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놀트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 선사시대부터 중세까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 10점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백낙청 외 옮김/창비


목차

1권-선사시대부터 중세까지


제1장 선사시대

제2장 고대 오리엔트의 도시문화

제3장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제4장 중세



제1장 선사시대

1. 구석기시대: 마술과 자연주의

15 구석기 시대 자연주의 미술의 특징은, 근대 인상주의의 출현이 있기까지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직접적이고 순수하며 어떠한 이지적인 작용이나 제약도 받지 않는 형태로 시각적인 인상을 재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5 우리 현대인들이 복잡한 기구를 동원해서야 발견해낸 갖가지 뉘앙스를 구석기 시대 화가들은 그대로 육안으로 볼 수 있었다. 이러한 능력은 신석기 시대에 이미 상실되었으며, 이 단계에서 벌써 인간은 감각적 인상의 직접성 대신 개념의 고정불변성에 의존하게 되었다.


17 이 시대의 그림은 이러한 마술의 도구였던 것이다. 즉 그림은 짐승이 그 속에 걸려들게 되어 있는 '함정'이었다. 아니, 이미 짐승이 걸려든 함정이었다고 말하는 게 좀더 정확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림은 대상의 재현이자 대상 그 자체이며, 소망의 표현임과 동시에 소망의 달성이었기 때문이다. 구석기시대의 사냥꾼 예술가는 그 그림을 통해 실물 자체를 소유한다고 믿었고, 그림을 그림으로써 그려진 사물을 지배하는 힘을 얻는다고 믿었던 것이다.


2. 신석기시대: 애니미즘과 기하학 양식

22 자연주의적 양식은 구석기시대의 종말까지, 그러니까 수만년간 지속되었다. 예술사에서 최초의 양식변화를 이루는 전환점이 나타나는 것은 구석기시대가 신석기시대로 이행하면서였다. 이때 비로소 체험과 경험에 대해 개방적인 자연주의적 경향이 물러나고, 경험세계의 풍성함을 등진채 모든 것을 기하학적 무늬로 양식화하려는 경향이 지배하게 된다.


23 이렇게 철저히 추상화된 예술형식에 이르는 예술양식상의 변화는 아마도 인류역사에서 가장 깊은 단절을 뜻한다고 할 문명 전반에 걸친 일대 변혁과 관련된 것이다. 이때 선사시대 인류의 물질적 환경과 정신구조에 일어난 변화는 너무나 근본적인 것이어서, 돌이켜보건대 그 이전의 생활은 모두 단순히 동물적 본능이었던 데 비해 그 이후의 모든 변화는 목적의식을 지닌 하나의 연속적 발전이라는 인상을 줄 정도다.


25 농경문화, 목축문화와 더불어서야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운명이 일정한 섭리와 의도를 지닌 힘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날씨가 고른 정도, 비와 햇볕, 천둥과 우박, 전염병과 가뭄, 토지의 비옥함이나 가축의 다산성 여부 등에 의존하고 있다는 의식은 축복 또는 저주를 가져다 주는 선악 사이의 온갖 신령이나 정령의 개념을 낳으며, 신비스러운 미지의 존재, 압도적인 위력을 가진 초인적 존재,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존재에 대한 관념을 낳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는 양분되고 인간도 자기 자신을 양분된 존재로 인식한다. 인류문화는 이제 애니미즘과 정령숭배, 영혼신앙과 사자예배의 단계에 이른 것이다.


26 예술작품은 이제 단순히 대상의 재현일 뿐 아니라 사유의 표현이며, 기억의 소산만이 아니고 상상력의 산물이기도 하다. 바꾸어 말하면 예술가의 마음속에 있는 감각적이 아닌 개념적인 요소가 감성적•비합리적 요소를 압도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실물의 모사는 점차 상형문자식의 기호로 변하여 사실성(寫實性)이 넘치는 그림은 사실성이 전혀 없거나 거의 없는 일종의 속기 기호로 변모하게 된다.


28 기하학적 모양을 위주로 하는 장식적•형식주의적 예술은 신석기시대와 더불어 시작된 이래 실로 오랜 기간 동안 아무런 도전도 받지 않고 지속되었다. 한 예술양식이 이렇게 오랜 기간을 지배한 일은 역사시대에 들어선 이래 어떠한 예술양식의 경우에도 ― 특히 엄격한 형식주의 자체의 경우에는 더욱이나 ― 다시 볼 수 없는 현상이다. 끄리띠, 미께네 예술을 제외하고는 청동기시대와 철기 시대 전부, 고대 오리엔트의 예술과 그리스의 아케이즘(archaism) 예술 전부를 이 양식이 지배하고 있는바, 바꾸어 말하면 기원전 5000년에서 기원전 약 500년에 이르는 세계사의 시기가 한 가지 예술양식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이다.


3. 마술사 또는 성직자로서의 예술가, 전문직업 또는 가내수공예로서의 예술



제2장 고대 오리엔트의 도시문화

1. 고대 오리엔트 예술의 동적 요소와 정적 요소

50 이집트에서는 애초부터 조형예술 작품들, 특히 무덤의 장식을 위한 작품의 수요가 대단했던만큼 예술가라는 직업이 상당히 일찍부터 독립되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하지만 예술이 다른 목적에 봉사하는 수담임이 철저히 강조되고 실용적인 과업에 완전히 몰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예술가 자신의 개인적 존재 같은 것은 완전히 작품의 이면으로 사라지고 만다.


2. 이집트 예술가의 지위와 예술활동의 조직화

56 물론 신석기시대의 종교예술에도 이미 틀에 박힌 양식이 없지 않지만 이집트의 궁정예술에서 볼 수 있는 거북살스러울 정도로 의식적인 형식은 전혀 새로운 것으로서, 이것은 인류사에서 이때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3. 중제국시대 예술의 유형화

58 자연주의적인 묘사를 선택한 원인은 무엇보다 먼저 이 마술적, 종교적 목적에 있었다. 이에 반하여 예술작품에서 권위를 나타내려는 목적 쪽이 마술적인 의의보다 더 우세해진 중제국시대에 들어오면 초상이 갖는 마술적 성격은 상실되어가고 그와 동시에 자연주의적인 묘사도 자취를 감춰버린다. 왕의 상은 한 사람의 개인적인 상이기에 앞서 우선 한 사람의 왕의 상이 되어야만 했다.


59 자연주의를 취하느냐 추상으로 달리느냐의 선택이 이집트인의 경우처럼 뚜렷하게 의지와 능력의 문제였던 경우는 예술사에서 그 유례가 없다. 즉 이집트인들은 예술작품을 제작하는 데 있어 단순한 미적 관점만을 척도로 삼지 않고 예술작품 속에서도 실생활에서의 행동과 동일한 기준을 도입하고자 했다.


60 이러한 데스마스크가 보여주듯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그가 자연주의적인 수법을 버렸다는 것은 의식적인 결단이었다고 추측해도 무방할 것이다.


61 고대 오리엔트의 미술, 그중에서도 이집트 예술에서 보이는 모든 합리주의적 형식원리 가운데 가장 뚜렷하고 가장 특징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정면성'(Frontalitat)의 원리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면성'의 원리란 랑에 및 에르만이 발견한 인체묘사의 법칙으로, 이 법칙에 따르면 인체는 그것이 어떠한 자세를 취하고 있든 간에 가슴의 표면만은 그 전부가 감상자 쪽을 향하도록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4. 아메노피스 4세 시대의 자연주의


5. 메소포타미아

72 메소포타미아 예술에 관한 진정한 문제점은 경제적으로나 상업과 수공업, 화폐와 신용제도가 압도적인 비중을 점유하고 있던 이 나라의 예술이 농업 및 자연경제에 더 깊이 뿌리박고 있던 이집트 예술보다 더 엄격한 규율에 매여 변화나 신선함이 적다는 사실이다.


6. 끄리띠

75 고대 오리엔트 예술 전체에서 끄리띠(Kriti) 섬의 예술만큼 사회학적으로 해명하기 곤란한 예술은 없다 즉 이 예술은 이집트 및 메소포타미아 예술에 비해서 특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석기 시대의 종말로부터 고전기 그리스 시대 개막까지의 미술사 전과정을 통해서도 하나의 예외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78 끄리띠 사람들이 기념비적인 장대하고 엄격한 양식의 작품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이집트 예술과 같은 웅대한 예술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러한 것이 그들의 취미와 예술의욕에 맞지 않았다는 증거인 것이다.


78 끄리띠 예술은 대체로 자연주의적 경향이 강한 편인 채, 처음에는 아마도 신석기시대로부터의 영향이 아직 남아 있던 시기의 주로 기하학적인 형식주의에서 출발하여 극단적인 자연주의 시대를 거쳤다가, 다시 고풍스럽고 약간 아카데믹한 면이 있는 양식화 시대로 되돌아온다. 미노아(Minoa) 문화 중기의 마지막 무렵, 즉 기원전 2천년기 중기 시기에 이르러서야 끄리띠는 독자적인 자연주의 양식을 발견하고 예술발전의 정점에 도달한다. 그러다가 기원전 2천년기 후반에는 다시 그 신선함과 자연스러움의 대부분을 잃고, 그 형식은 더욱더 도식화되고 인습적이며 딱딱하고 추상적인 것이 된다.



제3장 고대 그리스와 로마

1. 영웅시대와 호메로스 시대

86 모든 원시시대의 문학이 그렇듯이 선사시대의 그리스 문학도 주문이나 신탁의 일종이요 축복이나 기원을 위한 격식에 맞춘 문장들이거나 군가 또는 노동요였다고 생각된다. 이들 장르에 공통된 하나의 특색은 그 모두가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집단적 문학이었다는 사실이다.


87 영웅시대가 시작되면서 문학의 사회적 기능과 사회적 지위는 완전히 달라진다. 사회의 상층을 차지하게 된 무사계급의 세속적, 개인주의적 세계관은 문학에 새로운 내용을 불어넣은 동시에 시인의 역할까지 바꾸어 놓았다.


88 씨족 공동체가 점차 붕괴의 길을 밟고 있었다는 사실을 가장 두드러지게 입증하는 것은 영웅시대 이래 혈족간의 알력이 증대하는 경향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88 고전주의 시대의 그리스 비극에는 아직 씨족국가와 민족국가의 갈등을 소재로 한 것이 많은데, 쏘포끌레스의 [안티고네]의 주제를 이루고 있는 것도 역시 이미 [일리아드]의 주제를 이룬 의리의 문제였다.


89 영웅시의 첫째 목적은 무엇보다도 이 명예심을 만족시키는 일이었고 그 밖의 것은 감상자의 입장에서는 부차적인 의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예술은 모두 이러한 명예욕, 동시대 및 후세 사람들한테 칭송받고 싶다는 욕구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89 시는 그 종교적인 의미를 상실함과 동시에 서정적인 성격을 잃어버리고 서사시적인 것이 되었는데, 이 '서사시'야말로 유럽 문학에서 종교적 의례와 관계없는 세속적인 것으로서는 우리가 알기로 가장 오래된 문학인 것이다.


94 음유시인들은 이미 문자를 쓸 줄 알고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훨씬 뒤의 시대까지도 호메로스의 시를 전부 외우는 낭송자들이 있었지만 문자화된 텍스트가 전혀 없이 낭송으로만 내려왔다면 서사시의 내용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와해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99 서사시는 에에게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가 융합되는 용광로이자 당시 국제무역의 중심지였던 소아시에서 발단한 것이라면, 기하학 무늬 중심의 당시의 조형예술은 그리스 본토, 즉 도리스와 보이오띠아의 농경사회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호메로스의 스타일은 국제적으로 개방된 도시인의 언어인 반면 기하학주의는 모든 이질적인 것에 대해 등을 돌리려는 시골의 농민과 목축민의 표현형식이었다. 


2. 아케이즘과 참주제하의 예술

102 그러다가 이제 귀족계급의 윤리관이 확립되기에 이른 것이다. 종족•혈통•전통에 근거하여 신체적인 우수성과 군인다운 기율을 중시하는 '아레떼(arete,덕)'의 개념이라든가, 육체적 요소와 정신적 요소의 균형이라는 이념을 내세운 '깔로까가티아'(kalokagathia, 선과 미의 융합), 극기와 자체 및 절도를 이상으로 하는 '쏘프로씨네'(sophrosyne, 절제의 미덕)의 개념이 귀족 윤리의 근간을 이루는 덕목으로 확립된 것이다.


3. 고전주의 예술과 민주정치

122 일반 시민은 입장료를 지불할 필요도 없는데다 도리어 극장에서 보낸 시간에 대하여 보상금까지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흔히 민주주의의 최고의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칭송받기도 하나, 실은 이것이야말로 일반 민중이 연극의 운명에 대해 발언할 길을 처음부터 막아버린 요인이었다. 입장료 형식으로 지불되는 소단위의 금액들에 의존하는 극장만이 진정한 의미의 '민중극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22 고대 그리스•로마에서 진정한 의미의 민중 연극은 미무스(minus, mime, 실생활에서 취재하여 주로 흉내와 춤으로된 광대극, 익살극 - 옮긴이)였다. 미무스는 국가로부터 아무런 지원금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상부의 어떤 지시에도 따를 필요가 없었고 민중과의 접촉에서 얻은 스스로의 직접적인 체험에만 의존하면서 자유로운 활동을 하고 있었다. 


124 축제극장은 도시 국가가 가진 가장 효과적인 선전 시설이었다. 따라서 도시국가가 이의 운영을 시인들 마음대로 하도록 맡겨놓지 않았음은 당연한 일이다.


124 국가는 공연된 작품에 대해 돈을 지불했던 바, 국가의 정책이나 지배계급의 이해에 합치되는 작품의 공연만을 허용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124 실생활이나 정치와 하등 관계가 없는 연근이라는 관념은 당시의 예술관으로 보면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스 비극은 가장 좁은 의미에서의 '정치극'이었다.


4. 그리스의 계몽사조


5. 헬레니즘 시대

147 이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사람들은 그리스 예술의 발전을 한눈으로 둘러볼 수 있는 '완벽한' 조각진열관을 만들려고 했고, 또 중요 작품의 실물을 손에 넣을 수 없을 경우에는 하다못해 복제라도 만들려고 했다. 헬레니즘 시대의 수집은 이러한 학문적 계획성이라는 점에서 근대 박물관과 미술관의 선구자였다.

    

6. 제정시대와 고대 후기

152 그리스 초상예술과의 결정적인 차이는 그리스인들이 공적인 기념비로 쓰기 위한 것 외에는 거의 초상조각을 만들지 않았던 반면 로마에서는 그것이 대부분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154 그리스 고전 미술을 대표하는 것이 조각이었던 것처럼 로마시대 후기 및 초기 그리스도교의 대표적 예술은 회화였다. 동시에 그것은 로마의 민중예술, 즉 모든 사람을 향해 모든 사람의 말로 이야기하는 예술이기도 했다.


7. 고대 그리스ㆍ로마의 시인과 조형예술가

162 그리스의 지배계급 및 그들의 철학자들에게는 '충분한 여가'야 말로 모든 선과 미의 전제조건이었고 그것을 갖는 자만이 보람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여겼다. 여가가 있는 사람만이 지혜에 이르고 내면적 자유를 획득하며 인생을 지배하고 향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상이 금리생활자층의 사회적 입장과 직결되어 있음은 명백하다.


163 부르크하르트에 의하면, 어떤 민족이 노동이라는 것을 어떻게 평가하는가는 그 민족의 생활이상을 낳은 생활환경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현대 서양의 생활일상의 어버이가 된 중세 시민계급이 정신적인 면과 물질적인 면에서 모두 점차로 귀족을 능가해간 반면, 그리스인들의 생활이상은 그들의 영웅시대 즉 유용성을 초월한 세계에서 발단된 것으로 그들은 수세기에 걸쳐 이러한 조상의 유산에 매달려왔던 것이다.



제4장 중세

1. 초기 그리스도교 예술의 정신주의

180 고전기 그리스•로마의 사실주의에서 멀어져간 그리스도교 예술은 두 가지 방향을 취하게 되었다. 하나는 상징주의적 방향으로, 거기서는 묘사보다는 오히려 그려야 할 신성한 대상의 정신을 화면에 떠오르게 하는 것이 문제였고, 따라서 세부적인 묘사 하나하나가 모두 그리스도교적 구원을 가르치는 교리의 암호와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초기 그리스도교 예술의 특징 가운데 그 자체로는 전혀 뜻을 알 수 없다는 것이 있는데 그 대부분은 이러한 상징적•관념적 의미가 예술작품의 각 부분에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로써 설명된다.


2. 비잔띤제국의 정교합일체제하의 예술양식

187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와 더불어 그 시대가 추구하던 감각적 쾌감도 자취를 감추었다. 고대의 영광은 사라지고 로마제국도 무너져버렸다. 교회는 로마 지배계급의 정신으로 자신의 승리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것이 아니라고 자칭하는 새로운 권세의 이름으로 승리를 구가했다. 그리고 절대권을 완전히 장악한 지금, 교회를 고대 그리스•로마와 거의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예술양식을 스스로 만들어 내게 되었던 것이다.


3. 우상파괴운동의 원인과 결과

198 우상파괴운동은 실제로 예술배척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술 일반을 박해한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종류의 예술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즉 공격의 대상은 종교적 내용을 가진 예술작품이요, 우상박해가 가장 맹위를 떨친 시대에도 장식용 회화는 관대하게 봐주었다. 운동의 배경은 주로 정치적인 것이었다. 반예술적 경향 자체는 이 운동의 동기들 가운데서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하나의 저류, 어쩌면 가장 덜 중요한 하나의 저류에 지나지 않았다.


199 우상파괴운동의 또 하나의 동기로서 우상 숭배에 대한 반대와 간접적으로 관계되어 있는 것은 고대 그리스•로마의 감각적•심미적 문화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교도들의 반감이었다. 


200 성상반대운동 전파를 강력히 촉진한 또 하나의 요인은 일체의 성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아랍인들이 혁혁한 군사적 성과를 거두었다는 사실이다. 성공한 사람들의 경우가 흔히 그렇듯이 회교도의 이러한 입장도 많은 동조자를 낳았다. 그리하여 비잔띤제국에서도 아랍인들처럼 성상을 갖지 않은 것이 유행이 되었다. 


200 그러나 우상파괴운동의 가장 중요한 동기이자 결과적으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동기는 황제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이 부단히 증대해가고 있던 수도원 세력을 견제하고자 한 데 있다.


4. 민족대이동기에서 카롤링어 왕조의 문예부흥기까지

203 비잔띤 예술과 민족대이동기 서구의 예술, 이 두개처럼 대립적인 예술관이 이만큼 근접한 지역에서 동시에 실천에 옮겨지고 있던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즉 비잔띤에서는 엄격한 제약 아래 있기는 했지만 기술적으로는 모든 점에서 완벽의 경지에 달한 인물화가 번성하고 있었던 반면, 게르만족 및 켈트족이 점령하고 있던 서방에서는 장식적인 것에 철저히 얽매인 추상적인 기하학 양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207 어떤 시대의 각 예술장르가 얼마만큼 자연주의적인가 하는 것은 비록 그 시대가 동질적인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을 경우에도 그 시대의 일반적 문화단계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그들 각 장르의 성격, 역사, 독자적 전통에 의해서도 좌우되는 것이다. 


213 교회가 서양사회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기관이 될 수 있었던, 저 교양의 독점을 교회가 처음 이룩한 것은 이렇게 해서였다. 관리의 임명과 교육이 교회의 손에 맡겨졌다는 사실이 이미 국가가 성직자 중심으로 된 사실을 말해주거니와, 성직자 이외의 교양계층으로서도 자기 자식의 교육을 맡길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은 본당 부속학교, 그리고 후에는 수도원학교였던 만큼 아무래도 교회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마련이었다.


216 카롤링어 왕조의 문예부흥이 고대의 초기 그리스도교 문화와 다른 점은 바로 로마의 전통을 그대로 계속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새로이 발견해냈다는 사실이다. 카롤링어 왕조에 이르러 비로소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는 잃어버린 것을 다시 발견했다는 의식, 아니 다시 쟁취했다는 의식과 결부된 교양체험이 된 것이다.


5. 영웅가요의 작자와 청중

231 카롱링어 왕조 르네쌍스와 다음 몇세대의 교회중심주의의 결과 이들 궁정시인들이 상류사회의 고객을 잃고 하층민 사이에서 미무스와 경쟁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뒤에야 비로소 그들도 이 경쟁에서 견디기 위해 스스로 미무스 연기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6. 수도원에서의 미술품 생산의 조직화


7. 봉건제도와 로마네스끄 양식

252 로마네스끄 예술의 종교적 성격은 궁정사회, 도시 당국, 국가의 중앙권력 등이 붕괴한 결과 실질적으로 교회가 예술품의 유일한 고객이 되었다는 사정의 결과일 뿐이다.


253 로마네스끄 예술의 형식이 초기 그리스도교 예술의 형식보다 간결하고 간소화된 것은 대중의 취미나 이해력에 맞게 타협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교양보다 귄위를 내세우는 지배계급의 예술관에 영합했기 때문이었다.


253 고대 초기의 기하학 양식에서 고대 말기의 자연주의로,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추상화 경향에서 카롤링어 왕조 시대의 절충주의로, 예술양식의 이러한 리드미컬한 변화는 로마네스끄 시대에 이르러 또 다시 비자연주의적인 유형화와 형식주의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본질적으로 비개인주의적이었던 봉건제하의 문화는 예술영역에서도 일반적인 것, 동질적인 것을 추구하고 인간의 얼굴이나 옷 등에서부터 몸짓이 듬뿍담긴 큰 손, 종려나무 가지와 같은 작은 나무, 납으로 빚은 듯이 빳빳한 산 등에 이르기 까지 모든 것을 유형화된 모양으로 나타내고자 했다.


259 오로지 육체적으로 아름다운 것, 감각적으로 생동하는 것, 형태적으로 정상인 것을 묘사했을 뿐이며 영혼이라든가 정신적인 것에 대한 암시를 일체 회피했던 고전적인 고대에 비하면, 로마네스끄 양식은 영적인 표현만을 노리는 예술이요 감각적 경험의 논리가 아닌 내면적인 비전의 논리를 기준으로 한 법칙을 따르는 예술로 보인다. 그리고 이 비전적인 성격이야말로 후기 로마네스끄 미술의 본질, 특히 거기에 그려져 있는 인물이 왜 그림자처럼 길게 뻗쳐 있으며 어색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꼭두각시처럼 가뿐해 보이는가를 가장 적절히 설명해준다.


259 즉 최후의 심판에서는 인류 전체가 재판을 받는데 판결의 결과는 교회가 그 인간을 신에게 고발하느냐 두둔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을 위압하는 수단으로서 그 무한한 공포와 영원의 축복의 정경을 묘사하는데 미술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었다.


260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의 정신적 분위기 속에서 교육을 받은 초기의 그리스도교도들에게는 구세주가 죄인과 똑같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는 생각이 아무래도 좀 거북스러운 것이었다. 카롤링어 왕조의 미술에 이르면 오리엔트에서 도래한 십자가상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천대받고 고통스런 예수 모습을 그리지 않으려는 경향은 여전했다. 당시 귀족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신과 육체적 고통은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8. 궁정적ㆍ기사적 낭만주의

263 고딕(Gotik, Gothic)의 발생은 근세예술사에서 가장 근본적인 변혁이었다. 자연에 대한 충실, 감정의 깊이, 감각성과 감수성 등 오늘날에도 여전히 통용되는 양식상의 이상은 고딕의 소산이었다. 


271 고딕의 대성당 건축은 도시의 예술이요 시민적인 예술이었다. 즉 수도원과 귀족의 예술이었던 로마네스끄에 대립하는 의미에서 도시적•시민적이었고, 대성당의 건축에서는 비성직계층의 발언권이 더욱더 증대하고 이에 비례하여 성직자들의 영향이 감소했다고 하는 의미에서도 도시적•시민적이었으며, 끝으로 이들 교회건축은 한 도시의 재산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고 이미 교회의 어느 고위성직자가 자기의 재력만으로 충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의미에서도 도시적이요 시민적이었다.


276 기사계급은 12세기 말, 13세기 초에 이르러 다른 집단과 엄격히 구별되는 폐쇄적인 계급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기사의 자제만이 기사가 될 수 있었다. 귀족으로 대우받으려면 영지를 받을 능력이나 높은 생활수준으로 이미 불충분했다. 여러가지 엄격한 전제조건으로 채운 위에 엄숙하고 격식을 갖춘 의식을 거쳐서 정식으로 기사로 임명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277 기사계급의 낭만적 이상주의와 의식적이고 감상적인 영웅주의는 실은 재탕된 이상주요 영웅주의였으며, 그것은 기사계급의 명예라는 개념을 형성해나간 신흥귀족의 자의식과 야심에 주로 기인한 것이었다.


281 기사적인 깔로까가티아 개념, 즉 미적 가치와 지적 가치가 동시에 도덕적•사회적 가치라고 생각했던 이 새로운 문화 개념이 발전함에 따라 종교적 교양과 세속적 교양 사이에 새로운 괴리가 생겨났다. 그 결과 특히 문학영역에서의 지도적 역할은 정신적 시야가 좁은 성직자층에서 기사계급 쪽으로 옮겨갔다. 한때는 문학사의 추진력이었던 수도원 문학은 그 지도적 지위를 잃고 수도사들은 시대의 대표자 역할을 그만두게 된다.


282 중세의 궁정문화는 여성이 궁정의 궁정의 정신생활에 참가하고 또한 문학작품의 방향 결정에도 참여하고 있었다는 의미에서뿐 아니라 남성 자신도 여러가지 면에서 여성적인 사고방식과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여성적인 것이었다.


285 노예약탈이나 부녀납치가 다반사였던 고대나 영웅시대에는 남자 쪽에서 구애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그리고 실은 남자 쪽에서 여자의 사랑을 구하는 것은 민중의 풍속에도 위배되는 일이었다. 민중생활에서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여자이지 남자가 아닌 것이다. 샹송 드 제스뜨에서도 여자가 남자에게 접근하고 있다. 기사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이러한 태도가 궁정적인 예절에 어긋나고 부적당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여자가 쌀쌀하고 남자는 사랑에 몸이 달아있는 것이 오히려 궁정적인 예절이고, 남성이 끝없이 참고 끝없이 수그리며 여성의 의지와 더욱 훌륭한 본질 앞에서 자기의 의지, 자기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야말로 궁정적이요 기사적이라고 여겼다.


286 근대 낭만적 연애관의 근간을 이루는 이러한 갖가지 특색은 모두가 이 기사문학에서 비로소 등장하는 것이다. 


293 말하자면 이 시대 전체가 끊임없이 성적 긴장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301 왕년의 영웅가요는 노래부르기 위한 것이었고, 샹송 드 제스뜨는 낭송용이었으며, 초기의 궁정서사시도 아마 낭송되었을 것이다. 이와 달리 새 시대의 연애 이야기나 모험 이야기는 이제 주로 부인들의 독서를 위해 만들어졌다. 문학작품의 감상자 중에서 여성이 다수를 점하게 된 사실이 서양문학사에서 최대의 변화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읽는다'는 것이 감상하는 방법의 새로운 형식이 된 것도 장래를 위해 그에 못지않은 중요성을 가진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감상이 열렬한 취미가 되고 매일의 요구가 되고 습관이 된 것은 문학이 '독서'가 된 이 시기 이후의 일이기 때문이다.


301 이러한 감식가들의 출현으로 비로소 청중이나 독자의 무리에서 오늘날 말하는 문학독자층이라는 것이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이 독자층의 독서열이 빚어낸 결과 중 하나는 생겨났다가 곧 사라지곤 하는 유행문학이라는 현상인데, 궁정 연애소설은 그 첫 사례였다.


302 이와같은 읽기 위한 소설의 출현과 더불어 근대문학이 시작된다. 그것은 단지 이것이 서양에서 최초의 낭만적인 연애 이야기요 연애가 다른 모든 요소를 압도하며 서정성이 다른 모든 요소에 침투하고 작자의 감수성이 작품의 질을 결정하는 제일의 기준이 된 최초의 서사시적 작품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연극에서 익히 알려진 '잘 만들어진 각본'의 개념을 빌려 말한다면 최초의 '잘 만들어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9. 고딕 예술의 이원성

314 고딕시대의 이상주의는 동시에 일종의 자연주의로서 피안적 세계에 근거한 정신적인 이상형을 경험적인 관점에서도 정확하게 묘사하려고 노력했다. 이 점에서 그것은 당시 철학상의 관념론이 관념을 개개의 사물 위에 놓은 것이 아니라 사물에 내재하는 것으로 보아 관념을 강조하면서도 개개의 사물도 중요시하던 것에 대응하는 현상이었다. 이것을 이른바 '보편논쟁'(Universalienstreit)의 용어로 번역하면, 보편적인 개념은 경험적 사실에 내재한다고 생각되고 그 이외의 형태로는 여하간 객관적 존재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사에서 말하는 이 온건유명론은 아직도 철저히 관념론적이고 피안중심적인 세계관을 근거로 한 것이었는데, 이것과 절대적인 관념론 즉 보편논쟁에서의 이른바 '실재론' 사이의 거리는 뒤에 등장하는 극단적인 유명론 즉 관념은 그 여하한 형태의 객관적 존재도 인정될 수 없고 구체적으로 주어진, 일회에 한한, 유일하고 독특한 개별적 경험으로서 밖에는 진정으로 실재한다고 불 수 없다는 사고방식과의 거리보다도 더 컸다.


315 관념의 현실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경험적 현실세계의 사물과 불가분의 것으로 간주하려고 하는 온건한 유명론이야말로 당시 사회•경제 구조상의 갈등이라든가 그 예술이 지닌 이상주의적 요소와 자연주의적 요소의 내부적 모순 등, 요컨대 고딕시대의 모든 이원적 성격의 열쇠였다. 이 경우에 유명론이 맡은 기능은 고대 그리스 예술 및 문화에서 쏘피스뜨 철학이 맡았던 역할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양자는 모두 반전통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자유주의적인 색체를 띤 시대의 전형적인 철학사상의 하나이다. 양자 모두가 일종의 계몽철학이요, 이제까지는 보편타당하고 만고불변으로 간주되어온 규범을 상대적이 가치 즉 가변적이고 수명이 한정된 가치로 보며, 특수한 전제조건에 좌우되지 않는 '순수한' 절대적 가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을 그 본질로 하는 철학사상인 것이다.


317 그토록 많은 고딕의 대성당이 미완성인 채로 남은 원인이 된 이 새로운 예술의욕, 이미 괴테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던 것처럼 비록 실제로는 완성되어 있을 경우에도 본질적으로는 미완성이요, 다시 말해서 무한한 것이며 영원한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그 내적 불완전함, 무한의 피안을 찾아가고자 하는 그 충동, 여하한 완성에도 안주하지 못하는 그 본성,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 수난극 속에 비록 매우 소박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명료하게 나타나 있는 것이다.


321 예술의욕과 기술은 예술작품 발생과정의 어느 단계에서도 서로 독립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불가분하게 얽혀 있어 양자의 분리라 이론상의 편으로서나 가능한 것이다.


322 로마네스끄 교회는 그 자체로 완결된, 그 이상 아무것도 구할 바 없는 안정된 공간상이다. 비교적 넓고 상징적이고 간소한 그 내부는 감상자의 눈을 끌어 그 내부에 머물게 하고 감상자에게 언제까지나 완전한 수동적 태도를 갖게 한다. 이에 반해 고딕 교회는 생성의 상태를 계속하고 있고, 말하자면 우리 눈앞에서 솟아나고 있다. 그것은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인 것이다. 


324 그리스 계몽사조와 중세 계몽사조의 유사성과 미술에 대한 그 영향의 상통함에도 불구하고 고대 그리스•로마의 전통을 전적으로 새로운 것, 전혀 비고대적인 것, 그러면서도 능히 고전에 견줄 수 있는 것으로 대체하는 데 처음으로 성공한 것은 고딕 예술이다. 고대 그리스•로마는 고딕에 이르러서 비로소 진정으로 극복되었다.


324 독창적이고 유일무이한 체험을 전제로 하는 근대미술의 고백적 성격은 고딕 이후 점점 비개성적이고 판에 박은 것으로 되어가는 기수로가 맞서 자기를 관철해나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왜냐하면 예술이 그 원시성의 마지막 잔재를 청산하고 이미 표현수단 자체를 추구하여 싸울 필요가 없게 되는 순간, 기성품처럼 준비되어 아무데나 응용할 수 있는 기술에서 오는 위험이 머리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고딕과 더불어 근대예술의 서정성이 시작되었지만 그 기술만능주의 역시 고딕시대에 시작된 것이다.


10. 건축장인조합과 길드

330 중세에는 어떤 직업집단이 외부로부터 동업자가 들어옴에 따라 자신의 경제적 기초가 위협받고 있다고 느낄 때마다 길드가 생겨났다. 길드의 목적은 경쟁의 배제 혹은 적어도 제한에 있었다. 내부 조직의 민주적 성격은 처음에는 아직 지켜졌지만 외부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철저히 배타적인 보호주의가 취해졌다. 길드 규약은 생산자 보호만을 목적으로 한 것이며, 그것이 표면상 내세웠고 오늘날 길드라는 것을 이상화하여 생각하려는 낭만주의적 이론의 신봉자들이 주장하듯이 소비자 보호도 동시에 추구했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자유경쟁의 금지는 애당초부터 소비자에겐 커다란 손해를 의미했다. 수공업 생산물의 질에 관해 최저 수준을 정한 것은 결코 소비자의 이익만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기복없는 안정된 판로를 확보하려는 원대한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332 중세미술의 발전방향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것은 미술가의 작업장이 점차로 건축현장으로부터 떨어져나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로마네스끄 시대에는 아직 예술가의 모든 일이 건물 자체에 딸린 것이었다. 교회의 그림장식은 모두 벽화였으므로 다른 곳에서 마무리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건물을 장식하는 조각도 현장의 발판 위에서 '제자리에 고정시킨 뒤에' 작업을 했다. 즉 석공이 이미 벽면에 끼워넣어놓은 돌을 깎고 새겼던 것이다. 일찍이 비올레-르-뒤끄도 지적했듯이 12세기에 들어서 건축장인조합의 발생과 더불어 여기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즉 조합은 조각가에게 건축현장의 발판보다 쾌적하고 도구도 잘 갖추어진 작업장을 마련해주었다. 이제 그들은 대부분의 경우 조각을 처음부터 끝까지 아뜰리에에서, 교회당에서가 아니라 교회 옆에서 하게 되었고, 조각품은 완성된 뒤에 건물에 설치되었다. 


332 회화 영역에서도 화판 그림의 대두로 벽화가 쇠퇴하면서 같은 경향이 나타났다. 그리고 마침내는 예술가가 일하는 장소는 완전히 건축현장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조각가와 화가가 모두 건축현장을 버리고 자신의 아뜰리에로 들어가,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가 직접 본 일도 없는 교회를 위해 제단이나 감실의 미술품을 만들었던 것이다.


11. 고딕 후기의 부르즈와적 예술

334 중세 후기는 출세한 시민계급이 형성된 시기일 뿐 아니라 시대 그 자체가 시민계급의 시대였다. 중세의 전성기 이래 역사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도시의 화폐•교역경제는 시민계급의 정치적•문화적 자립을 가져오고 뒤이어 그들에게 지적 주도권을 안겨주었다.


335 12세기 및 13세기까지만 해도 시민계급은 자기들의 물질적 생존근거와 자신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싸웠는데, 이제는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새로운 세력에 대항하여 자기들의 특권을 지키지 위해 싸우게 되었다. 이제는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새로운 세력에 대항하여 자기들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싸우게 되었다. 사회진보를 위해 투쟁하던 진취적인 계층으로부터 현상에 만족하는 보수적인 계급으로 변모한 것이다. 


337 화기의 발명과 용병으로 구성된 보병 부대의 설치로 기사계급이 그 본업을 잃게 된 결과 군사적인 복무가 민주화되었다는 유명한 이론은 엄격한 유보조항을 달지 않고는 승인하기 어렵다. 보병의 무기가 주로 창과 활로서 화기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도외시하고라도, 앞서의 이론에 대한 반론이 올바로 지적하고 있듯이 기사계급의 무기가 휴대화기나 화승총의 등장으로 무용지물이 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중세 말기는 기사들의 중장비와 발달이 그 정점에 달했던 시대였고 30년 전쟁(1618~1648)까지는 보병대와 나란히 기병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일이 많았다. 더구나 보병은 모두 농민으로 구성되었던 것도 아니다. 그중에는 시민계급 출신자도 있었음 귀족도 섞여 있었다. 기사계급이 시대착오적인 존재가 된 것은 그들의 무기가 낙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이상주의'와 비합리주의가 낡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기사들은 새로운 경제, 새로운 사회, 새로운 국가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시민계급과 저들의 돈, 저들의 '장사꾼 근성'을 하나의 병적인 현상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시민계급은 기사와의 관계에서도 훨씬 물정에 밝았다. 그들은 기사계급의 무술시합이나 기사도적 연애라는 놀이에 기꺼이 끼어들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유희에 지나지 않았고 사업에서는 냉정하고 빈틈없고 현실적이었다. 한마디로 비기사적이었던 것이다.


339 중세에도 자본주의 체제를 운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자본주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려 있다. 자본주의 경제라는 것을 동업조합적인 제약이 이완되고 생산이 점차로 동업조합의 틀로부터 벗어남과 동시에 조합이 제공하던 안전범위에서도 벗어난다는 것, 즉 경제활동 일체가 경쟁을 의식하고 이윤을 목적으로 자신의 독자적 책임 아래 행해지는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우리는 중세 전성기도 이미 자본주의 시대라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이에 반하여 이러한 정의로써는 불충분하고, 자본주의라는 개념에 포함된 가장 본질적인 요소로서 타인의 노동력의 기업적인 활용과 생산수단의 소유를 통해 노동시장을 지배하는 것, 즉 한마디로 노동을 일종의 봉사에서 하나의 상품으로 변형시키는 것을 든다면 자본주의 시대는 14세기 및 15세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347 고대나 중세 초기의 미술이 결코 이루지 못했던 일을 중세 말기의 미술이 이루어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간, 즉 현대의 우리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공간을 묘사하는 데 처음으로 성공한 것은 이 시대의 역동적인 생활감정에서 생긴 '영화적' 시각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후기 고딕의 그림이 이와 같은 공간파악으로부터 얻은 최대의 수확은 그 자연주의적 성격이었다. 그리고 중세 말기의 회화에서 볼 수 있는 환각적인 공간은 원근법이라는 르네쌍스 개념에 비추어보면 아직도 부정확하고 불철저한 것이었지만, 이 새로운 공간구성에는 이미 시민계급의 새로운 현실감각이 반영되어 있어던 것이다.


348 전통적인 교회미술과 궁정 미술은 그 정신이 소멸됐을 뿐 아니라 그 외면적 형식도 차차 사라져갔다. 거대한 벽화는 패널화(판자에 그린 그림-옯긴이)로 바뀌고 귀족 취미의 사본삽화는 판화에 의해 밀려나게 되었다. 그것은 더욱 값싸고 '민주적'인 형식의 승리였을 뿐 아니라, 좀 더 친근하고 좀 더 시민계급의 정신에 가가운 형식의 승리이기도 했다. 회화는 패널화라는 형식을 통해서 비로소 건축으로부터 독립하고 부르즈와 주택의 이동 가능한 가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348 목판화와 동판화는 최초의 대중적이고 비교적 값싼 미술작품이었다. 문학영역에서 커다란 강당의 사용이나 낭독의 반복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효과가 기계적인 복제기술의 발명에 의해 조형예술 영역에서도 가능하게 되었다. 판화는 말하자면 상류층 본위인 사본삽화의 본완물이었다. 


349 미술품이 중세 초기에도 아직 갖고 있던 일종의 마력, 일종의 후광을 점차로 잃어버리고 시민계급의 합리주의적 정신에 의한 '현실의 탈마술화'에 대응하는 발전경향을 보여줬다면 그 원인의 일부는 기계적인 복제가 가능하게 됨으로써 미술품이 전처럼 교환할 수도 대체할 수도 없는 유일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 판화기술의 발명과 그 보급의 부산물 가운데 하나는 미술가와 감상자의 관계가 점점 사무적인 것으로 되었다는 사실이다.


350 15세기에 이르면 사본까지 기계적으로 복제되어 여기에 간단한 펜 스케치에 의한 삽화가 곁들여지고, 서점에서 하듯이 완성된 제품을 내놓고 파는 제작소가 나타난다. 화가나 조각가까지도 시장을 위한 생산을 하게 되고 비인격적인 상품생산의 원리는 미술의 모든 분야에 침투했다. 예술활동의 중점을 개인의 천재에 두지 않고 장인적인 측면에 두고 있던 중세에는 생산의 기계화와 미술의 본질이라는 것이 근대에게 그런 만큼은 ― 그리고 아마 르네쌍스의 인간에게도 만약 수공업적인 예술제작이라는 중세 이래의 전토이 그들의 천재 개념을 일정한 한계선에서 멈추게 하지 않았던들 그러했으리라고 생각되는 만큼은 ― 서로 배치되는 개념이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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