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인문학 | 05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기


갈리아 원정기 - 10점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지음, 천병희 옮김/도서출판 숲


2012년 CBS 라디오에서 진행하였던 강유원 선생님의 '라디오 인문학' 강의를 녹음파일을 듣고 정리한다.
팟캐스트 주소: https://itunes.apple.com/kr/podcast/jumal-nyuseusyo-bagmyeong/id576954501



2013-05-25 30회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기" 1 

<갈리아 원정기>는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처럼 객관적인 역사서술을 목표로 한 책이 아니고 율리우스 카이사르 자신의 전공을 알리기 위해 쓴 것으로 1차 사료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당대 로마사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이 있어야 이해도 쉽게 될 수 있는 책이다.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시작한 작은 나라인데 지중해를 중심으로 해서 유럽, 아시아, 북아프리카, 오늘날 마그레브라고 불리는 지역까지도 지배했던 국가를 가르키는 말이기도 하고, 로마 문명이라고 해서 하나의 문명을 가르키는 말이기도 하다. 로마는 나라가 몰락했다고 해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문화유산을 남겨두고 있다.

문명이라는 말 자체가 영어로 civilization이고 이는 라틴어인 키비타스(Civitas, 도시)라는 말에서 나왔다. civilization 자체가 라틴어에서 나온것을 보면 문명은 이러 이러한 것을 갖춰야 한다는 것을 가르키는 것이기도 하다.


로마의 왕정기는 서기전 750~510년까지로 신화 시대에 가깝다.  그리고 서기전 510~27년이 공화정 시대이다. 공화정이라고 해서 오늘날 우리가 살고있는민주 공화정을 떠올려서는 안되고 원로원을 중심으로 하여 귀족들이 다스리던 시대이니 귀종 공화정. 서양에서는 공화정이라고 하면 프랑스혁명이전에는 온전한 의미에서의 공화정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런 다음에 서기전 27~476년까지, 500년정도가 서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은 그때부터 1000년정도 지속되어서 1453년에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멸망당했다. 로마가 동서로 분열되기전인 333년에 콘스탄티누스 1세가 수도를 비잔틴으로 옮겼기때문에 역사학자들은 동로마제국도 로마제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해서 묶어서 보면 서기전 750~1453년까지, 즉 2000년이 된다. 크게 유념해야 할 시기는 공화정 시기, 서로마, 동로마 제국.


<갈리아 원정기>의 저자인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서기전 100년 무렵 사람으로 공화정 말기 시대를 살았다. 

단어만을 보면 공화정에서 황제정으로 넘어가는 것이니 좋은 것에서 나쁜 것으로 간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역사 속에서는 선악이라고 하는 판단을 내리기 쉽지 않다. 카이사르는 일종의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가는 전환기를 살았고, 제정으로 변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카이사르이기도 하다. 브루투스를 비롯한 원로 의원들이 공화정에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인데 사람들이 흔히 이 시대에 카이사르하고 부르투스와 같은 사람들을 볼 때 공화정 말기 정치 지도자들의 권력투쟁, 그리고 카이사르는 나쁜놈, 부르투는 착한 놈 이렇게 단순화해서 얘기하는데 그런데 간단하게 생각할 수 없다. 로마 공화정 말기가 서기 133-27년 약 100년가까이 되는데 공화정 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많이 누적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라고도 볼 수도 있다. 고민을 많이 한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그 문제에 대해서 브루투스 공화정 지지파들이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카이사르가 태어났을 무렵이 서기전 100년 쯤인데 로마는 공화정의 형태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의 상황이었다. 로마의 공화정은 평민과 귀족의 세력 균형에 따라서 운영이 되었는데 공화정 말기에 들어서부터 귀족들은 여전히 부가 증가하고 번영을 누리던 반면 평민이라고 하면 농민인데 농민의 상당수가 몰락하여 토지를 팔아서 노예로 전락하는 것이 가속화되었다.


세력균형이라는 것은 경제적인 어떤 힘에 의해서 이루어 질 수 있었는데 그것이 깨지니까 세력 균형도 깨지게 되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생각했다. 깨진다는 것을 쉽게얘기하면 농지나 토지가 귀족들에게 몰리는 것. 귀족들은 농민들이 땅을 버리고 떠나니까 토지를 매입해서 노예를 이용하고 광대한 농장을 경영하기 시작했다(라티푼디움 Latifundium). 부의 원천이라고 하는 것이 토지에 있으니까 부익부빈익빈이 심각하게 되고, 농민들이 토지를 잃고 노예가 되니까 체제를 유지하는 근본적인 장치가 선거제도라든가 또는 징병제도인데 예전처럼 운영할 수 없게 되고 그에 따라 공하정이 붕괴 직전에 놓여있었다. 다시말해서 공화정의 근간을 이루는 제도는 붕괴되고 있는데 그것의 원인이 되는 토지 문제는 해결이 되지 않고 있고 이를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 토지소유와 같은 부의 원천을 둘러싼 싸움들이 사실은 큰 체제변화를 가져오는 단초들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라고 조건을 붙일 수는 없지만 역사를 읽어볼 때 토지 문제로 대규모로 변화가 일어나면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토지 이외의 것이 부의 원천이 되는 시기가 인류 역사에서 100년도 안됐기 때문이다.


로마 공화정 말기에 불어져서 나온 이 문제가 다시말해서 카이사르와 브루투스의 대립 문제는 거의 200년 전쯤인 포에니 전쟁에서 생겨난 변화가 누적되어 생겨난 문제로도 볼 수 있다.


포에니 전쟁이 100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그 동안에 군대에 복무했던 사람이 농민인데 전쟁이 너무 오래되다 보니까 농민들이 농사를 못짓고 토지가 황폐화되기 시작 했다. 그리고 전쟁이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니까 평민 지도자는 몰락하고 장군 지도자가 등장하면서 사실상 형식적으로는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이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군사 군주정의 조짐이 나타났다. 즉, 전쟁이 오래 계속되면 징병제도의 근간이 되는 농민이 몰락하고 정치적 야망을 가진 장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로마 공화정 말기는 내전의 세기라 불리기도 하는데 장군 지도자들인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같은 사람들이 독자적인 군단을 거느리면서 세력을 넓혀가고 서로 힘을 합하거나(삼두정치) 대립하기도 하고 누구나 이제 1인자가 되려고 했다. 그래서 이시기를 1인자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앞서 공화정 말기를 133년부터라고 했는데 이때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호민관으로 선출되었는데 토지개혁을 시도하다가 반대파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이러다 보니 대지주로 구성되어있는 원로원과 도시나 농촌에서 거주하는 하층민의 갈등이 폭발하여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전쟁을 멈추고 이 문제를 해결했으면 사실 로마가 제국이 되지 않고 공화정을 유지했을지도 모른다. 내전의 시대에 들어서부터 하층민이 완전히 힘을 잃어버린 상태되었는데 하층민의 불만을 흡수해서 자신의 세력으로 땡기는 사람이 바로 1인자들이다. 그러니까 사회 혁명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정치권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변질된 것. 어떤 나라에서든지 계층 간의 갈등이 극단적으로 일어난 시기가 있는데 그것이 사회개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몇몇 지도자 아래로 대중들이 몰려들어서 그 지도자의 세력을 키워주고 그 지도자가  유력한 정치지도자들 사이에 권력 투쟁을 벌이게 되고 그러면 대중은 다시 장기판의 졸의 처지가 되고 만다.


다음 시간부터 책을 읽도록 하겠다.




2013-06-01 31회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기" 2

* 군대의 사병화

군대가 국가의 무력인 경우는 얼마 안되었다. 로마가 세워지기 전에 혼란한 시대에는 대개 사병화된 무력이었고, 공화국 시기에는 국마의 무력이었다. 다시 사병화로 된 결정적인 계기 서기전 107년 가이우스 마리우스라는 정치 지도자가 군사 개혁을 실시한 것에서 연유한다. 개혁의 1차적인 이유는 본래 로마 군단병은 재산이 있는 사람만 지원할 수 있었는데 전쟁이 오래 계속 되니까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재산이 없는 사람도 군대에 지원할 수 있게 했다. 그러다 보니 없는 사람들이 형편에 따라서 군대 생활을 하면서야 먹고 살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각각 군단을 지휘하던 사람들이 없는 사람들을 계속 군인으로 쓰게 된 것. 이 당시에 로마가 지중해를 '우리의 바다'로 불렀다. 부국강병에 이르렀고 곧 군대가 늘어났다. 군대가 늘어나서 해외 영토를 계속 정복을 해야하니까 하층민이 많이 늘었다. 


로마는 군사국가가되었다. 펠로폰네서스 전쟁 당시 아테나이도 비슷한 길을 걸었던 것. 군국주의 제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대체로 자신들의 국민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전쟁을 치르고, 결국은 그러다보니 모든 자원을 군사적인 쪽으로만 쏟아붙는 현상들이 벌어지게 되었다.

제국주의로 가는 일반적인 패턴이 군사화이다. 특히 과거에는 전쟁도 경제활동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이런식으로 나라가 운영되어간 측면이 있다. 아테나이도 그랬고, 스파르타는 애초에 온 국민이 군인이었다. 로마도 공화정 국가였다가 제국으로 가기 위해 여기저기 침략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상비군이 필요하게 되는데 그런 저런 개혁에 덧붙여진 것이 마리우스의 군대 개혁이다.


마리우스는 전쟁의 역사에서는 중요하게 다뤄지는 사람으로, 마리우스가 없었으면 카이사르가 없었다고 할 정도로 전쟁의 역사라는 측면만 떼어서 말할 때는 중요한 사람이다. 이 사람으로 인해서 로마가 아주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되었고, 이 후 군대의 역사에도 기여한 측면이 있다. 이 전까지는 시민군이 었으니 무장을 하면 각자 무기를 가지고 나왔으나 군대의 표준 무장을 만들었고, 군장인 '마리우스의 당나귀'가 지급되기 시작했다. AD 100년 무렵에 서양의 군대에서 나왔으니 굉장한 것.


*마리우스의 당나귀

로마 군인들의 기본 무장은 투구, 갑옷, 정강이 받이 각반, 신발, 칼, 방패, 창이 있다. 여기까지는 예전의 무장과 다르지 않은 데 군인들이 짊어지고 다니는 배낭이 있었다 전군이 배낭을 짋어지고 다닌다는 것, 여기에는 식량이나 식기를 넣기도 했지만 더 중요한 것이 괭이, 도끼였다. 길을 닦고 성을 쌓고 도시를 만들었던 것. 그들은 전투병이기도 하면서 전투를 하지 않을 때는 토목 공병 노릇을 한 것이다. 로마가 고대 세계 최강의 군대를 육성한 나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게 바로 '마리우스의 당나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말해서 로마 군인이라는 인간 행위자, 거기에 마리우스의 당나귀라는 비인간 행위자인 표준화된 배낭을 지급한다는 것이다. 현재 군대 제도로 마리우스에게서 나온 것.  마리우스는 인간 행위의 인터페이스를 새롭게 만들어주는 비인간 행위자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침공한 이유

단순히 개인의 야욕이라기 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로마는 해외 식민지를 계속해서 확장하지 않으면 국가 운영자체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그 시기에 일인자들은 앞다투어서 해외영토를 늘리려고 했다. 국가 이익이 늘어남과 동시에 그에 수반되어서 군단을 조직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세력도 늘어난다. 쉽게 말해서 국가 이익을 핑계로 자신의 이익을 늘릴 수 있는 기회였고, 게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지역 총독이었기 대문에 갈리아를 침공할 수 있었던 것.


<갈리아 전기> 첫문장을 보면 인구가 어떠하다 풍습, 지리가 어떠하다하고 설명하고 끝난다. 개인의 보고서니까 그렇게 할수도 있겠다 하겠지만 사실 직접적인 원인이 나타나 있지 않고 사태를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카이사르의 저술의 특징이다. 두번 째 문단을 보면 헬베티족에 대해 나온다. 전쟁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갈리아지역의 갈리족, 갈리족 안에 속해있는 헬베티족이 다누비누스(도나우강)에 살고 있는데 북쪽 게르마니아 지역에 살고 있던 수에비족에 쫒겨가지고 갈리아 지역으로 이주를 하려고 했다. 그러다보니 이 갈리아 지역에서 분쟁이 일어나고 이를 막기 위해 카이사르가 출동한 것. 이것이 전쟁의 출발점이다. 


헬베티족이 원래 살던 곳이 오늘날 스위스 지방이다. 카이사르가 헬베티족을 갈리아 지역으로 못오게 막아서 다시 스위스로 쫒겨나게 되고, 그 뒤로 다시 나오지 않게 된다. 그들이 오늘날 스위스의 조상이다. 스위스 정식 국가 명칭이 콘포이데라티오 헬베티카(Confoederatio Helvetica)인데 여기서 헬베티가라는 말이 헬테비족에서 나온 말이다.


* 프로콘술 proconsul

카이사르는 총독이었다. 

로마에서 집정관은 최고 정치 책임자이며, 임기가 끝나면 로마의 식민지로 그들을 통치하도록 내보낸다. 전임 집정관을 프로콘술 proconsul이라고 하며, 곧 총독이다. 문제는 총독들이 나가서 독자적으로 세력을 만들 수 있으니 원로원이 귀환을 요구하면 무장을 해제하고 바로 로마로 들어와야 했다. 카이사르는 사실 총독의 임무를 잘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갈리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서 이후 명성이 높아진 상태가 된다. 서기전 49년에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세력이 커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로마로 귀환 명령을 내렸는데 카이사르가 이를 거부하고, 원로원파와 카이사르파가 내전에 돌입하게 된다. 이것이 <갈리아 내전기>


* 내전기

로마 귀환 명령을 거부하고 루비콘 강 앞에서 남긴 유명한 말이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 사건은 갈리아 전쟁 이후 내전기에 나와있다. <내전기>는 카이사르가 자기 정당화를 위해 쓴 책으로 완성하지는 못했다. 카이사르는 선전선동에 능한 사람이었기 떼문에 부하 장병들에게 루비콘강 앞에서 호소를 한다. "나는 너희들과 더불어 그동안 숱한 승리를 거두었다. 갈리아를 평정하고 게르만족을 몰아내어 국가에 지대한 공훈을 세웠다. 그런데 폼페이우스 일파는 나를, 너희들의 총사령관을 제거하려 하고 있다. 그들의 음모로부터 나의 명예와 존엄을 지켜달라."  다른 문헌에 따르면 "이 강을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하고, 이 강을 건너면 세계가 파멸한다." 도 말했다고 한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행한다는 cross the Rubicon의 유래가 된다.


* 갈리아 원정기

갈리아 원정의 시작 부분을 다시 보면 로마로서도 게르만족과의 싸움은 처음이었고 만만하지 않았다. 이 때 카이사르 특유의 군사지도자 능력이 발휘하게 되는데 나중에 카이사르 군단이라고 불리기도 한 10군단에게 한 연설을 보자. "나를 따라오는 자가  없다해도, 제 10군단만은 데리고 떠나겠다. 제10군단의 충성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제 10 군단은 앞으로 내 친위대가 될 것이다." 10군단에 호감을 표명함으로 해서 다른 군단들이 거기에 대해 경쟁심을 유발시키는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이었다. 일단 로마 군대는 어디든 도착하면 진지를 구축했다. 로마가 세계를 제패한 힘이자 시스템이다. 더 나아가 로마군대는 장비가 좋았다. 예를 들면 갈리아 군대는 칼질만 해댔는데, 포위공격용 성탑을 세워서 바퀴를 달아서 굴리기도 했다.


* 시스템의 힘, 도구의 힘. 

결국은 통치를 해야하는데 무력과는 다른 종류의 통치 기술이 있어야 한다.

로마가 갈리아를 정복한 진정한 힘은 로마나이즈, 로마화 정책에 있다. 만약에 로마가 갈리아 지역을 정복한 다음에 갈리아 지도자 계급을 노예처럼 착취했으면 계속 끊임없이 반란에 시달렸을 것. 그런데 그러지 않고 자녀들을 본국이나 다른 발달된 식민지로 보내서 공부시키고, 그 다음에 시민권을 주었다. 나중에는 그들이 로마의 지배계층에 올라가 버린 것. 로마 식민지 사람들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 이 것이 로마제국을 만든 진정한 힘이 된다. 두번째로 중요한 게 경제 관계인데 이를 강화해서 경제적 이익이 늘어나게 되니 로마 화폐가 기축 통화가 되어 널리 쓰이게 되고 자연스럽게 식민지 저항운동을 내리누르는 효과를 거두게 된다. 모든 면에서 로마에 예속시킬 수 있도록 했다.




2013-06-08 32회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기" 3

* 알레시아 공방전

갈리아 전투에서 가장 유명했던 전투는 알레시아 공방전으로 7권에 소개 되어 있는데 갈리아 부족 연합군을 이끈 베르킨게토릭스의 발란이고, 이 발란이 7년동안 계속된 후에 맨 마지막에 치러진 전투가 바로 알레시아 공반전이다.  갈리아의 부족 연합군이 로마의 식민지배에 저항을 일으킨 반란. 그리고 그 지도자가 베르킨게토릭스. 갈리아 사람들이 아무리 뒤쳐진 사람이었다 해도 자신들을 식민지 삼아 지배하려는 외부의 침략자에 맞서지도 않고 순순히 굴복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로마 입장에서는 반란이겠는데 갈리아 사람 입장에서는 저항 운동이고 일종의 무장독립군.


갈리아 원정을 바라볼 때 반대의 입장에서 보면 저항을 했던 것이다. 어느 한 쪽의 입장에 서야 하기는 하겠는데 시오노 나나미는 일본 사람으로, 일본은 식민지 침탈을 한적도 있고 그래서 갈리아 원정 사태를 즐겁게 읽을 수 있었을지도. 그런데 우리로서는 정반대 입장에 있으니 섣불리 로마의 입장에 스스로 동화시켜서는 안될 것 같고, 객관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베르킨게토릭스의 명분은 갈리아인의 자유. 7권 4절을 보면 "그는 갈리아 전체의 자유를 위해 무기를 들라고 그들을 격려한 뒤 곧 대군을 이끌고 가서 얼마전에 자기를 추방했던 반대세력을 추방했다. 이제 자신의 추종자들에 의해 왕으로 선포된 베르킨게토릭스는 사방으로 사절단을 보내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했으며, 그들은 만장일치로 군 통수권을 맡겠다."


원정기를 쓴 사람이 카이사르니까 아주 자연스럽게 자기 입장에서 썼을 테고 더군다나 로마의 위대함을 드러내 보이면서 그 위대함에 편승해서 자기의 위대함을 드러내 보이려는 시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런 제국주의적인 시각으로 빠져들게 된다. 


객관적인 전력의 열세는 어쩔 수 없는 것이고 패퇴해서 알레시아 지역으로 쫒겨 들어가서 농성을 시작한다. 이 알레시아 지역은 오늘날로 치면 프랑스 중부, 디종이라는 곳의 구릉지대이며, 이 농성 전투에서 로마군이 5만명, 요세 안에 8만명의 농성군이있고 26만명의 포위군이 밖에 있었다. 로마 입장에서는 5만명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을 수 있지만 갈리아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총력전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사에서는 이 전투를 카이사르의군사능력이 가장 잘 발휘된 것으로 평가한다. 저항군이 총력전을 펼쳤음에도 인원도 적은 로마군이 승리를 했다면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로마군대가 구축했던 포위망인데 그 지역을 가면 갈리아 원정기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 되어있다.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부분도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알레시아 공방전


농성한 지역을 빙 둘러서 참호를 파고 그 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방어시설을 구축하였다. 바깥에 있는 방어시설은 범위가 넓은 것 같지만 사실은 강물이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외부에서 오고 있는 갈리아 부족 연합군의 지원군이 운신할 수 있는 폭이 상당히 좁다. 강을 넘어와야 되고 구릉지대라고 하지만 뒤쪽으로 산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남서지역으로만 강이 있어서 남서쪽 접근로 하나밖에 없었다. 거기에는 로마의 망루가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안쪽 포위망은 농성하고 있는 사람을 압박을 가하고, 이 공격을 원할하게 하기 위해 외곽에 있는 포위망에서는 외부지원군을 물리치고 이런식으로 진행되었다. 7권 72절을 보면 통틀어서 설명이 되어있다. 상당히 수비 형태를 잘 구축했다고 봐야한다.


바로 이것이 로마군대의 힘이다. 이 힘은 전투하는 사람들에게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이처럼 시설물인 비인간행위자들에게서도 나온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수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마리우스의 당나귀 덕분.


이 공방전 끝에 갈리아 지역이 완전히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군대에 굴복했다. 전투에 패배를 하게되고 베르킨게토릭스가 회의를 소집해서 자신의 거취를 동족에게 맡긴다. 


그 부분이 7권 89절. >> 이튿날 베르킨게토릭스는 회의를 열어 자신의 각오를 말했다.

"내가 전쟁을 시도한 것은 모두의 자유를 위해서이지 사리사욕 때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운명에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이상, 나를 죽이고 로마 인에게 속죄하든, 아니면 산 채로 넘겨주든 마음대로 하라." 


조금은 비감어린 측면이 있다.

이 사건을 보면 로마가 식민지배를 어떻게 하는가가 나온다. 저항하는 베르킨게토릭스 같은 사람들은 로마에 압송해서 처형하고 말을 잘듣는 이들은 각별히 챙긴다. 윤봉길 의사를 일본에 압송해서 처형할 때 이마에 하얀띠를 두르게 해서 이마 한 가운데를 총으로 쏴서 일장기가 나오게 했다는 떠올려 보자.


* 팍스 로마나

팍스 로마나 시기는 서기전 27년 -서기 180년까지니 대략 200년이다. 

그런데 로마에 의한 평화라고 하지만 갈리아 원정기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정확하게 말하면 식민지를 살육해서 살육전을 통해 식민지를 바탕으로 하는 평화다. 이후에 이어지는 팍스 브리타니아, 팍스 아메리카도 마찬가지. 미국에 의한 평화라고 하면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시대부터 시작한 건데 유럽 같은 경우는 미국에서 마샬플랜 대규모 경제원조를 한 반면 한국 같은 변방국가에서 문제가 생길 때는 깔끔하게.. 이런식으로 갔다.


평화를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들은 상당히 평화스럽지 못하게 정리가 되곤한다.


이탈리아, 독일, 일본 모두 전범 국가. 조선은 전범국가가 아닌 피식민지배국가, 즉 전범국가의 식민지국가였는데 그 나라에 미국이 개입을 해서 이런 식으로 현지에 있는 폭력적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하는 경우...는 현대사에서 유례가 없는 경우.


* 카이사르의 문체

흔히 투철한 문체다라고 한다. 자신이 쓰면서도 '카이사르는' 3인칭으로 썼다. 일부러 그런 것으로 사실을 말하고 있음을 두드러지게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개인사정을 일체 언급하고 있지 않는다. 자기에게 불리해 보이는 것도 적당히 집어넣는다. 숫자를 많이 집어넣는다. 가능하면 정확하게 기록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다. .


무엇보다도 카이사르의 문체 스타일이  가장 잘 드러내 보이는 부분은 자신이 잘났다는 것을 깔끔하게 잘난척하는 것. 이를테면 7권 마지막 문장에 보면 >> 이상의 전적이 전해지자, 로마에서는 20일 동안의 감사제가 개최되었다."

원정기의 독자인 로마사람들 눈에는 엄청난 잘난척으로 보였을 것인데 당시 로마에서는 누군가 훌륭한 전승을 거두면 개선문 들어오면서 10동안의 감사제를 개최하는 것이 관습이었는데 카이사르의 경우에는 15일로 늘어났고 마지막에는 20일아 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승전을 과시한 것.


* 이 책의 의의

로마가 공화정 시기를 거쳐서 공화정 말기 내전기에 들어섰는데 이 내전기에 로마의 방향이 달라져서 제국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제국으로 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식민지 확대이다. 일반적으로 확장적으로 해외영토를 침략하고 식민지 지배를 늘리는 것을 제국주의라고 한다. 이 것이 로마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게 옳은일이었는지 그른일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필연적이었다고 말한다. '새로운 체제를 만들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었다. 그러니 제국으로 가는 길을 닦았던 카이사르는 탁월하다.' 이 것은 정당화 논리로 살육을 정당화하는 논리에 불과하다고 본다. 


우리가 꼭 봐야 하는 것은 제국으로 가는 길에는 수 많은 사람들을 살육해야만 제국으로 가는 길을 닦을 수 있다는 것. 그 살육의 생생한 기록이 아닌 것 같은데 생생한 기록이 바로 이 갈리아 원정기라는 것을 염두해두면 좋겠다. .




2013-06-15 33회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기" 4

로마는 강력한 제국이었고 강한이미지를 남긴것도 사실.

몇가지 핵심적인 것만 짚어보면 보자.


아우구스투스를 지나면서 5현제시대. 보통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를 많이 읽는데 사료로서 의미가 있을 뿐이지 기번의 책을 읽고 로마제국을 알았다고 하면 무식한 것. 옛날 역사책이기 때문에 그동안 로마에 대한 새로운 자료들이 등장하였고 역사해석도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기번이 정의한 그 당시 시대를 5현제시대라고 하는데 과연 얼마나 현명했는지는 따져볼 문제이고, 대체로 그 시대하고 팍스 로마나 하고 겹친다. 로마의 군사력에 의한 평화. 그리고 식민지에 대한 폭력적인 지배와 착취에 의해서 유지되는 체제가 바로 팍스로마나.


착취만 했다면 그렇게 오래 유지하기 어려웠을것. 일종의 문화정책인 유화정책도 있었다. 일제 식민지 지배를 떠올리면 된다. 갈리아 정복에 이어서 '로마화' 한다. 이런 것들이 로마 식민지에서 대규모로 행해졌다. 로마의 지배를 받게된 지역들이 로마의 제도를 받아들이고 지배층은 라틴어로 교육받으면서 로마의 가치를 수용하게 되는것. 이게 중요한 부분. 라틴어 교육 즉, 언어교육. 이로서 로마는 단순한 식민지에 대한 무력지배가 아니라 완전한 지배, 즉 헤게모니를 쥐게되었다. 이러한 지배가 오랫동안 계속되었기 때문에 후대의 사람들이 로마를 단순한 국가가 아니라 문명으로 이해를 하게되는 것.


200년 정도 지속이 되어 문화정책이 이루어졌으면 그 어떤 지배도 무너뜨렸을테고 생각을 해보면 일본제국주의가 한반도를 36년 지배했는데 그것의 7배 정도면 그 지배를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것. 40년도 채 안되었는데 한국사회에서 해석이 분분한데 200년이면 역사의 필연으로 느껴지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문화정책을 뒷받침하는 제도적인 장치들은? 

그게 바로 무력지배, 문화적인 동화, 제도적인 장치가 맞물려 간다. 

로마 식민지배가 자리를 잡을 때가 서기후 200년 무렵인데 212년에 카라칼라 황제(21대 황대, 186~217)가 '모든 자유민은 로마시민이다' 다시말해서 식민지에 있는 흔히 말하는 속주 개념이 완전히 사라지고 로마영토에 사는 사람이라면 노예가 아니한 모두 시민으로 자격을 얻게 된다. 그런데 사실 이것을 선언한 이유가 군대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로마는 시민만이 군대에 복무할 수 있었기 때문. 속주사람들이 군인이 되면 군대를 통해서 출세를 할 기회가 얻게 되고, 자연스럽게 그런 것들이 로마의 신분질서를 요동치게 했다.


카라칼라 황제는 이런 선언을 뒷받침하기 위해 항상 법제도를 중시 했고, 모든 자유민들에게 적용되는 법률체계 흔히 말하는 [로마 만민법]을 만들었다. 자유민선언, 만민법은 로마사회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나 결국 이 문제가 로마의 발목을 잡는다.


서양의 역사를 살펴볼 때 보통사람들은 대개 문화사를 보는데 문화사는 어떻게 보면 그 사회가 어떻게 굴러갔는지와는 무방하게 표피적인 것일 수 있다. 80년대 6월 항쟁을 떠올려보면 그 때 유행하던 노래만 듣고 있다보면 그때 우리가 살고있던 시대가 어떤 것이었는지 잘모른다. 세계 역사도 마찬가지. 문화사만 보다보면, 르네상스 시대의 아름다운 여인들의 그림만 보다보면 사실은 화약과 대포로 대량살상무기가 생겨난 시대임을 모르게 된다.. 그 사회가 어떻게 굴러갔는지를 밑바닥에서 집약적으로 보고 싶으면 오히려 '군사제도의 변화' 이런쪽이 훨씬 더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국가의 성립조건으로 말하는 영토,주권,국민에서 로마시민권의 확대를 뒷받침하는 만민법을 보면 국민 조항은 해결된 것. 우리가 특정한 영토 안에서 국가의 주권이 행사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면 세금을 걷어야 봐야한다.  세금을 걷어들이는 조세기구가 확립되고 세금을 걷어들이는 중앙정부, 영토를 지키는 군대. 조세기구 확립, 중앙정부, 군대 이게 로마를 구성하는 핵심요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든 국가가 반드시 갖춰야 하는 성립 조건이 된다.


일치일란 一治一亂: 한번 다스려지고 한번 어지러워진다.

이른바 위기의 3세기라고 불리는 군인황제 시대가 있다. 장군들이 황제가 되기 위해 서로 경쟁하던 시기였고, 이 시가 지나면 그 유명한 콘스타티누스 황제 시기다.


콘스타티누스 1세는 후에 동로마 제국으로 불리는 비잔티 제국의 길를 놓은 사람이다. 

그때의 명칭으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콘스타티누스의 도시' 라는 뜻으로 330년에 완성되었다. 역사가들은 대게 이때를 동로마 제국의 원년이다라고 본다. 콘스탄티노플이 동로마제국의 수도가 되고 황제가 집중적으로 정무를 보기 시작한것은 6세기 지나서.


로마 영토가 지나치게 넓어지니까 기존의 기술적인 네트워크만 가지고는 다스리는 한계에 이르렀다. 그에 따라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원로원을 하나 더 설치했는데 이미 서쪽의 원로원인 로마의 원로원은 쇠락의 징조를 보이고 있었다. 원로원은 기본적으로 땅부자 귀족. 국가통치기구와 관료집단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재산을 늘리는데 사용했다. 로마제국멸망의 핵심적인 요인이 바로 세도정치, 대토지를 소유하는 귀족들이 늘어났다는 점. 관직의 수익사업이다. 로마제국의 농민이 군인이었기 때문에 귀족들이 대토지를 소유하게 되면 그들이 노예가 되어 군대를 가지 않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콘스타티누스 황제가 죽은 뒤 더 가속화 되었다. 로마시민의 5퍼센트가 전체 부의 80차지하게 된다. 


시민들이 군대를 가지 않고 국민노릇을 안하게 되는 것. 사실 우리가 일상속에서 만나는 것은 국가기구가 아니라 사장님, 기업이다. 국가의 국민이기도 하면서 기업의 사원인데 기업은 민주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즉 민간영역하고 공공역역이 서로 분리되기 시작하는 것. 민간영역이 힘이 커져버리면.. 로마제국말기의 사태가 이걸 잘보여준다. 국가와 시민이 직접 만나는 지점이 없어지는 그 현상을 잘봐야한다.


동로마 제국의 경우는 로마 멸망 그 이후에도 천 년을 유지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건립된 시기가 300년 대이니 한반도로 치면 삼국시대부터 시작해서 1453년에 망했으니 조선시대까지까지.


나라가 오래 유지된 비결 중 첫째가 바로 종교이다.

비잔티 제국의 황제들은 자신이 로마의 후계자라고 생각했다. 비잔티제국이니 동로마제국이름은 후대사람들이 붙인 이름일 뿐이고 자기들의 나라를 폴리테이아 로마나(로마인들의 나라)로 불렀다.  콘스타티누스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그 뒤로 황제들이 계속 이를 받아들여서 결국에는 기독교라는 종교와 로마라는 이념이 결합해서 신의 이름으로 지배하는 황제, 다시 말해서 '비잔티식 국가통치모형'이라는 것이 나타났다. 중세시대에는 황제와 교황의 대립이 있었는데 비잔틴 제국은 황제가 교황을 아래두고 다스리는 '비잔틴식통치모형'이성립된 것이다. 그것을 뒷밤침하려면 현실적으로 법률이 있어야하는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로마법대전] 나왔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6세기 무렵을 살았던 인물인데 이 때쯤되면 동로마제국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로마의 흔적은 거의 다 사라지고 비잔티제국이라고 할만한 차원으로 들어선다. 이 때를 거치면서 발칸 반도의 슬라브족, 불가리아, 오늘날 동유럽 지역이라고 불리는 지역을 정복해 들어갔다. 러시아를 포함해서 그리스정교회(희랍정교회) 지역으로 알려진 곳들이 본격적으로 비잔틴제국에 포함된 시기다.

 

제정일치 체제였다. 법률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혁신을 계속해가는 관료 제도가 있었고,이를 뒷받침하는 교육제도가 있었다. 그래서 황제가 독재권력을 휘두른 신정국가다라고만 말해서는 안된다. 천년동안 황제 독재가 유지된 것은 자식에게 물려주기도 했지만 끝임없이 능력있는 사람이 구데타를 일으키도했고, 나쁘게 말하면 궁정 음모인데 좋게 말하면 물갈이가 확실하게 된 것 때문이다. 스스로를 혁신한 황제들도 굉장히 많았고 이것이 천년 번영의 기초였다는 것을 잊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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