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의 책을 읽다보면 | 05 파스칼의 팡세 4


팡세 (양장) - 10점
B. 파스칼 지음, 김형길 옮김/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7년 11월 4일부터 CBS 라디오 프로그램인 변상욱의 이야기쇼 2부에서 진행되는 "강유원의 책을 읽다보면"을 듣고 정리한다. 변상욱 대기자님과 강유원 선생님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팟캐스트 주소: http://www.podbbang.com/ch/11631




20180210_15 파스칼의 팡세 4

파스칼의 《팡세》는 상당히 진행자를 괴롭게 하고, 청취자를 괴롭게 하고 있다. 지난 시간 얘기를 축약한 다음에 오늘 얘기를 들어가야 할 것 같다. 


인간이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가, 그리고 또 우주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미미함으로 인하여 비참한가, 그런데 또 비참한 것을 아니까 그만큼 또 위대하기도 하다는 얘기를 했다. 파스칼의 기본메시지가 시작이 되었고, 그것이 이어지다가 그 비참함에서 인간을 구원할 존재로서 신이 등장한다.

그러니까 신은 우리보다 앞서 있으며, 함께 있으며, 우리가 도달할 곳에 미리 가있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으니까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시계열로 인식을 해야 하지만 신은 한 눈에 보는 것. 우리도 어느 때는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보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보면 미리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 그 미미한 존재로 세상을 파악하고 진리를 알겠다고 하는데 신을 근거로 하지 않으면 절대적인 진리라고 어떻게 주장할 수 있는가도 제기가 되고, 결국 신을 근거로 하지 않고, 신을 믿지 않는 인간은 진정한 선이나 진정한 정의에 대해서 근거와 기준이 없게 된다. 그래서 신이 중요한 존재로서 이야기에 등장한다.

신만이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다라고 《팡세》에서 얘기하고 있는데 이 말의 원천을 따져들어가보면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서 "당신으로부터 오는, 당신을 향한, 당신을 위한 기쁨"이다. 책을 읽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는 내용만 대개 살펴보기 쉬운데, 우리는 시험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천천히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인간의 위대함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에 있는데 《팡세》의 146절을 보면 "나무는 자기가 비참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그러나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비참함을 아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는 것까지 가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 사이 사기꾼들이 개입해서 헛된 욕망을 부추긴다. 


7. 위대, §146

인간의 위대성은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에 있다. 나무는 자기가 비참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그러나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이제는 《팡세》에서 신을 향해 나아간다.

이 부분은 사실 앞부분보다 훨씬 느끼하다. 신을 향한 발걸음에서 시작해서 신의 본성이 어떤 것이고, 그리스도교는 본격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논의하고, 메시아로서의 예수에 관한 논의로 끝을 맺는다. 특히나 뒷부분은 인간에 대한 논의보다는 신에 대한 논의들이 많다 보니 느끼하고, 무신론자들에게는 역겹고, 차라리 앞부분은 인간의 실존적인 처지와 상황에 대해서 말하니 수긍할만한데, 갑자기 인간 자신이 그렇게 비참하다는 것을 고백하고, 고작 신에 대해 의존한다는 것이 패배주의적인 태도도 보인다.


13장부터 26장까지는 원래 《팡세》라는 텍스트가 조각글이고, 특히나 이 부분은 조각글이기 때문에 그냥 완결된 논증이 아니니까 파스칼이 쓴 발언들 중 몇몇 구절들을 읽고 음미하는 것도 적절한 방법이다.


또 신이야 라고 하지만 오늘날에도 신을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신에 대한 간절한 물음을 과거 파스칼은 여정을 밟아나갔는지 보자.

첫번째로 192절에서 세상은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있는가를 보면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세부적으로 보면 "신을 발견하고 나서 그에게 봉사하고 있는 사람들" 신앙인이다. "신을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를 찾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 이게 말하자면 예비신앙인 또는 적어도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 그 다음에 "신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찾지도 않으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 요새 말로 하자면 아무 생각없이 사는 사람들이다. 첫번째 사람은 신을 발견하고 봉사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아직 찾고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은 마찬가지. 사실 두 번째에 있는 사람이 제일 괴롭다. 세번째 사람들은 필로조프라고 말하는데 직역을 하면 철학자들이다. 파스칼처럼 17세기 프랑스 사람에게는 필로조프라는 말이 오늘날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일종의 무신론자들의 앞선 세대로 이해를 하면 괜찮을 것이다. 그러다가 이 용어가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들을 가리킬 때도 필로조프라는 말을 쓴다. 파스칼은 자기가 가장 경멸하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 파스칼에게는 필로조프이다. 또한 인간의 이성을 가지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렇다. 대개 18세기를 프랑스 계몽주의라고 하는데 파스칼에서 벌써 연결고리를 볼 수 있다.


13. 시작, §192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신을 발견하고 나서 그에게 봉사하고 있는 사람들, 신을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를 찾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신을 발견하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그를 찾지도 않으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 첫 번째 사람들은 분별력이 있고 동시에 행복한 사람들이고 마지막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이고 불행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중간의 사람들은 불행하지만 분별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둘째 종류의 사람들, 인간이 자신의 비참한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인간, 그러면서 동시에 신을 찾아가는 인간. 그러면 신을 어디에 있는가를 묻게 된다. 그런데 인간이 신을 찾아낼 수 없다. 신이라는 것을 바깥에서 찾지 말고, 내가 신에 대한 갈증이 있고 신을 갈구하면 갈구할 수록 갈구하는 마음에 신이 있다는 것. 내가 유한자라는 것, 내가 비참한 존재라는 것, 파스칼의 논변이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의 논변에서 나온 것. 《고백록》에서도 신을 찾는 부분이 있다. 신을 찾아가는 마음이 있는데 아우구스티누스가 갑자기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서 "그 마음이 제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 그 마음이 있는 곳에 신께서 계십니다. 그리고 신을 찾는 마음은 그 신이 계신 마음 속에 바로 아래 신을 원합니다"라고 말을 한다.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내성적 논변이다. 그러면서 폴 틸리히 신학이 새로운 측면을 열었던 것. 


숨어 있는 신 테제.

프로테스탄트의 신학은 사실 그 이전 중세 가톨릭 교회에서는 여럿이 모여서 눈에 띄는 선행을 행함으로써 신의 구원에 가깝게 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신은 내 마음 속에 있기 때문에 내 안에서 나를 진정으로 찾아내면 이것이 구원에 가는 길이다 라는 것이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신이 곁에 있는 존재'라고 해서 얼마나 든든하냐고 말하는 것. 그런데 그 신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는 구약성서부터 시작해서 신은 인간이 마음에 있지도 않고, 사실 신이 내 마음에 있다는 발견 자체가 기독교 신학자체가 엄청난 혁신이다. 원래 신은 숨어 있는 존재이다. 그런데 파스칼은 내 마음 속에 있다는 말은 하지 않고 숨은 신 테제를 끄집어낸다. "참으로 당신은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성경 이사야 45장 15절의 이야기를 가져온다. 이 테제가 구약성서에서 등장하는데 파스칼이 굉장히 233, 260, 275 절에서 계속해서 이야기 한다. "이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이 나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한다" 그 뒤에 신이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 파스칼에서는 신에 대한 논변에서 최종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것이 이사야서에서 제시되었던 숨은 신 테제이니까 사실상 이것에 대해서 묵상하는 것이 파스칼에 대한 독서의 시작이고 끝이라고 할 수 있다.


16. 인간을 아는 것으로부터 신을 알게 되는 과정, §233

이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이 나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한다.


19. 종교의 기초와 반대에 대한 답변, §260

예언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가 명백하게 하나님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진실로 숨어계신 하나님이라는 것, 그는 오해를 받을 것이라는 것, 사람들은 결코 이 사람이 그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 그는 걸림돌이 되어 여러 사람들이 거기에 부딪히게 될 것이라는 등. 명료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우리들을 더 이상 비난하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그렇게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람들은 애매모호한 점들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점들이 없다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딪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예언자들이 공식적으로 드러낸 의도이다.


19. 종교의 기초와 반대에 대한 답변, §275

하나님께서 숨어 계시기를 원하셨다는 것. 만일에 종교가 하나밖에 없을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 종교 속에 분명하게 나타나실 것이다. 만일에 우리들의 종교에만 순교자들이 있을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숨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숨어 계신다고 말하지 않는 모든 종교는 참 종교가 아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 모든 종교는 교육적인 종교가 아니다. 우리들의 종교는 그 모든 일을 하고 있다.


프랑스 얘기가 나왔는데 아메리카 스타일은 어떤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민간 사람들은 엄청난 신앙인이다. 그러니까 '미국 예외주의'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유럽사람들과 다르다는 말이다. 계몽주의자의 태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과학적인 이성을 신봉하면서도 신에 대한 신앙이 동시에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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