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반 일리치의 죽음 - 10점
레프 톨스토이 지음, 이순영 옮김/문예출판사


이반 일리치의 죽음

악마

신부 세르게이


작품 해설

작가 연보




9 커다란 법원 건물에서 멜빈스키 사건 심리가 열리던 날, 잠시 휴정 시간을 이용해 재판관들과 검사는 이반 예고로비치 셰베크 집무실에 모여 앉아 잡담을 나누었다. 어느새 화제는 그 유명한 크라소프 사건으로 흘러갔다. 표도르 바실리예비치는 이 사건이 사법부 관할이 아니라며 중거까지 대면서 주장했고 이반 예고로비치도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표트르 이바노비치는 애초에 이 논쟁에는 아무 관심 없는 듯 말 한마디 거들지 않고 방금 배달된 신문 〈베도모스티〉만 들여다보았다.

신문을 읽던 표트르가 말했다. "이것 좀 봐요! 이반 일리치가 사망했다는군요!"

“정말이에요?"

“여길 보세요." 표트르 이바노비치가 아직 잉크 냄새도 가시지 않은 신문을 표도르 바실리예비치에게 건냈다.

검은색 테두리 안에 이반 일리치의 부고가 실려 있었다.


11 그들이 이반 일리치의 사망 소식을 듣고 생각한 것은 그로 인해 생길 자리 이동과 승진이 전부는 아니었다. 가까운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누구나 그렇듯 그들 역시 속으로 안도감을 느꼈다.

'죽은 건 내가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이야.'

그들 모두 생각하거나 느낀 건 이런 거였다. '아, 그는 죽었지만 나는 이렇게 살아 있어!' 하지만 이반 일리치와 비교적 가까웠던 이른바 친구라는 사람들은 이제부터 장례식에 참석해 미망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하는 아주 성가신 일이 남았다는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들었다.


19 ‘사흘 밤낮을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다 죽었단 말이지. 그런 일이 언제든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거잖아.' 이런 생각을 하며 표트르 이바노비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런 일은 이반 일리치에게 일어났을 뿐 자신에게는 일어날 수 없고 일어날 리도 없다는 지극히 그다운 생각이 슬며시 들었다. 그냥 우울한 기분에 젖은 것뿐이며, 시바르츠가 얼굴 표정으로 분명하게 말했듯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 마음이 편안해진 표트르 이바노비치는 그제야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관심을 보이며 그의 마지막이 어땠는지 자세히 물었다. 마치 죽음은 원래 이반 일리치에게만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며 자신과는 관계없는 것처럼 말이다.


33 자신에게 아무런 해도 미치지 않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점점 줄여갔고, 부득이 함께 있어야 할 때는 다른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 자신의 위치를 지키려 했다. 중요한 것은 이반 일리치에게 일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모든 삶의 재미를 일에 집중하면서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이 재미가 그를 삼켜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파멸시킬 수 있는 권력이 있다는 자각, 표면적인 것이긴 하지만 법정에 들어설 때나 아랫사람들을 만날 때 그에게 향하는 예우, 상급자와 하급자들 사이에서 거둔 성공, 그리고 무엇보다그 스스로도 느끼는 뛰어난 업무 처리 능력, 이 모든 것이 그에게 기쁨을 주었다. 이와 함께 동료들과 나누는 대화와 식사 자리, 카드놀이 등이 그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이반 일리치의 삶은 그가 기대한대로 즐겁고 붉스럽게 흘러갔다.


51 이제 더는 자신을 속일 수가 없었다. 무시 무시하고 낯선 일이, 지금껏 살아오면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심각한 일이 이반 일리치의 몸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아는 사람은 이반 일리치 한사람뿐이었으며, 주위 사람들 누구도 이해

하지 못했고 이해하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것이 전과 다름없이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다른 무엇보다 이런 사실이 이반 일리치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가 보기에 집안 식구들 특히 한창 사교계에서 활동하던 아내와 딸은 이반 일리치가 어떤 상태인지 전혀 모르는 채 오히려 침울해하고 까다롭게 구는 것이 다 그의 잘못인양 화를 냈다. 


54 이반 일리치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다들 말했다. "피곤하면 이제 그만하죠 좀 쉬세요." 쉬라고? 아니, 그는 전혀 피곤하지 않았고 끝내 세 판 승부까지 마쳤다. 모두들 어두운 표정으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이반 일리치는 자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분위기를 바꾸지는 못했다. 사람들이 저녁 식사를 하고 돌아간 뒤 이반 일리치는 혼자 남아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그의 인생에 독이 스며들었고 이 독은 다른 이들의 삶에까지 번져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독은 약해지기는 커녕 점점 더 강해져 그의 몸 전체에 깊숙이 파고드는 것 같았다.


87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무엇 때문이지? 이럴 수는 없어. 삶이 이렇게 무의미하고 추악할 수는 없는 것 아닐까? 삶이 이처럼 추악하고 무의미한 것이라면, 왜 죽어야 하며 그것도 이처럼 고통스럽게 죽어야 하는 걸까? 분명 뭔가 잘못된거야.

‘내가 잘못 살아온 건 아닐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다 하면서 살았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거지?' 그는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가 바로 다음 순간 삶과 죽음의 모든 수수께끼를 풀 단 하나의 해답을 마치 절대 있을 수 없는 것인 양 머릿 속에서 몰아냈다.


98 이반 일리치는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아, 여기 있구나. 뭐 어때, 거기 있으라고 하지 뭐.'

‘그런데 죽음은? 죽음은 어디 있지?'

이제는 습관처럼 익숙해져 버린 죽음에 대한 공포를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죽음은 어디 있는 거야? 대체 죽음이 뭐지? 죽음이 없었으므로 죽음에 대한 공포도 전혀 없었다.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갑자기 그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이렇게 기쁠수가!" 

이 모든 일은 한순간에 일어났으며, 이 한순간의 의미는 이제 변하지 않았다.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반 일리치의 고통이 그러고도 두 시간이나 더 계속되었다. 그의 가슴에서 뭔가가 끓어올랐다. 쇠약해진 그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며 부르르 떨렸다. 그러더니 가슴이 끓어오르는 소리와 숨을 색색 몰아쉬는 소리가 차츰 잦아들었다.

“다 끝났습니다!" 누군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반 일리치는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끝난 건 죽음이야. 이제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

이반 일리치는 숨을 훅 들이마시다가 그대로 멈추더니 몸을 축 늘어뜨리며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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