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채드윅: 초대교회사 ━ 펭귄 교회사 시리즈 1

 

초대교회사 - 10점
헨리 채드윅 지음, 박종숙 옮김/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01.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02. 신앙과 직제

03. 확장과 성숙

04. 저스틴과 이레니우스

05. 부활절, 단일신론 논쟁, 그리고 버툴리안

06.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오 오리겐

07. 제3세기의 교회, 국가, 사회

08. 콘스탄티누스와 니케아 공의회

09. 니케아 공의회 이후의 아리우스 논쟁

10. 4세기에 이교와 기독교 사이에 벌어진 투쟁

11. 율리아누스로부터 테오도시우스까지의 교회와 국가와 사회

12. 금욕주의 운동

13. 오리겐에 관한 논쟁과 요한 크리소스톰의 비극

14. 그리스도의 위격 문제

15. 라틴 기독교 사상의 발전

16. 교황제

17. 교회와 야만족

18. 예배와 예술

19. 결론

참고문헌

 

 


7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이었다. 이들은 민족의 대망인 메시아가 나사렛 예수의 모습으로 이제 오셨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다른 동료 유대인들과는 구별되었다. 메시아의 오심은 약속의 성취이기 때문에, 자기 백성에서 주신 하나님의 과거의 계시와 연속선 상에 있다는 점에 이들은 하등의 의심을 갖지 않았다. 그것은 결코 할례로 상징되는 아브라함과의 옛 언약이나,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주어진 율법과 단절을 의미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설령 새로운 그 어떤 것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것은 한 분 동일하신 하나님, 즉 세상의 창조주, 역사의 주,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열두 족장의 하나님의 행위였다.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새로운 말씀은 예언자들을 통해 과거에 주어진 말씀과 일관성을 갖지 않으면 안되었다.

20 바울은 근본적으로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준수를 통해 성취하는 자신의 공로를 근거로 천국을 획득하는가 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율법 관념에 반대하여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 무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자비와 용소라는 관념을 대비시켰다. 세례를 통하여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의롭게 된다,' 그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놓이게 되며, 이러한 관게에 근거하여 비로소 '선한 행위들'을 하게 되고 거룩함에 있어서 진보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모세의 율법으로부터 자유롭다. 율법의 위치는 항구적인 것이 아니라 잠정적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었다.

20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자유와 동등한 위치를 옹호하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로부터 이방인 개종자들이 교회의 완전한 구성원이라는 인정을 이끌어 낸 것은 바울의 공로였다. 

20 그는 팔레스타인의 복음을 헬라 세계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할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서 최초의 그리스도교 변증가가 되었다. 팔레스타인의 첫 세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게서 영광 가운데 곧 돌아오실 것을 기대했다. 바울은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다는 교리는 헬라 세계의 복음화에 있어서 자산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부채라는 것을 깨달았다. 헬라 세계에서는 주된 사변적 관심이 종말이 아니라 우주의 시초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종말로서의 그리스도로부터 창조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로서의 그리스도로 그 강조점을 이동사켰다. 

26 로마 정보는 실제에 있어서는 어떤 종교에 대해서도, 반역을 부추기거나, 도덕성을 악화시키지만 않는다면, 관용적인 입장을 취했다. 참으로 로마가 정복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 이유들 중의 하나는 다른 민족들은 단지 자기들만의 지역신을 숭배하는데 비해, 로마인들은 어떤 신도 배척하지 않고 다 숭배하며, 이로 인해 신들이 로마인들의 경건에 보상을 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믿어졌다. 유대인들의 하나님은 어떤 형상도 없고 예루살렘에서가 아니면 희생 제사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인들이 적응하기 어려웠다. 

40 영지주의(Gnosticism)라는 용어는 지식(gnosis)을 뜻하는 일반적인 헬라어 단어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2세기 종파들은 교회의 단순한 신앙을 초월하는 특별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상 이들이 주장하는 지식이란 철학적이고 지적인 성격의 것이라고 보다는, 인간 특히 영지자(Gnostic man)의 본성과 운명에 관한 지식, 특별히 어떻게 악이 존재하여 되었고, 악으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설명하는 세상의 기원에 관한 웅대한 계시에 근거를 둔 지식이었다.

58 2세기 중반 이후 교회 안에 신앙과 질서에 있어서의 표준화를 향한 강한 노력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교리상의 다양성들, 에전적 관습상의 문제들(예를 들면 부활절 준수), 그리고 성경 선택의 문제들이 점점 통일되어 갔다. 이러한 과정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원칙적으로 동의했던 전제는 교회는 하나이기 때문에, 그 신앙과 관습들이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회의 직제에 있어서 다양성은 초기 선교 사역의 유산이었다. 

62 4세기에 이르러서야 교회당은 비로소 '공공의'(public)건출물 양식을 갖게 되었으며, 외관만 보고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해 때문에 교회가 지하 묘지로 숨어들었으며, 성례는 일종의 혈거적 생활 속에서 이루어져야만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박해는 교회를 지하로 쫓아내기는커녕 정반대의 효과를 가져왔다. 2세기의 소아시아의 한 지방 총독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을 때, 이 지역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의 공개적 고백과 불의에 대한 항거의 표시로 총독의 관저 앞에서 시위를 했다. 처음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외부의 견해에 비정상적일 정도로 예민한 집단이었다. 그들이 극복해야만 하는 적은 편견과 오해였다.

63 개종의 조건은 세례시의 서약이었다: 죄를 포기하고, 악한 영들, 우상, 점성술, 마술 등과 관련된 모든 것을 거부하는 것과,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구속적 행위에 대한, 그리고 교회 안에 활동하고 계신 성령에 대한 믿음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64 나그네들에 대한 환대는 특별히 중요한 사랑의 행위였다. 그리스도인 형제는 자신의 신앙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기만 하면, 최대 사흘 동안은 아무런 질문도 받지 않고 확실하게 숙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감독은 특별히 전도 여행 중인 선교사들을 위해 이러한 환대를 제공할 일차적 책임을 가지졌다. 따라서 감독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교회의 수입을 관할해야 했다.

67 그리스도교는 여성이나 노예들에게 정치적 해방을 선사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또한 모두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았으며, 따라서 절대적인 존중심을 가지고 대해져야만 한다는 가르침으로 이들의 가정 내에서의 위치를 매우 고양시켰다. 하나의 사회적 제도로서의 노예제에 관해 교회가 보수적 태도를 취하게된 것은 정치적 무관심 때문이 아니라, 로마서 13징에 기술되고 있는 것과 같은 국가와 법에 대한 존중 때문이었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소유권을 갖는다는 것은 악으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아담 이후 이간의 타락상태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생각되었다.

80 그리스도교의 초자연적 기원에 대해 증명하도록 압력을 받자, 2세기의 교회는 일차적으로 예수에 의한 구약 예언의 성취와, 신앙의 보편적 확산에 대한 가시적 증거를 제시했다. 때로는 그러나 좀 덜 빈번하게는 신적 권능의 증거로서 예수의 기적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들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논증은 심지어는 대중적인 변증에 있어서조차도 대닪히 종속적인 역할을 했다.

81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광범위하게 확장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호소는 성공으로부터의 단순한 논증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쉽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 논증은 복음의 진리가 도덕적 체험 안에서 입증된다는 주장을 함축하고 있다. 이 도덕적 체험은 사도들의 확신과 순교자들의 고결성에서 증명된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였다면, 사도들은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걸고자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논증은 전개된다.

83 2세기에 이교도들은 이 지역 신들을 지방 총독에 비유할 수 있는 존재로 해석했다. 지방 총독은, 정부의 소소한 일들에 관심을 갖기에는 너무나 초월적인 최고 권력자를 위해 세상을 다스린다. 그리하여 유일신론 비슷한 것이 식자층에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3세기에 이르러 유일신론을 향한 이러한 노력은 태양 숭배와 결합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교가 제국 내에서 성공을 거둔 것은 부분적으로는 보편적 종교에 대한 제국의 필요에 그리스도교가 가장 잘 응답했기 때문이다. 제국은 스스로와 동일시될 수 있는 보편적 종교가 필요했다.

83 4세기에 일부 그리스도인 저술가들에게는 '로마적'(Roman)이라는 말과 '그리스도교적')(Christian)이라는 말이 논란의 여지 없이 거의 동의어로 여겨졌다. 그렇지만 실제에 있어서 로마 제국주의와 그리스도교의 종합은 붕괴되었다.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가 적대적인 야만족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져야만 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가 이 덧없는 세상의 정치적 구조에 대해 일종의 초연함과 심지어는 무관심이라는 옛 전통을 다시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89 그리스도께서 "때가 차매"(in the fullness of time) 오셨다는 바울의 함축적 표현은 역사에 대한 신학적 해석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저스틴은 인류의 연대기를 그리스도의 오심을 분기점으로 갖는, 거룩한 역사와 세속적 역사의 이중적 이야기라고 생각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113 클레멘트의 사상에 있어서 중심 원리는 창조 교리이다. 창조가 구속의 근거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이성의 피조물들 안에 진리의 선한 씨앗을 뿌려 놓으셨기 때문에, 플라톤의 형이상학과 스토아 학파의 윤리,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으로부터 배울 것이 많이 있다고 클레멘트는 확신하였다. 어디에서 발견되든지 간에 모든 진리와 선은 창조주로부터 온 것이다. 동일한 근거 위에서 클레멘트는, 물질을 지존의 하나님으로부터 전적으로 소외시킴으로써 창조 세계를 폄하하, 그 결과 윤리적으로 극단적인 금욕주의나 도는 반율법주의적 정욕주의에 바지게 되는 영지주의자들을 반대하였다.

147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은 교회사와 유럽사의 방향을 틀어놓은 사건이다. 그것은 단순히 박해가 끝났다는 것만 뜻하지 않고, 훨씬 더 많은 것을 뜻했다. 황제가 교회의 발전에 어쩔 수 없이 즉시 개입하게 되었고, 반대로 교회는 갈수록 황제의 정치적 판단에 연루되었다. 서방 교회는 콘스탄티누스의 개종과 그 결과에 대해서 동방 교회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인 시각을 견지했다. 서방 교회는 황제가 교회에 주는 유익의 양면성을 동방 교회에 비해 예맇게 인식했다. 

153 그 (니케아) 공의회가 상정한 신조는 성자가 '성부와 하나의 본질'을 지니신다고 확언함으로써 아리우스에 대한 반대 의사를 분명하게 천명했다. 신조에 결론으로 붙은 아나테마(저주)는 성자가 형이상학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성부보다 열등하며, 창조계에 속한다는 주장을 단죄했다.

153 "하나의 본질"(호모우시오스)이라는 표현은 동질성을 확언했다. 성부와 성자가 '동일한 분'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모호했다. 일부는 그것을 개인적 혹은 구체적 동일성으로 이해했고, 보다 많은 수는 보다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동일성으로 이해했다. 

154 니케아 교회법은 교회의 조직과 '권력 구조'가 발전된 경위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325년경에 그리스 교회들은 적어도 제국의 속주 체제에 입각한 조직에 익숙해 있었고, 그 단위는 대개 국가의 속주 단위와 일치했다. 하지만 속주(관구) 공위회 위에 어떠한 항소 법원이 설 수 있었을까? 서방과는 달리, 동방은 누구나 수위성(首位性)을 인정하는 단일 교구가 없었고, 다만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과 (330년부터는) 콘스탄티노플 같은 대도시들밖에 없었다. 대단히 중요한 성스러운 지역들을 보유한 그리스 유일의 도시는 예루살렘뿐이었다. 그곳의 주교들은 자신들이 기독교 세계의 모교회를 주교한다는 강한 의식을 보여주었다.

156 4세기의 교회가 조직을 갖춰 가는 과정에서, 신학 논쟁에 휘말린 것은 크나큰 불행이었다. 교리적 불화는 곧 질서와 권징과 권위 문제로 비화했다. 무엇보다도 교리적 불화는 그리스 동방과 라틴 서방 사이에 갈수록 증폭되던 긴장과 깊이 연루되어 갔다. 4세기 전반에 동방에서 아리우스파 지도자들은 이런 긴장을 이용하여 그리스 교회들을 상대로 상당한 통일 전선을 형성할 수 있었고, 관용 정책을 표방한 황제 콘스타티우스 2세(Constantius II, 337-61)와 그 뒤에 발렌스(Valens, 364-78)에게 지지를 얻었다. 더욱이 아리우스주의가 동방에서 최종적으로 진압될 때도 논쟁이 끝나고 나서도 동방과 서방 사이의 긴장을 지속시키는 방식으로 진압되었다. 

197 테오도시우스가 법으로 규제한 이단 종파들 가운데 가장 심한 탄압을 받은 종파는 마니교(the Manichees)였다. 마니교는 시리아어를 사용한 바빌로니아인 마니(Mani, 216-76)가 이란의 제르바나교(Zervanite)에 기초하여 세운 영지주의 형태의 이원론 종교였다. 마니는 조로아스터교와 불교와 영지주의 형태의 기독교에서 끌어온 요소들을 한데 홉합하여 동방과 서방에 다 유용한 보편 종교를 세우려고 했다. 태초에 빛과 어둠이 투쟁을 벌였다는 마니교의 신화는 왜 현실 세계에 선과 악이 뒤섞여 있는가를 설명하고, 금욕적이고 윤리적인 생활의 근거를 제공했으며, 이런 생활에 힘씀으로써 '선택된 자들'(the Elect)이 자기들의 육체에 갖혀 있는 신적 빛의 분자들을 풀어주게 될 것이라고 가르쳤다. '선택된 자들'보다 하위 계층인 '듣는 자들'(Hearers)에게는 몇 가지 기본적인 윤리적 규율만 지키도록 했고, 그로써 선택된 자들로 환생하고, 궁극적으로 윤회의 수레바퀘에서 풀려나기를 소망하도록 가르쳤다. 마니교도들은 비밀 의식 때문에 문란과 흑마술의 의혹을 받았다.

203 4세기 말에 접어들면, 교회가 사실상 사회를 장악하고 있었다. 세상적인 표준으로 볼지라도, 어지간한 도시의 주교직은 딱히 종교적인 동기가 아닐지라도 한 번 꿈꾸어 볼 만한 좋은 직위가 되어 있었다. 많은 지역 교회들이 실질상 지주들이 되어 무수한 지역 빈민들의 생계를 지원했다. 사람들은 주교가 자신들의 영적 목자뿐 아니라 세속적 이익의 대변자까지 되어주기를 기대했다. 고대 사회에서는 성공하려면 후원자가 있어야 했다. 관공서의 좋은 부서에 들어가려고 할 때나 경찰이나 세관과 문제가 생겨서 구속을 면해야 할 때, 심지어는 법정에서 소송을 벌일 때조차 후원자의 청탁이 큰 힘이 되어주었다. 3세기부터 성인들의 대도(代禱)가 하늘에서 영향력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들을 후원자(수호성인)로 삼는 관행이 발전한 것도 지상의 사회적 상황이 천상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간 것이었다. 세속 행정관에게 고소를 당한 사람이 주교에게 도움을 청하면, 주교는 혹시 행정관의 권력이 자신보다 약할 경우 재판에까지 간섭했다.

206 많은 금욕주의자들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리 오래 가지 않아 이 운동은 응집된 신학적 기반을 갖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오리겐의 저서들에는 벌써 금욕주의 신학에 따르는 모든 기본적인 요소들이 두루 발견된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다만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려고 한 순교자의 이상에 주도된 신학이었다. 십자가가 악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였듯이, 순교자도 죽음으로써 이 승리에 참여했다. 금욕주의자들은 박해가 끝난 뒤에도 이 정신을 계승했다. 세상을 등지는 동일한 자기 희생에 도달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희생을 요구하는 복음의 교훈과 고전 시대의 유산인 단순 소박한 삶의 태도가 뒤섞였다. 수도원 운동은 소박한 평민들뿐 아니라 플라톤과 그의 이상적인 순교자 소크라테스의 전승, 경유학파의 자족 원칙, 그리고 얻지도 지키지도 못할 것에 대한 욕구를 억누르는 데서 행복이 생기므로 합리적이고 올바른 삶을 살려는 집착도 버리라고 가르친 스토아주의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까지 파고들었다.

256 397년에 [고백록]이 출간되었다. 자아 성찰적인 자서전으로서는 비류가없는 걸작인 이 책은 대단히 어려운 장문의 기도 형식으로 기술되었는데, 시편의 문체를 본딴 경우가 많았다. 그럴지라도 이 자서전은 영혼이 창조주께 돌아가기까지는 안식 할 수 없다는 영원한 진리를 무의식중에 보여주게끔 구성된 점에서 대단히 독특하다. 개인 이야기를 섬세하게 기술하되, 그 목적은 주로 신학적 논제를 예시하는 데 있다. [고백록]을 마치 단순한 삶의 이야기에 생소한 신학적 내용을 끼워 넣은 평범한 자서전처럼 읽어가지고서는 그 취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263 한편 413-427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직접 펜을 들어 기독교를 변호하는 방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제하의 이 글에서, 그는 교회가 모든 제국들과 문명들의 흥망성쇠를 초월하여 참되고 '영원한 도성'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존재한다고 보았다. '기독교' 로마조차 야만족들이 몰고온 혼돈과 파괴에서 제외되지 않는다고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제국의 관심사와 하나님의 나라의 관심사가 조금이라도 일치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부와 교회의 관계에서, 정부는 평화와 자유를 유지하는 적극적인 기능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국을 침공한 야만족들을 반드시 하나님의 도성의 적들로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야만족 주인들을 개종시키는 것이 서방 교회의 임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266 이러한 교리가 펠라기우스에게 큰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그는 아담의 타락 이래로 죄가 재생 과정을 통해서 유전적으로 전가되는 일이 없음을 분명히 밝힐 의도로 직접 펜을 들어 바울 서신들에 대한 주석을 썼다. 펠라기우스에 따르면, 우리는 저의적으로 아담의 범죄를 모방함으로써 죄를 짓고, 외부의 환경과 연속적인 그릇된 선택으로 의지의 결단이 약해짐으로써 부패하는 것이지,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오는 '본성'에 내재된 잘못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266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할 능력을 상실한 정도로 인간 본성이 타락할 수 있음을 시인하는 것은 마니교에 양보하는 치명적인 잘못이라고 간주했다. 그는 모든 죄가 개인의 동의하에 범해지고, 반대로 개인이 동의하지 않으면 죄도 없음을 시인하는 것이 윤리 개념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갓 태어난 아기에게 악의 요소가 있다는 생각을 부정하는 데로 나아갔따. 아담의 죄가 초래한 결과는 치명적으로 악한 불순종의 시범을 보여준 것일 뿐, 후손에게 죄나 사망을 전가한 것은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아담은 죄를 지어 필멸의 존재가 된 것이 아니라, 지음을 받을 때부터 그런 존재였다고 했다.

271 아우구스티누스가 펠라기우스주의를 논박하면서 제시한 교리에 따르면, 인류 전체가 아담 안에서 타락했다. 유전적 죄성의 전가가 출산과 맞물려 진행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볼때, 정절이 결혼보다 고등한 상태라는 당시의 일반적인 신념은 성적 충동이 호색과 무괄할 수 없다는 증거였다. 어쨌든 유아들에게 죄사함의 세레를 베푸는 것은 유아들이 죄로 오염되었음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유아들은 세상에 나와 죄를 짓지 않았으므로 죄사함은 그들의 본성에 붙어 있는 죄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만약에 아기들이 세례를 받지 않는 채 죽으면 멸망에 떨어진다. 비록 '대단히 온건한' 형태의 멸망이긴 하지만 말이다. 인류는 파멸 덩어리로서, 구속의 은혜를 입지 못하면 순수한 선한 의지의 행위를 내놓을 수가 없으며, 선량한 이교도들의 덕행도 모두 죄로 얼룩져 있다. 온 인류가 지옥에 떨어진다해도 그것은 엄격한 공의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신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소수의 영혼들을 구원하기로 선택하시되, 그들이 일체의 공로를 나타내기 전에 예정하심으로써 선택하신다. 이 선택이 불공평하다고 불평한다면 그것은 자범죄는 물론이고 원죄에 붙은 죄의 무게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277 4세기 후반부터 서방 교회들의 삶에 나타난 현저한 특징을 들라면, 로마 교구가 영적 권위와 법적 권위의 중심으로 급속히 떠오른 것을 들 수 있다. 로마 교회가 자연스럽게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 기원은 교회의 초기 단계로 거슬로 올라간다. 그것은 1세기가 저물기 전에 로마 교회가 고린도 교회의 분쟁에 형제애를 가지고 개입한 데서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권위에 대해 지녔던 독립적인 태도와, 그가 이방 세계의 수도를 중심으로 이방 기독교 세계를 창설한 데서 향후의 발전을 위해 뿌려진 씨앗들을 일찌감치 식별 할 수 있을 것이다.

331 사도 시대의 핵심 쟁점들은 교회와 이스라엘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관한 것이엇다. 모세 율법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하던 사람들과, 상극의 위치에서 구약성경을 완전히 버릴 것을 주장한 이방인들은 모두 배척되었다. 주류에 의해 받아들여진 노선은 바울의 중용(via media)이었다. 구약성경은 인류에 대한 신적 교육의 역사로서, 인간들에게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해석해야 할 책으로 기독교 성경에 항구적인 자리를 차지했다. 교회는 구약성경을 조금도 남김 없이 편안하게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었지만, 그럴지라도 구약성경 없이 존립할 수가 없었다.

332 사도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권위가 큰 문제로 부각되었고, 따라서 2세기는 씨앗과 같은 신조들 안에 기독교 교리의 기본 형태가 간결하게 요약되기 시작했고, 성직 체계가 주교와 장로와 부제라는 보편적인 삼중 형태를 띠었으며, 마지막으로 신약성경의 정경이 형성된 시기였다. 질서와 일치가 시급하게 필요했다. 특히 영지주의적 혼합주의의 지방분권적 경향때문이었다. 영지주의에 대한 투쟁과 정복이 교회사에서 가장 힘겨웄고 가장 결정적인 전투였을 것이다. 

333 3세기 중반에 이르면 교회가 보다 일반 사회의 시선을 의식했고, 기독교는 식자층과 지배 계층 사이에 깊숙이 뚫고 들어갔다. 옛 이교가 퇴조를 보이면서 이교도들은 수세적 입장에 몰렸고, 기독교의 공세 앞에서 적극적인 대안을 모색할 필요를 느꼈다. 3세기 중반에 발생한 야만족의 침공은 한동안 제국의 존립을 위협했고, 산발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혹한 박해가 가해졌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 치하의 대 박해는 기간도 긴 데다가 훨씬 더 체계적이고 가혹했다. 박해는 기독교 내부의 분열이라는 불행한 유산을 남겼다. 특히 북아프리카에서도 도나투스파가 7세기에 이슬람교의 침공을 받을 때까지 가톡릭 형제들과 첨예하게 대립한 상태로 공존했다.

334 대 그레고리우스 때 교황의 사역이 콘스탄티노플의 옛 제국보다 서방 세계의 이민족들에게 더 치중해 있다는 점이 인정되면서, 그리스 교회와 라틴 교회 사이의 간격은 갈수록 넓어졌다. 동방과 서방 사이의 긴방감은 교회사의 초기 단계로 거슬러 올라가면, 두 교회가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사회와 교회 관습도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서로간의 이해도 진척되지 못했다. 하지만 두 교회의 관계를 특히 더 어렵게 만든 원인은 몇 차례에 걸쳐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하지 못한 데 있었다.

335 동방 교회들이 밖으로는 이슬람 정복의 타격에 직면하고 안으로는 화상 사용의 적법성을 둘러싼 논쟁에 휘말릴 당시에, 로마의 교황들은 눈을 서쪽으로 돌렸다. 동방 교회가 겪은 이 사건들은 교회사에 또 다른 한 획을 그었으며, 교부들의 시대가 대개 서방에서는 대 그레고리우스로, 동방에서는 다마스쿠스의 요한으로 끝나는 것으로 간주하는 관습도 그런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 뒤로는 동방과 서방의 기독교 세계의 역사를 마치 하나의 이야기인 것처럼 쓰기가 훨씬 더 어려워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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