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카와 시즈카: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세상을 바꾸리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세상을 바꾸리라 - 10점
시라카와 시즈카 지음, 장원철 옮김/한길사

+ 책이 절판되어 구하지 못하고 교보문고 e-book으로 구매하여 읽음


목차

1. 동서남북을 떠도는 사람

2. 유교의 원류

3. 공자의 자리

4. 유교의 비판자

5. 논어에 담긴 뜻은

- 옮긴이 주(註) 

- 지은이 후기 : 깜깜한 바다 위를 홀로 떠다니듯이 

- 옮긴이 후기 : 인간 세상을 향한 이상과 광기 

- 찾아보기




14 2,000년에 걸친 관료제 국가의 이데올로기로서 봉건성의 기초를 세운 것은 공자였지만, 역사가 전개되는 중에도 혁명가들은 대부분 유교에서 혁명의 근거를 찾았다. 그리고 근대에서도 그 유파 가운데 하나인 공양학파가 체제 부정을 주창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15 공자는 비천한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에 관한 일도 분명치 않아, 나는 그가 무녀의 사생아가 아닐까 생각한다. 만년에는 당연히 한 시대의 사표로서 존경을 받았겠지만 망명 중의 어떤 시기에는 "선생을 죽이려면 자에게 죄를 주지 않았고, 선생을 욕보인 자를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장자> [양왕])고 할 만큼 받아줄 이 없는 망명자, 요컨대 외부에서 온 도적인 외도로 취급 받았던 것이다.


23 그러나 <논어>에 충신(忠臣)이라는 사고방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충이란 성실하다는 정도의 의미인 것이다. 공자는 "만약 나를 등용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1년 안에 뭔가를 해내겠다"([자로])든가, 공산불요의 부름에 응하려 했을 때도 "만일 나를 써주는 이가 있다면 나는 그 나라를 장차 동쪽의 주(周)나라로 만들 것이다"([양화])라고 자로에게 이야기한다. "만약 나를 써주는 이가 있다면" 상대가 누구라도 좋았던 것이다. 벼슬하는 자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었다. 세습의 신하조차 순절하지 않던 시대였다. 목숨을 바쳐 순사하더라도 도나 의를 위해 순사하는 것이 공자의 뜻이었다. 벼슬도 한 일이 없는 소공의 뒤를 따라 망명함으로써 충의로운 듯이 꾸미는 행동 따위를 공자가 할 리는 없었다. 망명은 어디까지나 공자 자신의 개인 사정에 따른 것이었다.


25 공자는 음악을 좋아했고 스스로도 금(琴)을 연주했다. 시 작품 따위도 현악기의 연주에 맞추어 노래 부르곤 했던 것이다. 인간 형성의 최종 단계를 "음악에서 완성된다"([태백])


33 이리하여 14년에 걸친 망명생활이 시작된다. 공자는 벌써 쉰여섯 살, 자로는 제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마흔일곱 살, 안연 이하로는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청년들이었다. 망명생활은 그들 사이에 깊은 운명 공동체 의식을 심어놓았고, 그와 동시에 운명 문제, 천의 문제, 인간성 문제, 현실 정치 문제 등에 대해서 사색을 심화한 기회를 주었을 것이다. 그것은 사도들을 데리고 방황을 계속한 나사렛 예수의 모습과 닮았다.


42 공자는 무녀의 자식이었다. 아비의 이름도 모르는 사생아였다. 이산에 빌어서 태어났다는 것도 예삿일은 아닌 듯하다. 마치 예수처럼 신은 즐겨 그런 자식을 선택한다. 공자는 선택된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그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는 어느 누구도 그의 전반생을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신은 자신을 맡긴 이에게 깊은 고통과 고뇌를 줌으로써 그러한 진실을 자각시키려 한다. 그것을 마침내 자각해내는 이가 성자가 되는 것이다.


42 공자는 한평생 끝없이 꿈을 꾸었다. 꿈에 나타나는 것은 언제나 주공이었다. 은주 혁명, 서주의 창업을 이룩한 이 성자는 명보(明保)로서 주나라 최고의 성직자이자 문화의 창조자였다. 동시에 이 성자는 비극의 성자이기도 했다 .공자는 만년의 어느 날 "심하도다. 나의 늙음이여! 오래되었도다. 내가 다시 주공을 꿈 속에서 뵙지 못한 것도"([술이])라며 탄식한다. 공자는 평생 꿈에서 주공을 보고 주공과 끊임없이 대화를 해왔을 것이다. 주공이 무엇을 이야기했는가는 알 길이 없다. "사문을 없애지 말지어다"라는 식의 명령조였을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안심하고 천명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은데도 천명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모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48 공자는 학문을 좋아했던 사람이다. "발분하면 먹는 것도, 이치를 깨달으면 즐거워서 모든 근심을 잊고, 늙어가는 것도 알지 못하는"([술이]) 사람이다. 그러나 공자가 배운 것은 반드시 고전만이 아니었다. 고전의 학문은 이 무렵에도 아직 성숙 되지 않았다. 더구나 공자의 학문은 "배우고 제때에 그것을 익힌다"


50 공자의 교단에 속하는 이들을 유(儒)라고 불렀다. 공자 자신도 일찍이 제자인 자하에게 "너는 군자다운 유가 될 것이지, 소인 같은 유는 되지 말아라"([옹야])라고 가르친 적이 있다. 유에서 군자유와 소인유를 구별한다는 것이 이상하긴 하지만, 여기에는 틀림없이 까닭이 있을 것이다. 유에는 갖가지 계층이 있었던 듯하다. 공자가 스스로를 유라고 칭했으므로 다른 사람들도 그들 학파를 유라고 불렀다.


52 유가는 스스로를 유(儒)라고 칭하고 다른 유파에게도 유라고 불렀는데, 당시의 문헌으로 유의 뜻을 언급한 것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훗날 유에는 '꾸미다', '적시다' 또는 '나약하다'와 같은 뜻이 있으므로 예문이 있는 온화한 학풍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유학의 본래 뜻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이다.


62 은주 혁명이 일어난 것은 대개 기원전 1100년 전후의 일로 추정된다. 그것은 내부에서 시작된 혁명이 아니라 외부에서 시작된 혁명이었다. 이질적인 문화를 지닌 동서 세력 사이의 교체였다. 그러나 은나라를 대신한 주나라에는 은 왕조와 같은 신화 체계가 없었고, 신화 계승의 조건도 존재하지 않았다. 인격신으로서 제(帝)의 관념은 포기되고, 비인격적이고 이성적인 천(天)의 관념이 이를 대신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합리주의적인 정신의 맹아는 이러한 천의 관념에서 비롯된다.


68 고전에 대한 위작은 그 후에도 계속 행해졌다. 예를 들면 <서>의 첫 번째 편인 [요전]은 요순과 같은 고대 성왕의 설화에 신화 등을 고쳐서 덧붙였던 것으로 의고체 문장도 새로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맹자> [만장상] 편에 동일한 의고체로 순 임금의 설화를 기록한 예가 있는 것으로 보아 요순의 이야기는 맹자시대에 이르러 문헌화가 시도되었던 것 같다. 주지 하는 바와 같이 홍수 설화에 등장하는 우를 고대의 성왕으로 삼고 자기 학설의 근거로 삼은 것이 묵가였다. 그래서 유가는 우 임금보다 이전에 존재했던 고대 성왕 이야기를 만들어 묵가를 능가하려고 했던 것이다. 공자가 주공을 일컫고 묵가가 우 임금을 받들고, 그런 뒤에 유가가 다시 요순을 만들었다. 도가는 더욱이 그 위에 황제(黃帝)를 내세웠다. 이것이 이른바 가상설(加上設)이라는 것인데, 그것은 또한 고대사상이 전개되는 실상을 알 수 있게 해준 하나의 열쇠가 된다. 서주 시기에 성립된 것이 확실한 어떤 문헌에도 요순이나 우 임금은 보이지 않는다. 우 임금은 춘추시대 중엽의 금문과 시편 등에 보이지만, 여전히 완전한 홍수신 신화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69 유가의 주장은 당시에 실제로 존재했던 관행의 질서를, 고대의 성왕이 규정한 질서로 고정화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관행적 질서는 춘추 말기에 이르러 두드러지게 어지럽혀졌고, 예약도 계속 붕괴했다. 이것을 '본디 이상적 상태로 회복 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주공이 정한 예악으로 복귀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 유가의 생각이었다. 고전을 바로 그러한 목적에 이용하는 것을 탁고개제라고 한다. 공자의 입장은 바로 탁고개제였던 것이다. '탁고'란 과거에 규범을 두는 것이며, '개제'란 개혁이자 혁신이며 때로는 변혁이기도 한 것이다. 공자는 한편으로 주공의 열렬한 찬미자이자 복고주의자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각지에서 등장한 반란자의 부름에 기꺼이 응하고자 했던 모반자이기도 했다. 다만 공자가 여느 모반자와 다른 점은 그는 언제나 이상주의의 깃발을 높다랗게 내걸었고 '주공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표방했다는 점이다. 이상과 현실의 거리가 어느 정도인가는 별 문제가 아니었다.


72 유는 본래 무축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그들은 고대의 주술 의례나 상장 따위의 일에 종사하는 밑바닥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공자는 아마도 그러한 계층에서 태어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무류의 호학자였던 공자는 의례의 본래적인 의미를 탐구하면서 고전을 배웠다. <시>와 <서>를 배우고 이것을 전승하는 사(史)나 사(師)에 나아가서 널리 식견을 구했다. 그리하여 무릇 선왕의 예약으로 전해지는 것을 거의 빠짐없이 익힐 수 있었다.


74 예의 본질이 현재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사회적인 합의에 있다면, 그러한 합의의 밑바탕에 있는 것은 인간의 덕성이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인 인(仁)이 아니면 안 된다. 더욱이 인간은 예의 실천을 통해서 그러한 인에 도달할 수 있다.  <논어>에는 인을 언급한 대목이 많지만, 안연에게 다음과 같이 답하는 공자의 말은 아마도 깊은 뜻을 드러낸 것이리라.

안연이 인에 대해 물으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이겨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 단 하루라도 자기를 이겨 예로 돌아간다면, 온 천하가 인을 따르게 될 것이다. 인을 행하는 것은 자기에서 말미암는 것이지, 어찌 남에게 말미암겠는가?"라고 하셨다. [안연]


81 객관적으로 보면 공자가 아무리 고매한 이상으로 살았다 해도 공자가 걸었던 생애는 겉보기에 양호와 퍽 닮은 것이었다. 묵자학파의 인식은 오히려 당시에 일반적인 것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보면 공자도 당시 사회에서는 권외의 부류로 취급 받던 망명자・외도・무사・백공 등, 때로는 '불평분자들'로 불리던 무리에 속한 인간이었다.


113 유묵은 어느 쪽이나 당시의 하층 사회에서 태어난 사상이다. 무축의 무리인 유(儒), 공장(工匠)의 무리인 묵(墨), 이 양자는 각자 기나긴 인고의 세월 끝에 새롭게 사회적으로 발언할 기회를 얻었다. 또한 배후에는 각자의 장구한 전통이 있고, 그러한 전통이 양자의 사상운동의 성격을 규정했다. 종교 의례의 집행을 직업으로 하는 자와 기물 제작을 통해 사회생활에 관여한 자 사이에 서로 다른 체질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다만 출신관계로 보면 양자는 서로 양립하지 못할 대립자이기보다는 차라리 경쟁자의 입장이다. 말하자면 계통이 다른 노동 단체 같은 것이다. 그런 까닭에 상호 비판이 필요했다. 사회적인 대립자 사이에는 비판을 통해 서로 간에 영향을 주고 받은 관계가 존재할 수 없다.


123 맹자는 인의로써 왕도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가에서는 인의를 함께 일컫는 것이 맹자에서 시작된다. [...] 공자에게 인과 의는 나란히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의는 당위로 "의를 보고도 행하지 않음은 용기가 없는"([위정]) 것이지만,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에 밝다"([이인])고 한 것처럼 행위 기준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인은 인간 존재 근거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사람으로서 불인하면"([팔일]) 예약은 의의를 잃는다. 문화도 가치도 오직 인을 근거로 할 때만 존재한다.

묵가에서 의(義)는 흡사 공자가 말하는 인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것은 모든 존재와 가치의 근거인데, 하늘의 뜻에 의해 주어진다. 공자가 극기복례의 실천을 통해 내관의 극치에서 찾아내려 한 것을, 묵가는 하늘의 뜻이라고 하여 선험적인 것으로 뒤바꾸어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의가 행위의 규범이 될 때는 겸애가 교리인 것처럼 이와 결합되었다. "의(義)는 이(利)다"라는 [묵경상]의 명제는 공자가 말한 인과 차원이 다른 것이다.


124 묵자에게 의는 하늘의 뜻으로 무조건 절대화되고 있다. 겸애와 교리(交利) 야말로 하늘이 이로써 실현됨을 추구하는 것이다. 맹자에게 하늘의 뜻은 민의를 매개로 해서 표현된다. 거기에 천 사상, 새로운 시대적 의미가 발견된다. 어느 경우나 하늘과 인간의 관계가 주제다. 인간은 누구나 하늘 아래서 평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하늘의 뜻을 대신할 수 있는 이가 천자가 되고 왕이 되어야 한다. 그러한 천하적 세계관의 질서 원리를 묵자는 법 또는 법의라고 하고, 맹자는 인의 또는 왕도천하라고 일컬었다. 그것은 노모스(nomos)의 세계라고도 할 수 있다.

노모스는 분배를 어원으로 하는 말이다. 그것은 공공성의 원리였다. 구체적으로는 도덕이나 법률이 그것에 해당된다. 묵자가 말하는 법의는 거의 그러한 개념에 가깝다. 노모스는 개인에 대해 앞서 존재하는 것이고, 개인을 포괄한 역사적으로 사회적인 일반자다. 그것은 집단 자체가 지닌 권위 위에 성립하는 것으로 개인적인 계기를 포함하기는 어렵다. 유가가 그 같은 노모스적 체제에 대응하는 충분한 학설을 준비한 것은 순자에 이르러서다. 거기에 맹자의 반(反)시대성이 있다. 또한 묵자는 의의 근거를 하늘의 뜻에서 구하는 신수설을 취했는데, 거기에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일반자로서의 노모스에 대한 반동이 있었다. 집단의 권위를 대표하는 것은 왕이 아니면 안 된다. 그것은 선왕이 아니라 현재의 왕, 곧 후왕이 아니면 안 된다. 후왕주의를 설파한 순자, 왕권의 절대성을 주장한 한비자의 법가 사상이 이러한 노모스적 세계의 최후 승자가 되었다. 그리고 묵자는 강고한 폐쇄성으로 말미암아 노모스적 세계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멸망하는 것이다. 묵가 최우 집단이었던 진묵은 진(秦)의 통일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멸망했다.


179 <논어>의 최종 편집자가 누구였는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미자]라는 한 편을 덧붙임으로써 <논어>는 노모스로부터 탈출을 의도하는 새로운 정신으로서의 가능성을 약속했다. 공자가 죽은 뒤 유가는 파벌 대립을 안은 채 노모스적 세계로 몰락해갔지만, 그러한 인위적인 균질의 세계에 가장 과감하게 저항을 시도했던 이들이 장주 일파다. 그리하여 아마도 안합 등으로 대표되는 반노모스적인 유가의 계통과 관계를 맺게 되었을 것이다. 초광 무리의 문장이 노모스적으로 부패한 천유들에 의해 일그러지려 하는 원시 유가의 정신, 곧 공자와 사도들이 내건 정신을 겨우 계승하고 있다. '이것을 경쇠의 옥소리로 끝맺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 후에 자장등 세 유파를 비롯한 천유들의 어록인 [자장] 제 19편, 의고적인 <서>의 단편과 자장이 오미・사악을 설파한 '제론'인 듯한 [요왈] 제 20편ㅇ 있다. 도통설로 이 한 권의 결말을 삼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최후의 한 장에 다음과 같은 공자의 말을 들고 있다.


공자가 말씀하기를 "천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고, 예를 알지 못하면 설 수 없고,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가 없다"고 하셨다.


이 형식은 <논어> 첫머리의 한 장과 동일하다. <논어>의 편집자는 이로써 책의 구성을 수미상응케 했던 것이다.

<논어>의 '상론'은 [향당] 편으로 끝난다. [향당] 편은 공자의 언동을 모두 규범화하려는 의도가 있다. '하론'은 아마도 [미자] 편에서 끝났어야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적어도 [미자] 편을 편집한 사람들은 노모스적으로 규범화된 그와 같은 세계에서 탈출을 의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곳에 공자정신의 올바른 계승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184 공자 사상은 결코 노모스적인 것이 아니다. 공자가 추구했던 이데아 세계는 노모스적 사회와는 전혀 맞지 않으며, 공자의 고귀하고도 격렬한 인간 정신의 탐구는 끊임없이 반노모스적인 것이었다.

노모스적인 사회로 오늘날과 같이 거대화하고 물량화된 사회는 일찍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날처럼 노모스가 사회적 초월자로 가공할 지배력과 파괴력을 보여주는 시대도 없었다. 수천 만 또는 수억 명에 달하는 민중이 단지 하나의 규범에 복종하고 있다. 사람들은 완전히 노모스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 더욱이 노모스는 보다 더 자신을 거대화하기 위해 거대 도시와 거대 국가를 만들고 있다. 사람들은 거대 도시가 문화의 파멸로 이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거대 국가가 인간 삶의 방식에 어떻게 관여하는가에 대해서는 물으려고 하지 않는다. "선생께서 구이의 땅에 살려고 하셨다"([자한])고 하듯이 공자가 탈출을 꿈꾸었던 권외의 세계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그러한 상황은 공간적 세계뿐만이 아니라 정신세계에서 한층 더 심각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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