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아퀴나스: 하느님의 존재 |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1

 

하느님의 존재 - 10점
토마스 아퀴나스 지음, 정의채 옮김/바오로딸(성바오로딸)

제1문제 거룩한 가르침에 관하여-그것이 어떤 성질의 것인지, 그리고 그것의 범위에 대하여
제2문제 신론-하느님이 존재하는가
제3문제 하느님의 단순성에 대하여
제4문제 하느님의 완전성에 대하여
제5문제 선 일반에 대하여
제6문제 하느님의 선성에 대하여
제7문제 하느님의 무한성에 대하여
제8문제 사물에 있어서의 하느님의 실재에 대하여
제9문제 하느님의 불변성에 대하여
제10문제 하느님의 영원성에 대하여
제11문제 하느님의 일체성(단일성)에 대하여
제12문제 하느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인식되는가에 대하여

 


제2문제 제1절 :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명한 것인가

첫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명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사실 그 인식이 본성적으로 우리에게 내재해 있는 것들은 우리에게 자명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제1원리들에 대해 말할 때 명백한 것과 같다. 그런데 다마스케누스는 그의 저서의 시작에서 "하느님이 실재한다는 인식은 모든 사람에게 본성적으로 주어진 것이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2. 그 밖에도 그 구성명사들이 인식될 때 즉시 인식되는 것들은 자명한 것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도 「분석론 후서」 제1판에서 논증의 제1원리(명제)들에게 귀속시키는 것이다. 예컨대 전체가 무엇인지, 부분이 무엇인지를 알면 즉시 모든 전체는 그 부분보다 크다는 것이 알려지는 것과 같은 경우다. 그리고 하느님의 명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면 즉시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명칭으로 의미되는 것은 바로 그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존적으로 있으며 지성에도 있는 것은 지성에만 있는 것 이상의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그 명칭이 이해될 때 지성 안에 있는 것이며 동시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귀결된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3. 그 밖에도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그것은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도 진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만일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진(眞)이며, 또 어떤 것이 참된 것이라면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요한복음서」 제14장 제6절에서도 "나는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입니다."라고 말하는 바와 같이 하느님은 진리 자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반론이 있다.
아무도 자명한 것의 반대를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제4권과 「분석론 후서」 제1권에서 논증의 제1원리들에 관하여 명백히 한다. 그런데 「시편」제52편 제1절에서 "어리석은 자 제 마음 속으로 말하기를 '하느님은 없다'고 한다."라고 한 바와 같이,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 아니다.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어떤 것이 자명하다는 것은 두 가지를 내포한다. 그 하나는 그 자체로서는 자명하나 우리에게는 자명하지 않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자체로서도, 또 우리에게도 자명한 것이다. 사실 어떤 명제가 자명한 것은 술어가 주어의 개념에 내포되는 데 기인한다. 그것은 예컨대 "사람은 동물이다."와 같은 경우다. 이때 동물은 사람의 개념에 속한다. 그러므로 술어에 대해서도 주어에 대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가 모든 사람에게 분명하게 밝혀지면 이런 명제는 모든 사람에게 자명하다. 이런 것은 논증의 제1원리들에서 명백한 바와 같다. 즉 이런 제1원리(명제)의 명사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다. 그것은 예컨대 유와 비유(非有), 전체와 부분, 그리고 이와 비슷한 것들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 술어와 주어가 그것이 무엇인지 명백하지 않다면, 이때 명제는 그 자체에 있어서는 자명하다 할지라도 명제의 주어와 술어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에게는 자명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보에티우스도 「데 헵도마디부스」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어떤 개념들은 정신의 공통된 개념이며, "비물체적인 것이 장소에 존재하지 않는다."와 같이 지자(智者)들에게만 자명한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이 명제는 그 자체에 관한 한 자명한 명제다. 왜냐하면 이때 술어는 주어와 같기 때문이다. 후에 명백히 하겠지만 사실 하느님은 자기 존재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 그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이 명제는 우리에게 자명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명제는, 우리에게 더 명백하게 알려지고 그 본성을 따라서는 덜 명백하게 알려진 것을 통해 논증될 필요가 있다. 즉 결과를 통해 논증될 필요가 있다.

1. 그러므로 첫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어떤 일반적인 형태로 막연하게 우리에게 본성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즉 하느님이 인간의 행복인 한에 그렇다. 사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지복을 욕구하며, 또 인간에 있어서 본성적으로 욕구되는 것은 인간에게 본성적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단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오는 사람을 인식하는 것이, 실제로 페트루스가 오고 있다 할지라도 페르루스를 인식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완전한 선(善), 즉 행복(지복)을 부로 생각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쾌락으로, 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2. 둘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하느님이라는 명칭을 듣는 사람은 (하느님을), 그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이 의미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이 물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구든지 하느님이란 명칭으로 여기서 말하는 것, 즉 그 명칭으로 그보다 더 큰 것이 인식될 수 없는 것이 의미된다고 할지라도, 그렇다고 명칭으로 의미되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귀결이 따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성의 파악에 불과하다. (하느님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인식될 수 없는 어떤 것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한 논증될 수 없다. 그런데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3. 셋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일반적으로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제1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자명한 것은 아니다;

 

제12문제 제12절: 우리는 이 세상 삶에서 자연본성적인 이성으로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는가

열두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우리는 이 세상 삶에서 자연본성적인 이성으로 하느님을 인식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사실 보에티우스는 「철학의 위안」에서 "이성은 단순형상을 포착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하느님은 앞에서 제시된 바와 같이 최고도로 단순한 형상이다. 그러므로 자연본성적 이성은 하느님의 인식에까지 도달할 수 없다.

2. 그 밖에도 영혼은 표상상 없이는 자연본성적 이성으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은 「혼론」 제3권에서 논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비물체적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표상상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자연인식적 방법으로 우리에게 인식될 수 없다.

3. 그 밖에도 자연본성적 이성으로 말미암은 인식은 선한 사람에게도 악한 사람에게도 공통된 것이다. 그것은 자연적 본성이 그들에게 공통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하느님의 인식은 오직 선한 사람들에게만 적합한 것이다. 사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 제1권에서 "인간 정신의 시력은 그것이 신앙의 의로움으로 정화되지 않는 한 이렇게 탁월한 빛을 응시하기에 적합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자연본성적 이성에 의해서는 인식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반론이 있다.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제1장 제19절에서는 "하느님께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저들에게 이미 알려졌습니다."라고 한다. 그것은 하느님께 대해 자연본성적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우리 자연본성적 인식은 감각에서 시작한다. 그러므로 우리 자연 본성적 이성이 미치는 범위는 그것이 감각적인 것에 의해 인도되는 한에 가능하다. 그런데 감각적인 것들에서 우리 지성은 하느님의 본성을 보는 데 이를 수가 없다. 그 이유는, 감각적 피조물들은 하느님의 결과이긴 하지만 원인의 능력에 대비되는 결과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각적인 사물들의 인식에서 하느님의 모든 능력이 인식될 수는 없는 것이며 따라서 하느님의 본질이 보여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원인에 종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감각적인 것들에서 하느님에 대해, 그가 '존재하는지'의 인식에까지 인도될 수는 있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은 그한테서 원인되어 온 모든 것을 초월하는, 모든 것의 제1원인이므로, 하느님께 필연적으로 적합한 모든 것을 그에 대해 인식하게끔 우리가 인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에 대하여 그의 피조물에 대한 관계를 인식하는 것이다. 즉 하느님이 모든 것의 원인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또한 피조물의 하느님과의 차이도 인식하는 것이다. 즉 하느님은, 하느님에게서 원인되어 오는 것들 중의 어떤 것(피조물 중의 하나)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렇게 피조물들이 하느님에게서 제거되는 것은 하느님의 결함성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은 그런 것들을 멀리 초월하기 때문이다.

1. 그러므로 첫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이성은 단순형상에 도달하여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그것이 있는가를 인식할 수는 있다.

2. 둘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하느님이 자연적 인식에 의해 인식된다는 것은 결국 그 결과의 표상상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다.

3. 셋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하느님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도 본질에 의한 인식은 그것이 은총에 의한 인식이기 때문에 선한 사람에게만 적합한 것이다. 이에 반해 자연본성적 이성에 의한 하느님의 인식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다 같이 적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재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도 중에 나는 '마음이 깨끗한 자들만이 참된 것을 알게 하시려 하신 하느님이시여!'라고 하였지만 지금은 이것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이 깨끗하지 못한 자들도 역시 많은 참된 것을 알 수 있다고 응답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자연본성적 이성으로 말미암아 이런 인식이 가능한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