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계 | 03 매체, 물음이 없는 단순한 세상, 지상과 천국, 두 세계의 갈등


필사본이 있어서 별도로 강의 내용을 요약하지 않았다.



강유원 "책과 세계" 강의노트 3 | 2004


인용된 책들:

나카자와 신이치: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움베르토 에코: 해석의 한계

움베르트 에코: 푸코의 진자

강유원: 근대 실천 철학 연구

에른스트 카시러: 르네상스 철학에서의 개체와 우주

자크 르 고프: 중세의 지식인들



제 3 강  :  매체, 물음이 없는 단순한 세상, 지상과 천국, 두 세계의 갈등 2004. 7. 20.


지금까지는 주로 개념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오늘은 방법에 대해 얘기하겠다. 방법은 굉장히 중요하다. 

학을 한다고 할 때에는 학의 출발점, 즉 학의 최소 단위는 개념이다. 개념을 풀어내면 명제가 되고, 이를 논리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것, 이것이 논리학이다. 논리학적으로 전개하는 것은 '논리야 놀자' 같은 책을 마스터하면 초등학생들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논리학은 형식적 측면이며 기능일 뿐 학이 아니다. 학을 하는 사람은 논리학 뿐만 아니라 고유의 방법(Methode)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방법 외에도 학은 학문에 대한 목적, 목적 안에 있는 의도(현실적으로 구현된 목적) 등으로 이루어져있다. 따라서 결과물이 같지만 결과에 이른 방법이 달랐다면 학파가 다른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꽃놀이를 가서 꽃을 자세히 들여다 본 후에 [야, 꽃 속에 우주가 있네]라고 말하는 것과, 생물학자가 30년 동안 꽃에 대해 탐구한 후에 [꽃 속에 우주가 있다]하고 내린 결론은 같을 수가 있다. 자연에 대해 궁금해하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같은 결론을 낸다해도 양자는 다른 방법으로 결론에 이른 것이다. 우리는 그저 취미가일 뿐이요 후자를 학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또 절간에 가서 평생을 수련한 성철 스님이 "산은 산이요, 물이 물이다."라고 한 말과 내가 그저 산과 물을 보며 "산이네, 물이네."하는 것은 말은 똑같지만 전혀 다른 것이다.


* 고전주의

"수학적 사유를 신봉하는 이들은 모호한 것, 운동하는 것을 참된 본질로서 인정하지 않는다. 플라톤의 지적 선구자 중의 한 사람인 파르메니데스는 일자(一者)만을 실체로 인정했으며, 또 다른 선구자인 피타고라스의 교단은 그 자체가 신비주의적인 분위기를 가졌으면서도 신비한 것을 배척하였다. 피타고라스 교단은 남성만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들에게는 극단적인 금욕과 사고의 순수성이 요구되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실제생활에서도 이른바 '매개' 기능을 갖는, 즉 두 세계에 걸쳐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철저하게 배제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콩을 먹지 말라는 지침이었다. 콩은 모든 신화적 사유체계 속에서 모호한 것으로 나타나며, 그런 까닭에 피타고라스는 콩을 악마적인 것으로 여겼다."(p33)


위의 글은 나카자와 신이치의 <<신화, 인류 태고의 철학>> (동아시아)을 참조하여 서술했다. 신이치는 이어서 이런 매개가 서양사상에서 계속 배척되어 왔는데 근대 이후 헤겔에서 재발견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헤겔에서 재발견 되기 전에 이미 발견된 바 있다. 


p.43 에 나오는 '모두스 뽀넨스'(modus ponens) : 합리주의, 이성적 분별

이게 로마의 시대정신이다.


"신비주의는 어지럽고 고통스러운 세상에 등장하는 반지성주의의 최절정이다. 신비주의는 이성적 분별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무차별로 통합시키고자 하는 시도이다."(p59)

신비주의는 이성적 분별(-> modus ponens)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무차별로 통합시킨다.


p.60 '신성한 무지'(->신비주의가 구체적으로 나타난 형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쓰기 위해 학적으로 천착한 책은 리비우스의 『로마사』였다. 마키아벨리가 『로마사』에 대해 주석을 달아 쓴 책이 있는데 이것이 마키아벨리 사상의 핵심이다. 그는 여기서 로마의 [단순한 실천]을 끄집어 내고자 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결론이고 방법은 '주석달기'였던 것이다.

학자를 볼 때 어떻게 공부했느냐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으로 고전주의를 규정할 것인가?

고전주의하면 떠오르는 것은? 질서, 수학적 조화, Kanon(正展, 규범), 영원 불변의 것... 

이런 것들을 다 묶어 한 단어로 말하면 Ideal(아이디얼, 理想)이다. 만일 누가 고전주의자면 그는 idealist요 관념론자요 이상주의자다.


우리가 고전주의하면 떠올리는 요소들을 생각해보면 고전주의에 입각한 이들은 매우 피곤하게 산 사람들이다. 인류의 역사를 보아도 고전주의는 매우 짧은 기간 동안에 나타났다. 

ideal에 대립되는 것은 현실이다. 골수 고전주의자들은 현실 정치 안에서는 파시스트가 된다. 깔끔한 질서를 현실 정치에 실현하고자 하다보니 파시스트가 된다. 말 안 듣는 놈들을 가스실에 넣어 죽이고 묻어 버린다. 물론 파시즘은 낭만주의적 열정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질서를 현실에 강요한다는 점에서 고전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상Sollen(졸렌, 마땅히 그러해야 할 바)과 현실Sein(자인, 지금 그러한 바) 사이에서 계속 갈등하게 된다. 일테면 내 얼굴이 너무 못생겨서 성형외과에 가서 "장동건처럼 고쳐 주세요"라고 얘기할 때 '장동건'이 바로 Kanon이 된다. 

극단적으로 고전주의적 이상을 가진 이들은 그렇게 한다. 그런데 병원에 가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즉 현실을 이상에 맞출 때는 돈이 필요한 법인데 이를 매우 극단적인 방법으로 해버리면 파시스트가 된다. 이는 현실과 이상을 매개하는 문제로 철학적 문제의 하나이다. 어.떻.게. 존재를 당위에 맞출 것인가. 


피타고라스는 매개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고 따라서 독단론자이다. 

누구든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ideal을 가지고 있고 이를 현실 안에서 어떻게 실현하고 연결시킬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이를 매개하는데 있어 고민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으니 그들이 율리시스 카이사르와 마키아벨리이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혼란한 현실은 사악한 것도 선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극복해야 할 현실일 뿐이었다. 이런 현실 앞에서 도덕을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위선이다. 차라리 컨텍스트가 철저히 반영된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것이 정직한 지식인이며, 마키아벨리가 걸어간 길도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p65-66)

마키아벨리는 아예 가치판단을 안한다. 가치판단에는 이상이 필요한데 마키아벨리는 오직 현실만을 따진다.


철학에는 몇 가지 조류들이 있다. 플라톤에게 끼친 피타고라스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플라톤처럼 현실을 그림자로 보고 이데아를 동경Sehnsucht 하는 것은 매개를 끊는 것이요 그것이 순수주의이다. 그래서 플라톤 철학에서 현실과 이상 간의 매개는 고작 想起 Recollection이다. 다 끊어져 있는데 느닷없이 상기가 들어갈 뿐이다. 플라톤의 인식론을 따르자면 우리가 내공이 엄청 쌓여있지 않으면 이데아의 세계로 갈 수 없다. 평생 가봐야 깨달을 수 있을 지 없을 지 알 수 없다. 그래서 플라톤의 철학은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준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플라톤 공부를 안했다. 공부할수록 짜증나니까 단순하게 살았다. 그저 서커스 구경 가고 속주 여행 다니고 별장에 가서 놀았다. 플라톤 철학은 서구 이상주의가 갈 때까지 간 성과물이기 때문일 게다.


그래서 이 사람들에게는 뚜렷하게 이상과 현실 사이에 경계가 있다. 이들은 두 세계에 속하는 것을 싫어했다.


* horos (경계, 말뚝박기)

매개를 허락하지 않는 것, 경계를 뚜렷하게 하는 것, 즉 말뚝박기를 잘 하는 사람들이 있다. 철학자들 중 흄, 칸트, 비트겐슈타인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여기에 속하는 것은 여기에, 저기에 속하는 것은 저기에 속한다고 말한다. 칸트는 物自체 Ding an sich의 세계와 인간의 인식이 가능한 세계인 현상의 세계, 이 두 세계를 완전히 나누어 버렸다. 이는 자신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처럼 얘기해서는 안된다는 Hume으로 인해 독단의 잠에서 깨어난 Kant의 성과였다. 이렇게 해서 나온 칸트의 저작이 『순수이성 비판』이다. 여기서 비판Kritik은 각자의 나와바리 즉 moira를 정해주는 것이다. 칸트는 결코 두 세계를 매개하려 하지 않는다. 신마저도 '요청'할 뿐 매개하려 들지 않는다.


서양철학의 주류는, 늘 강조하지만, Platon에서 시작하여 Hume - Kant - Wittgenstein(비트겐슈타인) 등이다. 즉 모두스 뽀넨스에 충실한 이들이다. 이를테면 케니가 쓴 『서양철학사』는 서양철학의 주류만을 강조하고 힐쉬베르거의 책은 오히려 주류를 무시한다.


경계를 지워버리는 학자들이 있다. Hegel은 매개를 살리는 혹은 경계를 지우는 철학자이다. 뚜렷한 경계를 세운 Kant와는 다르다.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은 물자체와 현상계가 다르다고 말한다. 『실천이성 비판』은 『순수이성 비판』과 완전히 다른 얘기다. 『순수이성 비판』을 읽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 『실천이성 비판』은 『순수이성 비판』에서 모른다고 해버렸던 물자체를 요청한다. 그래서 양자를 엮기 위한 제 3의 저서 『판단력 비판』이 나온다. 그러나 양자를 엮지 못한 것이 칸트의 한계라고 하르트만이 전한다. 이 미해결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 칸트의 뒤를 이은 독일 관념론자들의 문제였다.


헤겔 『정신현상학』은 감각적 확실성에서 출발하여 절대적 지에 이른다. 절대적 지는 어찌 보면 신이다. 칸트식으로 말해보면 감각적 확실성은 현상이고 절대적 지는 물자체다. 이 상이한 것이 헤겔의 철학에서는 한 통 안에 속해 있다. 즉 내가 절대지를 알 수 있을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래서 핀들레이는 "헤겔의 철학은 그 체계 안에서 보면 모두 진리이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물론 '그 체계를 벗어나면 모두 거짓으로 보인다'는 것을 덧붙인다. 우리가 어떻게 절대적 지에 이를 수 있겠는가, 말도 안된다. 우리는 오성의 단계로 가다 죽는다. 헤겔은 『논리학』, 『엔치클로페디』 등에서 매개를 통해 모든 경계를 허물어 버렸다. 그래서 Hegel은 절대로 고전주의자가 아니요 낭만주의자다.


이처럼 철학에는 경계를 중요시 하는 사람들이 있고 매개를 중요시 하는 사람들이 있다.


* modus(모두스, 경계) vs Hermes(헤르메스, 매개)

서양학을 방법을 기준으로 나누면 경계적 방법이냐 매개적 방법이냐로 나눌 수 있다. 송대방의 『헤르메스의 기둥』을 읽어보면 서양인들이 헤르메스에 대해 가진 생각을 알 수 있다. 더 잘 알려주는 책은 에코의 『푸코의 진자』이다. 신비주의 사상을 다룬 것이다. modus는 이성적 분별 쪽이고 Hermes는 경계를 뭉개는 쪽이다. 


움베르토 에코, 『해석의 한계』 (열린책들), 제2장 '신비주의적 기호 현상의 양상'을 보자.

"그리하여 신비의 비합리주의는, 한편으로는 신비론자와 연금술사, 또 한편으로는 괴테에서 네르발과 예이츠, 쉘링에서 폰 바이더, 하이데거에서 융에 이르는 시인과 철학자들의 품 속으로 망명한다. 그리고 비평의 포스트모던적 개념에서 또한 의미의 지속적인 표류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은가?"(p64)


에코는 기본적으로 합리주의자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가 결코 아니다. 헤르메스주의 - 기원 2세기 경 헬레니즘 세계를 뒤엎었던 사상으로 로마의 전통적인 modus ponens에 대비된다. 모두스 뽀넨스로서의 로마 vs 헤르메스로서의 헬레니즘 세계라는 구도가 여기서 나온다. 그러니 매개의 사상은 헤겔이 아니라 이미 2세기에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교부신학이 그리스 합리주의와 섭리적인 역사 방향의 개념을 구상한다면, 그노시스주의는 시간과 역사를 향하여 거부의 신드롬을 궁리한다... 그노시스적 인간은 초인으로 변해간다."(p65)


교부신학(아우구스티누스)은 그리스 합리주의와 섭리적인 역사 방향(불가역적, 돌이킬 수 없는)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서 일직선적 역사관이 성립된다. 모두스 뽀넨스에 입각한 결과인 것이다. 교부신학이 개념을 구성한다면 그노시스주의(헤르메스주의)는 심리적 증상인 신드롬(심리적 증상)을 궁리한다. 그노시스적 인간은 초인(니체를 상기시킨다)으로 변해간다. 이를 통해 에코는 니체 역시 그노시스주의자임을 암시한다. 니체를 본 받은 철학자는 들뢰즈나 라깡 같은 이들이다.


modus ponens는 전통적인 방법이다. 시간적 선후가 있고 합리적 분별이 있다. 이것이 없다면 논리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이들은 동일률과 모순률에 입각하여 사유한다. 


반면에 Hermes주의는 "시간과 역사를 향하여 거부의 신드롭을 궁리한다." 즉 시간을 거꾸로 돌린다. cause->effect가 아니라 effect가 다시 원인이 될 수 있다. 이를 독일 낭만주의라는 토대위에서 학적으로 성립시킨 사람이 바로 Hegel이다. 헤겔 철학은 modus ponens에 입각하여 사유할 수 없다. 그래서 원융회통(커다란 원에서 뭉쳐 만나진다)사상과 통하기도 한다. 원 안에 순환 체계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런 원을 그리며 쭈욱 가버리면 결국에는 초인이 된다. 선과 악을 넘어서 버리고 '선악의 피안'으로 간다. 이처럼 절대적 진리라는 결론이 같아도 방법이 다르면 같은 카테고리 안에 넣을 수 없다. 칸트와 헤겔이 같다고 해서는 안된다.


헤르메스적 그노시스적 사유에서는 '경계지우기'가 행해진다. 그런데 만일 헤르메스적인 방법, 즉 매개의 방법을 가지고 자본주의 시스템을 보려고 하면 제대로 볼 수가 없다. 마르크스는 브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경계를 확실히 세운, 모두스라는 방법을 택한 사상가이다.


마르크스는 과학적 사회주의를 학의 목적으로 삼는다. '과학적' -- 이게 모두스적인 것이다 -- 이라는 방법과 '사회주의'라는 목적으로써 자신의 학문적 아이덴티티를 규정한 것이다. 푸르동과 같은 공상적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의 차이점은 '사회주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방법론에 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푸르동이 목표는 같지만 조야하다고crude 평한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방법론적 전체주의를 수용했다. 동시에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은 거꾸로 서 있다"고 비판한다. 이는 헤겔의 철학이 신비주의적이라는 뜻이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헤겔의 변증법은 원인과 결과가 구별이 되지 않는다. 헤르메스적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헤겔의 방법론적 전체주의를 수용하면서도 신비주의적 요소를 배제하여 [역사적 방법(발생적-구조적)]을 제시해냈다. 헤겔은 방법론적 전체주의에서 시간을 일직선으로 놓지 않고 원으로 만들어 버렸으나 마르크스는 원을 직선으로 펴 낸 것이다. 원인과 결과가 전도되어있다는 신비주의를 털어내고 방법론적 전체주의를 끌어들인게 마르크스의 학적 방법론이다. 분명히 경계 세우기를 하는 모두스의 입장에 선 것이다. 


이처럼 방법의 중요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 누군가가 좌파라고 할 때에도 반자본, 비국가 등과 같은 결론만 볼 것이 아니라 그의 방법이 무엇인지도 반드시 보아야 한다. 그의 방법이 모두스 뽀넨스적인지 그노시스적인지 혹은 이도저도 아닌지를 따지지 않으면 안 된다.


좌파적 방법의 문제가 요즘 거론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따지지 않으면 두 가지 문제가 생긴다. 첫째로 마르크스에 있어서 중요한 당파성이 지워진다. 그러면 부르주아 경제학이 되어 버린다. 둘째로 마르크스를 비마르크스적으로, 또는 반마르크스적으로 읽는 일이 생긴다. 결국 같은 말이지만...


헤겔을 처음 공부하면 모든 경계를 지우고 우주론적 체계를 구성할 수 있다는 야망이 생긴다. 그러나 이를 비판한 마르크스를 읽으면 그의 신비주의적 요소를 알게 된다. 나의 저작 『근대 실천 철학 연구』 끝 부분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홈페이지 메뉴스크립에도 올려져 있다)


어쨌든 이렇게 함으로써 마르크스는 월시의 말처럼(『역사철학』) 사회과학자들을 위한 학문적 지침을 만든 것이다. 철학의 신비성을 없애고 낭만주의자들과 헤겔이라는 거대한 구름 속에서 전통적인 모두스 뽀넨스적 방법을 다시 끄집어 내었다. 오늘날 우리가 '마르크스로 돌아간다'고 말하려면 바로 이러한 모두스 뽀넨스적인 방법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방법은 경계지우기를 사용하면서 마르크스로 돌아가면, 프루동처럼 조야한 사회주의가 된다.


이처럼 우리가 누군가의 학문적 성과물을 볼 때 그가 어떤 방법을 통해 거기에 이르렀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자본주의 시스템안에 살면 누구나 반 자본적 태도를 가질 수 있다. 그렇다고 가진 자를 미워한 연쇄 살인범을 가리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만큼 방법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서양철학사를 읽어보면 철학자들의 결론이 모두 거기서 거기다. 그럼에도 이들을 나누는 이유는 그들의 학적 방법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어쩔 수 없겠지만...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쿠자누스하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신비주의자면서도 그 만큼 근대적인 학자도 없다. 쿠자누스에 관해서는 에른스트 카시러의 『르네상스 철학에서의 개체와 우주』(민음사)를 참조해야 한다. '중세철학' 하면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들어봤어도 쿠자누스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쿠자누스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무한자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신에 대한 인간의 종속적 관계가 폐기되고 인간의 지위가 격상된다. 개체성의 발견 곧 근대성이 시작된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은 우주보다는 연약한 존재지만 광대하고도 무한한 우주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인간은 위대하다.'고 했다. 이런 것이 바로 쿠자누스에서 연원하는 얘기이다.


그래서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를 근대적 사유에 있어 遠祖(먼 조상) 격으로 볼 수 있다. 철학자는 신을 파악해서 합리적인 논증을 구성한다. 이것이 예술가에 가서는 천재가 된다. 그래서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는 진리를 파악해서 진리를 표상하는 존재로서의 천재이다. 독일 낭만주의시대에도 천재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들은 별 볼 일 없는 천재다. 별 볼일 없는 천재와 별을 바라보는 천재를 구별하자.


다빈치는 manner와 양식Stil(style)을 구별해서 썼다. 전자는 우연적, 개인적인 성향이요 후자는 새로운 예술적 형식과 방법론을 모두 아우르는 것이다. 그래서 천재는 사태의 본질에 관여하여 이를 개념적으로 파악해서 구체적인 형상으로 구현한다. Stil 안에는 지적 파악을 구현하는 방법까지 들어간다. 방법! 또 나왔다. 그만큼 방법은 중요하다. 누군가가 히로뽕얼 백 대 맞고 모나리자를 그려낼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우연히 만들어낸 것이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르네상스적 천재는 Stil을 만들어낸 이들이요 낭만주의적 천재는 그저 manner를 만들어냈을 뿐이다.


"대략 12세기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이 지식인들은 ... 절정에 이른 것이다."(pp.57) 이것은 자크 르 고프, 『중세의 지식인들』을 참조한 것이다.


① "그러므로 중세 가톨릭의 입장에서는 당시에 재발견된 플라톤철학, 아리스토텔레스철학, 헬레니즘, 아랍철학 및 이교사상 등을 기독교 중심으로 종합하고 재정리할 절실한 필요가 있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은 바로 이러한 과제를 수행해낸 결과물인 것이다. 그의 사상은 어설픈 절충이 아니라, 기존의 모든 것을 분석하고 소화해낸 새로운 종합이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태도를 바탕으로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수용하되, 둘을 체계적으로 조화시킨 것이다"(p56) 이것은 김규영, 정의채, 『중세철학사』 (지학사)에서 해당 부분을 재정리한 것이다.

토마스아퀴나스는 종합의 철학을 했다. 분석과 종합을 적절하게 사용한 것은 아퀴나스의 의의이다.


② "토마스 아퀴나스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문턱에 살았다. 이미 중세적 사고방식은 해체되고 있었고, 교회는 점차 발전하는 자연과학과 상대해야 했다. 어떻게 하면 이 싸움을 피할 수 있을까? 토마스의 해결책은 '이성'과 '계시'를 아예 분리하여,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양자를 교차하지 않는 두 개의 동그라미로 나누어 버리는 거다."(진중권, 『미학 오딧세이 1』)


위의 ①과 ②는 완전히 다른 얘기이다. 

②는 거짓말이다. 문헌적 팩트에 근거한 말이 아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문턱에 살았다] -> 그는 중세의 절정에 있었다. 

[이미 중세적 사고방식은 해체되고 있었고, 교회는 점차 발전하는 자연과학과 상대해야 했다.] -> 아니었다, 중세적 사고방식은 종합되고 있었다. 자연과학이라고 불릴 만한 것은 없었다. 당시 교회의 적은 이단운동이었다. 그래서 이단에 대응하기 위해 도미니크 수도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도미니크 수도회에서 학자, 이단 심판관들이 많이 나온 것이다.

[토마스의 해결책은 이성과 계시를 아예 분리하여,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 아퀴나스의 해결책은 양자를 분석하여 종합하는 것이었다. 학적으로 그는 결코 양자를 분리하지 않았다.


②은 정확한 사실을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저 자기가 막연히 이해한 대로 쓴 것일 뿐이다. 그런데 이런 책이 많이 팔리고 있다. 독자야 모른다치고 글쓴이는 제대로 알고 있는걸까? 어쨌든 이는 지적 사기이며 한국 지식인 태반이 저지르는 작태이다. 이러한 책은 학적 결과물이라고 할 수 없다. 


* 인지적 부조화 이론

예수는 '여러분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마을을 한 바퀴 돌기도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예수 자신이 메시아인지 예수 역시 언젠가 올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는 아직도 판별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세 번도 더 돌았는데 사람의 아들은 오지 않았다. 여기서 바울로의 업적이 등장한다. [믿는 자가 많아지면 그것이 진리로 입증될 것이다]는 인지적 부조화 이론에 입각해 바울로는 예수를 메시아로 만들어 버렸다. 

많이 팔린 책이면 그게 진리가 되어 버리는 것도 이와 비슷한 거 같다. 마치 진리를 다수결로 결정하자는 것과 비슷하다. 어쨌든 어떤 책이든 논리적 정합성과 사실적 정확성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특히 지적 사기가 횡행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모두스와 매개, 각각의 학문의 방법론을 기억해두자.

다음주에는 근대 세계, 매체에 관한 얘기를 할 것이다. 

근대 자본주의는 철저하게 로마시대, 마키아벨리의 세속적 현실, 서구 저변에 놓인 약탈적 시스템, 다윈의 진화론, 토마스 홉스의 국가론, 데카르트 및 뉴튼의 기계론 등이 결합된 것으로 엄청나게 단단한 것이다. 인류 문명사를 살펴보면 이렇게 강력한, 통일된 체제가 없었다. 모든 것이 녹아 들어가 형성된 것으로 깨기 힘들거니와 사람이 본능처럼 가지고 있는 욕망에 호소하여 흡입력이 강하다. 그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2004.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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