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시어도어 드 배리: 다섯 단계의 대화로 본 동아시아 문명


다섯 단계의 대화로 본 동아시아 문명 - 10점
윌리엄 시어도어 드 배리 지음, 한평수 옮김/실천문학사


서문

제1장 고전적 유산

제2장 불교의 시대

제3장 신유교의 단계

제4장 동아시아의 근대적 변형

제5장 후기유교의 새 시대

제6장 동아시아와 서구 : 서로 따라잡기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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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8 처음 네 개의 장은 동아시아 문명을 크게 4단계로 다루고 있다 (1) 틀을 형성하는 단계(대략 서력 기원 전 11세기에서부터 기원 후 2세기까지): 고전적 중국이 후에 다른 동아시아 민족의 고전적 유산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던 기본 관념과 제도를 발전시켰다. (2) 불교의 시대 (3세기부터 10세기까지): 동아시아에서 지배적이고 널리 영향을 미치는 문화적인 힘은 대승불교였고, 이것은 최하층 수준에서 살아남은 토착적 전통과 공존하고 있었다. (3) 신유교의 시대(11세기부터 19세기까지): 신유교는 새로운 사회문화적 활동에서 지도적 역할을 떠 맡았다. 반면 불교는 이제 복합적인 최하층 수준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했다. (4) 근대: 확장하는 서구 문명의 파도는 동아시아의 해안에 갑자기 밀어닥쳤고, 오래된 바위와 같은 토대를 씻어 버렸다. 제5장에서는 현재 동아시아에서 유교의 역할과 가능한 미래를 다룰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제6장에서는 동아시아와 서구 사이의 상호 작용이라는 새로운 단계를 다룰 것이다. 물론 문명을 보는 다른 방식과 설정할 수 있는 다른 시간의 틀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앞에서 설명한 것이 몇 개 안되는 장으로 동아시아를 이해한다고 하는 거대하고 복합적인 작업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일 것이다.


11 첫 번째 단계에서는 여기서 제시한 것처럼 대화는 주로 유가와 묵가, 도가 및 법가 사이의 대화이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의 대화는 불교와 유교와 동아시아 각 지역의 토착 전통 사이의 대화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신유교와 불교 사이의 대화이고 네 번째는 주로 신유교와 서구 문명 사이의 대화이다. 이 모두는 새로운 반응을 요구했던 발전하는 역사적 상황에서의 이들 각각의 서로간의 대화이다.


제1장 고전적 유산

39 왕망도 정치적으로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가 실행하려고 노력하였던 강력한 수단들의 결합 ━ 고대의 정전제의 이름으로 토지를 국유화하고 재분배하며, 정부의 독점권과 시장조절권을 강제적으로 다시 제정한 것 ━ 은 국가로 하여금 경제에 강력하게 간섭하게 하고 외관상으로는 유기적으로 정당화된 법가식의 제도를 채택하게 했다.


39 유가적 이론과 법가적 실천의 이런 혼합물은 이후의 중국 정치 전통에서 거의 표준이 되었다. 이후의 정치는 대개 경제에 대한 국가의 최소 개입이라는 동중서의 온건 개혁론의 극단과 강력한 국가 주도와 조절을 통한 보다 급진적 인 간섭이라는 왕망의 주장인 반대 극단 사이에서 동요했다.


40 결론적으로 나는 중국 전통의 특징을, 그 형성 단계에서부터 나타나는 것처럼, 주로 고전 유교와 한의 제도의 종합이라고 특징짓고 싶다. 유교는 학교와 가족에 깊게 뿌리내렸고, 한의 제도는 많은 인구가 생산하는 농업 경제의 조정에서는 감명적이었지만 이미 그렇게 광대해진 사업을 관리하는 데서 오는 부담을 보여주었다. 역사는 물론 성공과 실패를 모두 보여주었다. 다음 세대에 대한 이 문명의 복합적인 문화 유산은 유교 경전을 포함한 풍부한 문헌이었다.


40 위대한 한 문명을 함께 건설했던 무력은 중심을 지킬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변경도 방어할 수 없었다. 한의 권력과 유가의 가르침은 지상 낙원을 창조하려는 순자의 열망을 충족시키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2세기 말에 왕조가 난장판이 되자 유학자들은 때를 기다려야 했다. 그들은 에워싼 암흑으로부터 새로운 날이 터져 나올 것이라는 어떤 신탁과 같은 전조를 갈망하며 『역』(易)이라는 책으로 물러나야 했다. 동아시아 문명의 위대한 신기원을 위한 다음 단계를 만드는 것은 외부로부터 온 정복과 외국에서 온 종교에게 맡겨졌다.


제2장 불교의 시대

47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었을 때, 대승불교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변화 중의 하나는 획득해야 할 종교적 목표가 열반 대신 부처됨이라는 개념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동아시아 전체를 통해 가장 인기 있는 종교적 경전이 된 「법화경」에서 생생하게 표현되었다.


48 유교도 분명히 포교하는 종교가 아니다. 그러나 공정하게 말하면, 힌두교는 카스트와 계급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유교도 혈족 관계와 공동체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이와 다르게 불교는 처음부터 출가의 지혜, 즉 구걸하면서 포교하는 종교였다. 이 사실은 동아시아에서의 불교의 역사적 역할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명상적 종교로서 불교는 안으로 바라 보는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는 안으로 어떤 중심도 어떤 실체적인 자아나 정의 가능한 본성도 보지 않았다. 그리고 설법하고 포교하는 종교로서 불교는 권위의 고정된 중심 없이 밖으로 세계를 바라보았다.


50 실천적인 차원에서 불교는 조만간 중국의 가족 체제와 정치제도의 대부분에 뿌리를 내렸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불교가 가족의 삶이나 국가의 조직과 행위에 대해 특별히 말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불교는 '세간을 떠난다'는 종교적 삶의 특수한 요구만을 말했다(그리고 이것조차도 평신도의 불교에서는 오직 제한된 의미에서만 적용되었다). 그리고 지배자에게 그 종교를 정신적인 은혜의 원천으로서 진흥하고 보호할 것만을 요구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빈손이었기 때문에 불교는 여전히 토착적 기호에 맞도록 자유롭게 적응할 수 있었다.


50 7세기와 8세기의 한국과 일본에서 불교가 국가 건설의 새로운 과정에 공헌할 수 있었던 것은 불교가 가진 정신적 역동성과 새로운 상황에 적용하는 능력이 다시 작용했기 때문이다. 불교는 낡은 충성을 풀고 새로운 충성을 받아들이는 용매 구실을 할 수 있었다.


64 당이 붕괴되자 8세기 말부터 불교는 교리적·제도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을 보는 다른 방식은 전환기로 보는 것이지만, 더 나아가 그 과정을 불교가 중국의 삶의 상황에 더욱 깊이 적응해가는 시기로 볼 수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대사찰 제도와 교종이 쇠퇴하는 반면, 교리를 강조하지 않는 종교적 실천의 새로운 형태가 그 자리를 대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새로운 형태 중에 선 명상의 실행과 정토 신앙이 후기 중국 불교를 가장 잘 대표한다.


제3장 신유교의 단계

74 유교에는 불교처럼 개종시키려는 의도나 포교해야 할 의무가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유교가 불교와 비슷한 활력을 만들어 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내가 믿기에, 그 답은 불교와 신유교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 뿐 아니라 동아시아 문명의 세 번째 단계가 두 번째와 어떻게 다른가를 아는데도 있다. 요약하면 세 번째 단계는 확장주의의 국면이 아니라 오히려━경제·사회·문화적으로━내부로 향한 발전의 정도가 격렬했기 때문에 다른 단계와 구별되는 그런 국면이었다.


91 주희의 주석과 서문이 있는 사저가 13세기 중에 유교의 학원에서 핵심 교과서가 되어감에 따라 이 이념과 실천은 그 자체가 지닌 지적·도덕적 장점에 의해 확산되었고, 주희의 죽음 직전과 직후에 있었던 주희와 그의 추종자에 대한 공식적인 박해를 견디어 내었다. 주희의 가르침이 아주 논리 정연한 형이상학적 체계에 근거했기 때문에 지도적 학자들의 호감을 샀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94 나는 한국인이 주희가 권장한 사회 제도와 실천을 철저히 ━ 중국인 자신들에 의해 기도된 어떤 것도 훨씬 능가하게 ━ 채용했다는 사실 뿐 아니라, 그들이 삶의 완전한 길로 신유교를 채택할 때 취했던 진지함과 성실한 방식을 강조하고 싶다.


94 신유교는 국가의 정통성이나 이데올로기로 정착되기 전에 교육받은 한국인 사이에서 학문의 본체와 윤리의 법칙 및 정신성의 틀로서 수용되었다. 심지어 공식적으로 채택된 뒤에도 신유교는 창조적인 문화적 힘으로 계속 작용하였고 단순히 판에 박힌 공적 전례로만 기능하지는 않았다.


98 현재의 목적을 위해서는 정통 정주의 가르침을 포함한 신유학은 19세기까지 계속 이학과 심학 모두를 포괄하여 왔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전자의 측면은 학자적 연구와 객관적 탐구를 조장했고, 후자의 측면은 도덕적·정신적 수양을 조장했다.


제4장 동아시아의 근대적 변형

104 약간 수정된 비서구적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왜 서구는 동아시아의 유가의 품위 있는 행위에 부합할 수 없었는가? 왜 서구는 세계 도처에 칼자국을 내 타국을 괴롭히기보다, 중국과 일본 및 한국이 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 자신의 집안을 정돈하고 모국에 머무르는 그런 성숙하고 책임있는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았는가?


109 어떤 사람들은 아마 이 17~18세기 동아시아의 고립 국면을 그 다지 이상적이지 않은 관점에서 서구 세력이 동아시아 해역으로 진출한 것에 대한 방어적 반발로 평화에 대한 어떤 사랑보다는 외국인 혐오증에 의해 고취된 것으로 보려고 할 것이다. 혹은 기독교의 급진적이며 잠재적으로는 파괴적이기 조차한 성격에 대한 공포에 의해 지배된 것으로 보려고 할 것이다.


109 그러나 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세계에 대한 신유교의 완강한 내향성으로 특징지어진 전망(outlook) ━ 혹은 보다 정확하게는 내관(inlook) ━ 의 우세를 주목할 수밖에 없다. 이 내향성은 주변적이고 이차적인 것을 향해 밖으로 보기보다는 중심적이고 일차적인 것을 향해 안으로 보려는 성향이다. 서구인이 보기에 이것은 나머지 세계에 대한 오만한 무관심이나 무사안일주의적인 고립주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유가가 국민에게 이익이 될지 의심스러운 국제적 모험에 휘말리는 것보다 국내 문제의 해결과 기본적인 인간 욕구의 충족을 정당하게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이었을 뿐이었다.


110 이 모든 것은 아직 서구의 어떤 위협도 나타나기 전이었던 시대, 즉 몽고가 보다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정책과 무역정책으로 전환했을 때에 분명히 나타났다. 그 정책 전환은 정확히 전통적인 중국이 왕조 제도를 재확립하고 신유교를 원 왕조의 공식적인 가르침으로 채택한 바로 그때(1284~1320) 시행되었었다. 이러한 경향은 또한 명 왕조가 하원기 같은 유가 재상의 조언에 따라 환관 제독인 정화(1371-1435)의 인상적인 해외 모험에서 물러났던 사실에서도 보인다.


111 동일한 세계관은 15~16세기의 한국에서 충실한 군비에 힘쓰지 않고(한국이 히데요시의 침략에 초기에 제대로 저항할 수 없었던 역사적 사실은 대부분 이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문민정부를 강화하고 인문주의적 학문을 진흥하는 정책으로 바뀌어 나타났다. 이것은 도쿠가와 정권의 결심에 더욱 깊이 반영되어 있다. 그들은 히데요시와 같이 모험주의적 정책을 추구하는 것보다 국내 지배를 공고히 하고 자국 중심적이고 중앙에서 조절되는 외교 정책을 확립하려고 했다.


148 중국은 이제 실질적으로 문화혁명 당시의 도덕적 투쟁을 포기했다. 그리고 중국의 목표를, 특이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사실로부터의 학습'과 '실용주의' 및 공론가의 태도를 피하기 등을 강조하는 근대화 과정의 관점에서 다시 정의했다. 변하면 변할수록 더 중국적으로 된다. 이런 점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변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중국이 자신의 전통적/혁명적 고립주의로부터 탈출했다는 것이며, 동시에 중국의 과거를 연구하는 문제에서 조차 새로운 개방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제5장 후기유교의 새 시대

156 자각이 이렇게 늦어졌던 한 가지 이유는 최근까지도 근대화는 대부분 급속한 변화의 관점에서, 사실상 거의 변함없이, 어떤 혁명적 과정으로 여겨져 왔었다는 데 있다. 성공의 비결이 오히려 깊게 뿌리내린 사회적 과정과 문화적 전통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잠시라도 생각했던 분석가들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오늘날 그러한 기적이 고유한 요소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성공은 서구, 특히 전후 미국의 원조나 무역에 많이 힘입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원조의 모든 수혜자가 동아시아의 국민이 했던 것처럼 원조를 그렇게 잘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인으로 하여금 이 기회를 보다 충분히 이용할 수 있게 한 것은 아마 그들의 과거로부터 전승된 문화적 특성들과 기능 및 훈련일 것이다.


159 인도의 왕조 지배가 상대적으로 불안정했던 것에 비해 중국의 왕조 국가가 안정성을 유지했고 관료제가 지속되었던 이유의 대부분은 아마도 유가의 기풍과 학문 때문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유교는 국가에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그 반대가 똑같이 진실인 것은 아니어서, 국가가 유교에 의존한 것만큼 유교가 살아 남기 위해 국가에 의존하지는 않았다. 유교는 비록 왕조의 흥망에 영향을 받았을지라도 스스로 살아남을 길을 발견했다. 그러한 길 중의 하나는 학교를 통한 것이었다.


163 동아시아 발전의 첫 번째 단계인 틀을 형성하는 시기에도 교리는 흔히 국가가 실제로 하는 것과 뚜렷이 다르게 존재했다. 때문에 유교와 국가의 관계는 매우 결정하기 어려웠고, 심지어 유교가 어떤 종류의 국교가 된 이후에도 그 관계는 애매한 상태였다. 더욱이 왕조 지배의 바로 그 불안정성도 유교를 어떤 불안정한 지위에 남겨두었다. 그러한 변천을 통해 유교는 국가와 결합하거나 학교를 통해서 라기보다는 가족과 씨족의 삶에 확고한 발판을 마련함으로써 계속해서 이른바 '규범적인 가르침'으로서 중국에서 전통적인 사회 규범의 화신이 되었다.


164 결국 세 번째 단계에서 가족 윤리는 신유가의 가르침과 실천의 핵심으로서 강력하게 강화되었다. 그리고 주희의 「가례」는 『소학」과 함께 동아시아의 대부분에서 기본적인 사회 교본이 되었다. 이 때문에 이러한 방식으로 오랫동안 확립된 근대의 유교는 가족에 대한 유교의 지배력을 통해 동아시아 도처에서 일어난 전통적 지배 체제의 폐지와 서구식 학문에 의한 유교식 학교의 대규모 대체를 견뎌내는 것이 가능했었다.


171 유가는 지금까지 정치적 단체를 조직해 혁명을 유도하거나 권력을 장악한 적이 없었다. 유교가 지금까지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된 적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나는 현재의 상황에서 유교가 그렇게 되어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교는 교육의 과정에서 어떤 위치를 반드시 다시 얻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정치적 행동으로 바뀔 수 있는지는 주로 의사 소통과 결사의 자유의 존재여부 및 신장 정도에 의존할 것이다.


제6장 동아시아와 서구 : 서로 따라잡기

195 우리는 이제 새롭고 매우 답답한 발전 국면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것은 이제까지의 근대적 삶에 대한 믿음과 어긋나게 우리로 하여금 제일 먼저 우리의 내부의 공간 ━ 자기 반성과 가족사이의 친밀함, 이웃 사람 사이의 관심 및 우리 자신의 생물학적 영역에 대한 도덕적 책임의 공간 ━ 에 주의하게 하고 그리고 오직 그런 다음에야 외부의 공간에 주의하게 할 것이다.


195 주희의 교과과정 모델 ━ 고전에 대한 개인적 독서와 대결로부터 시작하여, 다음에 주요한 역사를 연구하고, 호원이 그 필요를 인식했던 기술적인 전문화와 나란히 가치 문제와 동시대의 문제에 대해 일생을 통해 검토를 계속해 나가는 것 ━ 은 오늘날도 여전히 고찰할 가치가 있다. '고전'은 주요한 세계 전통을 보다 넓게 대표해야만 할 것이다. '우주론'은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보다 큰 우주와 지구의 기원에 대한 것을 포함해야 할 것이다. '역사'는 생물학적 문화적 발전을 포함하도록 확장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대의 문제'는 갱신되어야 하겠지만, 본질적으로 주희 시대의 것이 여전히 타당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196 이 책에서 검토된 문명의 네 가지 단계의 각각은 앞선 시대의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힘에 의지하고 있는 동시에, 그러한 내적 혁명에 의해 고무되고 유지되었다. 나는 이것이 세계 문명의 다음 위대한 시대에도 역시 진실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의 유산을 끌어들이지 않는 어떠한 새로운 질서도 지속될 수 없다. 그러나 유교적이든 불교적이든 기독교적이든 지구적 투쟁의 혹독한 시련 속에서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은 어떠한 전통도 살아남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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