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카와 쇼지, 히라이 가즈오미: 끝나지 않은 20세기


끝나지 않은 20세기 - 10점
이시카와 쇼지.히라이 가즈오미 엮음, 최덕수 옮김/역사비평사



한국의 독자들에게

옮긴이의 글

책머리에

서론/ 동아시아 '장기 20세기' 정치사

1부 근대의 패러독스, 저항과 수용 : 1894~1930년

2부 '근대의 초극' 그 꿈과 현실 : 1930~1950년

3부 열전,휴전,냉전 : 1950~1970년

4부 변화 속의 지속 : 1970년~

결론/ 끝나지 않은 20세기

엮은이의 글

부록




관련 공부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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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글

17 1984년 동아시아 역사는 개별 국가의 역사만으로 객관적인 서술이 이루어질 수 없다. 1894년 5월 말 동학농민군이 전주에 들어간 바로 그간, 일본 의회는 내각불신임안을 가결시켰고, 이에 대응하여 일본 정부는 닷새 뒤 대본영을 설치함으로써 국내정치를 전시체제로 전환했다. 청 왕조도 즉시 군대를 파병하여 양국이 대치한 지 두 달을 넘기지 않아 한반도에서 양국의 전면전이 치러졌다. 그 후 전투에서 청나라에 대한 우위를 점하자 일본군은 농민군 제압에 나섰다.


서론/ 동아시아 '장기 20세기' 정치사

30 영국의 저명한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20세기의 시작과 끝을 1914년의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1991년의 소련 붕괴에 두었다. 이 두사건을 20세기 세계사를 규정하는 분수령으로 파악하고, 20세기를 '단기 20세기'라고 명명했다. 반면 19세기는 1789년부터 1914년까지로 파악해 '장기 19세기'로 명명했다.


31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미소의 냉전구조가 붕괴함으로써 세계를 양분했던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 대립은 끝났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유럽을 중심으로 생각한 것이고, 동아시아에서는 20세기에 형성된 냉전구조가 북조선과 한국, 중화인민공화국와 중화민국(대만)처럼 결코 붕괴되지 않은 채 확고히 존속되고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자본주의적 근대세계시스템에 대한 포섭과 그에 대한 저항을 기조로 하는 동아시아 20세기는 적어도 서구권과는 달리 1991년으로 끝났다고 말할 수 없다. 그와 같은 상황은 21세기를 맞이한 지금도 끝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19세기 후반 책봉체제가 붕괴한 이래 그것을 대신할 안정적인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아직까지 구축되지 않았으며, 이제 겨우 모색되는 단계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동아시아에서는 20세기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채 이어지는 길고 긴 20세기인 것이다.


33 1945년 이후 냉전이데올로기에 규정된 정치 이념 때문에 한반도와 중국에서는 같은 민족이 서로 갈라서서 총을 겨눈 내전이 발발했다. 중국 본토와 한반도에서는 냉전이 아닌 열전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


1장 근대국가 일본의 등장과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재편

38 1842년 청나라와 아편전쟁에서 승리하고 홍콩을 영유했던 제국주의의 본가 대영제국, 세계 최대의 영토를 가진 제정러시아, 1861년에 발발한 남북전쟁으로 국토 분열의 위기를 피할 수 있었던 미국, 오늘날 많은 일본인들이 해외여행으로 방문하고 있는 하와이는 이 시기까지 아직 독립국이었다. 그리고 1871년 프랑스와 전쟁에서 승리해 파리에서 그 성립을 선언했던 독일제국, 독일에 패한 프랑스는 제국 붕괴의 폐허 위에 성립된 제3공화정하에 있었다. 제3공화정 최초의 과제는 파리코뮌을 분쇄하는 것이었다.


42 우리들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근대화는 '문명개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었다. 문명개화는 서구의 문물과 제도를 채용하는 데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서양화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43 근대화를 강력한 중앙정부를 필요로 했다.


44 근대화로 인해 명확한 국경선이 확립되었다. 막번체제하에서는 일본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선은 지금과 달랐다.


44 1874년의 대만 출병을 둘러싼 일련의 과정을 거쳐 오키나와는 1879년에 일본의 하나의 현으로 편입되었다.


2장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용과 조선 : 근대화의 모색

66 1875년의 강화도 사건을 계기로 다음해인 1876년 조선은 일본과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했다.


66 조선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세계에 편입되는 한편, 정치면에서는 책봉체제라는 전통적인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각국과의 조약에 근거한 국제법체제라는 이른바 이중의 국제질서하에 놓이게 되었다.


68 동아시아에서 맨 먼저 근대화를 달성한 일본은 스스로가 문명국이 되었다는 자부심을 가졌다. 그와 동시에 열강이 이용한 문명을 내세운 지배논리를 역시 받아들였다. 조선을 비롯한 다른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침략행위를 정당화할 때 일본은 바로 이 논리를 사용했다.


81 일본군은 1909년 전라도에서 '남한대토벌작전'을 전개하여 이 지역 의병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후 의병운동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조선 내에서 무력을 통한 조직적인 저항은 종언을 고했다.


3장 세계질서의 재편과 일본 : 1931~1950년

92 1932년 3월 실질적으로 일본의 괴뢰국가였던 '만주국'이 건국 선언을 했다.


93 '국가개조운동'은 일부의 군인 및 우익이 테러나 쿠데타라는 급진적인 행동과 병행해서 전개한, 이 시대의 독특한 분위기와 그 극복을 위한 방편이었다. 이 운동은 근대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양자를 비판함과 동시에 아래로부터의 위기의식을 조장함으로써 국민을 조직화하려고 했다.


99 "천황의 결단에 의한 본토 결전의 회피는 전선과 후방을 역사적·정치적으로 차단했고" 그 결과 후방의 국민은 "서구 열강으로부터 아시아의 해방이라는 대의명분, 곧 일본과 아시아의 관계 속에서 전쟁의 의미를 묻고 총괄하는 노력을 전개한 흔적은 거의 볼 수 없다"라는 것이다. 또한 아시아에서 행한 일본의 가해 사실에 대한 망각과 은폐, 다른 한편으로 전시하의 생활난, 공습, 오키나와전, 원폭투하 등에 수반되는 피해의식과 그것에 뿌리를 둔 전후의 평화의식이라는 이중구조는 일본의 특별한 전쟁 종결방식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105 전쟁체험에 갇힌 내셔널리즘적 시점이 아닌, 자신과 국가의 관계 그리고 아시아와 일본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파악하는 작업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했다.


105 이 과정에서 '아시아 속의 일본'이라는 문제는 한동안 망각의 저편에 남겨두게 되었다.


4장 냉전과 분단국가의 형성, 그리고 민주화 : 한국의 '해방'과 현실

117 1948년 5월 UN 임시정부조선위원단의 감시 아래 제주도를 제외한 남조선 전역에서 단독 선거가 실시되었고, 제헌국희 의원이 선출되었다 .7월에는 헌법이 제정되었고, 국회에서 간접 선거로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8월 15일에는 최종적으로 대한민국(한국)의 수립이 선언되었다. 9월 9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조선)이 수립이 선언되었다. 남북의 양 분단국가는 어느 쪽도 상대를 정부로서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이 유일한 정부라는 입장을 취했다. 이제 막 건국된 한국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126 분단국가는 냉전 대립이 낳은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조선이 단순한 개체로서 그 운명이 일방적으로 좌우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식민지 엘리트가 그 처단을 피하기 위해 반사회주의 입장을 취했던 것이 남조선의 정치에 영향을 끼쳤다. 마찬가지로 분단은 조선 내부에서 어느 정도 자율적으로 진행된 정치과정과 국제환경 사이의 상호 작용에 의한 결과였다. 일단 건설된 분단국가는 어느 쪽이나 체제 유지를 지상과제로 삼고 있었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두 체제가 군사적인 긴장감을 유지한 채 대치하는 상황에서 그러한 과제는 당연했다.


127 4월 혁명을 통해서 단지 반공만으로는 비민주적 체제를 정당화할 수 없음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이 바뀌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쿠데타 세력은 개발에 의한 부국강병이라는 새로운 국가목표를 제시하고 비민주적 체제를 정당화하기위한 새로운 논리를 준비해야 했다.


5장 동아시아 냉전 속의 일본 : 보수,혁신의 대립과 고도성장

134 대일점령 정책의 목표는 기존의 일본의 비군사화·민주화에서, 일본을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전략과 자본주의 경제의 담당자가 될 수 있도록 조속히 자립시키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그 구체적인 방책으로 국내 공산주의 세력의 억압 및 인플레이션의 조기 수습을 통한 경제의 안정화 등이 시도되었다.


6장 동아시아 냉전과 중화인민공화국:중국사회주의의 모색

170 군사적으로 고착화된 38도선과 달리 대만 해협에서는 1954년부터 1955년에 걸쳐 1차 대만해협 위기, 1958년에 2차 대만해협 위기가 발생했다. 또한 국민당 정부 점령지인 금문·마조도를 둘러싸고 공화국의 공격과 이에 대한 미군의 출동이라는 군사적·정치적 긴장이 되풀이 되었다. 반복되는 해협 위기의 의미는, 중화인민공화국에게 있어 건국 이래의 과제이자 혁명의 최종 과제인 중국 통일이 미국과 군사대결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현실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발생한 동아시아 냉전이 미·중대결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구체적 증거였다.


7장 세계화는 자본주의와 일본 : 혼돈 속의 정치와 경제

204 냉전 종결은 미국을 세계에서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만들었고 미국은 세계화된 자본주의 국제질서를 유지하는 '경찰관'으로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그러한 미국도 경제 측면에서는 이제 1960년대까지와 같은 압도적인 힘이 없었다. 따라서 미국은 UN을 이용하여 각국의 군사력·경제력을 동원해 지역분쟁에 개입하는 방식을 썼다. 미국은 이러한 개입을 벌일 때마다 당연하다는 듯이 일본에게 적극적인 군사적 지원을 요구했다. 특히 중국, 대만 및 남북한이라는 분단국가가 존재하는 동아시아에서는 그 군사적 긴장 상태가 일미 양국 정부에 의해 때로는 크게 좌우되었다. 일미 안보조약 역시 지금까지보다 더욱 중요한 군사적 역할을 일본이 담당하는 방향으로 사실상 개정되었다.


8장 냉전하의 개발과 민주화 : 한국의 경험

223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로 간신히 찾아온 민주화의 '기회'는 신군부의 폭력에 의해 짓밟히며 비민주주의적 체제가 계속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그것은 개발과 반공 체제를 묶은 부국강병 노선이 이 단계에서는 아직 극복되지 않았다는 의미한다. 그러나 민주화의 과정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중단'되었을 뿐이었다.


227 반공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개발이라는 목표가 설정되고 그에 기반한 개발반공체제가 형성되었다. 개발, 즉 풍요로움의 실현이라는 최우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가 제약받는 반공체제도 '어쩔 수 없다'라는 것이 이 정당화 논리였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개발반공체제가 성과를 올림으로써 경제적 풍요가 일정부분 달성되자 '어쩔 수 없다'라는 구실도 무너지게 되었다.


결론/ 끝나지 않은 20세기

234 일본은 '서구의 국제 질서로의 폭력적 편입'이라는 충격에 대해서 아시아 연대로 대항하지 않고 재빠르게 서구질서 편입을 결의하고, 탈아입구를 통해 아시아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길에 매진했다. 그리고 패전 후에도 이를 반성해 아시아의 일원으로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탈아입미', 즉 일본의 미국화를 선택했다. 그 때문에 일본은 정면으로 동아시아와 마주하지 않았던 것이다.


244 여러분 중에서는 자신이 철이 들고 난 후, 왜 내가 20세기 일본과 동아시아의 역사를 배워야 하며 그것에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역사적 책임을 느껴야만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테사 모리스 스즈키씨는 이것을 '연루'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 말은 과거와의 의식적 관련을 가진 존재와 (법률 용어로 말하는 부분인) 사후공범 an accessory after the fact의 현실을 승인한다는 의미이다. 다음과 같은 상황을 예로 들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이민은 원주민 애보리진에게 직접적으로 토지를 수탈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도둑질한 토지 위에 사는 것이다. 학살을 실제로 행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학살에 대한 기억의 말살과정에 관여한 것이다. 자신은 타자를 구체적으로 박해하지 않았을 지라도 정당한 대응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과거의 박해의 이익을 얻어 성립된 현재 사회에 살고 있다.


244 인간의 역사는 하나의 공간과 시간으로 미리 방향이 정해진 직선적인 흐름일까, 아니, 오히려 무수한 공간과 시간의 끊임없는 충격과 재편성, 통합과 분열, 상호 침투와 상호반발의 행보이다. 그곳에서 인간의 자유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유한한 시간과 공간을 자기의 의지로 제어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과 교감하고 소통하는 가운데 공생을 배우고, 배분을 조정해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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