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마셜: 종교개혁 ━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11


종교개혁 - 10점
피터 마셜 지음, 이재만 옮김/교유서가



1. 종교개혁들

2. 구원

3. 정치

4. 사회

5. 문화

6. 타자

7. 유산


연표/ 참고문헌/ 역자후기/ 도판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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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3 우선 아주 기본적인 질문부터 해보자. 실제로 '종교개혁' 따위가 있었는가? 이 표현이 가리키는 사태가 일어나고 오랜 시간이 지나기 전까지, 오늘날 우리가 공통으로 받아들이는 의미로 종교개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5 단수 종교개혁에 관한 옛 교과서들은 으레 1517년에 루터가 항의한 시점부터 이야기를 시작했고, 1546년에 루터가 사망하고 길어야 10년 남짓 지난 시점에 이야기를 마 무리 지었다. 종교개혁은 근본적으로 독일의 사건으로 보였고 서사 형태가 깔끔한 운동이었다. 다시 말해 이런 저런 이유로 루터가 로마 교회와 결별하고 뒤이어 독일 가톨릭교도 황제의 뜻에 대항해 프로테스탄트 국교회들이 설립되었다는 이야기였다.


16 단수 종교개혁은 복수 종교개혁들에, 즉 저마다 고유한 지향과 의제를 추구했던 복수의 신학적, 정치적 운동들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이처럼 뚜렷이 구별되는 국가·지방·지역 단위 종교개혁들이 있었다.


17 '가톨릭 종교개혁', 또는 '가톨릭 쇄신'이라 알려진 것은 단순히 적에 직면하여 방어 시설을 보강한 대응책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넓은 운동이었다. 신교 반란에 앞서 가톨릭교 내부에 이미 개혁을 지향하는 새로운 정신적 동향들이 있었다. 그중 일부는 신교 반란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다른 일부는 그러지 않았다. 신교가 시종 가톨릭교 또는 '교황파'라는 타자와 관련하여 스스로를 규정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톨릭 개혁은 자연히 신교와 줄곧 대치하면서 형태를 갖추어 갔다. 가톨릭 개혁과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별개로 고찰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이 책은 서로 대조를 이루고 이따금 수렴하는 두 궤도를 나란히 다룰 것이다.


19 종교개혁의 영향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진 결과 1517년 면죄부 논쟁부터 1563년 트리엔트 공의회 폐회까지 숨 가쁘게 전개된 과정은 이 현상을 이해하기에 충분한 얼개로 보기 어렵게 되었다. 종교개혁이 불러 일으킨 힘들은 수십 년간, 길게는 수백 년간 작용했다.


22 '단수 종교개혁'은 한 시대 그리고 유럽 문화의 심장부에서 핵심 원리 ━ 분열과 분쟁을 통한 정체성 형성 ━가 정립되어 간 기간과 과정을 다 가리킨다. 이 시대에 삶의 무수한 측면에서 종교적 차이의 표지들이 갑자기 나타났다.


1. 종교개혁들

27 성채 교회(Castle Church)의 문은 비텐베르크 대학의 게시판 역할을 했으며, 루터의 행위는 오늘날 대학에서 강의 목록을 공지하는 행위보다 별반 극적일 것이 없었다. 95 개 논제 자체는 딱히 혁명적이지 않았다. 교황의 권위를 부인하거나 새로운 교회 창설을 요청하지 않았고, 신학에서 그리 대수롭지 않은 모호한 문제를 제기했다.


29 1517년에는 교회를 개혁하려는 청사진도, 예측 가능한 결과도 없었다. 루터의 완고함과 감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야마는 의지가 당대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린 결과, 감당 못할 방향으로 사태가 흘러 갔다.


33 유럽 여러 도시에 인쇄업이 확실히 자리잡고 있었다(인쇄물의 가장 큰 범주는 가톨릭 신앙서적이었다). 그러나 루터의 저술이 폭발적으로 인쇄된 것, 루터가 그저 지식이나 교훈이 아니라 의견을 전달하기 위해 인쇄된 책을 활용한 것은 출판물의 역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이와 관련해서도 독일 사회의 분열상이 도움이 되었다. 다른 곳에서 인쇄는 소수의 소도시와 도시에 집중되곤 했다. 이와 달리 독일에서는 인쇄기가 제국의 도심지 여러 곳에 넓게 흩어져 있었던 까닭에 중앙 당국이 통제하기가 더 어려웠다.


38 루터가 오해를 받았다기보다는 독일 사회의 다양한 집단들이 그의 가르침 가운데 각자에게 타당한 것을 선택하여 기존의 고충과 야망에 적용했을 것이다. 뤼베크를 비롯한 몇몇 도시에서 루터주의는 이전까지 부유한 상류층의 통치에서 배제되었던 중류층 길드 조합원들이 채택한 도시 쿠데타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39 루터는 자신의 신학이 혁명 이데올로기로 탈바꿈하는 광경에 경악했고, 1525년 5월 제후들에 "약탈과 살인을 저지르는 농민 무리"를 죄책감없이 살육할 것을 촉구하는 팸플릿을 발행하여 자신에게 불똥이 튀지않게 막았다.


43 1529년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는 보름스 칙령을 원상복구했다. 그러자 여섯 제후들과 14개 자유시 대표들이 제국의회의 결정에 반대하는 '항의서(protestation)'에 서명했다. 그들의 행동으로 새로운 고유명사 '프로테스탄트'와 새로운 정치적 정체성이 생겨났다.


45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에서 결의된 사항들은 보통 라틴어 어구 '쿠이우스 레기오 에이우스 렐리기오(cuius regio, eius religio. 영토에 그의 종교) 〔통치자가 자기 영토의 종교를 결정할 권리를 가진다는 뜻〕로 요약된다. 제국 내 제후들은 원하는대로 가톨릭교를 유지하든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채택 할 수 있었다.


56 칼뱅주의는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에 따라 가톨릭교의 대안을 하나만 인정하고 있던 루터파 독일에까지 침투했다. 이 진정한 '제2 종교개혁'은 1563년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충성 대상을 루터주의에서 칼뱅주의로 바꾼다고 선언한 일을 계기로 본궤도에 올랐다. 프리드리히의 수도로 중요한 대학이 자리한 하이델베르크는 독일 칼뱅주의를 선도하는 중심지가 되었고, 이곳 대학 교수 두 명이 작성한 하이델베르크 교리 문답은 칼뱅파 세계 전역에서 널리 쓰였다.


59 트리엔트 공의회는 가톨릭교도로 존재하는 새로운 방식을 개시했다. 라틴어화된 형용사 '트리엔트식(Tridentine)'은 그 방식을 나타낸다. 공의회가 마무리될 무렵, 아직 갈 길이 멀기는 했지만 가톨릭 개혁은 부인할 수 없는 성과를 거둔 터였다. 우선 논란이 분분한 거의 모든 쟁점에 관한 가톨릭 교리를 명료하게 밝힘으로써 단일한 로마 가톨릭 교회 ━ 종교개혁 이전 유럽에서 공존했던 더 엉성한 표현인 '가톨릭교들(Catholicisms)'을 대체했다 ━ 의 통일된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평신도를 위한 표준화된 교리문답서를 공인했고, 미사 집전의 균일한 순서를 정했다


68 이제 '비국교도(Non-conformist)'는 잉글랜드 교회로부터 영원히 분리되었고, 국교 지지자들은 스스로를 '성공회교도(Anglican)'라 부르기 시작했다. 성공회는 유럽 대륙에서 창설된 다양한 신교 교파 들과는 사뭇 다른 갈래였다.


68 17세기 후반에 국내외 정치에서 헌신적인 신앙의 역할이 줄어들고 종교 전쟁의 시대, 종교개혁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70 한 세기 반 동안 종교 개혁들은 유럽 정치생활과 문화생활의 주요 동력이었다. 종교개혁이 그 기능을 아직 다하지 않은 때에 계몽주의 시대가 동트기 시작했다.


2. 구원

73 종교 개혁은 무엇보다도 구원의 규칙과 기제에 관한 지난한 논쟁이었다.


73 논쟁은 기독교도 개개인이 실제로 그 문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지, 통과하기 위해 준비하는 동안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지, 그 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지 아니면 소수에게만 열려 있는지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76 다시 말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희생한 결과로 하느님께서 설령 여전히 완전한 죄인일지라도 개개인을 의인으로 받아들이기로 선택하신다고 결론 내린 순간, 불안과 자기 혐오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났다. 구약과 신약, 율법, 복음의 총합이 이 통찰에 담겨 있었다.


76 루터주의는 '이신득의'(以信得義: 믿음을 통해 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 교리를 믿는다. 이제 구원은 참된 기독교 생활의 최종 목표가 아니라 출발점이었다.


78 이신득의는 가톨릭 세계와 신교 세계를 가르는 단층선이었지만, 신교 진영 내부에서도 이 교리를 가다듬고 확장하는 과정에서 교파들 사이에 영속적인 차이가 빚어졌다.


79 예정론을 다듬어 최종 형태를 내놓은 사람은 제네바에서 칼뱅을 계승한 테오도뤼스 베자(Theodorus Beza, 1519-1605)였다. 그는 세상의 창조와 아담의 타락 또는 '탈선' 이전부터 하느님이 모든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정해두었다고 결론 내렸으며, 이 교리는 '타락 전 예정설'이라는 위압적인 이름으로 불려왔다. 이 교리를 논리적으로 더 밀고 나아가면 그리스도가 모두를 위해 돌아가셨을리 없고, 선택받은 자들만을 위해 돌아가셨다는 결론, 즉 '제한 속죄'에 이른다.


83 교회가 먼저인가 성서가 먼저인가? 가톨릭 측은 예수가 공동체를 세웠지 책을 쓰지는 않았다고 지적했다. 신교 측은 그리스도 자체가 말씀이며, 우리는 성서를 읽고 듣고 설교하면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체험한다고 반박했다.


87 오늘날 우리에게는 불가해 보일지 몰라도 성사를 둘러싼 종교개혁 논쟁은 길고도 신랄했는데, 성사 신학을 올바로 파악하는 것이 곧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성사는 종교개혁이 얼마만큼 '의례적인 과정'이었는지, 개인뿐 아니라 집단까지 구원받기 위한 사회의 상징적 질서와 깊이 연관된 과정이었는지 드러낸다. 그리고 성사는 성직자의 영적 권위와 불가분하게 얽혀 있었다.


88 신생아가 영벌을 받는다는 것은 제아무리 엄격한 신학자가 생각하기에도 지나친 귀결이었으므로 가톨릭 교회는 이 경우에 지옥을 영혼들이 고통받지 않는 중간 내세인 '림보(limbo)'로 대체했다. 개혁파 신학은 연옥과 더불어 림보를 성서에 위배되는 허구라고 여겼다. 구원에 세례가 필수라는 생각은 하느님의 자유로운 예정 선택과 모순되고 그 선택을 제한하는 것이기도 했다.


90 가톨릭 종교개혁은 전통적인 의무인 고해를 더 주기적으로 충실히 준수해야 한다는 생각을 주입시키고자 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주목할 만한 혁신이 있었다. 바로 16세기 후반 이탈리아의 발명품인 문으로 차단되고 안에 칸막이가 설치된 고해실이었다. 밀라노의 개혁적인 대주교 카를로 보로메오가 홍보한 이 고해실은 머지 않아 가톨릭 세계 전역으로 퍼졌다.


90 성찬식만큼 격렬한 논쟁의 초점이 된 성사는 없었다.


91 가톨릭교도들이 가장 신성시한 이 예식을 신교도들은 가장 불쾌하게 여겼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단 한 번뿐인 사건이었으므로 사제의 대리권을 통해 그 사건을 재연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극악한 신성모독이었다.


96 종교개혁들을 거치면서 성찬식이 기독교 분열의 주된 근원이 되었고 여전히 그렇다는 것, 성찬식을 대하는 태도가 '교파' 정체성의 표징 역할을 해왔다는 것은 애석한 아이러니다. 트리엔트식 가톨릭교의 표징은 성체에 대한 공적인 신심을 강화했다는 것으로, 이를테면 성체 축일에 공개 행렬을 하며 성체를 운반했고, 교회에서 새로운 '40시간' 성체 조배를 하며 신심을 드러냈다.


3. 정치

108 이따금 '두 왕국론'이라 불리는 것에서 루터는 하느님의 왕국은 신께서 어련히 다스리실 테지만 교회 조직의 외형을 포함하는 '세속의 왕국'은 적법한 정치적 강제의 영역이라고 보았다. 그런 이유로 루터는 1528년 선제후 요한의 '순시' 요청을 받아들여 작센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제후의 후원을 받으며 현지 교구들에 종교개혁을 도입할 준비를 하고 국가 행정의 한 부문인 영역 교회를 설립했다.


111 1970년대 이래 학자들은 정치적 중앙 집권이 강화되던 시대에 종교개혁과 국가 건설 의제가 어떻게 교차했는지를 기술하고자 '교파화(confessionaliz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해왔다. 이 논증은 16세기 후반과 17세기에 유럽 전역에서 신교 진영과 가톨릭 진영을 막론하고 정치 당국들이 각자의 영토 내에서 신민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방도로서 단일한 기독교 '신앙고백'을 열심히 장려하고 다른 대안들을 억압했다는 것이다.


125 종교 전쟁이라는 대변동이 잦아든 뒤 즉각 나타난 종교개혁의 결과는 정치적 권위의 강화와 공고화였다. 주목할 만한 몇몇 예외(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같은)를 빼면, 17세기 후반 유럽 국가들의 기조는 '절대주의'였고, 대의기구는 쇠퇴했으며, 군주의 구속 받지 않는 권력 행사가 절대선으로 제시되었다. 저항 이론들은 폭력적이고 분열적이었던 가까운 과거의 산물로서 한물간 것이 되었다. 그러나 통치자, 피치자, 신의 3자 관계의 계약적 측면에 근거하여 숙고한 끝에 정치적 불순종에 대한 정당화를 정식화한 논변들은 미래에 아주 중요했다. 물론 정당화 논변을 창안한 이들의 목표는 민주정 수립이나 정치적 자유 그 자체가 아니라 '우상 숭배'와 '이단'의 근절이었다. 그럼에도 그 작업들은 18세기에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끼쳤고, 그리하여 새롭고 판이한 정치적 세계가 열리는 과정에서 일익을 담당했다.


4. 사회

129 오늘날 우리가 '종교'로 분류하는 것은 당시 사회 조직 및 일상 생활의 구조와 씨실 및 날실로 엮여 있었으므로 그것을 따로 뽑아내려다가는 조상들의 인생 경험을 왜 곡할 우려가 있다. 종교와 사회가 그토록 불가분했기에, 종교개혁은 공동체 기독교의 언어와 상징, 의례를 변경하려 애쓰다가 이웃과의 관계와 일상 생활의 구조 자체까지 바꾸게 되었다.


130 근대 개인주의와 아노미의 요람인 도시들은 16세기만 해도 시골만큼이나 공동체와 집단을 중시했고, 주민 모두의 도덕적 안녕을 책임지는 성스러운 공동체임을 자처했다. 시민적 인문주의 정신에 물든 츠빙글리와 마르틴 부처의 신학이 고독한 수도승 마르틴 루터의 신학보다 도시민들에게 더 어필한 이유를 공동체의 이런 성격으로 어느 정도 설명 할 수 있을 것이다.


149 신교의 공인받은 신심은 평신도들 중에서도 지역 엘리트층에 훨씬 더 어필했을 것이다. 점잖고 글을 아는 그들은 박식한 설교와 토착어 성서를 이해할 수 있었고, 가난한 이웃들의 무질서한 품행에 재갈을 물려 지켜야 할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다.


5. 문화

159 16세기 종교개혁은 이 비범한 유산을 거부하고 태반을 파괴했는데, 교양이 없거나 예술의 힘을 알아보는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힘을 더 예민하게 감지했고 우상 숭배의 위험을 몹시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이 근대 유럽의 다채로운 문화 환경에 남긴 유산 중에 가장 피부에 와닿는 것은 '성상파괴 운동' ━ 명백히 이데올로기적인 이유로 종교 이미지를 파괴하는 것 ━ 일 것이다. 이베리아 반도와 이탈리아 같은 일부 지역들은 비교적 피해가 적었지만 다른 지역들은 예술 홀로코스트를 겪었다.


182 종교개혁은 좋았든 나빴든 예술 변화의 중대한 동인이었고, 근대 초기 유럽에서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들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인자였으며, 근대 유럽 국가들이 그토록 판이한 문화적 궤도들을 그려나간 이유를 설명하는 주된 요인이었다. 신교가 시각에서 청각으로, 이미지에서 수용하고 듣는 말씀으로의 패러다임적 변화를 대변했다는 주장에는 분명히 과장된 측면이 있다. 그렇다해도 하느님을 표상하는 방법과 하느님의 임재 사이의 관계에 합의 할 수 없었던 가톨릭교도들과 신교도들은 근본적으로 상이한 방식으로 현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6. 타자

208 전도의 목표를 위해 낯선 사회의 관습과 의례를 존중한 태도가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서 문화적·종교적 상대주의를 촉진하고 결국 기독교 자체가 그 상대주의의 제약을 받게 되는, 예상치 못한 장기적 결과를 가져 온 것인지도 모른다.


209 마녀라는 용어의 부정확한 대중적 쓰임새와 반대로 유럽에서 마녀들을 대규모로 체포하고 처벌한 것은 '중세' 현상이 아니라 근대 초기의 일면이었다. 15 세기 후반에 시작해 1560년경 이후 가속이 붙고 18세기 전반에 막을 내리기까지 유럽에서 약 10만 명(대부분 여성)이 마녀술 죄목으로 고발 당했다.


7. 유산

217 기적 개념, 아울러 악마를 비롯한 영적 존재들이 인간사에 개입한다는 믿음이 용인될 가능성은 적어도 교육받은 계층에서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이것은 관례상 '과학혁명'이라고 뭉뚱그리는 현상에 수반된 변화였다.


220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결과들은 실은 역설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과 가톨릭 종교개혁은 사회적, 종교적 균일성의 창출을 지향했으나 목표와 달리 다원주의의 형태들을 산출했으며, 그 형태들은 뒤이어 세계의 가장 먼 지역들에 수출되어 모방되었다. 종교개혁은 국가의 정치적·정신적 권력을 강화하겠노라 약속했지만 국가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문법과 어휘를 낳아놓았다. 종교개혁은 이단과 그릇된 믿음을 뿌리 뽑고자 했지만, 예전에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정도까지 주춤주춤 오류를 용인했다. 종교개혁은 사회 전체를 신성화하겠다고 나섰지만, 장기적으로 사회가 세속화될 여건을 조성했다.


222 근대 유럽의 다원주의적이고 아량 넓은 사회가 나타내는 것은 진보의 필연적인 승리가 아니라, 과거에 교파들이 경합한 데 따른 특수한 역사적 결과다. 종교가 점차 국가의 공식 이데올로기 자리에서 밀려나고 신앙이 시민 자격을 알리는 배지의 기능을 상실함에 따라 종교는 갈수록 가내화·사사화(私事化)되었다. 또한 종교는 불가피하게 선택적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국가가 국민들에게 특정 교회에 참석할 것을 더이상 법으로 요구하지 않게 되자 일부 사람들은 그 기회를 이용해 예배 장소에 자주 드나들던 관행을 아예 그만두었다.


223 근대 초기가 끝나갈 무렵 종교는 여전히 다수의 정체성에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종교는 사회에서 기본 구조와 문법이 아니라 개별 요소가 되어 가기 시작한 것과 마찬 기지로 더욱 다채로워진 정체성에서 갈수록 한 요소가 되어 갔을 것이다. 겉보기에 통일된 교파 문화들 안에서마저 종교는 1700년을 전후한 수십 년간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의미들의 매개체 역할을 상실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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