관계에 온정주의적 색깔을 입혀 군주에게 규범과 요구를 제기하고 군주가 백성의 아픔을 중시해주길 희망한다. 그렇지만 정치와 봉건 윤리의 두 측면에서 어버이 군주가 자식인 백성을 주재하는 지위를 확립해주기도 했다. 민중의 정치 권력을 박탈해버린 것이다.


54 민본 사상은 통치 계급이 자아비판을 통해 자신의 안위에 대한 조건을 분석하고 인식한 데 따른 산물이다. 이런 식의 사유와 논리는 정치적 주도권과 결정권을 절대로 자신의 통치 대상에게 귀속시키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명군의 치국이나 청관의 정무 처리에 희망을 걷게 된다. 정치에서 유일한 최고의 주체는 군주이며, 민본 사상은 그저 군도의 주머니 속 물건일 따름이다.


67 민본 사상의 특징은 이러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관계 양식을 한 번도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민본 사상은 이러한 관계 양식을 긍정한다는 전제하에 어떻게 군민 쌍방으로 하여금 제 역할을 맡고 서로 화목하게 지낼 것인가를 논설했다. 민본 사상이 민중에게 제공한 것은 자기 업무에 충실하고 제 직분을 지키는 것이었으며 군주에게 제공한 것은 나라의 안녕과 군주의 존엄이었다.


70 민본 사상을 촉진시킨 근본 원인은 민중의 폭력적 대항이다. 봉건 시대에는 정치권력이 일체를 지배했는데, 오직 강권을 지닌 세력만이 강권을 전복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정권 체계 내부로부터 오는 정변을 방비하고 정권 체계 외부로부터 오는 민중 폭동을 없애는 것이 전통 정치사상에서 줄곧 가장 큰 관심을 가져온 두 가지 과제였다. 전민적 폭동은 언제든 궤멸을 가져올 만한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봉건 통치자들로 하여금 민이라는 사회 역량을 고도로 중시하여 적극적으로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민본 사상은 이렇게 생겨났다. 이 사상의 발전과 변천은 주로 통치 계급 정치가의 자아비판과 자아 인식을 통해 완성되었다.


89 진한 이래 제후들을 분봉했는가? 어떻게 제후들을 분봉했는가? 이는 줄곧 조야의 상하가 끝없이 논쟁하던 문제다. 매번 묵은 것을 고치고 새로운 것을 정립할 때, 혹은 천하가 동란에 빠졌을 때 이 논쟁은 이론적 논쟁에서 정책적 논쟁으로 바뀌었다. '봉건' 문제는 국가체제, 왕위 계승, 군신 관계 및 종법 윤리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최고 통치자를 괴롭히는 난제였다. 봉건 군주 제도하에서 제왕은 반드시 국國과 가家를 두루 살펴야 하고, 군주와 신하, 권력의 집중과 권력의 분산, 중앙과 지방의 관계를 잘 처리해야 한다. 이 때문에 정치 체제론은 실질적으로 군신 관계론, 즉 제왕과 종실, 친척과 공훈귀족 간 관계의 문제가 된다.


117 수당 황제들의 법제 사상은 군주 권력 이론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법은 협의적으로는 율, 영, 격, 식이며, 광의적으로는 국가와 군주가 반포한 각종 행위 규범 또한 법이라 부를 수 있다. 율은 법전, 형전으로 죄와 그에 맞는 형벌을 확정하는 비교적 안정된 법률 형식이다. 영은 수요에 따라 수시로 반포되는 법률 명령으로 율에 빠져 있거나 부족한 조항들을 보충해준다. 격과 식은 모두 행정 법규에 속한다. 봉건 시대에 법은 제도화 격식화되었으며 상대적으로 안정된 사회 규범이자 정치 규범이었다. 시비를 판정하고 상벌의 균형을 맞추어주는 척도이기도 했다. 현대 법학의 기준에서 보면 당시 군주와 법의 관계에 대한 인식은 기본적으로 정치사상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132 봉건 시대에 '법령이 많다'는 것은 곧 폭정의 동의어였다. 고대 중국에 법에 의한 '치국'을 중시한 사상가나 정치가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 사상은 중국 고대 통치 사상의 중요한 조성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법에 의한 치국이 가져온 것은 민주 제도가 아니라 왕권의 강화였다. 이런 국면이 만들어진 근본 원인은 바로 그 법 이론에 치명적 약점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군주가 법 안이 아니라 법 밖에 있었으며, 법 아래가 아니라 법 위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법치 이론은 군주 정치에 중요한 조절 작용을 할 수 있었음에도 결국에 가서는 군도의 보충에 불과했고 풍부한 이성을 지닌 인치론이었다.


139 납간론은 군주 "한 사람의 이목에 한계가 있고, 생각이 모든 일에 미치기 어렵다"는 실제적 곤란에서 출발한다. 제왕이 되면 천하의 지혜를 겸하고, 천하의 전략을 아우르고, 신하의 재지를 폭넓게 이용하여 효과적인 수단을 제공받는다. 그 최종 목적은 군주로 하여금 신중하게 군국의 대사를 결단하여 권위를 독자적으로 운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을 모아 이익을 넓히고 현명하고 유능한 사람을 임용한다는 측면의 납간론에만 주의를 기울이면 신하를 제어하는 중요한 수단으로서 그 본질을 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치 판단에 편차가 나타나게 된다. 수당 시기 수많은 자료 가운데 군주와 신하가 시정 방침이나 정책 결정권을 나눠 가졌다는 말은 후대 그 누구도 들어본 적이 없다. 두루 듣되 권력은 나누지 않으며, 독단하되 맹목적이지 않음이야말로 군주 납간의 본질이다.


161 역사가 우리에게 제공한 경험을 보면 간언을 맡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간언을 듣는 것이 어려우며. 간언을 듣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간언을 운용하는 것이 어려웠다. 의가 군주 정치를 조절하는 지랫대이긴 했지만 지랫목은 완전히 군주 개인의 수중에 있었다. 제왕이 알아서 간의 수단을 운용해 정치를 조절하고 통제할 때 안전계수와 이성적 색채가 두터워지기 때문에 군주 정치 체계는 더더욱 공고해진다. 군주가 자기 고집대로 행동하여 군주 정치가 고삐 풀린 말처럼 통제를 잃을 경우 간언 또한 속수무책으로 그저 어찌하나 탄식만 할 뿐이었다. 그러니 납간이고 진간이고 군주 전제 제도의 역사적 부패와 포학을 방지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제2장 수당 시기 불교와 도교의 정치사상

184 유 도, 불 3교는 중국 전통문화의 3대 지주다. 수당 이래 3교의 교차와 통섭이 고대 문화의 전체를 구성했다. 유 도, 불 3교가 이데올로기 영역에서 지배적 지위를 다투며 끊임없이 갈등하고 부딪힌 것은 수당 사상사의 뚜렷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3교의 충돌은 위진 시대에 시작되어 남북조 시대에 성행하다가 당나라 때 3교가 병립하는 국면을 연출했다. 봉건 왕조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문화 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에 3교는 각자의 장점을 발휘하여 셋으로 나뉘어 정립의 형세를 땀으로써 백중을 가리기 어려웠다. 서로 배척하고 침투하는 과정에서 3교의 학설이 모두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며 각자의 이론 형태에 심각한 변화가 생긴 것도 수당 사상사의 특징 중 하나다. 불교와 도교가 수당의 문화생활 사회생활

및 정치 생활에 끼친 영향은 그 정도가 절대로 유가에 못 미치지 않았다.


186 부혁(555~639)은 상주의 업(오늘날의 허난성 안양) 사람이다. 천문역법에 통달했고 태사령을 역임했다. 그는 수당 시기를 통틀어 불교의 배척과 폐지를 최초로 공개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의 기본 관점은 유가와 도가의 반불교 활동을 대표하는 입장이 되었다.


191 부혁은 불교가 국가와 백성의 재앙이며 "백성에게도 아무 도움이 안 되고 나라에 해만 끼치는 존재"라고 단정했다. 따라서 행정 수단을 동원하여 불교를 없앨 것을 주장했다. 그는 불교를 나라 밖으로 몰아낼 것을 건의했다. 뭇 승려는 환속시켜 집으로 돌려보내고 사원은 고아나 빈민들에게 나누어줄 것이며, 오직 초당과 토탑에만 불상을 놓도록 하여 뿌리를 끊고 유행을 단절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193 불교의 중국화 과정은 일련의 불성론이 만들어지고 발전하며 실현되었다. 불교에서의 해탈은 신앙 외의 지혜에 의지해서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단순한 신앙을 기초로 하는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다. 우주와 인생에 대한 불교의 통찰은 인간 이성에 대한 반성으로 모두 독특한 견해를 지니고 있다. 불교의 철학적 사변은 인간의 이성적 사유의 발전 가운데 상당히 높은 단계에 속한다. 수당 시기 천태종, 화엄종, 선종 등 중국화한 불교 종파들은 불가의 불성론을 집중적으로 발전시켰다. 이른바 '육조혁명' 즉 선종 육조 혜능의 불성론, 종교의식, 수행 방법에 대한 일련의 개혁과 재구성은 불교 중국화 과정의 완성을 상징한다. 당나라 중기 이후 특히 '회창법난' 이후 선종이 중국 불교의 주류가 되었으며, 봉건 사대부의 정신세계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195 선종은 불성을 일체의 무정물에까지 적용한다. 마음이 곧 부처이니 목석에도 본성이 있으며 "삼라만상기운데 개개가 모두 부처"라고 한다. 그들은 쇠와 그릇, 물과 얼음, 빗물과 만물의 관계를 비유로 들며 본체의 부처가 만물 가운데 곁들어 있으며, 일체 제법이 추상을 하면 본체의 부처가 되기도 한다고 논증한다. 이로부터 우주 만물 "모든 것에 불성이 있으며 동일한 심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199 심성 사조의 촉진 하에 유학은 차츰 고도의 철학적 이치를 추구하게 되었으며 본체, 심성, 윤리, 정치를 한데 융합시킨 사상 체계를 수립했다. 송대에 이르러 성명의리를 종지로 하는 리학이 거꾸로 중국 심성 학설의 주류가 되었다. 어떤 범주와 의미에서 본다면 송명 리학은 유학화된 불학이요, 유학화된 도학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종교 이론으로서의 불성론과 도성론이 전통 정치사상에 대단히 깊은 영향을 미쳤다는 표시다.


200 도교는 당대에 이르러 차츰 성숙해져 갔으며 전성기를 누렸다. 도교는 왕권과 한 집안으로 취급되었다. 당나라 이씨 왕조는 도교를 국교로 신봉했으며 『노자』를 '조업'이자 '가서'로 삼고 도사를 동성동본으로 여겼다. 태상노군은 '대성금궐현원천황대제'에 봉해졌다. 도교는 왕권의 필요에 영합해서 교의를 조정했다.


224 부의 경계와 교의는 또 다른 사회정치적 효과를 발휘했다. 예컨대 도교 교의 가운데 일정 부분이 사회비판 시상의 유래가 되기도 한 것이다. 인간의 고난이야 말로 종교를 탄생, 발전, 전파시키는 사회적 근원이다. 도교의 초창기 신도들은 주로 하층 민중이었으며 교의 가운데는 하층 민중의 사회적 이상이 녹아들어 있었다.


230 불교는 중국에 들어온 뒤 끊임없이 중국의 전통 도덕, 왕도 정치, 민족 심리와 관습으로부터 완강한 견제와 강렬한 배척을 당했다. "다섯 번 공경의 예를 바꾸라는 명령을 받았고, 세 번 토벌을 당했다." 이 때문에 불교는 그들의 현실적 성격을 부분적으로 바꾸지 않을 수 없었으며 중국 왕권의 요구에 부합하려고 애를 썼다. 그 변화는 주로 유가의 충효 관념과 종법 사상을 불교가 흡수하고 인정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는 중국 불교 도덕의 주요 특징이 되었다. 중국화한 불교 도덕은 인도 불교의 도덕과 달랐을 뿐만 아니라 유가의 도덕 학설과도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이 새로운 도덕 체계는 불교가 생존을 위해 환경에 적용한 결과였다. 또한 거꾸로 중국의 윤리 도덕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여 기존 종법 강상 윤리에 중요한 보완 작용을 하기도 했다. 중국 고대에는 도덕이 바로 정치였다. 종법화한 불교 도덕은 강상 윤리의 영향력과 침투력을 확대시켰으며 왕도 정치의 정신적 지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247 불교 가운데 아미타 정토와 중생 평등 사상은 세상 사람들에게 종족의 상相도 없고, 국토의 상도 없고, 강약의 상도 없고, 남녀의 상도 없는 "모두가 평등하고 차별이 없는" 서방 극락세계를 알려주었다. 이 극락세계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평등하게 만나고 모든 것을 공유하며 각자 필요한 것을 갖기 때문에 "그 어떤 고통도 없고 여러 즐거움만 얻는다." 극락정토와 현실 사회 간의 강렬한 차이는 순식 간에 중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248 북조 이래 미륵신앙이 민간에 깊이 파고들어 하층 민중에게 '미륵의 출현'은 고난에서 건져 줄 복음으로 받아들여졌다. 수당 시기에는 '미륵의 출현'을 기치로 내건 수많은 모반 사건이 발생했다.


제3장 수당 유학의 부흥과 정치 철학의 새로운 변화

271 공영달의 도론에서 도는 본원, 본체, 총칙일 뿐만 아니라 각종 구체적인 사물의 규율, 규범, 도리, 법칙의 총칭이기도 하다. "도의 본뜻은 개통과 실천을 통해 행해지며 큰 것과 작은 것, 정밀한 것과 거친 것을 두루 포용한다. 큰 것으로 말하자면 천도가 자연을 조화시키는 이치를 도라고 일컫는다. 도를 도라고 말하는 것은 불변의 도가 아니라는 노자의 말은 곧 자연 조화의 허무를 일컫는 말이다. 작은 것으로 말하자면 범인의 재예 또한 도라고 할 수 있다. 도에는 정해진 구분이 없다. 큰 것과 작은 것에 따라 다르게 말해지지만 모두가 만물을 개통시키는 것이며 몸의 실천을 통해 행해지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도는 자연과 인간사 일체의 이치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물 어느 것 하나 도로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


272 선진 제자의 백가쟁명은 한편으로 도를 인식의 각 영역으로 끌어와 각종 구체적 사물의 도리를 사람들에게 알려주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도를 차츰차츰 이론의 꼭대기로 밀어올림으로써 갈수록 추상적 의미가 깊어지게 만들었다. 선진 도가에 이르러 도는 철학, 윤리, 정치가 하나로 융합된 개념이 되면서 최고 범주의 함축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선진 도가의 도는 형이상학적 사유에 편중되어 있으며 고도의 추상성을 갖는다. 반면 선진 유가는 예, 인, 중화 등 비교적 구체적인 정치 윤리 규범에 안광을 집중하고 있어서 추상성은 비교적 덜하다.


273 백가쟁명이 도의 분화에 중점을 두었다면 진한 이후의 각종 도는 차츰 합류가 되었다. 대체로 군주 전제 제도를 정치적 전제로 삼아 논증하면서 유가 정치 윤리 학설을 기본 내핵으로 하여 각종 도론을 정합시키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전통 정치사상 발전과 변화의 추세이자 주류였다. 한대의 양웅이 벌써부터 상당히 성공적으로 주역과 노장을 두루 종합한 적이 있다. 명교와 자연 사이의 논변은 위진 현학의 핵심 명제였다. 현학자들은 정교한 형식으로 유가, 도가 두 사상 체계의 균열을 봉합했다.


350 한유가 제기한 도통은 명확한 대응성과 이론적 기능을 갖는다. 첫째, 불교와 도교를 배척하고 유도儒道를 수립한다. 불교는 조사 법의의 계승 관계를 따진다. 이를테면 선종의 경유 석가모니로부터 줄곧 이어져 홍인과 혜능에 이르는 '법통'을 강조한다. 법을 전수하는 계보를 개괄하는 '법통'은 자신들의 높이와 정종 또는 정통의 증거로 삼는다. 도교 또한 유사한 법통을 갖고 있었다. 불교와 도교에 맞서서 한유는 유가의 도통을 꾸며냈다. 그는 유학의 연원을 위로 고대 성왕까지 끌어올리고 이를 빌려 유학의 탄생이 불교와 도교보다 앞섰으며 화하 문화의 정통임을 강조한다. 그는 '도'가 불교가 노장의 도가 아님을 명확히 선포하고 피차 간 당파의 경계선을 분명히 정했다.


374 공영달의 도론으로부터 유종원의 천도자연관, 한유의 도통론, 이고의 복성설에 이르면서 유학은 철학화 체계화 계보화되었다. 종법 윤리, 인간 본성은 우주 본체와 합일되었다. 정치사상의 관점에서 보면, 이 이론 형태의 실질은 종법 도덕으로 하여금 천도 자연과 인간 본성을 빌려다가 보편적 강제성을 띠는 사회 규범과 종교에 가까운 문화적 신앙으로부터 이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송대 유학자들은 이 이론의 기초 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융합하고 추출하고 승화시켜 끝내 유학 이론 형태의 전환이라는 역사적 과정을 완성했다.


제4장 당말오대唐末五代의 정치사상: 군주 정치에 대한 반성과 균평均平 이상의 동경

399 농민 전쟁은 봉건 제도에 대하여 무기의 비판을 행한 것이다. 봉건주의 정치 제도와 경제 제도의 기본적 특징은 불평不平과 불균不均이다. 상하존비와 빈부귀천의 등급이 분명하며 뚜렷한 차별성을 드러낸다. 한쪽에선 "한 몸이 고대광실을 누리고" 다른 쪽에선 "가난하여 집 한 칸이 없었다." 한쪽에선 "한 식구가 천 개의 곳간을 지녔지만" 다른 쪽에선 "천하여 끼니를 때우지 못했다." 폭정의 압박과 토호들의 착취 아래 수많은 민중은 쑥 열매를 삶아먹거나 홰나물 잎을 회 쳐 먹고, 심지어는 자식을 바꾸어 먹는가 하면 뼈를 부러뜨려 불감을 삼았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한 살 길은 깃대를 높이 들고 일어나는 것이었다. 생존을 위해 무기를 들고 폭군, 폭정, 토호를 뒤엎었으니 봉건 제도에 대한 무기의 비판을 실행한 것이다. 보통 봉건 정치에 개입할 힘이 없던 서민들이 일종의 집단적 폭력의 방식으로 정치에 주동적으로 참여하는 자체가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정치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다시 말해 '평平'으로 불평의 사회를 개조하고 대신하려는 것이었다.


400 평平은 전통 정치사상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어떤 측면에서 평平, 균均, 제齊, 동同은 같은 부류의 정치 관념이다. 옛사람들은 제齊 자와 평平 자를 써서 치가治家와 치국治國을 논했다. 이를테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평천하라 했고 국가가 잘 다스려지는 것을 천하태평이라 불렀다. 상벌을 논할 때는 공평을 언급하고, 토지와 전답을 논할 때는 만평을 말하고, 이상을 논할 때는 대동이라 했다. 분分을 특징으로 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평을 특징으로 하는 정치를 편애하는 것은 그만한 사회적 근원과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401 균평 그 주체는 사회정치 이상이다. 이것의 형성에는 적어도 세 가지 경로가 있다. 첫째는 특정 정치사상가의 사회정치 이상이고, 둘째는 불교 교의 가운데 중생평등이나 도교의 태평 이상처럼 특정 종교 중의 평등과 평균 관념이며, 셋째는 '인생길의 불공평함에 대한 통탄'으로 인해 응결된 하층 민중의 갈망이다.


417 『무능자』 정치사상의 특징은 노장 무위자연 사상을 주지로 삼았으며 등급명분, 강상 윤리 및 군주 정치를 비판하며 재앙의 근원으로 배척했다는 것이다. 인류 사회는 소박하고 진실한 원시 상태로 돌아가야 하며 예교를 폐지하고 인륜을 버리고 귀천, 군신 등급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봉건 예교, 군주 제도에 대한 비판과 부정으로부터 인류의 모든 사회 관계 및 문화를 부정하는 극단으로 나아갔다. 무능자의 사회정치관은 당시로 볼 때 일정한 대표성과 전형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무능자』는 도가 사상을 숭상하는 특정 선비의 정치의식을 반영한 작품으로 고대 사상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제5장 북송 시기 정치 개혁, 왕권 강화의 정치사상

464 태조, 태종, 진종의 기본 정치 전략은 이랬다. 권력의 배치를 대폭 조정하고, 갖은 방법을 동원해 군권을 강화하고 신하를 약화시키며, 왕권을 위협하고 국가를 분열시키는 각종 정치 역량이 재기하는 것을 방비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 전략에 대해 그들은 요점만 간략히 제시하는 말씀과 지령을 내렸지만 행동으로는 더욱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고심에 찬 장기 경영으로, 황제를 중심으로 한 고도의 권력 집중과 지방에 대한 중앙의 엄밀한 통제라는 정치 체제가 형성되었다.


482 정치사상 발전사의 관점에서 볼 때 북송 개혁 사조의 의의는 매우 중대하다. 각 파의 정치 주장 대부분이 이론적 깊이를 결하고 정책성과 실용성에 편중되긴 했지만 그래도 일군의 사상가는 우주관, 방법론, 인성론의 철학적 탐색을 통해 치국과 안정, 개혁과 변동의 일반 원칙을 탐구함으로써 체계적인 사상을 만들어냈다. 왕안석의 학문, 즉 형공신학'은 바로 이와 같은 배경 아래서 길러지고 탄생한 것이다. 사마광의 『자치통감』 역시 이 시기의 산물이다.


521 중국 역사학은 경세치용의 전통을 갖고 있다. 『춘추』가 나온 후 역사학은 시종 국가 정치의 중요한 구성 부분이었으며 정치학과 긴밀하게 결합되는 정사불분의 특징을 형성했다. 역대 사가들 모두 정도는 다르지만 역사를 통한 참정과 역사를 정치의 바탕으로 삼는 정치의식을 드러냈다. 사마천은 『사기』를 쓸 때 명확한 원칙을 하나 갖고 있었는데 바로 "천인의 경계를 탐구하고 고금의 변화를 통달하여 일가의 학설을 세우리라"는 것이었다. 역사 발전의 과정을 통해 치세의 규율과 처방전을 찾아 자신의 정치적 심경을 토로했다. 이 전통은 후대에 계승되어 송대에는 한걸음 더 나아갔다. 사마광은 선배들의 역사학 성과를 총결하면서 역사와 현실을 긴밀하게 결합시켜 이사자치, 즉 역사로 정치의 바탕을 삼는 강렬한 정치의식을 드러냈다.


522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편찬한 까닭은 물론 그가 어려서부터 역사학을 좋아했고 사학에 농후한 흥미를 품고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역사서의 편찬을 통해 "국가의 흥망성쇠를 이야기하고 민중의 기쁨과 고통을 함께 드러내어 관찰자로 하여금 선악과 득실을 스스로 선택케 하여 권계를 삼도록"하려는 것이었다. 역사 경험과 교훈을 총결하여 집권자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바로 사마광이 사서를 편찬한 기본 취지였다.


536 명군은 삼덕을 구비하는 것 외에도 반드시 간언을 채납하고 잘못을 고치려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교만하거나 자만해서도 안 되며 제멋대로 음란, 사치해서도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창업, 수성, 중흥의 군주가 능이나 난망의 군주로 바뀔 수도 있다. 사마광은 군주도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부족한 존재이며 성왕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점은 여러 사람의 말을 듣고 잘못을 알면 바로 고친다는 데 있다. "사람이기 때문에 누구도 잘못을 면하지 못한다. 오직 성현만이 그것을 알고 고칠 수 있다. 옛 성왕은 잘못이 있음에도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했다. 그래서 비방의 기술을 개발했으며 과감히 간언하도록 북을 걸어두었다. 어찌 백성이 그 잘못을 듣는 것을 두려워하겠는가! 이렇게 볼 때 군주되는 사람은 잘못이 없는 것을 현명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잘못을 고치는 것을 아름답게 여겨야 한다."


537 사마광이 만들어낸 성왕의 형상은 고상한 도덕 수양과 범인을 초월하는 도량 그리고 폭넓은 학식과 재지를 갖춘 명군이다. 이는 그가 추구하는 이상적 인격이기도 하다. 사마광은 정치의 부흥과 국가 안정의 희망을 최종적으로 역시 성왕의 신상에 기탁했다. 이는 그의 정치역사관이 일종의 영웅 사관임을 드러낸 것이다.


제6장 송대 리학의 정치 철학, 정치 가치, 정책 사상

600 리학은 북송에서 흥기하여 남송에서 성숙되었다. 사실상 리학은 남송 말기에 이미 통치 사상의 지위를 획득했다. 원 왕조로부터 청 왕조가 멸망하기까지 리학은 줄곧 봉건 왕조에 의해 관학官學으로 받들어지며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600~700년 동안이나 주도권을 장악했다. 리학은 봉건 통치 계급의 권위주의적 정치 이론의 바탕이었을 뿐만 아니라, 과거를 통한 인재 선발의 법정 표준으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발전에 직접 영향을 미쳤다. 리학은 송대 이래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정치적 사유 방식이며 전통문화의 대표자였다.


601 리학은 도학道學이라고도 불리며 하나의 통일된 철학 분파는 아니다. 여러 리학자의 정책 사상 또한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러나 정치의 기본 가치라는 측면에서 리학 내 여러 분파는 고도로 일치된 면을 보이기도 한다.


603 유교, 불교, 도교 3교가 다투다 하나로 귀결된 것이야말로 리학 사조 형성의 문화적 동기이며 사상적 연원이다. 일찍이 당대에 이미 "유자이면서 불자와 섞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자이면서 유자와 섞인 사람이 있었다." 여러 리학자는 한편으로 유가의 도통을 계승한다면서 이단을 극력 배척했으나 다른 한편으로 모두 "여러 학파의 학설이 넘쳤고, 도교와 불교를 넘나들었다." 그들은 유학을 본으로 삼아 불교와 도교를 융합시켰으며, 전통 유가의 이론을 기본 틀로 하고, 삼강오륜의 윤리를 취사선택의 척도로 삼았으며, 불교와 도교의 철학적 사변을 대량 흡수하여 심성지학산을 주지로 하는 고도로 철학화한 신유학을 창립했다.


603 리학은 결국 유학 스스로가 내적으로 쌓아온 논리에 따라 부단히 변화하고 승화된 결과다. 위진 이래 유학은 본체, 규율, 방법, 인성 등 철학 문제 및 그것과 도덕, 정치와의 관계에 대해 깊이 있는 논의를 진행하여 차츰 심오한 철학적 사변을 갖춘 이론 체계를 구성해왔다. 리학은 이러한 사상의 변화, 발전 과정의 완성이고 총결산이다.


613 주희는 송대 리학의 집대성자다. 그는 이정을 직접 계승하여 '리'를 최고 범주로 삼았다.


613 송명 리학은 주희의 손을 거쳐 비로소 독특한 나름대로의 규모와 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 그의 사상 체계, 학문적 지위와 영향력은 리학에서 이정의 지위를 숭고하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리학이 중국 봉건사회 후기에 통치 지위가 되도록 만들어주었다.


615 리학의 본질적 특징은 철학적 사변의 고도화로 『중용』 『대학』의 사상적 정수를 크게 넓히고 공맹지도의 기본 신조를 밝히는 데 있다. 리학 사상가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일체를 초월하는 우주 본체가 존재함을 인정한다. 그리고 자연, 사회, 인생은 모두 이 본체의 파생이고 외연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근거하여 리학 사상가들은 인생, 도덕, 사회, 정치와 관계있는 각종 문제에 체계적인 대답을 하며, 철학 이념화한 일련의 정치적 가치를 제기한다. 그들은 또 송대 정치의 현실적 문제에 직면하여 각자의 정치적 방략과 정책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616 리理는 송대 리학의 핵심 범주로 도道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것은 세계관이고 방법론일 뿐만 아니라 이상적 사회 규범이며 정치의 표준 형식이다. 리(도)는 본체, 규율 윤리를 하나로 합체한 우주의 법칙이며, 자연의 규율이고, 사회 질서이며, 인륜 규범의 개괄이고 추상이다. 자연 규율과 윤리라는 속성이 다른 두 가지 범주가 조합하고 함께 통일되니, 윤리 또한 사람의 의지로 바뀌지 않는 영원불변한 철칙이 된다. 이른바 "이 도리는 하늘이 자연을 낳음과 같이 인위적 안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도리는 스스로 천지간에 자라나며 성인을 빌려와야 한 번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리(도)는 리학 정치사상의 이론적 기초다. 그래서 리학을 도학이라고도 부른다.


682 예禮를 숭상하고, 인仁을 소중히 여기고, 중中을 높이고, 화和를 구하는 것은 유가 정치 학설의 기본 특징이다. 유가 정치사상의 논리 구조 가운데 중화는 예와 인을 일체로 통일시킨다. 공자는 예, 인, 중, 화를 일체로 총결산한 첫 번째 사상가다. 그의 정치 학설 가운데 예치, 인정, 중용은 삼위일체이며 상부상조한다. 공자의 후학들은 이 사유 방식을 계승하여 중용과 중화를 자연과 사회를 주재하는 근본 법칙이자 일체의 모순을 화해시키는 비결로 여겼다. 한대 유학자들은 이를 '대중지도大中之道'라고 불렀다. 수당 시대 『중용』의 지위는 한층 더 부각되었다. 북송과 남송 시대에 위대한 유학자들은 거의 모두 『주역』을 해석하고 『중용』에 주를 단 작품을 썼다. 사람들은 분분히 『서경』 『논어』 『주역』 『중용』에서 중화사상의 근거를 찾고자 했다.


692 중용은 절중, 절충으로도 해석한다. "충은 중일 따름이다." 충과 중은 서로 통한다. 주희는 절충에는 두 가지 속 뜻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지나침도 못 미침도 없는 것"이고 하나는 "딱 들어맞는 것"이다. 그는 "중이란 글자는 대체로 지나침과 못 미침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다. 이를테면 육예가 공자에게 절충됨과 같다"고 말한다. 이렇게도 이야기한다. "딱 들어맞음이다. 이를테면 절충은 둘의 절반을 잘라서 그 가운데를 취함이다." 절중이라 함은 중에서 표준을 찾고 중에서 삼화하는 것이다.


693 정이의 다음 한마디는 중용에 대한 전체 결론이라 할 수 있다. "천하의 리는 하나일 뿐이다. 작은 것으로 작은 것을 이루고, 큰 것으로 큰 것을

이루는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니다. 이 마음을 들어서 저곳에 더하고, 멀게는 사해까지 밀어서 기준으로 삼고 역사적으로는 만세까지 밀어서 기준으로 삼는다. 그래서 한번 수신하면 어떻게 사람을 다스릴 것인지 알게 되고, 사람을 다스릴 줄 알게 되면 천하 국가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 알게 된다. 모두 여기에서 나온 것이니 무엇인가? 중용일 따름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에 관한 모든 원칙은 나눠서 말하면 다르지만 합해서 말하면 하나다. 한마디로 중용일 뿐이다.


745 리학 사상가들의 마음속에 가장 이상적인 사회적 역할은 도를 갖추고 도를 다하는 성현이었다. 이 사람이 주인이 되면 마치 좋은 주인인 것처럼 하고, 노예가 되면 마치 좋은 노예인 것처럼 한다.


746 특정한 역사 조건하에서 충효 등 도덕의 부호는 부단히 강제성을 띠며 정치의 내용 속에 새겨졌다. 도덕문화와 정치 문화가 혼연일체가 된 것이다. 본원을 파고들면 유가야말로 효를 본종이자 근거로 하고, 그를 승화시켜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마침내 폭넓고 정심한 사상 체계를 구성한다. 제자백가 가운데 효는 어디서든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불교와 같은 외래문화조차도 효에 의해 순화되었을 정도다. 전통문화의 여러 요소 가운데 종법과 효도만이 쇠하지 않는 왕성한 생명력을,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응집력을, 쉼 없이 낳고 또 낳는 번식력을, 그리고 들어가지 않는 구멍이 없는 침투력을 지녔다. 리학은 바로 효’에 관한 학문적 결정이자 극치다.


제7장 남송의 사공事功 사상과 등목鄧牧의 이단 사상

778 남송에서 리학 사조와 대등한 입장에서 대웅한 것은 진량과 섭적으로 대표되는 사공事功 즉 업적주의 사조다. 진량과 섭적 정치사상의 뚜렷한 특징은 실제를 지향하고 실천을 중시하며 사공을 제창하고, 심성을 둘러싼 공리공담에 반대하고, 농업과 상업의 상호 이익을 주장한 점이다. 그들은 강산을 가리키며 금나라에 항거할 것을 애써 주장했다. 시대 정치를 평론하고 개혁을 창도했으며 사회 현실에 격렬한 비판을 가했다. 리학 사조에 대한 그들의 비평과 비난은 당시 사상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송말원초 사회는 급격한 혼란에 빠졌으며 수많은 선비는 산림으로 숨어들었다. 그들은 현실을 비판하고 폭정을 폭로하며 이단 사상의 발전을 촉진했다. 등목鄧牧의 정치 이상은 일부 선비들의 소망을 반영하고 있는데, 격렬한 사회비판 사상으로 일정한 가치와 의의를 지니고 있다.


제8장 요遼, 서하西夏, 금金의 통치 사상

841 거란, 여진, 당항은 모두 중국 역사상 오래된 민족 가운데 하나로 역사적 연원이 역대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 민족들은 모두 중화 문화에 탁월한 공헌을 한 적이 있다. 요, 서하, 금은 소수 민족이 건립한 정권이었기 때문에 경제, 문화 및 직면한 정치 상황이 중원과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통치 사상과 치국 방략에서 일정한 특색을 지니고 있다. 요, 서하, 금은 정치 문화의 변천 측면에서 어느 정도 공통된 특징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하나하나의 마상 민족이 한 민족을 통치하는 과정에 점진적으로 중화의 예법을 받아들이게 되었음이 그렇다. 그들은 문명의 큰길을 향해 치달았다. 왕권이 부단히 강화되어감에 따라 요, 서하, 금 내부의 군신 간 구별도 날로 삼엄해졌다. 군주와 신하가 상대적으로 권력을 나눠 가졌으며, 서로를 제약했던 구체제의 요인들은 이로 인해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왕권은 또한 부패의 길을 향해 치닫기도 했다. 그리하여 또 하나의 마상 민족이 굴기하여 앞의 것을 대신하고 (…) 역사는 반복하여 비슷한 윤회의 수레바퀴를 보여주었다.


855 요나라와 금나라 통치자들이 잇달아 공자를 존중하고 유학을 숭상하는 정책을 시행하면서부터 북방 유학은 거의 중원과 보조를 맞추며 발전

했다. 리학 또한 북방에 전파되었다. 예컨대 두시승은 "숭산과 낙양 산중에 은거했는데 그의 학문을 따르는 자가 매우 많았다. 대저 이락지학 즉 정주학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북방에 심성을 다루는 성리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영향력에 한계가 있었을 뿐이다.


865 요, 서하 금의 정치 문화의 발전과 변화 과정은 한 민족의 생활 구역 내에서 건립한 소수 민족 정권의 발전, 변화와 공통된 특징을 보여준다. 청나라 초 왕부지가 설파한 논의는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이적이 강해진 것은 그들의 법제가 소략하고 거처와 음식이 조악하여 사납고 매서운 기운을 길렀기 때문이며 그들의 습속을 바꾸지 않음으로써 큰 이익이 있었다." "일단 개혁을 하여 중국의 도가 섞이게 되면 저들의 이익과 손해는 반반이 된다. 이익이란 점점 중국을 이기고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며, 손해란 저들 또한 이로부터 약화된다는 것이다." 사실 요, 서하 금의 통치자들은 여러 방면에서 "그들의 습속을 바꾸지 않으려고" 힘써 노력했으나 효과는 아주 미미했다. 비교적 선진적인 문화를 대대적으로 흡수하는 것이야말로 낙후한 민족이 선두를 따라잡을 수 있는 첩경이다. 하지만 어떤 정치 문화를 받아들일 때면 피치 못하게 그 정치 문화가 내포하고 있는 정치 가치의 오류 또한 많든 적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해야 자신의 장점을 유지하면서 타인의 좋은 점을 흡수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끌어들인 정치 가치의 오류를 최대한 피할 수 있을까? 중국 고대 소수 민족 정권의 통치자들은 그 누구도 이 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했다.


제9장 원元대 ‘용하변이用夏變夷’ 사조와 리학의 관학화

910 남송 도종 함순 7년(1271) 세조 홀필렬(쿠빌라이)이 원元 왕조를 건립하고 얼마 안 있어 남송은 멸망했다. 송원 교체기 화하 전통의 유가 문화는 전대미문의 맹렬한 충격을 받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낙후한 북방 유목 문화와 고도로 발달한 중원 예악 문명은 격렬한 충돌 대항을 거치면서 점차 조화와 융합의 과정으로 나아갔는데 이는 원대 정치사상의 발전에 매우 특수한 상황을 제공하게 되었다.


913 민족 등급 정책은 원대의 정치 제도와 정치 발전에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원대 정치사상 발전의 기본 추세에도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원대는 한법을 배척하지 않았다. 사실상 이 시기에 허형, 유병충, 유인 등 수많은 저명한 유학자가 출현했으며, 그들은 전통 사상 문화의 발전사에서 모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리학 즉 주자학의 관학화 과정 또한 바로 원대에 완성되었다. 몽고 통치자들이 완고하게 민족 등급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에 중원 한법은 통치자들의 인정을 받긴 했지만 절대 주도적 지위를 차지할 수 없었다.


914 학경으로 대표되는 유학자들은 적극 협조하면서 이론적으로 '용하변이' 즉 중화문화로 이민족 문화를 바꾼다는 내용으로 전통 유학과 이민족 통치 사이에 조화의 길을 만들어냈다. 전국이 정치적으로 통일되면서 강남의 주희, 육구연의 학문은 전국에 광범하게 퍼져나갔고 차츰 원 왕조 통치자들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원 인종 시기가 세 번째 단계다. 이 시기엔 허형의 노재 학파가 흥기하고 리학이 제왕의 전당으로 파고들었다. 원 인종은 유술치국을 힘써 주장하고 정주학을 과거 시험의 교재로 세움으로써 리학의 관학화를 완성했다.


932 전통적 화이지변은 두 가지 핵심적 특징이 있다. 첫째, 화와 이를 판명하는 표준은 유가의 예의 문명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둘째. 화이와 내외의 구별은 유가 예의 문명이 주도적 기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긍정한 것으로 유가 문화의 응집력을 드러낸 것이다. 학경은 전통 화이지변의 기초 위에서 "중국의 도를 실행할 수 있으면 중국의 주인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화와 이를 판명하는 기준을 정치에 그대로 적용시켜 정권을 세우고 천하를 통치하는 합법적 근거로 삼았다. 그의 인식에 따르면 어떤 종족이든지 유가 예의 문명의 세례를 받아들이고 한법을 받들 수만 있다면 중국 토지 위의 통치자가 될 자격이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이적 군주'의 정치적 권위의 합법성을 인정한 것이다. 이 합법성은 도(즉 유가의 기강예의)를 지킨다는 전제하에만 성립할 수 있다. 이로써 이론적으로 심리적으로 한몽문화의 소통이 가능해지고 몽고족과 한족의 통치 계급간 정치 협력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934 '용하변이' 사상은 한몽 문화를 소통시키는데 중개자로서의 가치를 제공했다. 이 사상이 정치에 적용됨으로써 한족들은 살육의 재앙을 면했고 유가 예의 문명은 특수한 역사적 조건하에 지속적으로 전승되어 출로를 찾을 수 있었다. 동시에 염황의 자손이고 성인의 문도를 자처하면서도 이민족 통치에 굴종할 수밖에 없었던 한족 통치 계급과 지식인들에게 어느 정도 심리적인 평형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제10장 명대 통치자들의 전제집권 강화 정치사상

964 명明 태조, 명 성조, 장거정을 대표로 하는 명대 통치지들은 중앙 집권과 전제를 강화하고 관리에 대한 통제와 안민을 동시에 주목하는 치국 방침을 받들었으며, 제왕의 권력을 한층 더 절대화했다. 절대 군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들은 중앙 집권 체제의 완성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정치 이론의 건설 또한 중시하여 일련의 치국 사상을 마련했는데, 이는 명대 정치의 발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주의를 끄는 것은 절대 군권을 옹호하는 이 정치 이론이 군권을 조정하려는 전략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구준의 제왕학은 군권을 위한 활동 범위를 명확히 획정했으며, 최고 통치자들로부터 인가를 받았는데, 이는 명대의 통치 사상과 정치 사조를 이해하는 데 전형적인 재료를 제공해준다.


제11장 왕양명王陽明의 심학 및 그 후학들의 정치사상

970 주원장은 어떤 형식의 혁명도 엄금했을 뿐만 아니라 "마음속의 사념을 없애고 정도로 돌아오는" 백성을 매우 중시했다. 이러한 목적에 기초하

여 그는 불교의 추존에 크게 힘썼다. 예컨대 경성 안팎에 두루 승도아문을 설치하고 그들에게 매우 큰 권한을 부여하는가 하면, 명승들을 경성에 소집하여 각종 대규모 법회를 거행하고 친히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불조를 향해 무릎 꿇고 엎드려 큰절을 올리기도 했으며, 사람을 조직하여 불교대장경을 간각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홍무남장』이다. 또 도첩을 발행해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했으며, 승려들의 결단설법을 윤허해주고, 온 힘을 다해 불교 사원의 재산을 보호해주는 등 불교를 추존했다.


971 주원장의 불교 존숭은 절대로 그가 초년에 승려였기 때문에 불교에 특별한 감정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를 통해 백련교 등 민간의 종교를 진압하기 위함이었다. "마음속의 사념을 없앤다" 함은 혁명을 이끌 가능성이 있는 그 어떤 요소도 근본적으로 잘라버려 그가 개창한 명 왕조의 일통대업이 영원히 존속하도록 한다는 말이다.


978 왕조의 창건 과정에서 주원장이 유학을 추숭하고 유가 학자들이 발휘하는 작용을 중시한 것은 주로 민심을 얻기 위함이었다. 특히 유생 문사들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명 왕조가 건립된 뒤에도 주원장이 여전히 유가 경전을 존숭한 것은 완전한 군주 전제 통치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바꿔 말하면 사실상 그 는 유학을 우민愚民의 통치술로 삼았다.


1066 왕양명은 위로 공맹을 계승하고 "주희와 육구연을 범위로 하여 나아가거나 물러섬으로써" 심학의 집대성자가 되었다. 그는 송•명 리학 가운데 정인심 사상 및 그와 관련된 철학적 사변을 집중적으로 발전시켰으며 정주학의 폐단을 교정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정•주와 육•왕의 기본적인 정치 가치관은 다르지 않지만 심과 리를 결합시킨 왕양명의 철학적 사변은 심의 본체성 및 그 윤리도덕적 속성을 강화시켰다. 격민심지비, 즉 민심의 잘못을 바로잡고, 파심중지적, 즉 마음 속의 적을 깨뜨리라는 말은 심학이 특별히 관심을 기울인 이론 문제다. 왕양명과 그의 후학들은 이 사유의 길을 따라 서민을 교화하고 사회를 안정시킬 구세의 방안을 탐색했으며 이로써 유학은 더욱더 세속화하게 되었다.


1067 유학의 다른 유파와 비교해볼 때 심학 일파는 사람의 주체의식과 자아의식 및 도덕 인격의 자아 완성을 더더욱 강조한다. 그의 후예들 가운데 "대부분이 맨손으로 용사와 싸울 수 있었는데" 그들은 아주 파격적으로 시대 조류에 반하는 정신을 가졌다. 그래서 왕양명과 그의 후학들에게서는 학문적으로 창조적인 견해가 많이 나오며 세상을 놀라게 하는 논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공자와 경전이 갖고 있는 지고무상의 권위를 부정하는 이단으로 치닫기도 했다.


제12장 동림당인東林黨人의 시폐 관심 정치사상과 충군의 정치심리

1217 명 말 당쟁 가운데 동림당인들은 선비들의 정치 단체 중 가장 풍부한 이상을 갖고 원칙을 견지하면서도 대단한 희생정신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순지구세 즉 세상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바칠 뜻을 지니고 순도충군 즉 도에 목숨을 걸고 군주에게 충성하는 정치 심리에 기초하여 군주와 사회 각계각층의 인정과 비호를 얻고자 했다. 하지만 소망과는 달리 그들의 결말은 지극히 비참했다. 역사의 겉모습이 보여준 것은 동림일파가 환관 위충현 일파의 공격과 음해를 받았으며 마치 붕당 투쟁 가운데 쌍방의 세력이 커지고 줄어든 결과라고 한다. 그런데 사실상 역사의 진실은 이렇게 담백하지 않다. 환관이든 동림이든 모두 전제 왕권의 파생물이자 기생물이고 부속물이었다. 천계 초 동림이 정권을 잡았을 때 군주의 수긍을 얻었는데 그 후 환관이 동림을 박해한 것 또한 군주의 뜻을 받들었거나 부추긴 것이다. 따라서 결국 동림당인들은 그들이 절대적으로 충성을 다하고 적극적으로 옹호한 군주에 의해 직접 액살을 당한 것이다. 그들이 추구하고 분투한 정치적 가치는 거꾸로 그들 자신을 질곡에 빠뜨리는 포승줄이 되었다. 이는 일장의 비극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 자초지종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선비들이 필요한 학문적 자유와 정치적 독립성을 결여하고 있는 한 선비들이 어쩔 수 없이 권력의 부속물이 되는 한 그들의 뜻과 행동이 아무리 높고 고결하다 하더라도 노예의 운명을 벗어나기 어려우며 주인은 그의 노예에 대해 언제나 마음대로 상벌을 주고 뜻대로 처치를 할 수 있다.


제13장 청 초 봉건 사대부 집단의 자아비판 사조

1232 극렬한 사회 혼란과 나라와 군주를 잃은 정치 대변동은 수많은 사대부로 하여금 명대의 치적 병폐를 반성하게 만들었고, 송명 리학을 반추하게 했으며, 전통 정치사상과 정치 체제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하도록 했다. 비판과 성찰의 기초 위에서 그들은 도를 밝혀 세상을 구제하고, 실용을 숭상하고, 군권을 조정하고, 체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분분히 주장하고 나섰으며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친 정치 사조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1233 강산의 거대한 변화와 살면서 만난 불행은 그들을 단련시켜 사상적으로 깊이 천착하고, 학식이 넓으면서도 현실을 지향하는 철학자요, 학자요, 투사로 만들었다. 그들의 깊이 있는 성찰과 종합은 전국, 진, 한 이래 군주 정치의 구석구석까지 언급했으며, 그들의 정치적 사유는 비판성, 종합성, 창조성을 갖추어 전통 정치사상의 최고 성취를 대표한다. 여유량과 당견 등의 폭군, 폭정에 대한 비판은 특히 격렬한 언사로 가득했고, 혹자는 심지어 "패역과 광기 어린 언사"로 취급될 정도였는데 이는 이 사조의 비판성을 더욱 강화시켜주었다.


1354 종법 제도와 군주 제도는 여전히 그들의 정치 이상이었다. 그들은 군, 신, 민의 정치적 등급 관계를 부정하지 않았으며 특히 인민 주권 관념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군주가 정치의 근본"이라는 명제가 여전히 모든 정치론의 기본 출발점이었다. 그들은 정치 구조를 개혁하고 정치 관계를 조정하여 군, 신, 민 사이의 화해를 유지하고 군권을 상대적으로 약화시켜야 한다고 분분히 주장했다. 그들의 설계에 따르면 제왕은 신민, 도덕, 여론의 제약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전체 정치 체계 내부에 군주의 의지를 부정하고 군주의 거취를 결정지을 만한 제도화된 절차와 기제는 없었다. 이론적으로 포악한 독재자는 쫓아낼 수도 죽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폭군에 저항하는 민중을 도적이나 금수로 질타했다. 그러면 이상 정치는 그저 성군과 현신을 통해 실현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성현주의의 깃발을 높이 들었으며 성군명주가 출현해 백성이 처한 곤경을 해결해주리라 기대했다. 그들은 모두 일심홍방, 즉 하나의 마음이 나라를 흥하게 할 수 있다는 논의를 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책을 써서 주장을 세우고 시대 정치를 평론한 목적은 대방, 즉 성군을 기다리고 군주를 바르게 만들어 도를 실천토록 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들의 정치 설계가 모두 실현되었다 하더라도 기껏해야 개명한 군주 전제 제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소위 전제는 곧 군주가 유일한 최고의 정치 주체이며, 소위 개명이란 군주가 반드시 백성을 사랑하고 공을 행하고 간언을 받아들이고 현인을 임용하고 적당히 권한을 나누어주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본질로 볼 때 황종희 등의 정치사상은 여전히 봉건 통치 계급의 자아 인식이자 자아 조정이었다.


제14장 청淸대 전기 제왕들의 정치사상: 절대 군권의 수호

1398 강희제는 신민들을 향해 16조의 훈유를 반포하여 사회생활의 준칙으로 삼은 적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단을 몰아내고 정학을 숭상한"

것이다. 이 훈유에 대해서 옹정제는 "풍속을 도탑게 하려면 먼저 인심을 바로잡고, 인심을 바로잡으려면 먼저 학술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해석했다. 건륭제는 『사고전서』 편집을 주재하면서 전서관 신하들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감별에 주의하고 서적에 대해 혹은 수록하고, 혹은 버리고, 혹은 없애고, 혹은 고치되 "반드시 상세하고 신중하게 선택할 것이며 뭇 언어를 모두 아정으로 귀납시켜 옛 것을 거울 삼아 삿된 것을 배척하려는 짐의 뜻에 부합토록 하라." 문화 영역에서 '숭정척사', 즉 정을 숭상하고 사를 배척하는 것은 청나라 황제들의 일관된 사상이자 문화 정책이었다.


1399 서적 가운데 청 조정이 금기시하는 정치적 내용을 언급하고 심하게 폄하하거나 청 조정의 통치에 대항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더욱 큰 문자옥을 일으켜 끝까지 색출하고 널리 연좌시켰다. 숫자를 셀 수 없을 정도의 참혹한 사안이 만들어졌는데 극단화된 청대 전제 통치를 잘 보여주었다:


1408 저군은 예정된 장래의 황제다. 그 특수한 지위는 당금 황제의 권위에 바짝 다가서기 때문에 뭇 신하가 그를 꺼려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 해결의 유일한 방법은 비밀건저다. 여러 아들 가운데 하나를 선정하지만 공개하지는 않고 오직 황제 한 사람만 알고 있다. 추후에 만약 고가 맡길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되면 수시로 소리 소문 없이 바꾸어도 된다.


1409 비밀건저 제도는 궁정의 정치 모순을 조화시키고 통치 질서를 안정시키는 작용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는 군주 일인 전제의 강화를 통해

서만 실현된다. 비밀건저 이론의 관건은 '밀'자에 달려 있다. 비밀스러워 황제는 그 어떤 사람과도 상의하지 않고 그 어떤 사람이 알아서도 안되며 심지어 비밀리에 선정된 계승인 자신도 전혀 모르고 있어야 한다. 종실 귀족 황후 비빈, 조정 중신 등 그 어떤 사람도 계위 문제에 대해 일언반구도 할 수 없으며 완전히 군주 한 사람이 독단한다. 선정된 사람이 뜻에 맞지 않으면 황제는 수시로 비밀리에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있다. 모든 황자는 그저 고분고분할 수밖에 없으며 자기를 내세우면 내세울수록 선발될 수가 없다. 조신들 또한 장래 왕위 계승자의 신상에 결탁을 할 수가 없으니 붕당이 생길 요인이 하나 없어진 것이다. 이 때문에 비밀건저 이론의 실질은 군주의 권위에 대한 저군의 대항을 없애고 계승인의 선발과 교체를 완전히 군주 한 사람의 의지에 귀속시킨 것이며 동시에 극단적으로 절대화된 군주독재를 재위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굳게 유지하는 것이다.


1428 명청 교체기에 천지가 붕괴되듯 청 왕조가 소수 민족으로 중원의 주인이 되었다. 수많은 한족 관료와 사인들은 청조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고 다시 한번 화이지변이란 사상적 무기를 집어 들었다. 『춘추』 '존왕양이'의 대의 및 ‘『춘추』 대'일통' 학설의 의발을 이어받아 하층 사인들 사이에 반청 정서를 전파하고 끓어오르게 했다. 이는 사상 문화 영역에서 청조의 크나큰 적대 여론이 되었다.


1434 옹정제의 대일통 사상은 청조 국력이 날로 강성해져가던 형세하에 반청 사상을 지닌 한족 사인들과의 투쟁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가 의거한 사상 체계는 여전히 전통 유학의 봉건주의 강상 윤리였으며 여론을 통해 청조의 통치자적 지위를 유지하려는 동기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사상적으로 양이의 강조를 특징으로 하는 ‘『춘추』 대일통 관념보다 우월했던 것은 분명하다. 청조는 자신의 대일통 정권을 "천하일가. 화이일가"로 취급했으며 옹정제는 누차에 걸쳐 자신은 신하들에게 "진심으로 대우하며 만주인과 한인을 다르게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이것이 물론 실제로 완전히 관철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공공연히 민족적대를 책동하는 사상보다는 더 이지적 정신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이 새로운 대일통 이론은 청조의 정치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청나라 제왕은 천하의 주인을 자처했으며 어떠한 분열, 할거 현상도 용인하지 않았다. 변강 지역에 대한 관리를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청조 전기에 벌써 중국의 통일을 전에 없이 공고히 하여 중국 영토와 강역의 기초를 다졌다.


제15장 공자진龔自珍과 고전 정치 사유의 종결

1452 18세기 말부터 제1차 아편전쟁 전까지 학술 사상과 정치 사조의 변화 발전의 추세는 한마디로 건가한학이 쇠퇴하고 세상의 폐단을 바로잡겠다는 구세 사상이 흥기했다는 것이다. 건가한학은 일정한 사회 배경의 산물이었다. 청 초 실학 사조가 확산되면서 청대 '태평성세'의 번영과 문자옥의 속박은 사상 문화 영역 내에 일찍이 일세를 풍미한 건가한학을 촉발시켰다. 그러나 학문 방법의 한계와 사회정치적 동요는 필경 건가한학을 쇠락의 길에 접어들도록 결정 지어버렸다. 경세치용은 유가 정치사상의 보편적 준칙이다. 그것은

내적으로 수신제가와 치국평천하, 심성에 관한 학문과 실학이라는 두 극단을 내포하고 있다.


1453 유학은 바로 이 경세를 중추로 하여 두 가지 학술 경향이 서로 논쟁하고, 서로 보완하며, 서로 조정하면서 우여곡절을 겪는다. 이 시기 건가한학을 조정 대상으로 삼으며 비판했던 무기 또한 경세였다.


1460 공자진은 삼대 이래 중국은 '쇠세' 중에 처해 있으며 청 왕조는 그가 살아가는 해까지 발전했으나 역시 '쇠세'에 진입했으니 오늘날 세상은 '쇠세' 중의 '쇠세'라고 보았다.


1483 중국 고대 정치사상사는 회의와 비판, 그리고 규탄의 아우성 속에 종결되었다. 청나라 한 시대에만 해도 황종희부터 공자진까지 비판 색채가 농후한 사상가들이 연이어 출현했다. 집단을 이루었으며 사람도 많았고 파급 면도 광범했으며 언사는 격렬하고 깊은 이성적 사변을 보였는데 모두 이전 시대엔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사상가들은 모두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사람마다 하나의 사조나 학파를 대표했다. 그들이 사고한 문제는 사실상 전체 사대부 계층이 보편적으로 관심을 기울인 문제였다. 청대 신하들의 상소와 품의 및 제왕들의 유지와 조칙을 대강 훑어보기만 해도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조정에서도 중시하고 관심을 가졌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봉건 전제주의 사회정치 형태가 이미 막다른 길로 저물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1488 '난세'가 곧 오게 될 것이라는 공자진의 예언은 불행하게도 적중했다. 그가 죽을 무렵 서양 자본주의는 대포를 이용해 중국의 문을 요란하게 열어젖히고 폭력으로 중국 역사 발전의 고유한 진행 과정을 단절시켜버렸다. 서양 열강이 강압적으로 중국에 대량의 상품을 판매하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정치 문화 요소 또한 따라 들어왔다. 두 문화가 충돌하고 융합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위기를 구하고 생존을 도모하려는 사람들은 차츰 '존군-죄군' 문화 모델로부터 걸어 나왔다. 이에 따라 중국 정치사상사는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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