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철학 고전 강의 — 29

 

⟪철학 고전 강의 -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제34강

❧ 판단력에 의한 오성과 이성의 결합
오성이 수행하는 자연 개념에 의한 입법 / 이성이 수행하는 자유 개념에 의한 입법, 이 둘은 “원칙적으로 서로 만날 일이 없다.” 둘 사이에는 “거대한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인간의 일상은 자연과 자유가 수없이 교차하는 현실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철학은 자연과 자유의 통일의 근거를 마련해 주어야만 하며, 그 힘이 판단력이다.

❧ 현대철학에 대한 칸트의 영향
분석철학: 철학은 엄밀하고 정확한 앎의 근거를 마련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이는 ⟪순수이성비판⟫이 제시한 인간 인식의 한계에 대한 논의를 출발점으로 한다.
대륙철학: 철학은 인간의 삶에 깊이를 더해주는 통찰, 즉 지혜를 제시하고 이론과 실천의 통일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이는 ⟪판단력 비판⟫이 제시한 이론과 실천의 통일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삼는다.
철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 두 가지 모두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촉구한다.

 

2021.05.04 철학 고전 강의 — 29

⟪철학 고전 강의⟫ 제34강 판단력에 의한 오성과 이성의 결합, 여기까지 하면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 관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여기에 이어서 헤겔 이야기를 한다. 칸트의 저작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 비판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것이 세 개이다.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순수이성비판》은 인간이 어떻게 해서 사물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는가, 즉 칸트의 용어로 말하자면 자연의 진리에 대해서 탐구하는 것이다. 여러차례 얘기했듯이 비판이라고 하는 말은 그 경계가 어디인가, 또는 경계라고 하는 말은 상위에서 보는 것이고 어디까지가 끝인가를 아는 것이 비판이다. 순수이성이라고 하는 것, 그런데 제목을 보면 순수이성비판인데 그 다음 책은 실천이성비판이다. 실천이성은 자유의 개념, 즉 도덕에 관한 이야기인데 순수라는 말과 실천이라는 말이 서로 반대말이 아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말하면 순수이론이성, 순수실천이성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다.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에 관한 얘기이다. 자연의 진리는 어디까지이다. 또 도덕은 어디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니까 순수이론은 여기까지야 라고 말하는 것이고, 그것이 그친 자리에서 자유가 시작된다. 

예를 들어서 안좋은일이 있었다고 해보자. 도대체 왜 일어났을까.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것이 오로지 자연 사물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면야 시간을 잡아서 파보면 되는데 사람의 일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이 있다. 계속 궁리를 해보다가 안되니까 끝이라고 했다. 잘모르겠다. 이거라고 치고 그 다음으로 넘어가야지 하는 것이 사람의 일은 전부이다. 인간사는 그 시작과 끝을 완전히 하나도 남김없이 규명을 해낼 수 없으므로 인간사는 결국 이렇다고 치고 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오늘부터 착하게 살아야지 마음먹었다면 그냥 뚝 잘라서 오늘부터 무조건 이렇게 한다. 그것은 자유의지의 결단이다. 그게 실천이성이 하는 일이다. 자연의 세계와 자유의 세계는 서로 다른 입법의 원리 위에서 성립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마지막 비판서 제3 비판서인 《판단력비판》은 판단력은 어디까지 작용하는가. 자연 개념의 영역과 자유 개념의 영역을 결합하는 매개가 판단력이다. 그리고 판단력에는 미감적 판단력과 자연의 목적론적 판단력이 있다. 그리고 자연법칙을 만들어 내는 것은 오성에 의한 인식 위에서 이루어지고 이것이 바로 이론이성이 하는 일이고, 자유 개념에 의한 입법은 이성에 의해서 수행되며 이것은 실천적이다. 쉽게 이해해보면 인과관계를 따져볼 수 있는 것들은 그냥 인과관계를 따져보는 것이고, 인과관계가 따져지지 않는 것은 못따진다는 것이다. 도덕은 자연과는 무관하게 실천이성의 요청에 의해서 성립하는 것이니까 서로 영역에 있다. 자연과 자유가 원칙적으로 만날 일이 없다. 그런데 착한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어도 그것이 그냥 마음은 이러한데 이러한 의도는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목적은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실현하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의 영역에서 실현하는 것이다. 물질적인 것, 육체적인 것 안에서 실현해야 한다. 그것이 어렵다. 따라서 그것을 두 개를 잘 조정하는 힘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칸트가 말하는 판단력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살면서 이런저런 일들을 겪을 때 이게 어디 영역에 속하는 것인가를 잘 알아보는 것, 칸트의 《판단력비판》을 읽었다고 해서 행동이 잘되지는 않는다. 그러면 도대체 《판단력비판》을 왜 공부를 하는가. 아무 생각없이 살면 우리가 우리 몸에 편한 방식에 길들여진다. 그래서 이것을 계속 챙겨보게 되는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밴 습속들이 자기도 모르게 뭔가 쉬운 방향으로 또는 제정신이 아닌 방향으로 사람을 이끌어서 가게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처해있는 상황이 실천의 이성의 요청에 따라서 뭔가를 해야 하는 상황인지 아닌지 이런 것들을 생각해보게 할 때 막연히 생각할 수는 없으니까 생각하는 도구들을 우리게 준다는 것이다. 

앞서 얘기한 것들을 34강에서 다시 정리한 것 중에 하나가 뭐냐면 "특수를 보편 아래 포함된 것으로 사유하는 능력"이 판단력이라고 했다. 즉 특수를 보편 아래 포섭하는, 그런데 그 기준이 정해져 있으면 그런 판단력은 규정적 판단력이고, 특수에 대해서 보편이 주어져 있지 적절히 자지가 보편을 고안해내서 포섭을 시킨다고 하면 통제적이니까 반성적 판단력이라고 했다. 이런 경우에도 우리는 심리학 책을 읽어보면, 사람은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이 있는데 인간의 심리를 잘 드러내 보여주는 경우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에게 익숙한 것 또는 특수를 모으라고 했더니 엄밀하게 객관적이고 가능한면 공정한 기준에 따라 모으지 않고 사람들은 자기 편리한 것으로 모은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들이 의미하는 바이다. 그런 것들을 피해가려면, 내가 특수를 보편 아래 모아야 하는데 이미 보편이 주어져 있어서 그 아래에 모으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 전에 예를 들었던 것처럼 그리스도 신앙의 입문, 마르틴 루터의 신학, 세계종교사가 있는데 이 세권의 책을 가장 상위의 개념에 두면 책이겠고, 하위의 분류로는 종교에 관한 책이고, 더 아래 내려놓으면 세계종교사가 가장 범위가 넓고 그리스도 신앙의 입문, 마르틴 루터의 신학으로 나뉜다. 이렇게 나눌 때 사람들이 끊임없이 인생을 살면서 분류도 하고 나눠보기도 하고 흩어져 있는 것을 모으기도 하고, 즉 모음가 나눔을 계속 하면서 산다. 물론 이런 거 안해도 살 수 있다. 자기가 지금까지 해본 방식대로 익숙한 방식대로 그 기준을 가지고 하면 그것이 옳은 것일 수 있다. 그런데 부처님 말씀인데 자기도 모르게 악한 행동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어떤 행동을 하는 매순간 반성을 하는 것은 고통스러울테니까 그것까지는 아니어도 꾸준히 그런 자기점검을 해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그런 자기점검을 할 때 필요한 개념들을 배우는 것이다. 형이상학은 궁극적으로 사용되는 개념들을 배우는 것이다. 형이상학은 가장 기본이 되는 사유의 범주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학문이다. 여기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대상을 따질 때 자연 세계의 대상이다라고 하면 자연, 자유 이런 범주들이 얼마나 큰가. 그런 범주들을 따져묻는 것이 형이상학이다.

현대 철학에서는, 즉 칸트가 19세기 사람인데 19세기 이후의 철학은 크게 분석철학과 유럽대륙철학으로 나누다. 분석철학은 더 이상 철학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또는 인생은 무엇인가, 삶의 깊이를 더하려면 어떤 사색을 해야 하는 것들, 이런 것들, 지혜, 현명함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따져묻는 것이 철학이라는 생각을 버리자는 것이다. 분석철학은 명확한 지식, 확고한 지식의 근거가 무엇인가, 이것 만을 따져묻고 지식의 근거를 마련하는 일이 철학이 하는 일이다라고 말한다. 그런 분석철학과 그래도 여전히 철학은 인간의 실천적인 삶을 마련하는데 굉장히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고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대륙철학이다. 분석철학과 대륙철학의 구분이 칸트 이후에 본격적으로 생겨났다고 말할 수 있다. 두 가지 철학의 큰 흐름의 기반이 되는 것이 칸트의 책들이다. 지금가지 이야기한 것처럼 《순수이성비판》은 확실한 지식의 근거를 마련한다. 인간의 앎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까지다라고 말하는 책이다. 그렇게 되면 형이상학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순수이성비판》의 정신에 바탕을 두고 그것을 이어받아서 철학이라는 학문을 정확하고 엄밀한 지식의 근거에 대한 탐구로 국한시키자는 것이 분석철학이다. 그런데 《실천이성비판》이나 《판단력비판》처럼 특히 《판단력비판》처럼 인간은 이론만 가지고 살 수도 없고 또 근거 없이 실천만 가지고 살아가기도 어렵다. 그러니 인간은 이론과 실천의 통일에 항상 신경을 써야 하고 그 둘이 통일된 지혜의 형이상학을 구축하는데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하면 바로 대륙철학의 흐름이 된다. 그래서 《순수이성비판》과 《판단력비판》이 현대 철학의 큰 흐름인 분석철학과 유럽대륙철학에 영향을 주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왜 철학을 공부하는가에 대해서 대답을 할 때 이런 대답을 할 수 있겠다. 첫째 철학은 내가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이 정말 틀림없이 알고 있는가에 대해서 늘 괴로워하면서 살기 위해서 공부를 한다. 두번째로는 우리가 인생을 그리 오래 사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오늘날 생명에 관련된 여러가지 학문이 또는 여러가지 기술이 발전했다고 해도 어찌보면 굉장히 짧은 순간이다. 그런 짧은 순간에 가능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저지르는 악을 행하지 않고 사는 것. 신과 함께 가라 Vaya con Dios라는 영화에서 성당에서 바흐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 것처럼 그 정도로 기도하고 노래하며 신과 함께 가는 수준은 아니어도 적어도 자기도 모르게 저지르는 것은 몰라도 자기도 모르게 저지르는 악행을 그것도 최대한 줄이려면 깨어있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 그런 정신을 가지고 가능하면 악행을 줄이면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궁리할 때 우리의 삶의 여러 국면들을 탐구해본 이런 철학자들, 근본에 있어서 탐구한 철학자들의 이야기들이 지표가 되고 기준이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런 점에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이 자그나마 기여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을 해본다. 그런 점에서 칸트가 참 겸손하고 훌륭한 철학자라고 생각한다. 근대 철학자를 ⟪철학 고전 강의⟫에서 세 명을 다루는데 데카르트, 헤겔, 칸트, 그런데 데카르트나 헤겔에 비하면 칸트는 굉장히 겸손하다. 다음부터 설명할 헤겔은 오만할 정도로 인간이 가진 정신의 힘에 대한 자부심이 넘친다. 그렇게보면 칸트야말로 늘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것이 책을 읽으면 느껴진다. 함부로 선을 넘어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점이 보인다. "칸트는 자연과학의 도전에 직면하여 새로운 근거 위에 '장래의 형이상학'을 구축하고자 하였으나, 그러한 형이상학은 형이상학이 불가능함을 밝혀 보였을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한자와 무한자의 통일에 이른다는 것이 인간 이성의 요구이기는 하나 좌절될 수밖에 없는 것임을 뚜렷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칸트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그러한 좌절이다. 그러한 점에서 칸트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겠다.

제34강 380 칸트는 자연과학의 도전에 직면하여 새로운 근거 위에 '장래의 형이상학'을 구축하고자 하였으나, 그러한 형이상학은 형이상학이 불가능함을 밝혀 보였을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한자와 무한자의 통일에 이른다는 것이 인간 이성의 요구이기는 하나 좌절될 수밖에 없는 것임을 뚜렷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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