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홍: 플로티노스 - 그리스 철학을 기독교에 전달한 사상가 | 살림지식총서 264

 

소개의 글
그노티 세아우톤-시대를 넘어선 물음
그의 철학의 출발점
‘새롭게’ 철학하기 : 신플라톤주의의 길
존재에 대한 탐구 : ‘존재론적인 물음’의 의미
‘하나’에 대한 역사적 회고
신플라톤주의의 선구자 플로티노스
당시 헬레니즘 후기 시대사조와 맞서서
‘정신’과 육체적인 삶
연대기 및 작품

 


(우리의 영혼이) 자기 바깥의 그 어떤 대상에만 몰두하는 까닭에, 그만 ‘하나'를 바라보지 못할 뿐이다. 바로 여기에 '하나'에 대한 철학하기가 (새롭게) 요구된다. (3,13 이하)

만일 사람들이 저 헤아리기 힘든 본성의 정체('하나')를 송두리째 알아내려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 하겠다. 누군가가 이를 원한다 할 때 실제로는 최소한 그 본성의 아주 작은 흔적만을 따라 생각할 수 있기에 말이다. 아니 더욱이 그 정신적인 본성을 관조하려 한다면, 저 감각적인 것 너머에 자리하고 있는 그것을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감각적인 것들에 관한 상상력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결국 저 정신적인 것(들)을 헤아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모든 정신적인 요소마저 정화해야 한다. 저편의 세계가 버젓이 자리한다는 사실을 물론 우리 자신의 정신을 따라 이해하게 되는데, 이때 (우리의) 정신은 그 어떤 분류를 따라 파악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도 정신이 정화된 상태에서 말이다. 여기서 '어떤 분류'라고 하는 사고방식은 실제적으로 아무런 의미를 띠지 못한다고 보는데, 왜냐하면 거기〔저편의 세계]에서는 이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어떤 존재자'로서 말할 만한 입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러한 사고방식은 우리가 우리의 탄생에 대해서 실상 무지한 까닭에 형용할 수 없는 그것에다 우리가 편리한 대로 '이름'을 부과하여 표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경우와 흡사하다 하겠다. 이에 준하여 붙인 '하나'라는 이름은 최소한 의도했던 바대로 '다수'에 반하는, 그 어떤 배제로서의 의미를 띤다고 하겠다. (Enn. V 5, 6.11~26)

만일 비물질적인 무엇(=정신적인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면, 마땅히 그들의 존재가 거기(저편의 세계)에 근거함을 알아보게 될 것이다. 그 순수한 정신으로 우리의 눈을 돌려 바라보자! 그리고 일체의 육체적인 눈을 감아 보라! 그러면 너는 보게 될 것이다. '존재의 발상지'를! 또한 그 안에 꺼지지 않는 불빛을! 너는 그것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어떻게 드러나는지 또 어떻게 생명에 머무르는지를! 마치 미래를 내다볼 필요 없이 오로지 지금만을, 더욱이 항상 지금뿐이요, 향상 현재만을 지향하는 그 어떤 생각처럼 [항상] 머물러 있는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Enn. VI 2, 8a.4~10) 

모든 자연은 자기 내면에 질서를 무시하지 않고 표출하며 또 자기 자신을 전개하는 능력을 지닌다. 그런 점에서 자연은 '갈라지지 않은 원천'이라는 하나의 씨앗으로부터 감각적으로 표출되는 그 마지막 종착점까지 꾸준히 발걸음을 내딛는다. 이때 자연은 앞서 내딛은 발걸음을 그의 고유한 행동반경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유의하며 또한 뒤이어 내딛는 발걸음 역시 말없이 그런 힘, 곧 그의 완전한 목표를 언제나 의식하며 주저 없이 내면의 원천으로 파고드는 그런 힘에 따라 차근차근 옮긴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존재의 전체성을 실현할 때까지 말이다. (중략) 왜냐하면 저마다 존재하는 것이 그의 본질적인 수용 능력에 따라 선善의 본성에 참여하는 것을 도대체 그 어떤 것도 방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nn. IV 8, 6.8~17) 

그러므로 최초의 것(존재)은 (가장) 순수한 것으로서 (다른) 모든 것들에 앞서 있는 것인 만큼, 그 이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다르며 그 자체로 있기에, 그로부터 비롯되는 그 어떤 것과도 섞이지 않고 존재하지만, 그런 모든 것들과 함께 존재하는 데 있어 남다른 방식으로 역량을 발휘한다. 그런 한에서 그것은 참된 의미에서 '하나'로 존재하며 결코 그 어떤 것도 앞세울 수 없으니, 그에 관하여 마치 다른 어떤 것('하나'라는 개념)을 앞세워 언표하듯 '그것은 하나다'하고 말한다면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것에 합당한 개념도 지식도 있지 않으니, 차라리 (우리가 경험하는) 존재의 저편에 있다고 말해야 옳기 때문이다. (1.5~10)

신화, 그것을 우리가 어떻든 경험하면서도 '무엇'으로 정의할 수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것이 다루고 있는 바처럼 이미 그 안에 자리한다고 여기는 일정한 질서와 힘을 따라 우리가 시간으로 분해하여 많은 사물들을 서로에게서 분리한 것을 (다시금) 모두 (재)결합하여 이해하려는 진술양식이다. 이는 일반 학문이 마치 '생겨나지 않은 것'을 생겨난 것처럼 다루고, 항상 결합되어 있는 것을 분리해 이해하는 것에 대비된다. 그러므로 신화가 우리에게 전하는 뜻은, 그 상징(암시)하는 바를 이해하는 사람에게 신화는 분리된 것들을 다시 하나로 엮어서 이해할 수 있게끔 도와준다는 사실이다. (Enn. III 5, 9.24~29)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를 통해서 존재하는데, 그 '하나'는 원천적이며 본래적으로 하나로 존재하되 편리한 의미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과 비교하여 그에 앞서 존재한다고 말할 뿐이다. 만일 '하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연 무엇이 존재할 수 있을까? (중략) 저 '하나'를 갖지 못한다면, 하나의 집도 하나의 배도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집도 배도 하나로 존재하기 때문이니, 만일 그런 하나-됨이 사라진다면, 집도 더 이상 집으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요, 배도 더 이상 배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가 그들(존재하는 것들) 곁에 함께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와 같이 응집된 하나-됨의 크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Enn. VI 9, 1.1~10)

존재하는 것의 존재(본질)는 그러므로 어느 만큼이라는 양적인 것에 따라 이해되지 않고, 오히려 양적인 것에 앞서서 이해된다. 존재 그 자체는 양적인 것에 무관한 것처럼, 그 어떤 양적인 것에 좌우되지 않으니, (인위적인) 나뉨으로 인해 단연 분절되지 않는 그것은 (외적으로)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그 자체의 삶과 본질 안에서 꾸준할 수 있다. (Enn. III 7, 6.49~53)

영혼은 (모든 물리적인) 움직임의 시원이요, 그로부터 다른 모든 움직임이 가능하다. 영혼은 그렇게 스스로 움직이는 무엇이다. 영혼은 그로써 함께하는 육체에 무엇보다도 '생명'을 부여한다. 그 생명은 영혼 스스로 취하는 것이요, 따라서 결코 (외적인 강요로) 상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혼이 그 자체로 길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Enn. IV 7, 9.7~10)

'하나'는 그 자체로 온통 자유요, 그에게는 조금도 자유 아닌 것이 없다. (중략) 그렇게 '하나'는 그 스스로로 말미암아 있으며 (중략) 그 스스로를 통하여 모든 것으로 존재한다. 아니 차라리 무無와 같으니, 그것은 스스로를 위해 더 이상 그 밖의 모든 것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네가 저 '하나에 대해 말하거나 그와 하나가 되겠다고 한다면, 그 밖의 모든 것을 청산하라. (나아가) 네가 이미 모든 것을 청산하고 오로지 저 '하나에만 매달려 왔다면, 그에 덧붙여 이해할 만한 어떤 것을 (따로) 찾으려 하지말고, 혹시 네가 그에 대해 미혹한 바를 아직 (다) 청산하지 않았는지 반성하라. (21.14~28)

원천으로부터 최종적인 아래에 이르기까지 그 흐름은 계속되는데, 각각의 단계들은 항상 그의 고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 '생겨난 것'은 그보다 한 단계 아래에 내려 서있는데, 그때마다 생겨난 것은 그 자신을 본떠 ‘낳은 것'과 닮은 채로 있다. 예를 들어 영혼이 어떤 식물에게 들어가면, 그 식물 안에 영혼의 어떤 일부만이 자리하기에, 영혼 자체에서 떨어져 나온 만큼 더 뒤떨어지고 산만한 모습으로 (각혼의) 식물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정신이 없는 (각혼의) 동물의 경우에서도 그러하기에, 그들은 감각적인 활동에만 자신을 내맡기듯 나타난다. 또 영혼이 인간에게 혹은 정신을 가진 실체에 들어가면, 정신에 따라 행동하는 이치와 같다. 이때 영혼은 정신을 자신의 고유한 무엇으로 삼고는 그 정신에 따라서 생각과 행위를 가다듬는다. (Enn. V 2,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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