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커스 J. 보그: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 왜 신앙의 언어는 그 힘을 잃었는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 10점
마커스 J. 보그 지음, 김태현 옮김/비아


서문

01 그리스도교 언어를 말한다는 것


……


24. 주의 기도


25. 결론 - 무엇이 위기인가: 그리스도교의 심장




서문

12 이 책의 목적은 성서와 근대 이전의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길어 올린 그리스도교 언어의 대안적인 의미를 제시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교 언어가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다루며, 이를 성서에 바탕을 두고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내려오는 의미와 비교하고 대조할 것이다. 그리고 문자 그대로 이해하거나 천국과 지옥이라는 틀로 해석하는 방식이 그리스도교 언어의 의미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볼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 언어를 말하는 것'의 보다 고전적이고 진정한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13 이 책은 일종의 그리스도교 언어 입문서다. 특정 언어에 관한 입문서는 해당 언어를 읽는 법을 가르쳐주기 마련이다. 이때 읽기란 단순히 언어를 알아보고 발음하는 것을 배우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온전한 의미에서 특정 언어를 듣고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언어를 읽을 수 있다.


01. 그리스도교 언어를 말한다는 것

20 그리도교 언어는 성서, 그리고 성서가 기록된 이후 형성된 그리스도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교 언어는 예배와 기도, 교리와 공동체에서 사용하고 노래한 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스도교인이라는 것, 즉 그리스도교 언어를 이해하고 사용하고 그 언어로 자신의 삶을 빚어간다는 것은 그리스도교 언어라는 틀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25 천국과 지옥 해석틀에는 네 가지 핵심 요소가 있다. 그것은 내세, 죄와 용서, 우리 죄를 사하기 위한 예수의 죽음, 그리고 믿음이다. 이 네 요소는 과거 내 유년기 시절 기억뿐 아니라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교인의 머릿속에 박혀있다. 그리고 이 틀이 우리가 경험한 내용, 들은 내용을 달리 빚어 낸다.


37 그리스교도 언어는 하느님, 그리고 전혀 다른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열망을 중심에 둔 생활양식과 대안적 비전을 가리킨다. 이 언어에는 힘이 있다. 많은 이에게 그리스도교 언어는 거룩한 성사, 은총의 통로, 하느님의 영이 우리에게 말하는 방식, 삶의 변화를 위한 매개였으며 여전히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언어가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02. 문자주의를 넘어서

45 성서 무오설과 문지주의는 개신교가 시작할 때부터 있지 않았다. 완고하고 경직된 문지주의가 개신교 신자들 사이에 널리 퍼진 것은 17세기 신학 저서에 처음 등장한 이후 한참 시간이 흐른 뒤인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일이었다. 그리스도교 언어에 미친 문자주의의 영향으로 많은 이가 성서와 그리스도교를 믿기 어려워한다. 수많은 젊은이가 그리스도교에 거의 혹은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49 이재는 성서가 모든 걸 결정할 수 있는 것처럼 "‘성서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라고 묻는 대신 "저 언어가  '그때 거기'에서 그들에게 의미했던 바를 생각하면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03. 구원

61 구원의 통상적 의미가 죄와 용서, 천국이라는 해석틀에서 형성된 것처럼 구원의 성서적 의미도 일정한 해석틀을 거쳐 형성된다. 성서적 해석틀 안에서 구원은 죄와 용서, 천국과 지옥보다 훨씬 많은 것을 담고 있다. 구원은 죽음 이편의 삶에서 맞이하는 변환 ━ 개인적 변환과 정치적 변환 ━ 을 뜻한다. 즉 구원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서 일어나는 변환과 그리고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삶에서 일어나는 변환을 모두 아우른다.


82 구원은 개인의 변환이다. 하지만 동시에 구원은 이 세상의 변환 곧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 세상이 더 나은 세상으로 변환하는 것이기도 하다. 구원은 개인과 세상의 변환이라는 이중의 변환이다.


04. 성서

96 미국 헌법이 미국인에게 권위를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서는 그리스도교인에게 권위를 갖는다. 그리스도교인이 된다는 것은 성서를 권위 있는 경전으로 받아들이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것. 그리스도교의 기반이 되는 책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을 뜻한다. 누군가 성서와의 대화를 멈춘다면 이는 곧 그리스도교인이기를 그만두는 것이다. 성서는 그리스도교인의 삶과 정체성을 구성한다.


97 성서를 하느님에 관한 말씀, 하느님의 말씀이라 부르는 이유는 성서가 하느님과 소통하기 위한 수단이자 매개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면에서 성서는 신성하다. 기원이 신성하거나, 권위가 신성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인의 삶에서 성서가 갖는 목적과 기능이 신성하기에 성서는 신성하다. 성서는 하느님의 영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수단이다.


05. 하느님

105 많은 그리스도교인뿐 아니라 대부분의 불가지론자나 무신론자도 이러한 식으로 '하느님’이라는 말을 이해한다. 누군가가 자신이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면 나는 묻는다. "당신이 믿지 않는 하느님에 관해 이야기해주십시오." 그러면 대게 '’이 세계 밖에 있는 전능하고 인격적인 존재'로서 하느님을 이야기한다. 최근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무신론 관련 저서의 작가들 역시 마찬가지 방식으로 하느님을 이해한다. 그들이 믿지 않는, 그 존재를 거부하는 '하느님'은 결국 그들 자신이 이해한 '하느님'이다. 그들은 하느님에 관해 달리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듯하다.


111 고대 그리스도교인들은 '하느님'이라는 말을 쓸 때 하느님의 초월성뿐 아니라 내재성까지 말했다. 이러한 하느님 이해 방식을 19세기 초에 등장한 용어로 '법재신론'이라고 한다. 이 말의 헬라어 어원을 풀이하면 '만물이 하느님 안에 있다'라는 뜻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이라는 말에 담긴 정통적인 의미, 그리고 진정한 의미다.


06. 하느님의 성품

122 우리는 모두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형벌을 받지 않고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길, 인류를 집어삼킬 지옥의 불길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 하느님은 피난처를 마련해 두었는데 그곳에 들어가려면 예수가 우리를 대신해 죽음으로써 하느님의 진노를 달랬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예수를 믿는 자는 형벌을 면할 것이다. 하지만그처럼 형벌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있다 해도 하느님이 우리를 벌하시는 분이라는 이미지는 바뀌지 않는다. 하느님은 요구사항이 있으며 그것을 강요한다. 법을 제정한 이로서 사람들이 자신의 율법을 따르지 않을 때 부모로서 자식이 실망스러운 일을 저질렀을 때, 왕으로서 백성이 자신을 분노케 할 때, 연인으로서 자신을 버릴 때 그는 자신을 제대로 따르지 않은 이들을 모두 벌할 것이다.


07. 예수

131 유대교는 하느님의 결정적 계시가 책, 즉 토라에 있다고 본다. 모세는 계시를 전달한 사람이지 그 자신이 계시는 아니다. 무슬림 역시 하느님의 결정적인 계시를 책, 즉 꾸란에서 발견한다. 이슬람교에서도 무함마드는 계시를 전달한 사람이지 계시 자체는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의 결정적 계시는 신성한 책이 아니라 '인간'이다.


138 신성은 부활 이후의 예수에게 속한 것이지, 부활 이전의 예수에 속한 것은 아니다. 부활 이전의 예수를 하느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상 예수의 의미를 축소하는 것이다. 예수가 하느님이었고 하느님의 권능을 가졌다고 한다면 예수가 행한 일들은 그다지 놀라울 게 없다. 그랬다면 예수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부활 이전의 예수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고전적인 증언은 예수가 하느님이었다는 게 아니라 그가 하느님의 결정적인 계시였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이 예수를 부르는 고귀한 칭호들은 모두 이를 가리킨다.


08. 예수의 죽음

151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었다는 것, 예수의 죽음을 '희생'으로 표현한 것은 신약성서까지 올라가지만,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대신해서' 이루어졌다고 본 것은 1097년부터다. 당시 캔터베리의 안셀무스는 『왜 하느님은 인간이 되었나』라는 저서에서 물었다. 왜 하느님은 인간이 되었나? 왜 예수로 성육신했나? 여기에 안셀무스는 인과응보의 하느님이 우리 죄에 대한 형벌을 인간 편에서 치러야 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에 우리의 죄값을 온전히 치를 수 없다. 첫값을 온전히 치르는 일은 오로지 완전한 인간만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신이 아닌 이상 인간은 완전해질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 우리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인간 예수가 되셨다.


151 초대 그리스도교가 예수의 죽음을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이러한 이해가 부적절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성서가 기록된 이후에 이뤄진 신학적 발전은 우리의 이해를 도울 수 있으며 중요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 성서 시대가 끝났다고 계시가 멈춘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영은 끊임없이 활동한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으로 예수의 죽음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인들은 종종 간과하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151 이러한 이해방식은 예수가 우리 죄 때문에 죽어야만 했고,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세우신 계획의 일부였다고 암시함으로써 그 죽음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지우고 모호하게 만든다. 역사 속에서 예수는 그냥 죽지 않았다. 그는 살해당했다. 그것도 범죄자나 암살자에게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 공권력一제국 권력과 거기에 부역하는 종교 권력의 결탁―에 의해 처형되었다. 더구나 그냥 처형도 아니고 십자가형을 당했다.


153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기꺼이 자신의 독생자를 내주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포장하든 우리를 벌하는 하느님이라는 성품은 남아 있다. 이 하느님은 누구든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며 우리의 피 는 예수의 피든 피를 보기를 원한다.


153 예수의 죽음을 대속이라는 틀로 이해하는 것은 그리스도교가 죄와 용서.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었다는 것을 믿는 것 그리고 내세의 축복에 관한 종교라는 세간의 통념을 강화한다.


153 예수의 죽음을 대속의 틀로 이해하는 방식은 이러한 점을 은폐하며 예수를 믿고 용서받아 천국에 가는 게 그리스도교의 전부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09. 부활

169 부활에 관한 문제는 아주 오래 전 어느 날 극적인 기적이 일어났느냐 하는 문제보다 훨씬 더 큰 무엇을 다루는 문제다. 마찬가지로 부활은 예수에게나 우리에게나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보다 더 큰 무엇을 뜻한다. 부활은 우리에게 누가 우리의 주님인지를 묻는다. 예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이 주님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 혹은 다른 것이 주님인가?



179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에 관한 일련의 진술을 진실이라고 믿는 게 아니라 '예수를 사랑한다'는 뜻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도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신경의 라틴어 어원인 credo는 '내 마음을 준다'는 뜻이다. 이때 '마음'은 단순한 기분이나 감정을 뜻하지 않는다. 마음은 우리 내면 가장 깊은 차원에 자리한 자기 자신, 생각과 의지, 감정 밑바탕에 있는 자아에 대한 은유이다. 당신은은 누구에게 당신의 마음을 내어주는가라는 말은 곧 누구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주는가라는 뜻이다.


10. 믿음과 신앙

185 믿음은 중요하다. 하지만 '올바른 것을 믿는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신앙은 그보다 훨씬 더 깊은 마음의 움직임, 우리 내면 심층에 자리한 자아가 움직이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를 통해 알 수 있는 하느님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 그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11. 자비

190 '자비'가 오늘날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염두에 둔다면 하느님의 성품을 이야기하는, 우리가 어떠한 인간이 되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야기하는 여러 성서 본문에는 '긍휼'이라는 말이 훨씬 적절하다.


12. 의로움

202 성서가 말하는 정의는 징벌적 정의가 아니라 '분배 정의', 즉 생활에 필요한 물지를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이다. 분배정의를 향한 하느님의 갈망은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였으며 세상은 하느님의 것이라는 신학에 기초를 둔다. 이는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 설화의 중심 의미다.


13. 죄

210 죄란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우리에게 어떠한 잘못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가리키는 중요한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이를 가리키는 그리스도교의 지배적인 은유가 되었으며 그 지위를 독차지하고 있다. 그 자리에서 죄를 끌어내려야 한다. 앞서 이야기했듯 죄는 인간 상황을 묘사하는 성서의 유일한 은유가 아니라 여러 은유 중 하나다. 더군다나 죄는 그 은유 중에서 가장 중에서 가장 우선한것도 아니고 가장 중요한 것도 아니다. 죄가 차지하고 있는 잘못된 위상을 바로잡으면 중요하고 강력한 다른 은유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죄에 대한 이해 역시 풍요로워진다.


218 성서는 우리에게 묻는다. 누가 당신의 주인인가? 당신은 누구에게 충성하는가? 당신 자신과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인가? 당신이 속한 집단과 국가인가? 인류인가? 아니면 이 모든 것 이상인 하느님인가? 우상 숭배는 하느님보다 작은 것을 삶의 중심에 두는 것이다. 우상숭배에는 휘브리스와 태만이 모두 들어 있다. 우상숭배는 하느님이 아닌 무언가에 중심을 두고 하느님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우리 삶을 빚어내게 하는 것이다. 유한한 것에 중심을 두는 우상숭배에서 죄들이 흘러나온다.


14. 용서와 회개

226 마지막으로 고해한 후 죄를 용서받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면 영원한 형벌을 받을까? 수 세기 동안 수많은. 어쩌면 대다수 그리스도교인이 이러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용서받지 못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거나 살해당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때 용서받음은 영생으로 가는 길이다.


227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깨달았든 깨닫지 못했든 간에 이미 용서받은, 하느님에게 받아들여진 존재,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가 아닐까? 이는 성서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찾아볼 수 있는 용서와 은총의 급진적인 의미다. 몇몇 영향력 있는 신학자는 이러한 용서와 은총의 차원을 강조하는데 힘썼다.


15. 요한의 복음서 3장 16절

238 많은 그리스도교인이 영생을 죽음 이후 축복받은 내세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요한의 복음서에서 영생은 현재 일어나는 경험이다. 영생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단어는 '다가올 시대의 삶'을 의미한다. 요한의 복음서에 담긴 산학에 따르면 영생은 미래의 것, 희망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현재의 것, 현재 알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무엇이다. 요한의 복음서 17장 3절을 보라.


239 요한의 복음서 3장 16절은 미래의 천국을 위해 지금 예수에 관한 일련의 진술을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이 구절은 예수를 사랑하는 것, 그리고 예수를 통해, 성육신을 통해 알려진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다가을 시대의 삶'에 지금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 구절을 믿지 않는 이들이 지옥에 간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이 구절은 지금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길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16. 거듭남

246 거듭남은 그리스도교의 핵심으로, 그리스도교인의 삶의 목적과 전망을 보여주는 주요한 이미지다. 이 말은 우리의 변환,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세상의 변환을 그린다. 하느님의 영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더욱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열망에 함께한다.


17. 유일한 길

252 창조주를 단 하나의 종교 전통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주장은 급격히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이는 이제 다른 여러 종교가 있음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가 특정한 문화, 역사 속에서 하느님, 신성을 경험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떻게 한 종교가 자신을 "유일한 길"이라 주장할 수 있겠는가?


252 예수는 인간의 삶에서 하느님을 보여줄 수 있는 모습으로 육화한다.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은 "우리가 예수 안에서 길과 진리와 생명을 본다"는 말이다. 이 말은 "예수"라는 말을 아는 것도, "‘길"’인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믿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의 삶을 통해 그 길을 본다. 우리는 그가 보여준 삶을 통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 세상을 억압하는 권력에 도전하는 삶, 철저하게 하느님을 중심에 두는 삶을 발견한다.


18. 승천

263 부활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승천은 예수가 단순히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현재에도 존재함을 보여준다. 또한 부활과 마찬가지로 승천은 예수가 주님임을 확증한다.


19. 성령강림절

266 성령강림절의 핵심은 예수가 약속한 영이 그의 제자들 사이에, 세상 가운데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영은 하느님의 영, 선령, 그리스도의 영이다. 이는 신약성서와 초기 그리스도교의 근간을 이룬다.


20. 휴거와 재림

275 이들에게 휴거란 예수의 재림, 최후의 심판 이전에 전개되는 7년의 시간이라는 시나리오가 시작하는 사건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휴거는 진정한 그리스도교인들이 예수가 재림하기 전 하늘로 들려 올라가는 사건을 가리킨다.


279 휴거는 성서에 바탕을 둔 개념도 아니고 그리스도교 전통과 가르침을 따르지도 않는다. 수많은 그리스도교인이 휴거를 믿으며 휴거와 재림이 빠른 시간 내 일어날 거라 믿지만, 이러한 믿음은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교인의 삶을 왜곡할 뿐이다.


21. 천국

286 육체적으로 죽음을 맞이한 이후 또 다른 삶에 대한 희망이 담긴 천국은 오랜 시간 그리스도교의 한 요소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이 말이 그리스도교 초기 몇 세기 동안에는 전면에 등장하지 않았으며 1천 년 경이 되어서야 주목 받기 시작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후 내세를 가리키는 천국은 (지옥에 대한 위협과 더불어) 그리스도교인이 되는 주요 동기로 작동했다.


291 내세는 있을까?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나는 모른다. 하지만 이 생에서 하느님이 우리가 가라앉지 않고 떠 있을 수 있게 해주셨듯이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우리를 떠있게 해주시리라 확신한다. 우리는 죽어 하느님에게로 간다. 나는 이 이상은 알지 못한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알아야 할 전부다.


22. 신경과 삼위일체

301 니케아 신경을 고백하는 것은 전복적인 행위다. 우리는 이 신경을 고백함으로써 우리를 지배하려는 다른 주인들의 요구를 무효화한다. 예수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이 우리의 주님, 단 하나뿐인 주님이다. 이 세상, 문화의 지배자들은 우리의 주인이 아니다.


23. 주의 만찬

314 빵과 포도주는 예수의 살과 피를 의미했기에 대속은 성찬식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다. 성찬식은 죄와 죄의식,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자로서의 예수에 관한 이미 지들로 기득했다. 지금도 곳곳에서 거행되는 여러 성찬례에는 이러한 이해가 반영되어 있다.


24. 주의 기도

325 주의 기도를 1세기라는 역사적 맥락 아래 살필 때 우리는 먼저 예수가 가르침을 전한 주요 청자가 시골 농민이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이 기도가 빼앗기고 박탈당한 이들에게 어떠한 의미로 다가갔을지 상상해야 한다.


25. 결론 - 무엇이 위기인가: 그리스도교의 심장

336 내세와 개인의 구원에 집중하는 천국와 지옥 그리스도교는 이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꿈을 가려버린다. 하느님의 말씀이 예수로 육화된 것은 이 세상 밖으로 우리를 데려가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구원이라는 말이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함을 기억하라. 세상이 변환되기를 열망하는 하느님의 꿈을 가로막는 권력들과 그 권력들이 만들어낸 장애물로부터 이 세상을 해방하기 위해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를 통해 육화되었다.


338 문제는 하느님을 사랑하거나 그 열망에 동참하기 위해 그리스도교인이 되어야만 하는가가 아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과 세상의 변화를 바라는 하느님의 열망에 동참하지 않고서도 그리스도교인이 될 수 있는가이다. 긍휼과 정의, 평화가 넘치는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열망을 자신의 열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서도 그리스도교인이 될 수 있는가? 이는 오늘날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중요하고도 까다로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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