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M.콘퍼드: 종교에서 철학으로


종교에서 철학으로 - 10점
F.M.콘퍼드/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옮긴이의 말 


머리말 

1. 운명과 법칙 

2. 모이라(Moira)의 연원 

3. 자연, 신, 그리고 영혼 

4. 철학에의 소여 

5. 과학적 전통 

6. 신비주의적 전통 


찾아보기





6 철학은 종교로부터 신과 영혼의 개념 이외에도 운명, 정의 또는 법칙의 영역으로 다양하게 간주되는, 자연의 어떤 질서에 관한 지배적인 생각을 상속받았다. 자연의 생이 그 안에 갇혀 있는 바, 이 질서의 특성과 근원은 우리 탐구의 주요 주제들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곧 밝혀지겠지만, 필연의 지배는 역시 그리고 동일하게 도덕적 지배이며, '정의'의 왕국이다.

희랍 최초의 종교 시인 헤시오도스는 자연의 경로는 결코 옳고 그름에 무관심하지 않다는 그의 신념을 단순한 형태로 언명하였다. 그는 우리에게 말하기를, 인간들이 정의를 행사하고 옳음의 곧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을 때 그들의 도시는 번성하고 그들은 전쟁과 기근으로부터 자유롭다 했다. "그들을 위해 대지는 풍성한 식량을 산출하고, 언덕 위에선 참나무가 그의 꼭대기에서 상수리 열매를 맞으며 그의 가운데 줄기엔 벌떼를 모은다; 그들의 양들은 푹신한 양모를 기르고, 그들의 아내는 자신들을 닮은 아이를 배며" 등등. 이 인용문은 인간 행위와 '자연'의 행태 사이에 말하자면 공감적 관계가 있음을 명료하게 진술한다 : 만약 인간이 옳음의 길을 똑바로 걸을 때 파종과 수확이라는 자연의 질서 있는 과정은 순조로이 진행될 것이며, 대지의 열매들로 정의에 보상을 한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이 죄를 범할 때 - 가령 오이디푸스의 무의식적인 근친 상간과 같은 - '자연' 전체는 인간의 죄에 의해 더럽혀진다. 테베의 땅은,


      대지의 결실없은 새싹들 속에,

      메마른 목초지 속에 황폐화되어 가고

      죽어가는 여자의 탄생 없는 산욕을 겪는다.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믿음 - 자연은 도덕적이며 그래서 그의 질서는 인간의 죄에 의해 교란된다는 - 이 생겼는가? 이는 분명 아무 편견없는 직접적 관찰의 결과는 아니다. 한 왕이나 국가가 잘못된 행위를 했을 때, 추수는 흉작이고 기근과 질병이 돈다는 것은 경험적 사실이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접하는 바는, 경험이 가하는 끊임없는 반박에 저항하는 바, 그 고대의 전통적인 믿음들 중 하나이다. 곧 보겠지만, 최초의 희랍 철학자들은 이 신념 - 자연의 질서는 도덕적 질서라는 - 을 명백하고 도전 불가능한 진리로서, 진정 세계에 관한 가장 중요한 진리로서 표명한다. 이는 세계의 생성 소멸의 과정에 관한 그들의 개념 구조를 지배하고 있다. 이는 세계의 생성 소멸의 과정에 관한 그들의 개념 구조를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일단 철학 속에 자리잡자, 이 신념은 자연과 도덕 및 정치에 관한 사유의 전개 과정에 영향을 주고 채색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이 볼 때 어떻게 이 신념이 형성되었는가, 그리고 이것이 이성적 사유의 유산이 되기 이전에 어떤 형태를 거쳐 왔는가의 문제는 인간 지성사의 중심적 문제들 중의 하나이다. 이것이 앞으로 두 장들의 주제이다.


315 희랍 철학이 사변적 지성을 신격화하면서, 철학은 종교에서 모호하고 신비적인 요소들을 모두 제거하려는 최고도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지성도 신이 된 것이었으니, 이는 정서적 신앙의 대상이 되는 신들, 즉 자신보다 오래된 신들을 따라 제 7천국까지 간 것이었다. 여기서 자세히 다룰 수는 없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 내에서 신은 추상의 최고 정점에까지 고양되어 질료 없는 형상, 모든 실천적이고 창조적인 에너지를 거세당한 - 궁극 목적은 자신 이외의 다른 목표를 갖지 않으므로 - 순수 사유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심지어 자신 이외의 다른 것을 사유할 수도 없으니, 그 이유는 다른 것들은 그것의 관심을 받을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단한 그리고 불변적인 자기 명상 속에 갇혀 있다. 우리는, 이런 상태가 완전한 활동, 생명, 지복의 이름에 값하며, 이러한 신은 오직 세계가 신 자신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만이 세계를 움직이지(kinei hos eromenon), 다른 방식으로는 세계를 움직일 수 없다고 믿도록 요청받는다. 신은 세계를 사랑할 수도, 세계 속으로 자신의 로고스를 파견할 수도 없다. 하지만 세계는 신을 사랑할 것이 기대되며, 세계의 모든 생명의 원인은 이 수도원적이고 자기 최면적인 추상에 대한 욕망이다. 다른 피조물은 물론이거니와 가장 지적인 신비주의자라도 과연 이런 열정을 진실로 느낄지는 의심스럽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 지극히 미약한 매력이라도 느낄 수 있는 근거는, 오직 그것을 신이라 부르고, 그것이 살아 있으며 복된 존재라고 - 이는 분명 신비주의적 요소인데 - 우리 자신을 설득함에 의해서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에서 우리의 근원적 복합체의 두 요소들, 즉 모이라의 윤곽, 형태, 모습(eidos)과, 그리고 이것에 편재해 있는 기능적 힘과 형태와 본성(physis)은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의 양극점을 차지한다. 형태가 내용에서 벗어났으며 생명이 그것으로부터 빠져 나갔는데, 이 과정은 올림포스의 신들이 그들이 다이몬적 단계에서 소유하던 유용한 기능을 저버리고 게으르고 무능한 형상들이 되어, 생명과 변화의 모든 과정들이 자신들의 도움 없이 진행되어 나아가는 세계의 위에서 떠돌게 되는 그 과정과 유사하다. 진정코 종교는 신들에게 개인적인 속성들과 변덕스러운 의지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이제 과학이 그러한 의지가 작동할 여지를 남겨 놓지 않았으므로, 신적인 존재는 욕망 능력과 권능의 마지막 편린까지 상실하여 순수한 형상(eidos), 힘없는 그림자(eidolon)으로 전락하였다.


철학자 역시 현명하게 자신의 신적 상대역을 모방하여, "모든 존재가 도피한 곳으로 따라간다." <니코마스 윤리학>의 결로 부분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품고 있는 인간적 이상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모든 도덕적이고 실천적인 활동 중에서, 그는 논하길, "전쟁과 정치는 가장 고귀한 것이며 가장 장대한 스케일의 것이다. 하지만 이 둘조차도 여가와 비교가 되지 않으니, 그 이유는 이들은 자기 위의 다른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서만 선택되기 때문이다. 이성의 활동은 한층 고귀한 가치를 지니고, 사변적 활동으로, 자신을 넘어서 더 이상의 목표를 설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에 고유하며, 자신의 활동을 향상시키는 즐거움을 갖고 있다. 이러하므로 이성의 활동은 자족적이고 근심과 권태로움으로부터 해방되어 있으며 그 밖의 다른 모든 지복의 속성들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이 인간의 완전한 행복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삶의 인간성의 적도(適度) 이상이다. 사람은 자신의 인간됨 때문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어떤 신적인 요소 덕분에 그러한 삶을 영위할 것이다. 그리고 이 요소가 인간의 복합적 본성에 비해 우월할 만큼, 그 요소의 활동은 다른 덕목들보다 우월하다. 그렇다면 이성이 인간과 비교할 때 신적이라면 이성의 삶은 인간의 삶에 비해 신적이다. 우리는, 인간은 인간의 생각들에 충실하라, 또는 가사적 존재는 가사적 존재의 생각들에 충실하라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 가능한 한 불사성을 성취하고 자신 속에 있는 그 지고한 요소를 따라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바를 행해야 한다. 그것은 양적으로는 적을지 모르나 그 힘과 가치로 보면 다른 모든 것보다 훨씬 뛰어나다."

"그것이 지고의 것 그리고 좀더 나은 부분이므로 그것이 모든 인간의 진정한 자아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사람이 진정한 그 자신의 삶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택한다면 기이한 일일 것이다. 우리가 이전에 말한 바는 여기에서도 적합하다 : 모든 피조물의 본성에 고유한 것이 그에게 가장 고귀하고 가장 쾌적한 것이다. 그래서 이성은 인간의 진정한 자아이므로, 이성의 삶이 그러한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성의 삶이 가장 지복의 것이다."

신이 '자연' 세계 속에서의 기능적 유용성에서 도피하였듯이, 개인들의 이상은 사회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다이몬이 그러했듯이, 자신의 사회적 집단 위로 올라선다. 그는 스토아 철학자처럼 자율적 자족성과 올림포스 신적인 명상 세계에서 은둔할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그것은 네오플라토니즘의 신비주의적 황홀경에 이른다. 이 황홀경 속에서 얻어지는 직시, 존재와 인식을 넘어서 있고,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사유할 수도 없고, 심지어 더 이상 이성도 아닌 존재, '이성을 넘어서 있는 존재(epekeina nou)'인 절대적 일자에 대한 환희로운 직시, "홀로인 자의 홀로인 자에로의 도피"에서 오는 직시는 사유마저도 삼켜 버리고 만다. 이 황홀경 속에서 사유는 자신을 부정한다. 그리고 철학은 자신의 찬란한 곡선 비행을 끝막음하여 하강하면서 날개를 접고, 자신이 이전에 날아 나온 그 어두움 속으로, 마법과 주술의 그 침침한 에레부스(Erebus)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