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철학 고전 강의 — 30

 

⟪철학 고전 강의 -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제35강

❧ 칸트와 헤겔
칸트는 인간의 사유가 더 나아갈 수 없는 한계를 지적하였다 — 비판(Kritik)
헤겔은 인간의 사유가 전체로서의 세계에 관한 체계를 구성할 수 있다고 한다 — 체계(System)

❧ 정신(Geist)과 백과사전
세계는 물질적인 것과 궁극목적으로서의 정신이 혼융된 것이다.
무한자의 작동원리를 밝힌 ⟪논리학⟫, 자연세계에서의 정신의 작동을 드러내는 ⟪자연철학⟫, 인간의 정신이 구축한 세계를 해명하는 ⟪정신철학⟫이 ⟪철학적 학문의 백과사전⟫을 이룬다.
모든 사물은 실재적인 측면과 개념적 측면이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궁극목적인 정신에서는 사물의 실재적 구별(distinctio realis)이 폐기되어 개념적 구별(distinctio rationis)만이 존립한다. 그렇다고해서 사물의 실재성이 소멸된 것은 아니다.

 

2021.05.04 철학 고전 강의 — 30

성서를 읽는 방법에는 크게 네 가지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첫째가 문자적 의미를 이해하고 또 독실한 신자라면 그것을 믿기도 한다. 두번째는 성서 그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 즉 알레고리, 우의적 의미를 찾아보는 것이다. 세번째는 성서의 도덕적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고, 네번째로는 성서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신의 뜻, 신비한 의미를 찾아보는 것이다. four fold reading 또는 four fold method, 네 겹으로 읽는 방법론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기독교를 믿는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 독실한 신자인지 물어봤을 때에는 1차적인 질문이다. 성경에 있는 말들을 그대로 믿는가를 묻다고 물어보면 그것은 문자적 의미를 그대로 믿는다는 말이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도 역사 속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 위대한 교부들을 보면 아주 다양한 종류의 신앙들을 볼 수 있다. 그런 것을 보면 믿는 방법도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이. 예를들면 알렉산드리아 교부였던 오리게네스, 나중에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가 되어서 성인이 못했다. 그래서 세례를 받을 때 오리게네스라는 세례명을 쓸 수가 없다. 성서를 읽는 방법이, 오리게네스 같은 경우 성서의 우의적 의미를 찾아내는 방법론을 확립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오리게네스가 이단이라고 하면 절대로 연구해서는 안될 것 같지만 한국에서 오리게네스이 쓴 주요 저작이 《원리론 De Principiis》이라는 책인데 이를 번역한 사람들이 하성수, 최원오, 이형우, 이성효인데 한국교부학연구회 속하는 신부님, 수도사님들이다. 이런 것을 보면 2천년 기독교 역사라고 하는 것이 끊임없이 신은 어떤 존재인가, 신과 이 세계의 관계는 어떠한가, 이런 질문을 놓고 아주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서 궁극해하고 나름대로 답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이단으로 몰려서 파문을 당하기도 하고 그랬던 역사이다. 다시 말해서 각각이 다른 물음을 가지고 도전한 것 같지만 큰 틀에서 보면 신학의 역사에서 전체를 이루는 하나의 가지들이라는 말이다. 어떤 것은 굉장히 무성하게 피어난 것도 있고 더러는 귀퉁이에서 조금 피어나다가 시들어버린 것들도 있고, 열매를 맺는 사람도 있다. 열매를 맺은 대표적인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와 같은 사람들이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철학의 역사를 살펴볼 때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철학의 역사도 저 먼 옛날부터 오늘 읽을 헤겔까지, 헤겔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희랍 우주모형의 원형인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들의 계보》를 형이상학에서 다루지는 않는다. 그런 역사를 살펴볼 때 철학에서 다루었던 문제를 살펴볼 때 철학사 전체가 굉장한 다양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 같지만 항상 근본적으로는 지금까지 논의해온 형이상학과 존재론의 주제를 가지고 다루었다는 것이다. 헤겔은 그렇게 생각해서 철학의 역사를 썼다. 모르긴 해도 철학사를 본격적인 의미에서, 고대에서 당대의 철학의 역사까지 쓴 사람은 헤겔이 처음일 것이다. 헤겔 철학을 공부할 때는 그래서 철학사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철학사라고 하는 것이 하나 하나 그때그때 철학자들이 나타나서 형이상학과 존재론의 여러 주제들에 대해서 깊이 탐구하고 치운 것이 아니라 선행하는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묶어서 다시 생각해는 역사다. 따라서 헤겔을 읽을 때는 선행하는 철학자들의 논의가 깊이 들어가 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자기와 같은 시대의 철학자라고 할 수 있는 칸트, 칸트가 헤겔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대립 또는 대결해야하는 철학자였다. 그리고 칸트 이후에 피히테, 쉘링, 헤겔을 독일 관념론 철학자라고 부르는데 이 사람들은 모두 다 칸트가 내놓은 문제의식 위에서 뭔가를 해 나아갔다고 보면 되겠다.

제35강 385 헤겔은 철학사를 달리 파악합니다. 그에 따르면 철학사는 그것 자체로 하나의 철학이어서 각각의 철학자들이 같은 문제를 놓고 사유한 것을 살펴보는 영역인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철학은 시대적인 규정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또한 철학이 사유하는 주제들은 언제나 동일하지만 그 사유방식은 다릅니다. 철학을 이렇게 규정한다면 철학자들이 사유하는 동일한 주제들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바로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해온 형이상학과 존재론의 주제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플라톤을 읽을 때, 앞서 성서를 이야기할 때와 마찬가지로, 플라톤의 형상, 좋음의 이데아가 있고 그것을 따라 한다고 이야기할 때, 플라톤의 이데아를 믿는지 물어보는 사람은 없다. 그냥 공부의 어떤 것을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헤겔 철학에서 절대적 정신 이런 것을 믿는지 물으면 당연히 아니다. 그 사람이 그것을 놓고 왜 이런 방식으로 생각했는가를 따져보기 위해서 헤겔 철학을 읽는 것이다. 칸트는 이런 것이 덜 하다.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앎의 능력의 한계를 뚜렷하게 지어주고,  그것을 넘어가는 것들에 대해서는 부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플라톤 같은 경우는 칸트처럼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논지를 그대로 플라톤에 적용하면 플라톤의 철학 전체는 그냥 거짓말인 것이다. 이성의 사변적 사용이 넘쳐 흐르는 텍스트이다. 그런데도 플라톤을 읽는다. 읽는 이유가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어떤 문제들이 있다는 것이다. 헤겔도 마찬가지로 플라톤을 읽듯이 또는 다른 철학자들을 읽듯이 또는 기독교의 신학자들을 읽듯이 읽어야 하다는 말이다. 문자적 의미 하나에 대해서 논변을 따져보는 것은 어떤 책도 읽을 수 없다는 말이다. 

헤겔에서는 칸트와 딱 반대지점에 서있는 사람으로 보는 것이 가장 좋다. 이 세계에는 궁극목적이 있다. 그게 신이라도 불리든 플라톤의 형상으로 불리든 관계없다. 플라톤의 철학에서 보면 좋음의 이데아가 있어서 이 세상 만물은 좋음의 이데아를 향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좋음이라는 형상을 향해가는, 형상을 목적으로 삼는 만물들이 이 세계에 있다. 그 정도 얘기하고 만다. 플라톤 철학을 읽어보면 좋음의 이데아 위에 인간과 인간들이 모여살고 있는 공동체를 정초 지으려는 철학이다. 그런데 헤겔에서는 아주 야망이 크게도 자연세계까지도 절대적 정신이라고 하는 궁극목적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체계적으로 배열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헤겔은 절대적 정신의 거대한 체계(System)를 세우려는 철학자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헤겔에 바로 앞서서 철학적 사유를 펼쳤던 칸트에게는 그런 시스템이 불가능하다. 그게 바로 이성의 사변적 사용이다. 초월적인 것에 대해서 사람이 막 구성을 해서는 안된다. 칸트는 인간의 능력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딱 규정해서 말했다고 해서 비판(Kritik) 철학이다. 헤겔은 어디까지가 한계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그 너머를 안다는 것이 아닌가, 그 너머를 모르면 끝도 모른다, 그러니 한계가 아니라 경계선일 뿐이다 라고 해서 비판(Kritik)이 아니라 체계(System)이 철학의 심각한 관심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헤겔의 철학에서 정신이라는 말이 나오면 우리의 육체와 대립하는 정신으로 이해하면 안되고 이 세계의 철저하게 스며들어가 있는 그러면서도 이 세계를 움직이는 이 세계를 이끌고 가는 궁극적인 무한한 초월적 실재 이것이 정신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한 정신이 아주 희미하게 자기 안에서만 머물러 있는 상태에서 시작해서 자연세계로 정신이 나아가고 그 정신이 다시 또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정신 세계를 구축하는 과정을 헤겔은 논리학, 자연철학, 정신철학으로 나누는데 그 과정 전체를 하나의 체계로 모아서, 세상 만물의 구조에 대해서 책을 썼는데 그게 바로 백과사전이다. 《철학적 학문의 백과사전》, 독일어로 줄여서 Enzyklopädie(encyclopedia)라고 말을 한다. 따라서 이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헤겔에서는 육체에 대립되는 정신이 아니라 자연에도 관철되어 있고 인간의 활동을 매개로 해서 이 세계를 구축해 나아가는 것이 정신이다, 궁극 목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궁극 목적은 물질적인 것과 이런 것에 결합해서 세계 만물의 원리가 되기도 한다. 헤겔의 읽는 후대의 학자들은 이런 부분들이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런데 왜 읽는가. 이런 것들이 있다. 우리가 어떤 사물에 대해서 생각할 때, 눈 앞에 꽃이 있다. 꽃이구나, 아름답구나 생각한다. 얼핏 보기에는 그냥 자연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알고 있는 개념들이 머릿속에 있어서 그 개념들을 조합해가면서 외부 데이터를 가지고 감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해서 내가 벚나무에 대해서 말한다고 그러면 안다고 할 때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까 생각을 해보면 벚꽃이 피어있는 순간에 대해서만 아는 것은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다시말해서 어떤 대상 세계에 있는 사물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안다고 말하는 것, 앎의 산물이 사상Gedanke인데, 우리 머리속에서 사유된 것이다. 순수한 물질로만 이루어져 있는 자연 사물에 내가 생각하는 것 또는 세상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또는 학문이 정립해 놓은 여러가지 개념들 이런 것들이 결합되어서 아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우리는 앎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헤겔은 사상Gedanke이라고 부른다.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상, 참된 사상, 참된 앎 이런 것은 어디에서 성립하는가. 조금 전에 벚나무에 대해서 안다고 할 때 벚꽃이 피어있는 순간만을 아는 것이 아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처럼 벚나무에 대해서 안다고 하면 사실은 이 지구상에 처음 생겨나고 그것이 진화의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의 모습을 띠게 되고 내가 잠깐 산책 나간 길에 피어있는 나무로 되기까지는 유구한 역사가 있다. 그것을 알아야 벚나무를 아는 것이고, 또 당장 한 그루의 벚나무에 대해서 씨앗이 심어지고, 싹이 돋고, 열매를 맺고 이런 circulation, 즉 처음부터 끝까지의 순화 전체를 알아야만 그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거기에 안다고 말하는 것, 씨앗이다, 싹이다, 꽃이다, 열매다라는 구별을 붙여 놓은 것은 개념적인 구별이고, 식물 자체는 씨앗, 싹, 꽃, 열매 이런 과정 각각은 실제 구별들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씨앗에서 싹으로 가면 그 실제적인 단계가 전환된 것이다. 어떤 사물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항상 우리는 사물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장점, 지금 단계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것을 '실제적 구별'이라고 말한다. 그것을 규정적으로 개념을 붙여서 말할 때는 '개념적 구별'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어떤 사물이든지 실제적 구별과 개념적 구별이 서로 결합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리고 사물의 생성과 또는 일생의 전체 과정에서는 그 사물이 개념적 구별과 실제적 구별이 일치되는 경우도 있고 실제적 구별이 변화함에 따라서 개념적 구별이 변화하는 단계도 있다. 이 두개가 결합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어느 지점에서 그런 것들이 딱 선을 갈라낼 수는 없다. 항상 끊임없이 연속되어 있다. […] 그렇게 물리적으로 실제적으로 구현되어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도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절대적 정신, 즉 실제적 구별은 폐기되고 개념적 구별만 보존하고 있는 그런 상태, 그것을 헤겔은 진리라고 얘기했다.

제35강 394 헤겔의 체계에서 신적 인식에 올라서기까지의 과정, 즉 예비학의 과정을 다루는 것이 《정신현상학》이고, 신적 인식을 다루는 것이 《논리학》입니다. 논리학은 신적 인식의 학입니다. 실제로는 인간이 세우는 학이지만 인간의 학이 아닙니다. 논리학은 청사진, 설계도이고, 이것에 따라서 자연과 현실 세계라고 하는 전체 세계가 만들어졌습니다. 따라서 다음에 오는 것이 실제[실재] 세계입니다. 즉 실재철학(Realphilosophie)입니다. 이 실재철학 안에 자연철학과 정신철학이 들어갑니다. 집약하면 예비학(Propädeutik), 논리학(Logik), 실재철학(Realphilosophie)입니다. 논리학과 실재철학을 합하여 체계라고 하고, 이 체계를 움직이고,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무한자, 신, 정신입니다. 이 안에 들어 있는 모든 존재는 실재적 구별은 폐기되어 있으나 개념적 구별은 보존된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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