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철학 고전 강의 — 28

 

⟪철학 고전 강의 -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제33강

❧ ⟪판단력 비판⟫이 시도하는 것
필연적이지 않은 사태들을 설명한다.
반성적 판단력: 통제적 원리로서의 합목적성, 사유 속에 상정한 보편에 합치하는 것, 주관적 보편타당성, 공통감의 이념에 대한 요청, 동의, 합의 ⟷ 규정적 원리, 객관적 보편타당성, 확증

❧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은 어떻게 성립하는가
사람들이 이것을 미라고 하자고 합의하는 과정에 대한 탐구
외부로부터 감각 자료를 받아들이고(오성), 이렇게 성립된 개념(이론적 인식)을 구상력으로써 유동(Spiel)하여 성립
숭고는 초월적 이념에 관여하는 이성과 구상력의 유동이 결합하여 성립

❧ 목적론적 판단력
인간이 자연 세계를 체계적으로 남김없이 설명하려는 욕구
인과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유기체를 설명하는 방식
자연에 대해서는 실질적 합목적성을 적용할 수 없으므로 자연 바깥에 있는(외적) 우리가 목적을 상정
수단-목적의 연쇄는 인간이 자연에 투사한 것이며, 그것의 궁극에는 지적인 세계 원인으로서의 신을 상정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도덕 신학, 윤리 신학

 

2021.05.04 철학 고전 강의 — 28

⟪철학 고전 강의⟫ 제33강 미감적 판단력, 목적론적 판단력, 판단력의 두가지 종류에 대해서 설명한다. 앞서 32강에서 우리는 칸트가 말하는 판단력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칸트의 판단력이라는 개념은 그보다 앞서서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의 학자들이 사용하였던 세련, 도덕감정 이런 것들과 유사성이 있고 또는 그것의 연장성상에서 창안된, 독자적인 창안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인간은 사회적인 생활을 하는 가운데 공동체가 물려받은 유산들을, 또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만이 아니라 이웃나라에서 또는 다른 문화권에서 만들어진 그런 개념과 관습과 상상력의 산물들을 전수받는다. 그것을 자기의 상황에 맞추어서 새롭게 개조하기 마련이다. 칸트의 판단력이라는 개념도 그런 것이다. 다만 공통적인 것이 있다. 판단력은 상황에 따른 힘이다. 어떤 상황에서 뭔가를 하는 힘이다. 

자연과학이 탐구하는 것은 사실 우리 인간이 뭐라고 하든 안하든 그러한 것을 탐구한다. 그런데판단력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도덕이라든가 이런 것도 마찬가지이다. 도덕은 동네마다 다르다. 상황에 맞추어서 행동을 하게 된다. 상황에 맞춘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칸트가 《판단력 비판》이라고 하는 책에서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선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보겠다. 33강은 크게 세가지를 다루고 있는데 《판단력 비판》이라는 책이 시도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미에 대한 판단은 어떻게 성립하는가, 다시 말해서 뭔가 아름답다고 할 때 나 혼자만 아름답다는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것에 대해서 아름답다고 할까 라고 하는 의사소통의 공통체 속에서 아름다움의 판단은 어떻게 성립하는가, 그때 어떤 힘이 작용하는가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세번째로는 목적론적 판단력이다. 우리가 어떤 사태의 인과연쇄를 완전히 알고 있지 못할 때 뭔가 하나의 원리를 가지고, 우리가 창안해낸 원리인 외부에서 그 원리를 집어넣어서 쭈욱 일괄성있게 설명해보려는 시도가 목적론적 판단력이 하는 일이다. 목적론적 판단력이 좀 어렵지만 아주 나쁘게 말하면 이야기를 꾸며내는 능력이다. 우리가 어디선가 보고와서 사태를 전할 때 그 사태의 시작부터 끝까지 낱낱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우리는 뭔가 규모있게 이야기를 짜맞춰서 전달하려고 한다. 

이 세가지, 《판단력 비판》이 시도하는 것과 미에 대한 판단은 어떻게 성립하는가, 그리고 목적론적 판단력은 어느 때 작용하는가를 논의한다. 《판단력 비판》이 시도하는 것은 상황에 따른 앎, 즉 상황지를 설명하는 것이 《판단력 비판》의 시도이다. 그것을 칸트는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과 목적론적 판단으로 분류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면 필연적이지 않은 사태를 설명하려는 시도, 앞서서 판단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할 때 개별적인 특수들을 비교해서 그것을 상위에 있는 유 개념으로, 즉 포섭하는 보편으로 연결시키는 힘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보편이라고 하는 것은 특수들을 아무리 모아도 보편이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보편은 그게 있다고 생각해서 정하는 것이다. 보편을 상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조금 개념화해서 말해보면 판단력은 사회적인 상황 역사적인 상황을 설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우리 인간의 사유의 힘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을 칸트는 개별적인 특수한 것을 살펴보니 내 눈에 나타났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하고 살펴보니 반성하는 판단력이라고 말했다. 칸트나 헤겔이나 반성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철학책에서 반성이라는 말은 '한 번 더 생각해본다'라는 말이다. 인생을 돌이켜본다는 것은 다시 음미해서 분류를 다시하는 것이다. 잘한 일과 무모한 일을 나누어 보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unexamined life is no life, 검토되지 않은 삶은 인생이 아니다. 

제33강 360 판단력은 이처럼 철학책에만 들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판단력은 사회적 역사적 상황을 설명하는 데 밑바탕이 되는 개념입니다. 사회는 자연과학적인 원리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고, 어떤 식으로든 탐구를 해야 한다면 사회에 대해서도 보편적 개념을 이끌어내야 하므로 이러한 판단력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외부에서 목적을 정하는 것, 그래서 그 목적을 놓고 다른 사건을 그 목적 아래에다가 맞추는 것. 그것은 정해진 것이 아니까 칸트는 통제적 원리라고 말한다. 내 마음 속에 보편적 이념을 상정해서 만든 것이니까 그것은 주관적 보편타당성인 것이다. 반성적이라고 하는 것은 통제적 원리로서의 합목적성을 상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상정한 합목적성에 합치하는 것들을 마음 속에 꿰어 맞추는 것이 바로 반성적 판단력이다. 그것이 바로 미에 대한 판단력과 연결이 된다. 반성적 판단력의 성과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합의이다. 합의에 이르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공동의 이념에 합의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사실 합의라고 하는 영역은 두 가지 영역이 있다. 진리라는 말은 사실은 올바름이라는 것을 굉장히 강력하게 함축하고 있다. 과학적 진리라는 것과 주관적 합목적성 또는 주관적 보편성이라는 것도 대개 진리를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진리라는 것을 강하게 드러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은 과학의 껍질을 입힌다. 대표적인 사례가 우생학 같은 것이다. 

제33강 360 특수들을 비교하는 것은 특수들을 살펴보는 것이므로 이는 반성적(reflektierende), 즉 반성하는 판단력입니다. 이러한 특수들을 연결하는 원리는 통제적 원리로서의 합목적성(zweckmäßigkeit)입니다. 합목적성은 사유 속에 상정한 보편에 합치하는 것을 카리킵니다. 미리 그 원리가 주어져 있어서, 그 원리에 따라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맞아 떨어지게 특수들을 집어넣은 것이 아닙니다. 통제적 원리와는 달리, 제일원리가 미리 있어서 그것에 따라 특수들을 분류해낼 수 있다면 그것은 규정적 원리입니다.

제33강 361 우리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공통감의 이념'(Idee des Gemeinsinns)이라 할 때 이것에 합의하는 것은 주관적 보편성입니다. 칸트에서 '이념'이라 불리는 것들은 확증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동의되어야 하고 요청되어야 하고 상정되어야 하는 것들, 주관적 보편성에 해당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과학의 진리들, 지구는 태양의 둘레를 돈다는 현상이 있다.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만유인력이라고 하는 행성간 인력,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고 설명할 수 있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수학적 계산이 맞아떨어진다. 그런 것은 규정적 원리이다.  그것은 객관적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합의할 필요가 없다. 그건 것은 확증이라는 말을 쓴다. 즉 반성적 판단력이라는 영역과 자연과학의 규정적이라는 영역은 서로 목표가 다르다. 굳이 규정적 원리가 작용하는 원리가 작동하는 영역에서는 목적록을 쓸 필요가 없다. 합의라든가 또는 동의라든가 이런 것들은 정치의 원리이고 확증이 불가능하다. 《판단력 비판》은 이런 것을 나누어서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뭔가를 아름답다고 할 때 그런 판단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칸트의 미학을 흔히 형식미학이라고 하는데, 칸트는 이런게 아름답다, 저런게 아름답다, 아름다움의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동의하고 합의하는지, 마음 속에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들을 어떻게 모아서 그것을 하지 라고 판단이 성립하는 과정을 밝힌다. 그 과정을 밝힌다는 점에서 아름다움의 내용은 관여하지 않고 과정만 밝힌다고 해서 형식미학이라고 부른다. 민주정이 그렇다. 민중정은 훌륭한 사람을 골라내기 위한 절차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 법적 질서를 지켜서 누가 더 훌륭한지를 골라냈으면 그것으로 정당성이 성립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판단이 어떻게 성립하는가. 우선 뭔가를 봐야 한다. 내 머릿속에 꽃이 피었구나라는 개념이 들어오면 아름다움과 무관한 객관적인 데이터가 들어온 것이다. 여기까지가 이론적 인식이다. 그것이 들어왔으면 그것을 가져다가 내가 알고 있던 아름다움과 들어맞다 이렇게 저렇게 객관적 데이터, 이론적 인식을 이리저리 맞춰본다. 이것을 유동Spiel이라고 한다. 유희라는 말을 철학에서는 유동이라는 말로 번역했다. 이론적 인식을 하는 능력은 오성이고, 유동을 하는 것을 구상력이라고 말한다. 오성이 만들어 낸 이성적 인식과 구성력이 움직여 내는 유동이 성립해서 아름답다는 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숭고. 숭고한 것은 직관적으로 데이터가 없어도 생긴다. 이성이 작용해서 유동이 덧붙여서 숭고에 대한 감각이 생긴다. 판단력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유동을 하는 힘이니까 Einbildungskraft(상상력)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판단력은 좀 더 넓은 범위를 말한다.  Einbildungskraft는 play((유동, Spiel)하는 힘이라면 그런 play하는 힘을 포함해서 데이터를 들여다가 오성과 이성에게 이거 해봐하는 것이 판단력이다. 

그 다음에 자연이라고 하고 것은 우리 인간에게 자연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판별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그 안에 어떤 목적이 있는지 없는지 따져낼 수 없으니까, 자연의 합목적성을 얘기하는 사람은 사실 거짓말쟁이다. 자연 바깥에 있는 우리가 우리의 생각 속에서 뭔가를 집어넣어서 설명하는 것이다. 칸트는 그런 식으로 설명한다고 해놓고도 세계를 그냥 뒤죽박죽인 채로 놓아두려고 하지 않는다. 사실은 이것이 칸트의 형이상학이다. 세계를 살펴보면 세계의 원인이 있다고 하고 그것을 신이라고 했다. 세계의 원인으로서의 신을 상정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부동의 원동자와 비슷한데,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 개념은 결코 아니다. 원리로서의 신. 그래서 칸트가 쓴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가 있다. 그래서 그것을 신의 명령이라고 생각하고 도덕적 의무들을 정리한 것이다. 칸트는 우리가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도덕신학, 윤리신학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목적론적 판단력에서 칸트는 오히려 정통적인 의미의 형이상학을 잘 경계하고 실행가능한 도덕적 형이상학, 윤리적 형이상학 정도로 했다. 

제33강 366 칸트도 결국에 지적인 세계원인으로서의 신을 상정합니다. 신에게 의존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상정되는 신은 인격적 신이 아닙니다. 그저 지적인 세계원인으로서의 신입니다.

제33강 367 우리가 신의 명령이라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도덕적 의무들을 추상화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까닭에 윤리 신학, 도덕 신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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