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M. 귄: 로마 공화정 ━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4


로마 공화정 - 10점
데이비드 M. 귄 지음, 신미숙 옮김/교유서가

제1장 안개에 싸인 과거

제2장 공화정이 형태를 갖추다

제3장 남성, 여성, 그리고 신들

제4장 카르타고를 파괴해야 한다

제5장 지중해의 여왕

제6장 제국의 비용

제7장 언어와 이미지

제8장 로마 공화정 최후의 시기

제9장 로마 공화정의 유산


연표/ 참고문헌/ 역자 후기/ 도판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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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안개에 싸인 과거

19 기원전 510년에 로마 왕정은 붕괴되었다. 왕은 선거로 뽑힌 두 명의 집정관으로 대체되었다. 첫번째 집정관은 콜라티누스와 브르투스였다. 이로써 로마 공화정이 성립되었다.


21 로마는 이탈리아 서부 해안의 중간쯤에 있는 비옥한 라티움 평원에 자리잡고 있다. 이탈리아 지리의 특징을 규정하는 것은 북쪽의 알프스 산맥과 포 강 계곡, 그리고 이탈리아를 위에서 아래로 관통하는 척추의 역할을 하는 아펜니노 산맥이다. 아펜니노 산맥은 서부보다는 동부 해안 가까이에 있고, 동쪽이 더 가파르기 때문에 중부 이탈리아에서 비옥한 토양 대부분은 서쪽에 있다. 라티움 평원은 조밀한 농업 인구를 부양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땅에 사는 이들은 아펜니노 산맥에 웅크린 산악 부족들의 침략을 막아야 했는데, 로마 초기 역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이들은 삼니움 인이었다.

 

27 에트루리아인은 수세기 후에 그리스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로마 문화에 커다란 공헌을 했으나 결국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왕이 추방됨으로써 로마의 정치적 독립이 재확인되었으며, 로마는 점진적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제 형태를 갖추어가는 로마 공화정은 전적으로 로마인의 독특한 창조물이었다.


제2장 공화정이 형태를 갖추다

38 기원전 295년 센티눔 전투에서 로마와 동맹국들은 삼니움과 그 연합군을 분쇄했다. 이로써 로마공화정은 이탈리아 반도 최강의 세력임이 확증되었다.


39 기원전 270년 무렵 마그나 그라이키아의 모든 도시들은 로마의 동맹에 편입되었다.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여왕으로서 독보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42 기원전 342년부터는 2명의 집정관 중 1명은 반드시 평민이어야 했다. 결국에는 평민들도 거의 모든 정치적·종교적 직책을 맡을 수 있게 되었다.


43 행정관은 매년 선출되는 관리들로서 정부의 일상 업무를 수행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행정관은 2명의 집정관이었는데 이들은 과거에 왕이 행사하던 명령권을 보유했다. 2명의 현직 집정관은 국가의 정치적 군사적 수장이었다. 그들은 원로원을 주재하고, 필요한 경우 법안을 발의했으며, 전장에서 군대를 지휘했다.

 

43 집정관 아래에 여타 행정관들이 있었는데, 이들 또한 매 년 새로 선출되었다. 중요 관직들은 법무관, 조영관, 재무관, 그리고 호민관이었다.


43 호민관은 다른 행정관들과는 다소 달랐다. 호민관이라는 직책은 기원전 494년 첫번째 '평민들의 철수' 이후에 생겨 으며, 본래는 부유한 평민에게 개방된 유일한 관직이었다. 해마다 10명의 호민관이 선출되었으며, 이들은 혈통 귀족 출신 행정관들의 부당한 행위를 막아 평민들을 보호해야 했다.


48 로마인들은 전제 권력에 적개심을 품었으나, 단일한 지도자가 필요한 경우도 있음을 인정했다. 그에 따라 그러한 비상시기에 국가를 감독할 더 우월한 명령권을 지닌 독재관이 임명되었다. 독재관의 임기는 6개월을 넘을 수 없었으며, 위기가 해소되면 6개월 이전에도 종료되었다. 후일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보유한 '종신 독재관 직'은 로마인들의 눈에는 명백히 모순이었고, 카이사르 살해 사건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48 행정관들은 원로원의 지도에 따르는 것이 상례였다. 원로원은 왕들에게 조언하던 귀족 협의회에서 발전한 제도였다. 행정관 자신이 원로원의 일부였으며, 통상 임기를 마친 후에는 원로원 의원의 역할을 다시 수행했다. 중요한 결정 사항들은 항상 원로원에서 먼저 토의했으며, 원로원은 특별히 대외 정책, 민사 행정, 그리고 재정을 감독했다. 공화정 정부의 진정한 기초는 바로 원로원이었다. 원로원이 제안한 결정사항들은 공화정 체제의 세 번째 요소라 할 수 있는 민회가 확인해야 했다.

 

49 공화정 체계는 로마인의 독특한 창조물이었다. 로마 인민은 어떤 의미에서 최고 권력을 손에 쥐었다고 할 수 있지만 로마는 민주정이 아니었고 고전기 아테네보다 대중의 변덕에 훨씬 덜 휘둘렀다. 지배층을 형성하는 혈통 귀족 출신 혹은 평민 출신의 귀족들은 분명히 제한된 집단이었지만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데 개방되어 있었으며, 로마인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군주주의적 성향을 지녔던 스파르타인에게는 없었던 융통성을 지니고 있었다.


제3장 남성, 여성, 그리고 신들

58 원로원 내에서 한 인물의 지위를 결정하는 것은 그의 '디그니타스(dignitas: 위엄)'였다. 디그니타스는 사실 단순한 위엄이 아니라 훨씬 많은 의미가 있는 복합적 개념으로서 한 개인의 인격적 가치와 가문의 가치를 모두 합한 무엇을 의미했다. 더 높은 관직, 예컨대 집정관직 등을 보유한 자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더 높은 위엄을 지녔다.

 

58 누군가 자신의 위엄을 높이려 한다면 가장 중요한 수단은 '영광(gloria)'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공화정기 로마에서 최고의 영광은 전쟁을 통해서, 즉 군대를 승리로 이끎으로써 얻을 수 있었다.


63 공화정 초기에는 상비군이나 직업 군대가 없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병사들이 소집되었다. 잘 알려진 대로 전쟁은 매우 자주 일어났다. 전장에 나가지 않을 때 병사들은 자신의 농지를 스스로 돌보아야 했다. 재산이 없는 자들에게는 군복무가 허용되지 않았다. 병사들이 자신의 장비를 갖추는 데 필요한 비용을 손수 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군사 행동에 나설 필요성이 증가하자 로마 공화정은 병사들에게 보수를 지급하게 되었고, 국가가 갑옷과 무기 생산을 떠맡았다. 이로 인해 병사들의 겉모습이 균일해졌고, 전장에서의 전술이 더욱 통일적으로 시행되었다.

 

70 10세 이전에 사망하는 아이들이 50퍼센트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원치 않는 여아를 버리는 행위가 유아 사망률을 높였다.


71 낮은 기대 수명, 그리고 남자가 여자보다 늦게 정혼하는 세태는 중요한 결과를 초래했다.

 

71 엘리트 사이의 결혼은 주로 정치적 이유로 결정되었고, 이혼과 재혼이 빈번했다. 그러므로 로마 가정의 모습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가족간에 나이차가 매우 크게 나기도 했으며, 부 모가 서로 다른 아이들이 한 가정에서 함께 살기도 했다.

 

78 근대인의 눈에는 공화정기의 신앙이 매우 낯설어 보이겠지만 종교는 로마인의 생활에서 필수요소였다. 가정에서는 가정을 수호하는 정령들을 모시는 소규모 가정의례를 열었으며, 국가적으로는 국가를 수호하는 최고의 신들을 기리는 대규모 희생제와 행렬을 거행했다.

 

78 신들의 의지를 알아보기 위해 새들이 비행하는 모습을 해석했고, 희생된 제물의 내장을 분석했다. 신들의 승인을 얻기 전에는 선거를 치르지도 전쟁을 선포하지도 않았다.

 

80 로마의 종교가 기독교나 이슬람교처럼 좀더 배타적인 종교들에 비해 더 관용적이었다고 말하긴 어렵다. 관용이란 기존 종교를 대체할 다른 종교의 존재를 허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의 다신교는 관용적이지도 불관용적이지도 않았다. 다른 민족들의 종교 관행을 흡수해 버렸기 때문에, 특별히 종교적 이유에서 박해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82 로마의 수많은 종교의식들은 고유의 형식과 의례를 갖추고 있었다. 이들 사이에서 통일성은 기대할 수 없었다. 즉 모든 로마인이 따라야만 한다고 기대되었던 하나의 성스러운 경전도 신앙도 없었다. 서로 다른 종교적 요소들을 함께 묶고 있었던 것은 위험한 세상에서 지도와 보호를 얻으려는 인간의 보편적 바람이었다. 그러한 소망은 '신들의 평화(pax deorum)'라는 로마 종교의 근본 원칙으로 표현되었다.

 

83 개인의 신앙과 기도에 더 큰 가치를 두는 기독교에 비하면, 로마 종교는 공동체 성격이 강했다. 개인의 전통 표현은 구성원들이 함께 참가하는 의례보다 덜 중요했다. 가정의 종교의식도 국가의 종교 축제도 집단의 이익을 위해 신들에게 호소하는 것이었다.

 

83 형식과 절차에 대한 이런 강박관념은 로마인이 올바른 믿음(orthodoxy)보다는 올바른 행위(orthopraxy)를 강조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제4장 카르타고를 파괴해야 한다

96 제1차 포에니 전쟁을 통해 공화정은 군사적, 경제적 압박을 견디며 재기를 위해 국가를 탄력성 있게 운영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또한 엄청난 부담이 지속 되었음에도 동맹국들이 충성을 유지한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시칠리아는 세공을 부담하는 로마 최초의 속주가 되었다.


제5장 지중해의 여왕

129 그리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까지는 공식적으로 속주가 되지 않았다. 시리아와 이집트도 명목상으로 독립을 유지했다. 그러나 로마 공화정은 이제 그리스 도시국가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가 유산으로 남긴 지역에 대해 지배권을 행사했다. 수십 년에 걸친 충돌과 오해가 빚어낸 분노는 여전히 부글거리고 있었고, 그리스인과 로마인 사이의 긴장은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길게 보아 두 문화가 만나 얻게 된 혜택이 그 동안 치른 비용을 훨씬 능가했다.


129 로마의 지배는 궁극적으로 동 지중해 세계에 평화와 안정, 그리고 번영을 가져다 주었다. 몇 세기 후에 그리스어를 말하는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 제국은 스스로 로마의 계승자임을 자랑스럽게 선포했다. 그리스인 쪽에서는 로마에 항상 기꺼이 그러진 않았지만 자신들의 문학과 예술을 전해 주었고, 로마인의 생활에 세련미와 새로운 자극을 안겨 주었다. 


제6장 제국의 비용

133 공화정은 결코 제국 통치를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팽창으로 인해 로마 공화정의 정치 구조와 원로원 엘리트의 집단적 권위는 더욱더 많은 압박을 받았다. 로마의 사회적 경제적 구조에도 강력한 압박이 가해졌다. 초기 로마인은 소규모 농경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원정에 나서야 했던 농민-병사들로 이루어진 군대는 카르타고와의 오랜 전쟁과 지중해의 동서남북에 걸친 충돌에 적절히 대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로마의 농업 경제는 승전에 따라 들어온 부와 노예들에 의해 변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요인들이 로마와 이탈리아에 충분히 영향을 행사하게 된 시기는 기원전 2세기였다. 기원전 1세기에 공화정의 몰락에서 정점을 이룬 일련의 사건들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145 그라쿠스 형제는 공화정을 몰락으로 이끈 혼란한 세기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셈이었다. 토지 보유, 징집, 그리고 동맹국의 권리를 둘러싼 갈등은 계속 부글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일련의 군사적 위기가 닥치자 군사 지도자들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이들은 원로원의 집단적 권위에 도전했다.


149 마리우스는 공화정의 마지막 세기를 지배한 군사 지도자들 중 첫 번째 인물이었다. 그러나 길게 보면 경력 못지 않게 중요한 업적은 마리우스가 로마 군대를 재조직한 일이었다.


149 마리우스의 신병들은 경작할 토지가 없었기 때문에 엄격한 훈련을 받고 기강을 갖추어 오랫동안 군복무에 전념할 수 있었다. 가난했기 때문에 이들의 모든 장비는 국가가 일괄 지급했다. '마리우스의 노새'들이라 알려진 이들은 중갑병의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2개의 창과 스페인식 단검뿐 아니라 25킬로그램의 배낭을 지고 행군했다. 


151 돌이켜 보면 이탈리아 반도 사람들이 로마 시민권을 얻기 위한 투쟁에서 어렵게 얻은 승리는 지속적인 제국을 창조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뒤이은 수세기 동안 이탈리아 반도 사람들에게 부여된 권리는 점차 로마에 예속된 모든 민족들로 확대되었고 지중해 세계는 로마적 정체성이라는 우산 아래 통합될 수 있었다.


152 술라의 로마 행군은 로마의 귀족적 야망과 마리우스의 군사개혁이 초래한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영광과 탁월함을 갈망하면서 술라는 병사들에게 자신의 위엄(dignitas)을 위해 싸우라고 호소했다. 이 병사들은 국가가 아니라 술라에게 충성을 바쳤고 약속된 토지를 하사받기 위해 그에게 의존했다. 


제7장 언어와 이미지

163 라틴 문학의 초기 역사에서 마지막 거장은 대(大) 카토라 불리는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기원전 234-149)이다. 보수주의자였던 카토는 그리스 문화에 대한 적대감으로 유명하며, 산문으로 된 최초의 로마 역사를 저술했다.


166 키케로는 자신의 저술들을 통해 동시대인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나 율리우스 카이사르보다는 훨씬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는 결점을 지닌, 일관성 없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상주의자이고 원칙주의자이며 용감한 인물이었다. 그는 무너져가는 공화정을 부질없이 수호하느라 자신의 인생을 바쳤다.


제8장 로마 공화정 최후의 시기

187 갈등은 내부에서 비롯되었다. 제국을 통치하는데 필요한 요구들에 공화정 시기의 사회와 정부가 대응하는 과정에서 빚어졌고, 로마의 팽창 동력이었던 귀족 간의 경쟁 그리고 영광과 위엄의 압박에서 비롯되었다. 사병화된 군대들, 점점 늘어가는 부로 인해 경쟁은 더욱 격화되었고, 결국 한 사람의 수중에 위엄, 부, 군사적 지배권이 집중될 때까지 싸움은 그치지 않았다.

 

211 로마 공화정은 약 500년 동안 지속했다. 왕의 추방에서 시작하여 황제의 등장으로 끝나는 이야기이다. 로마시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생존을 위해 싸우던 작은 도시에서 광대한 지중해 제국의 여왕으로 변모했다. 로마 제국의 지배권은 단지 내부 투쟁에 의해서만 위협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공화정의 승리와 비극은 서로 떨어질 수없이 얽혀 있었다. 공화정의 독특한 정치 체제는 로마에 안정을 가져오고 원로원의 집단적 권위는 사회를 하나의 방향으로 이끈 반면, 귀족들의 경쟁과 영광을 향한 갈망으로 인한 사회적 압력은 로마를 팽창의 길로 몰고갔다.


제9장 로마 공화정의 유산

233 처음으로 미합중국의 기초를 세운 사람들에게 로마 공화정은 지침을 얻을 수 있는 실제 모델로 여겨졌다. 그러한 사람들 중의 한 명이 존 애덤스였는데, 그는 1787년 자신의 위대한 논고인 『미합중국 헌법에 대한 옹호」를 출판했다. 조지 워싱턴에 이어 미합중국의 제 2대 대통령(1797-1801)이 된 애덤스는 로마를 역사적 원형으로 하는, 균형 갖춘 정체를 강력히 신봉했다. 애덤스가 좋아한 정치가는 키케로였으며, 그는 자기 논고의 서문에서 키케로의 공화정부에 대한 견해를 강하게 지지했다.


234 키케로의 공화국에서 정부의 세 가지 구성 요소는 행정관, 원로원, 그리고 민회이다. 애덤스의 정체에서 세 가지는 대통령(집정관의 행정권을 보유하는), 상원(조약을 비준하고 다른 두 요소를 견제하는 역할을 하는), 그리고 하원(법률을 승인하고 전쟁을 선포하는)이다.


234 현실성 때문에, 그리고 민주정이 단순히 다수를 동원해 폭압을 행할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 선거로 선출된 하원이 민회를 대체했다. 그러므로 일반 대중 집단은 정부에서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게 되었다.


238 사실상 루소와 애덤스는 로마를 대조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서로 다른 길을 걸어 갈 미국 공화주의와 프랑스 공화주의의 미래를 보여 주었다. 애덤스가 키케로식의 견제와 균형의 형태를 취했던 것에 반해 프랑스의 혁명가들은 루소를 따라 인민주권과 공공 도덕을 옹호했다. 덕의 공화국을 만들려는 노력은 로베스피에르의 공포 정치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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