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사 | 25 토마스 아퀴나스, 보편개념실재론의 의의, 사상사에서의 방법론적 전환


세상의 모든 철학 - 10점
로버트 솔로몬 외 지음, 박창호 옮김/이론과실천


2012.8 강의
25강: 토마스 아퀴나스, 보편개념실재론의 의의, 사상사에서의 방법론적 전환: 한 사례로서의 소크라테스(Phaidōn읽기) 
26강: 송명이학(宋明理學)의 성립 배경: 유교의 체제교학화(體制敎學化), 삼교일치론(三敎一致論)
27강: 사대부(士大夫)와 남송도학운동(南宋道學運動), 주희(朱熹)와 사서(四書), 체제교학으로서의 주자학(朱子學)
28강: 송명이학의 형이상학(性卽理, 天命之謂性), 조선 성리학의 전개, 전승된 정신사적 유산


20120803 25강: 토마스 아퀴나스, 보편개념실재론의 의의, 사상사에서의 방법론적 전환: 한 사례로서의 소크라테스(Phaidōn읽기) 

1) 토마스 아퀴나스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이성을 통한 신앙이 완성되었음.

이성의 영역으로 알 수 있는 영역은 자연의 세계, 신앙의 영역으로 알 수 있는 영역은 초자연적 세계
이 둘을 어떻게 해야 통합해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 12세기 신학자, 철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핵심적인 문제의식
채택된 철학체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

자연세계와 초자연세계
이성으로 자연세계를 연구 - 이 세계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신이 창조한 것. 자연신학의 체계가 성립
신앙은 초자연적 세계, 계시를 통해 이해될 수 있다.
토마스 주의(Thomism,토미즘) - 가톨릭의 정통교리로 자리를 잡게 됨.
 
토마스 아퀴나스의 다섯 가지 우주론적 신 존재증명
1.운동을 통한 증명 (via ex motu).
2.능동 원인을 통한 증명 (via ex causa efficientis).
3.우연적인 것과 필연적인 것을 통한 증명 (via ex possibilii et necessario).
4.사물들이 드러내는 완전함의 등급에 의한 증명 (via ex gradu rei).
5.목적론적 증명 혹은 사물의 지배를 통한 증명 (via ex fine sive ex gubernatione rerum).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어떤 목적에 따라(혹은 목적을 향해) 활동한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거의 항상 그것에게 최상의 결과를 가져오는 방식으로 활동하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목적에 따라(혹은 목적을 향해) 활동하는 것은 지적인 능력을 부여받음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인식하고 그 목적에 따라     활동하거나, 이런 지적인 능력을 부여받지 못한 경우 지적인 능력을 가진 것이 그들에게 각각 목적을 정해주고 그에 따라 활동하도록 질서를 갖게 됨으로써 목적에 따라(혹은 목적을 향해) 활동하게 된다. .
그러므로 모든 사물들을 목적에 따라(혹은 목적을 향해) 활동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지적인 능력을 부여하거나 혹은 목적을 정해주고 이들을 이끎으로써 목적에 부합하는 질서를 통해 활동하도록 만드는 어떤 지적인 존재(aliquid intelligens)가 존재해야 한다. 이 존재가 신이다.

목적론적 신 존재증명
정교하게 잘 만들어진 세상. 이 정교하고 아름다운 세계의 창조자이며 설계자인 신이 있을 수 밖에 없다.
> 정교하게 잘 만들어지고 그것이 목적이 있다고 해서 설계자가 있다고 할 수 없다.
핵심적인 내용은 아무리 자연신학을 가지고 잘 설명한다고 해도 계시로 올라설 수 없다. 단절이 있다.
신앙의 영역은 신앙이고, 이성의 영역은 이성일 뿐이다. 이성과 신앙은 통합되지 않는다.

의심자 도마 
요한복음 14:5 "주님, 저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자 토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0:29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 도마는 확실하고 눈에 보이는 증거를 요구. 팩트를 요구함. 
가치(계시)와 사실(팩트)

"도둑질을 하면 감옥에 간다." (팩트)
팩트를 아무리 모아도 "도둑질을 하면 나쁜짓이다" 를 이끌어 낼 수 없다.
좋다, 나쁘다의 도덕적판단, 가치판단을 이끌어 낼수 없다.
사실로부터 당위를 이끌어 낼 수 없다. 믿음의 영역은 팩트에서 나오지 않는다.

칸트: 지성의 모든 종합적 원칙은 내재적으로 사용되는데 최고 존재(신)의 인식을 위해서는 이러한 원칙의 초월적 사용이 요구된다. 하지만 우리의 지성은 이러한 초월적 사용을 위한 아무런 장비도 갖추고 있지 못하다. 
> 지성의 모든 종합적 원칙은 내재적으로 사용되는데 > 인간 지성이 뭔가를 안다고 할 때는 감각 경험에 근거하여 사용되는데
> 우주론적 신존재 증명에 대한 비판. 칸트 이후로는 신학자들이 더이상 신을 알 수 있다고 말하지 않음. 
자연신학도 폐기되고 과학의 영역으로 넘어감. 칸트에게 신은 증명할 것이 아니라 전제 해야하는 명제

순수이성비판 서문.
감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며, 오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사유되지 않을 것이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 감성 - 감각을 뜻함, 직관(intution) - 무방비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감각 데이터
직관이라는 단어가 고도의 신적인 인식의 개념으로 쓰인 것은 쉘링때부터, 헤겔, 딜타이


* 안셀무스와 아퀴나스의 보편개념 실재론
안셀무스 - 신은 완전한 존재다. 완전한 존재는 실제로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신존재증명)
> 보편 개념 실제론. 이와 반대는 보편개념 명칭론 (일반적인 명칭은 유명론)
> 신이라는 자리에 정의를 집어 넣으면.. (정의도 보편 개념)

보편 개념 실제론은 우리의 상식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똑바로 살아라"라고 말할 때 "똑바름"에 대해 따져 묻게 된다.
근대인들은 궁극적으로 모두가 합의 할 수 있는 "똑바름"이 없다고 생각하므로, 법에 의존하게 된다. 법실증주의.
똑바름의 문제는 개념의 문제, 팩트의 얘기가 아니라 가치의 문제.
> 제도적인 실정성. 법적 실정성에 호소하게 된다. social bond 사회적 연대, social capital 사회적 자본. 이런 것들에 의해 해결이 나지 않고, 법실증주의로 가게 된다. 
> 법실증주의라는 것은 하나의 약속. 전 국민이 받아들일 정도만큼 보편화가 이루어질 때 실제로 현실세계에 있는 팩트에서 끌어낸 것은 아니지만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근거해서 행동하게 되면.. 그것은 "있는 것"
황금율이라고 부르는 보편적인 개념들이 있다. 즉, 가치의 문제들이 있다.
> 이성적으로 따져 물으면 보편 개념은 실제하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상 보편 개념이 실제한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으면 도덕적 행위가 불가능해짐. 직관적으로라도 전제하지 않으면 일상생활의 규범, 즉 법실증주의 자체도 궁극적인 정초로 삼기가 어려움.
> 한국사회에서 논증이 벌어졌는데 끝없이 대립만 일어나는 이유는 올바름의 개념이 합의되지 않았기 때문. 개념 실제론이 가진 문제점.
> 올바름, 아름다움, 착함 이런 보편 개념이 필요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논증해서 내놓은 사람이 플라톤.
>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를 가지고 신앙의 대상과 이성의 대상을 결합시키려고 했다. 결국은 불가능했다. 그 이유는 신앙의 영역에 있는 것들은 이성적인 논증이 안된다. 왜? 신앙의 영역에 있는 것들은 전제해야 하는 것, 깔고 들어가야 하는 것. 믿음의 영역
> 플라톤: 보편편적인 개념, 형상(eidos)은 우리의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 우리가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 변화하고 우연적인 영역을 넘어서 있다. 보편개념 실제론이라는 말로 중세시대에 다시 등장한 것. 다시 말해서 초월적 형상 실제론이 요구될 수 밖에 없다.
>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한 것: 신에 관한 것은 플라톤의 초월적인 형상 초월론이 사용되고, 자연세계에 관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내재론. 이것이 결국 보편개념 실제론과 명칭론으로 이어짐.
형상초월론은 '신'에 대하여, 형상내재론은 '자연'에 대하여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 이성은 자연세계를 탐구하는 힘이기도 하지만 초월적 형상을 직관하는 힘이기도 함.

칸트 <실천이성비판> 신은 실천이성의 요청이다.
신은 증명할 것이 아니라 전제해야하는 명제


2) 송명이학의 연구
미조구치 유조 계열의 중국 사상사 설명 방식에 의존.

송명이학이 성립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으로 생각해야되는 문제는 한·당과 같은 전 제국 시기에서 송·명과 같은 후 제국시로 넘어가는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해야 함. 즉, 철학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시대적인 상황에 대한 일종의 response(반응)으로 등장하는 것이기 때문.
새로운 문제상황으로서의 현실이 등장 할때 가장 먼저하는 것은 상황을 해명(이해)해야함. 이해가 된다음에 변혁. 이해와 변혁.
칼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새로운 문제 상황으로서의 자본주의 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저작.

방법론적 전환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1. 고전 텍스트를 읽고 재해석하는 것 2. 누군가가 나타나서 고전 텍스트를 쓰는 것
루소의 에밀이 등장했을 때는 고전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고전이 된 것. 새로운 고전을 만들어 냈다.

* 소크라테스의 방법론적 전환
<파이돈> 96a-100d
나는 사람들이 자연에 관한 탐구(peri physeōs historia)로 일컫는 바로 그 지혜를 놀라울 만큼이나 열망했네. 왜냐하면 모든 것의 원인들(aitiai)을 안다는 것이, 즉 무엇으로 해서 각각의 것이 생기며 무엇으로 해서 소멸하고 무엇으로 해서 있는지를 안다는 것이 내게는 대단한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지… 
 >> 자연에 관한 탐구 - nature 라는 단어는 자연에 탐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본성에 대한 탐구이기도 함.
물리적 세계에 대한 탐구, 만물의 본성에 관한 탐구 2가지 의미가 있음.

우리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피인가, 공기인가, 아니면 불인가? 또는 이것들 중의 그 어느 것도 아니고, 뇌가 듣거나 보거나 냄새를 맡는 감각적 지각들을 제공하여, 다시 이것들에서 기억(mnēmē)과 판단(의견: doxa)이 생기는 반면에, 기억과 판단(의견)이 확고함을 얻음으로써, 이런 식으로 앎(인식:epistēmē)이 성립하는 것인가?
>> 물리적 세계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 감각 데이터로부터 기억과 의견이 생기고, 그 기억과 의견이 거듭되어서 앎이 생겨남. 일반적인 자연에 대한 탐구 과정

언젠가 나는… 아낙사고라스가 지은 것이라는 책의 구절을 읽는 것을 들었는데, 그건 모든 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ho diakosmōn)이며 그것들의 원인으로 되는 것은 결국 정신(지성: nous)이라 주장하는 것이었네. 바로 이 원인에 대해 나는 반가워했으며 정신(지성)이 모든 것의 원인으로 되는 것이라는 건 어느 면에서는 잘 된 일로 내게는 여겨졌네. 그리고 나는… 질서를 지어주는 정신(지성)은 모든 것에 질서를 지어주고(kosmein) 각각의 것이 최선의 상태에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자리잡게 해준다고 생각했네.
>> 그 당시 아낙사고라스가 고전으로 읽혔다는 것을 알 수 있음.
>> 아낙사고라스는 nous를 말하면서 nous가 원인이다,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물리적 자연의 질서를 부여하는 뜻으로 썼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낙사고라스의 텍스트를 비판, 재해석하면서 nous 개념을 재규정. 
>> 질서를 지어주는 정신(지성)은 모든 것에 질서를 지어주고(kosmein), → 1.kosmein 하고,  각각의 것이 최선의 상태에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자리잡게 해준다고 생각했네. → 2. 최선의 상태로 자리를 잡게 함. 
>> nous 라고 하는 것은 자연의 질서를 부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가치의 개념도 있어야 한다. 그진정한 원인(aitia)이라는 개념을 달리 쓰는 것.

나는 그가 우선 지구(hē gē)가 평평한지 아니면 둥근지를 내게 말해줄 것이라 생각했으며, 그걸 말해 줄 때는, 더 나은 쪽을 말해주고서는 지구가 그와 같은 것인 것이 왜 더 나은지를 또한 말해주어서, 그 원인(aitia)과 필연성(anankē)을 덧붙여서 설명해줄 것으로 생각했네… 나는 이 기대들을 아무리 큰 대가를 받을지라도 단념할 수가 없었거니와… 이는 가장 좋은 것(to beltiston)과 한결 못한 것(to kheiron)을 되도록 빨리 알기 위해서였네… 
>> nous 라고 하는 이것은 물리적인 것에 대한 설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다시말해서 아낙사고라스는 가장 좋은 것과 한결 못한 것을 알게해주지는 않는다. 즉, 자연철학에서 인간철학으로의 전환이 여기서 일어난다. nous라는 개념을 자연철학에만 쓰면 안된다. 방법론적 전환
소크라테스는 아낙사고라스가 물질적인 원인과 참된원인(정신적인 원인)을 구별하지 않았다고 말함.

이 굉장한 기대에서 나는 내침을 당했네… 그 사람이 정신(지성: nous)을 전혀 활용하지도 않고, 또한 사물들에 대한 질서 부여(diakosmein)와 관련된 어떤 원인들을 그것에는 돌리지 않으면서도, 
>> 정신적인 원인을 말함.

공기와 에테르, 물 그리고 그밖의 여러 가지 이상한 것들을 원인으로 주장하는 걸 보게 되었기 때문이네… 
>> 물질적인 조건들

내가 자네들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과 관련해서도 이와 같은 또 다른 원인들을 말하려 드네. 소리와 공기, 청각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수없이 많은 이런 유의 것들을 그 원인으로 주장하면서도, 참된 원인들을 말하는 것은 소홀히 하네.
내가 행하는 것들을 이것들 때문에 행하며, 또한 그것들을 지성에 의해서 하지만, 가장 좋은 것의 선택(tou beltistou hairesis)에 의해서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건, 이건 몹시 그리고 아주 경솔한 주장일 게야. 
>> 가장 좋은 것의 선택 → 참된 원인, 가치 세계, 도덕 세계가 발견이 됨.

왜냐하면 그건 진짜 원인과 결코 원인일 수 없는 것이 별개의 것임을 구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네. 내가 보기엔, 바로 이 뒤엣것을 많은 사람이… 엉뚱한 이름을 이용하여, 바로 원인으로 일컫는 것 같아.
>> 여기까지가 소크라테스에 의해서 아낙사고라스를 비판한 부분

나는 이 원인을 얻지 못하고 말았기에… 내가 그 원인의 탐구를 위한 차선의 방법을 어떻게 수행했는지를… 내가 보여 주는 걸 바라는가? … 
>> 차선의 방법 →  간접적 방법, "내가 굉장히 노력했다네"의 뜻.
우리들은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 물을 때 물리적인 원인, 물질적인 원인, 환경적인 원인 이런 것들을 원인으로 본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조건에 불과하고, 초월적인 형상들이 원인이라고 봄. 즉, 선의 이데아 이것이 궁극적인 원인
최선의 상태로 자리 잡으려면 최선을 알아야 하는데, 최선이라고 하는 것, 다시 말해서 초월적 형상, 초월적 이데아들을 알아내는 방법을 자신이 개발했다는 것.
>> 고전 텍스트를 솔질하듯이 꼼꼼하게 읽어야 현실도 잘 읽을 수 있다. 고전 텍스트를 읽는 법을 배워서 현실을 읽는 법을 배운다.

나 또한 그와 같은 유의 것을 생각하게 되었으니, 육안으로 사물들(pragmata)을 바라보고 각각의 감각(aisthēsis)들에 의해서 그것들을 파악하려고 시도하다가, 나의 혼(psychē)이 아주 눈멀어버리지나 않을까 두려웠네. 
>> 자신도 경험론적 방법을 해봤다. 눈먼다 → 이성이 마비되었다. 이성에 의한 이해 또는 지성에 의한 이해는 할 수 없고 오로지 감각적 지각에 의존해서만 사물에 접근할 수 밖에 없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내게는 로고스들(logoi)에 의지하여 이것들 속에서, 존재하는 것들(있는 것들: ta onta)의 진리(진실: alētheia)를 고찰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네.
>> 이론적인 탐구에 의해서, 의미규정을 통해서, 대화를 통해서 →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에 대한 규정.
정합설: 앞뒤의 말이 맞으면 진리로 인정할 수 있다. 정의주의(정의를 내린다)라고도 함.

그야 어쨌든 나는 이런 식으로 시작했네. 나는 그때마다 가장 건실한 것으로 내가 판단하는 것을 원칙(logos)으로 가정하고서(삼고서: hypothemenos), 이와 합치하는 것으로 내게 생각되는 것들은, 그것들이 원인에 관련된 것이든 또는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에 관련된 것이든 간에, 나는 참된 것들인 걸로 간주하되, 그렇지 않은 것들은 참된 것들이 아닌 걸로 간주하네…
>> 소크라테스의 대화법. 즉, 정의주의의 방식

이건 전혀 새로운 게 아니고, 다른 때도 늘 그랬지만 이미 지난 논의에서도 끊임없이 말해 왔던 바로 그것들일세… 
>> 소크라테스가 늘 사용해왔던 대화법이다. 정합적인 논의 방식

아름다운 무엇인가가 그것 자체로(auto kath’ hauto) 존재한다(einai)고… 가정하고서 말일세.
>> 지금까지의 얘기는 가장 건실한 것으로 내가 판단한 것을 원칙으로 가정하여, 이것이 정합적이면 참이라고 하자라고 한 것. 그런데 문제는 가정한 것이 참이 아닐 경우가 한계가 있다. 즉, 논의가 벽에 부딪치면..
아름다운 무엇인가가 그것 자체로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  auto kath’ hauto, 아름다움, 좋음, 올바름, 똑바름 자체를 제일 바닥에 깔고 들어감. 제1 전제로는 함. 정의주의와 직관주의가 모두 들어가 있다.

모든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움(to kalon)으로 해서라는 건 자신있게 단언하는 바이기 때문일세.
>> 단언한다. → 그 앞에 증명이 없다.
>>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움을 나눠 가진 것.

** 아낙사고라스가 말한 nous 가 여기까지 오면 초월적인 형상을 직관하는 탁월한 힘으로 바뀐다. 
nous라는 아낙사고라스에서 단어가 나왔지만 충분히 전개되지 못했음을 발견한 소크라테스는 nous 개념을 가지고 초월적인 형상에 대한 직관하는 힘으로 전환한다. 이것이 소크라테스의 방법론적 전환.

** 이러한 방법론적 전환이 유가에서도 일어났다.
<논어> 술이편
24. 子以四敎하시니 文行忠信이니라 
      자이사교하시니 문행충신이니라 
공자는 네 가지를 가르쳤다. 곧, 고전텍스트 읽기와 윤리적인 행동과 politic,정치학과 rhetoric, 수사학이다.
>> 학파에 따라서 문,행,충 중 어느 것이 중요한 것인이 달라질 수 있다.

<논어> 옹야편
25. 子曰 君子 博學於文이요 約之以禮면 亦可以弗畔矣夫인저
      자왈 군자 박학어문이요 약지이례면 역가이불반의부인저
공자가 말씀하셨다. 군자가 문헌에서 널리 배우고, 예로 매듭을 지어야 비로소 어긋나지 않는다
>> 문헌에서 널리 배우고 → 고전텍스트를 읽는다, 예로 매듭을 지어야 →  윤리적인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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