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20분 | 일본 근현대사 | 05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3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 10점
가토 요코 지음, 김영숙 옮김/어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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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일전쟁의 실체와 중일전쟁에 대한 일본인들의 인식차이에 유념해야만 한다.

– 일본인들은 중일전쟁을 ‘日中戦争’이라 부르지 않고 ‘支那事変’이라 불렀다는 것.

– 고노에 후미마로 관계문서, “현 시국의 기본적 인식과 그 대책”(1938. 6. 7): 전쟁의 성질 — 영토침략, 정치·경제적 권익을 목표로 하지 않으며, 일본과 중국의 국교 회복을 저지하고 있는 잔존 세력의 배제를 목적으로 하는 일종의 토벌전.

– “쌍방이 상대 국가에 대해 국제 불법행위를 했다고 주장하면서 스스로 취한 강력조치가 보복이기 때문에 위법이 아니라고 서로 논쟁하는 두 나라, 그것이야말로 1930년대 일본과 중국의 모습이었다.”


– 満洲事変: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20분, 중국 동북부 요녕성 심양에서 가까운 류타오후(柳条湖)에서 남만주철도의 노선 일부가 폭파됨 — 류타오후 사건. 이는 관동군 참모 이시하라 칸지(石原莞爾) 등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며, 이 사건이 중국의 장쉐량(張學良) 지휘 하의 동북군 소행이라 발표하고 만주 침략을 개시.

– 만주사변의 4가지 특질: 1)상대의 부재를 틈타 일으켰다는 것, 2)정치간섭이 금지된 군인이 일으켰다는 것, 3)국제법에 저촉된다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국제법 위반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계획된 것, 4)지역개념으로서의 만몽의 개념을 끊임없이 확장시키고 있다는 것.


– 満蒙의 개념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 것이다.

– 처음에는 남만주와 동부내몽고를 가리켰던 개념이 東三省(길림성, 흑룡강성, 요녕성)과 열하성, 차하얼성의 두 성을 포함한 지역개념으로 변모하였다.


– 후발제국주의 국가였던 일본은 만몽세력화도 당시의 열강인 영국, 미국, 러시아의 동의나 승인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특히 일본은 외채가 많았으므로 채권국인 서구 열강의 의향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 여기서 일본 외교정책을 장기적으로 제약한 두 요소, 즉 불평등조약과 외채를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 세계에 가볍게 착륙한 것처럼 보였다.”

– 중국을 둘러싼 열강들의 쟁투가 일본에게 유리하지만은 않았다.




지난 시간에는 만주사변에 이르기까지 전간기에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가 또는 국내 정치 측면과 국제 정치 측면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오늘부터 책에 들어가도록 하겠다. 중일전쟁이라는 것이 일본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를 먼저 보기로 하겠다. 중일전쟁이라고 부르는데 당시에 일본에서는 지나사변이라고 불렀다. 즉, 중일전쟁을 전쟁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왜 그랬는가를 유념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중일전쟁의 실체적인 내용과 그 인식이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전쟁을 전쟁이라 부르지 않고 사변이라 불렀다는 것. 간단히 말하면 전쟁이라고 부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제1차세계대전 이후로 국제적인 큰 흐름이 나타나는데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는 흐름이 있고, 둘째로 민족주의이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같은 것이 있었다. 1차세계대전 이후에는 전쟁으로 생겨나는 치명적인 결과 때문에 전쟁을 위법화하는 것이 나타난다. 국제법에서 전쟁을 범죄로 다루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먼저 정당하게 선전포고를 해야 하고, 포로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이런 것들에 대해서 국제적인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것들을 어긴 상태에서 전쟁이 시작되면 전쟁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고, 이들에게는 국제적인 형사소추가 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이것이 분명히 중국에 대한 침략이었는데, 선전포고를 거치지 않고 슬금슬금 전쟁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중일전쟁으로 부를 수 없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문서가 있는데,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에서 내놓은 문서에 따르면 "현 시국의 기본적 인식과 그 대책"(1938. 6. 7)으로 중일 전쟁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 "전쟁의 성질, 영토침략, 정치·경제적 권익을 목표로 하지 않으며, 일본과 중국의 국교 회복을 저지하고 있는 잔존 세력의 배제를 목적으로 하는 일종의 토벌전" 일본에서는 청일전쟁부터 이런 것이 나타났는데 전쟁을 치르면서도 전쟁이라고 하지 않는 교모한 문서 장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7 고노에 후미마로 관계문서 가운데 「현 시국의 기본적 인식과 그 대책」(38년 6월 7일자)이라는 제목의 사료가 있다.


7 다음과 같은 중일전쟁관이 보인다. '전쟁의 성질 ━ 영토침략, 정치·경제적 권익을 목표로 하지 않으며, 일본과 중국의 국교 회복을 저지하고 있는 잔존 세력의 배제를 목적으로 하는 일종의 토벌전이다.' 중국과 전쟁을 하고 있는 와중에 전쟁의 성질을 마치 비적 토벌전 같은 싸움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쌍방이 상대 국가에 대해 국제 불법행위를 했다고 주장하면서 스스로 취한 강력조치가 보복이기 때문에 위법이 아니라고 서로 논쟁하는 두 나라, 그것이야말로 1930년대 일본과 중국의 모습이었다." 중국에서도 전쟁이라고 하기 어렵고, 일본에서도 전쟁이라고 하기 어려운 그래서 지나사변이라고 불린 것이다.

9 쌍방이 상대 국가에 대해 국제 불법행위를 했다고 주장하면서 스스로 취한 강력조치가 보복이기 때문에 위법이 아니라고 서로 논쟁하는 두 나라, 그것이야말로 1930년대 일본과 중국의 모습이었다.

2차세계대전 당시에 일본이 영국, 미국, 네덜란드와 싸움을 한 것도 위법을 한 것인데 이것을 태평양전쟁이라고 부른다. 요즘은 아시아 태평양전쟁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아시아가 말하는 것은 우선 중일전쟁이 마무리 되지 않은 상태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다. 또는 어떤 측면에서는 중일전쟁의 확장선상에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다. 따라서 중일전쟁에 포함되는 중국, 그리고 일본에서 동남아시아를 침략했기 때문에 동남아시아를 묶어서 '아시아'라고 하여 '아시아 태평양전쟁'이라고 한다. 1930년 이때부터 사실상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일본에서 만몽특수권익을 취하고자 했을 때 그냥 일본이 군사력이 강하니까 가져 챙기면 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 요인으로는 특히 워싱턴체제를 둘러싼 각축이 있었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10 이 책은 만주사변의 기원을 1920년대, 필요한 경우 러일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한편, 중일전쟁을 독자적으로 해결할 길이 사실상 소멸되는 1940년 10월의 대정익찬회 성립까지를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답하고자 하였다. ① 만몽 특수권익이란 무엇이었나? ② 두 가지 체제를 둘러싼 각축은 1920년대의 중국을 어떻게 변화시켰나?

만주사변을 먼저 보겠다.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20분, 중국 동북부 요녕성 심양에서 가까운 류타오후에서 남만주철도의 노선 일부가 폭파된다. 이것이 일본에서 폭파시킨 것이다. 관동군 참모 이시하라 칸지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며, 이 사건이 중국의 장쉐량 지휘 하의 동북군 소행이라 발표하고 만주 침략을 개시한다. 이것이 류타오후 사건인데 이 사건을 시작점으로 해서 만주사변이 시작된다. 

16 1931(쇼와 6)년 9월 18일 밤 10시 20분, 중국 동북부(만주), 요녕성 심양(봉천)에서 가까운 류타오후(柳条湖)에서 남만주철도의 노선 일부가 폭파되었다. 관동군 참모 이시하라 칸지(石原莞爾) 등에 의해 1929년부터 주도면밀하게 준비해 온 작전이 여기서 실행된 것이다.

여기서 4가지 특징을 살펴볼 수 있는데 첫째가 상대방의 부재를 틈타 일으켰다는 것, 그리고 이 사건은 정치간섭이 금지된 군인이 정치적인 사건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것이 일본 천황제 파시즘의 핵심적인 특징 중 하나로 등장하는 것인데 내각이 군부를 직접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일본은 육군이나 해군 모두 천황 직속의 명령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대놓고 만주를 침략하게 되면 국제법에 저촉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국제법 위반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 방법이 계획되고 그에 따라 실천되었다는 것이다. 즉, 중국에서 먼저 남만주 철도를 폭파했기 때문에 그에 대응하여 했다는 것. 그리고 네 번째로는 만몽이라는 지역개념으로서의 만몽의 개념을 끊임없이 확장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17 이 장에서는 만주사변이 가지고 있던 형태상의 특질을 밝혀 본서 전체의 도입부로 삼고자 한다. 만주사변은 ① 상대국 지도자의 부재를 틈타 일으켰다는 점, ② 본래는 정치간섭이 금지된 군인에 의해 주도된 점, ③ 국제법에 저촉된다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국제법 위반이라는 비난을 피하도록 계획된 점, ④ 지역 개념으로서의 만몽의 의미를 끊임없이 확장시키고 있다는 점, 이 4가지 특질을 가지고 있다고 보인다.

만몽의 개념은 본래 그곳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일본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아두어야 한다. 본래 러시아와 비밀협약을 통해서 남만주와 내몽고에 대하여 자신들의 이익범위에 넣는데 성공했는데, 이것이 중국의 양해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처음에는 남만주와 동부내몽고를 가리켰던 개념이 만몽의 개념이다. 그런데 나중에는 동삼성인 길림성, 흑룡강성, 요녕성과 열하성, 차하얼성의 두 성을 포함한 지역 개념으로 변모하였다. 이 과정을 살펴보면 일본이 그 지역을 우선 말로 표현한 다음에 그 지역을 야금야금 시간이 지나면서 점령해 나가는 방법을 택하였다. 일본 같은 경우는 후발 제국주의 국가였으니 열강의 눈치를 봐야 했다. 특히나 일본은 외채가 많았기 때문에 채권국가인 서구 열강의 압력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그러니까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외교정책이 장기적으로 제약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 내용을 저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 세계에 가볍게 착륙한 것처럼 보였다."라고 말한다.

30 그들이 가장 염려한 것은 열강, 특히 미국의 간섭이었다. 간섭을 피하기 위해서도 단기간에 전 만주를 군사적으로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30 그때 그들이 사변이 발발하기 2년 전인 1929년에 일어난 중소분쟁을 귀중한 사례로서 주시했음은 거의 확실할 것이다.

35 '만몽'이 어떤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본인들에 의해서였다.

37 러일전쟁 후 1907년 7월 30일, 제1차 사이온지 킹모치 내각에 의해 조인된 제1차 러일협약 부속 비밀협약에 의해 일본과 러시아는 철도와 전신에 관해 남만주는 일본, 북만주는 러시아의 세력범위로 한다는 것을 상호 인정했다.

43 중국 측이 지방행정제도를 정비하는 기회를 통해 일본 측은 자신이 동부 내몽고라고 부르는 지역을 확대 해석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남만주와 동부내몽고를 가리켰던 개념이 동삼성과 열하성, 차하얼성의 두 성을 포함한 지역개념으로 변모하였다.

46 제1차 세계대전 후 영국·미국·프랑스 등의 열강과 더불어 일본은 독일과 러시아의 급속한 체제 변화를 응시하면서 전후의 동아시아와 태평양을 둘러싼 경제 질서 재편에 나섰다. 재편 과정에서는 전전이나 전쟁 중 일본이 해당 지역 사이에 구축한 정치적·경제적 지위 또한 당연히 새롭게 정의해야 했다.

47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으로서는 한국 병합도 남만주와 동부 내몽고의 세력범위화도 동아시아에서 당시의 열강인 영국·미국이나 러시아 등의 동의나 승인이 있을 때 비로소 실현 가능했다.

47 채권국인 서구 열강의 의향에서 그동안 일본이 자유로웠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불평등조약과 외채 두 가지는 일본의 외교정책을 장기에 걸쳐 근본적으로 규정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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