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열: 중국철학사 1


중국철학사 1 - 10점
김충렬 지음/예문서원


001. <1> 중국철학사 서설 

002. '철학'의 정의와 '중국적 철학' 

003. 중국 철학의 특성 

004. 중국 철학의 발생과 철학사의 기원 문제 

005. 중국 철학사의 기원과 원류 문제 

006. <2> 중국 철학의 배태기 

007. 중국 문화의 원경 

008. 하대 사상 - 소박한 자연주의의 형성 

009. 은대 사상 - 추상적 신귀관념의 대두 

010. 하.은 사상의 집성 - '홍범구주' 

011. <3>서주의 인문사상 

012. 은상 종교 사상의 사주 인문 사상으로서의 전환 

013. 주공의 예악제정과 봉건제도 

014. 서주 말. 동주초의 사회 동요와 반인문 사상 

015. <4> 춘추초기의 철학사상 

016. 동주의 존왕양이 사상 

017. 관중과 '관자' 

018. 관중의 철학사상 

019. 관중의 사회사상 

020. 중국 철학사에서 관중의 위상 

021. <5> 춘추 중기의 철학사상 

022. 서주 말에서 춘추 중기까지의 사상의 흐름 

023. 반전통 사상의 태동과 그 특징 

024. 정자산의 정치 개혁과 철학 사상 

025. 자산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반응 





58 중국 철학과 서양 철학은 그 출발점에서 철학적 과제를 설정하는 것부터가 달랐다. 아름다운 환경과 여유 있는 생활 속에서 경이와 회의 그리고 호기심을 풀어 보려고 철학을 했다는 그리스인은 직접적인 삶과 거리가 먼 추상적인 세계를 동경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우주는 어디서 왔는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하는 형이상학적 본체론을 주제로 하여 사변적이고 논리적인 인식론을 발달시켰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황막한 평원에서 삶 자체에 골몰하고 우환 속에서 생존을 도모해야 했던 고대의 중국인들은 우선 그들의 삶에 절실한 농경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는 자연의 질서와 공능을 터득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 그들은 ①"우리가 삶을 기탁하고 있는 이 세상(自然, 즉 天)은 어떻게 있으며"(天道, 즉 천지의 운행과 기후 변화 등), ② "그렇게 있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人道, 즉 삶의 방법과 안정의 모색) 하는 구체적이고도 삶에 절실한 문제를 철학의 과제로 삶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철학은 자연히 경험적이고 실용적인 자연관과 윤리관이 주축이 되었다.

그런데 중국 철학의 이러한 두 가지 원초적인 과제는 결국은 문제 ② 하나로 귀착된다. 왜냐하면 ①의 경우, 그것은 사실상 문제 ②의 답을 구하기 위한 근거로 설정된 것이므로 문제 ①을 보는 태도도 자연히 문제 ②가 요구하는 내용, 즉 자연의 인간에 대한 관계 문제로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문제 ①도 자연(세계) 자체는 무엇으로 되어있고 (실체의 문제) 그것은 어디서 왔는가 (근원의 문제)하는 본체론적인 측면보다는, 이미 그렇게 있는 자연은 어떻게 작용하며 그것은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하는, 자연의 운행이나 생성 변화, 기후 조건 등과 같은 실용적인 특성을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게 되었다. 한편 문제 ②의 경우도 이것은 문제 ①에서 파악된 자연 속에서 그 운행 변화에 적합하도록 설계되어야 했으므로 그들이 생각한 인생의 목적이나 생활 방식 같은 것은 우선은 자연을 주격으로 하고 인생을 부격으로 하는 구도 속에서 모색되는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었다.

원초적으로 설정된 과제의 이러한 특성과 제약 때문에서였는지 중국 철학은 일반적으로 자연 밖의 초자연계를 설정하지 않았고, 신이나 주재자와 같은 경험의 영역을 넘어서는 절대적 존재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순수 학문인 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중국 철학의 이러한 특징은 의외로 그 사유의 범위를 좁히고 유한한 현실에만 매달리게 한다는 약점을 지닌다. 또 사실 이후의 중국 철학자를 개괄할 때 이런 약점은 실제로 구체화되어 중국 철학의 특성 가운데 하나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고대 중국인들의 인생관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현세적이었기 때문에 복합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이나 사변을 위한 사변력이 그들의 철학적 전통 속에서는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이 중국 철학에서 인식론이 발달하지 못한 커다란 원인 가운데 하나이다.


340 하, 은, 주의 삼대 철학 사상의 핵심 개념과 줄기 개념이 춘추 초•중기를 거치면서 변천한 과정과 내용을 일별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라의 '천天'과 은나라의 '제帝' 개념의 복합 개념인 '천명', '상제' 등의 범주는 여전히 종교 미신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고 오히려 현실 정치를 지배하는 관념적인 권위체가 되어 인간의 존재 범위를 위축시켰다. 그러나 다행히 자연과 신의 합세로 인간을 지배하던 종교 미신적 관념인 이 '천'과 '제'는 주초에 오면서 인간의 존재 위상이 강화되거나 제고되어 '천명'이나 '상제'라는 개념의 범주가 달라짐에 따라서 그 개념의 지배 영역이 위축 또는 도태되어 갔다. 물론 주초의 '인간' 자체가 '도덕적 인간'이라는 범주적 특성 혹은 조건을 띤 것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무튼 이 시기에 등장한 몇 가지 사유 내용들은 기존의 미신 종교가 지배하던 관념적이고 현실적인 영역을 지위로 전환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인간이 자기의 행위에 대해 자기가 책임 지려는 '우환 의식'이나 '흉'과 '화'와 같은 인간 행위가 가져오는 착오를 미리 막기 위한 '경敬' 혹은 '덕德'과 같은 자기 수행 덕목 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초에 들어와 미신 종교의 관념적인 잔재나 현실 지배적 영향이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형식은 같아도 내용이나 본질이 바뀐 제사 형태를 통해 다시 인간의 심성을 정화하는 도덕 수양의 한 방법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니까 외면적으로만 본다면 신의 존재니 그것의 신비스러운 작용이니 하는 것은 여전히 없어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러한 신 개념이나 그것은 작용은 통치 계급의 경우에는 통치 수단으로 이용되었고 일반 백성에게는 현실의 고뇌를 달래고 복된 미래를 염원하는 귀의처 역할을 하였다. 은나라의 종교 문화에서 신은 일정한 특수 지배층만이 제사 지낼 수 있는 존재였고, 또 신 자신도 그들에게만 복을 주고 국가를 융성하게 해 주는 그런 독점적인 성격이 강했지만, 주나라에 오면 종교의 민주화라고 할까 아무튼 신은 모든 사람의 기원 대상이 되었으며 "하늘은 백성의 바람에 따른다"고 해서 천이 모든 살마의 염원을 들어 주는 것으로 되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은나라의 종교 형태는 주에 들어와 없어졌다기보다 오히려 좋게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의 본질면에서의 변화도 한계가 있다. 종교란 실질적으로 인간의 염원을 들어 주는 효험이 있을 때라야 그 존재 의의가 확보되어 계속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 그렇지 못할 때는 더 이상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은대 종교의 신 개념이 은나라가 망하면서 위기에 봉착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동주에 들어오면서 일반 백성이 천과 신 혹은 조상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저주하며 고통스러운 현실로 돌아와 자기 자신만을 들여다보게 된 원인도 이처럼 신이 현실적 인간의 삶의 문제에 대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대문에 동주에 들어서면 은대로부터 내려오던 종교 문화는 두 번째의 위기를 맞는다. 하부 구조인 백성들에 의해 거부된 신은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게 되었고, 따라서 그것은 오직 혹세무민하는 자들에 의해 세상과 사람들을 속이는 수단으로 이용될 뿐이었다.

한편 이처럼 은나라의 '상제' 개념, 즉 종교 미신적인 개념 범주가 주초 이래 계속 쇠퇴 일로를 걷던 것과는 달리 하나라의 '천', 즉 '자연' 개념의 범주는 춘추 시대에 접어들어서는 크게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본래 '자연천'의 개념이 농후했던 하나라의 '천은' 은나라의 종교와 결탁하여 '천명'이 라는 종교성을 띠다가 주초에 이르러 다시 '도덕천'(義理天)의 의미를 띠면서 은나라의 종교가 지배하던 영역을 대체해 갔다. 그 후 중국 철학 사상, 특히 유가 철학은 바로 이 주초에 부상한 '도덕천'이 그 사상적 뿌리가 되어 발전한 것이다. 그러다가 동주의 사상적 공백기에 이르러 이 도덕천 역시 그 존재 근거에 손상을 입게 되자 하나라 본유의 자연천 사상이 서서히 그 본모습을 되찾으면서 종교신이나 도덕인의 범주 영역을 상대적으로 대체해 갔다. 춘추 중기의 자연 현상에 대한 경험적 파악, '음•양'과 같은 기氣 개념의 등장, 그리고 물질의 화합 및 생성관 등 획기적인 발전이 그것이다. 자연 개념에 대한 이러한 합리적이며 인식론적인 이해와 파악의 결과 종교 미신적인 신의 존재는 거의 부정당하는 위기에 까지 몰리고, 상대적으로 '인간' 개 념의 범주가 신보다 상위 개념으로 부상해 가면서 마침내 그것이 자연 개념의 범주에까지 도전하는 발전을 가져왔다.

이것은 한편으로 '인간'의 지능면의 발전에 힘입은 것이기도 하나 그보다 더 직접적인 원인은 주초 이래 발전한 철기 문화의 영향 때문이었다. 인간이 철제 공구를 사용하면서 활동의 기능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바로 '인간' 개념 범주가 신이나 자연 개념 범주를 그만큼 점령해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앞에 살펴본 몇 가지 반전통적인 사조들, 즉 계량의 "백성은 신의 주인이다. 그래서 성왕은 먼저 백성을 위한 뒤 신을 섬긴다"는 설과 사은의 "나라가 흥하려면 백성의 소리를 듣고 망하려면 신의 소리를 듣는다. 신은 총명정직하고 한결같은 존재로 사람에 의지해서 나타난다"는 설 등은 바로 인간 개념 범주가 신 개념 범주를 물리치거나 그 상위 개념으로 발전했음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도 인간 개념의 범주가 신 개념을 넘어 다시 자연 개념 범주까지 대체해 가기에는 아직은 역부족인 상황이었다. 이상이 대략 자연과 신과 인간의 문제에 대한 자신 시대 이전의 전개 양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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