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카시러: 상징형식의 철학 제2권: 신화적 사유

 

상징형식의 철학 제2권: 신화적 사유 - 10점
에른스트 카시러 지음, 박찬국 옮김/아카넷

저자 서문
서론: ‘신화철학’이라는 문제

제1부 사유형식으로서의 신화
제1장 신화적 대상의식의 성격과 근본 방향
제2장 신화적 사유의 개별 범주들

제2부 직관형식으로서의 신화: 신화적 의식에서 공간적-시간적 세계의 구조와 조직
제1장 근본 대립
제2장 신화의 형식론의 근본 특징: 공간, 시간, 수

제3부 삶의 형식으로서의 신화: 신화적 의식에서의 주관적 현실의 발견과 규정
제1장 자아와 영혼
제2장 신화적 통일감정과 생명감정으로부터 자기감정이 형성되는 과정

제4부 신화적 의식의 변증법

역자 해제

 


저자 서문

9 『상징형식의 철학』의 두 번째 권인 이 책에서 시도하려는 '신화적 의식 비판'은 오늘날의 비판적이고 학적인 철학의 상황에 비추어 보자면, 분명 모험이자 역설로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칸트 이래로 비판이라는 표현 속에는 '철학적인 물음이 의거하는 어떤 사실이 이미 존재한다'는 전제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철학은 그러한 사실이 갖는 특유한 의미나 타당성을 창출하지 않고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서 발견하며, 그후에 그것을 '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탐구한다. 그러나 산화세계는 이론적 인식세계나 예술세계 혹은 윤리적 의식세계와 어떠한 방식으로든 비교될 수 있는 '사실'인가? 신화 세계는 원래부터 가상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본질에 대한 학으로서의 철학은 오히려 가상을 멀리해야만 하고, 가상에 빠지기보다는 오히려 가상으로부터 자신을 갈수록 더 명료하면서도 첨예하게 분리해야만 하지 않을까? 사실상 학적 인 철학의 역사 전체는 가상으로부터 자산을 분리하고 해방하려는 계속적인 투쟁으로 고찰될 수 있다. 이러한 투쟁의 형식들은 이론적인 자기의식이 도달한 그때그때의 단계에 따라 변화되지만, 그것의 근본 방향과 일반적인 경향은 명료하면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가상에 대한 철학의] 대립은 무엇보다도 철학적 관념론에서 비로소 그 전체상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관념론이 자신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존재에 대한 사상이야말로 자산의 근본문제이자 근원적인 문제라는 것을 의식하게 되는 순간, 산화의 세계는 비존재의 영역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비존재의 영역 앞에는 옛날부터[파르메니데스 이래로] '순수한 사유에게는 비존재자에 접촉하거나 관계하는 것이 금지돼 있다'라는 말이 경고의 표지로서 세워져 있다. 철학은 경험적 지각의 세계와 관련해서는 이 경고를 오래전에 무시해버렸지만 산화의 세계와 관련해서는 변함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적어도 사상이 자신의 고유한 제국과 법칙성을 갖게 되자마자 산화의 세계는 극복되고 잊혀져버린 것 같다. 19세기 초 낭만주의가 [산화라는] 이 몰락한 세계를 다시 발견하고 셸링이 이 세계에 철학체계 내의 확고한 지위를 인정하려고 한 이후 하나의 전환이 일어난 듯도 했다. 그러나 신화나 비교신화의 근본물음들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일어났음에도, 신화의 형식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보다는 신화의 소재에 대한 연구가 훨씬 더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체계적인 종교학 · 종교사 · 민족학이 이 영역에서 수행한 작업 덕분에 신화의 소재는 오늘날 매우 풍부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이렇게 다양하고 이질적인 소재들의 통일성이라는 체계적인 문제는 오늘날 전혀 제기되지 않거나, 제기되더라도 그 문제를 발달심리학과 일반적인 민족심리학의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로만 국한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신화의 기원을 '인간 본성'의 특정한 소질에 입각하여 설명했을 때, 그리고 신화가 인간 본성이라는 근원적인 맹아로부터 전개되면서 따르는 심리적 규칙을 드러냈을 때, 신화는 '파악된'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방식의 설명이나 추론은 논리학과 윤리학 그리고 미학에서도 매우 자주 시도되었지만, 이에 대해 이 학문들은 항상 거듭하여 자신의 체계적인 고유 권리를 주장해왔다. 논리학 · 윤리학 · 미학이 이렇게 자신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 학문들이 모든 심리학적 해소에 저항하는 자립적 원리인 '객관적인 타당성'에 호소하고 의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신화에는 객관적 타당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신화는 심리학뿐 아니라 심지어 심리학주의에 의해 설명되고 심리학과 심리학주의의 희생물이 되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여기[심리학과 심리학주의]에서 신화의 발생조건들을 통찰한다는 것은 자립적 존재로서의 신화를 부정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보였다. [달리 말해 심리학과 심리학주의에서] 신화의 내용을 이해한다는 것은 신화가 객관적으로는 허망한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 [세계 도처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지만 그럼에도 신화는 전적으로 '주관적인' 환상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통찰하는 것이나 다름없게 여겨졌다.

이러한 '환상설(Illusionismus)'은 신화적 표상에 관한 이론에서뿐 아니라 미학과 예술이론의 정초를 위한 시도에서도 항상 거듭해서 나타나지만, 정신적 표현형식들의 체계라는 관점에서 고찰해보면 그러한 설은 지극히 중대한 문제와 위험을 포함한다. 정신적 표현 형식들의 전체가 진정 체계적으로 통일되어 있다면, 이러한 체계적인 통일과 함께 어떤 형식의 운명은 다른 모든 형식들의 운명과 긴밀히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형식에 대한 모든 부정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다른 형식들에까지 적용될 수밖에 없으며, 전체가 단순한 집적이 아니라 정신적―유기적인 통일체로서 여겨지는 한 개별적인 부분에 대한 어떠한 파괴도 전체를 위협하게 된다. 정신문화의 근본형식들이 신화적 의식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선화가 정신적 표현형식들의 전체에서 그리고 이 전체에 대해서 결정적인 의의를 갖는다는 사실은 즉시 분명해진다. 정산문화의 근본형식 중 처음부터 자립적인 존재와 명료하게 한정된 고유의 형태를 갖는 것은 결코 없으며, 각각은 신화의 어떤 형태 안에 위장되거나 감싸진 재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정신'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객관적 정선이 신화적 정신과 근원적으로 융합하며 구체적으로 통일되어 있음을 입증할 수 있다. 예술의 형성물과 인식의 형성물 그리고 윤리 · 법 · 언어 · 기술의 내용들 모두가 이 점에서 신화와 근본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지시하고 있다. '언어의 근원'에 대한 물음은 '신화의 근원'에 대한 물음과 뗄 수 없게 얽혀 있고 양자는 서로 결합되어 있으며 서로 의존하고 있다. 이에 못지않게 예술의 시원, 문자의 시원, 법률과 학문의 시원이라는 문제도 모두 신화적 의식이라는 직접적이고 분화되지 않은 통일성이 근거하고 있는 단계로까지 소급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선화 속에 포함된 상태로부터 인식의 이론적인 근본 개념, 즉 공간과 시간 그리고 수의 개념, 또는 소유권 개념과 같은 법적 · 공동체적인 개념, 더 나아가 경제 · 예술 · 기술의 개별적인 형성물들이 극히 점진적으로 분리되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러한 발생적인 연관을 한낱 발생적인 것으로 고찰하고 받아들이는 한 그러한 연관의 본래적인 의미와 깊이는 파악할 수 없다. 정선의 삶이 일반적으로 그러하듯이, 여기서도 생성은 존재로 거슬러 올라가도록 지시한다. 존재 없이는 생성은 파악되지 못하며, 생성에 담긴 특유한 '진리' 역시 인식될 수 없다. 현대 과학의 형태를 취하면서 이러한 연관에 대해 알려주는 것은 바로 심리학이다. 발생적인 문제들은 결코 순수하게 그 자체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고 '구조의 문제'와 극히 긴밀하게 결부되고 철저하게 연관지어질 때만 해결될 수 있다는 통찰이 심리학에서 갈수록 더 힘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의 개별적인 특수 형성물들이 보편적이고 무차별적인 신화적 의식에서 생긴다는 것은 이러한 근원적인 근거[신화적 의식] 자체가 파악되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 경우, 즉 산화적 의식에서 정신적 형성작용의 고유한 방식이 인식되지 못하고 오히려 신화적 의식이 단지 무정형의 혼돈으로 받아들여질 경우에는 진정으로 이해될 수 없다.

이와 같은 사실이 고려될 때 신화의 문제는 모든 심리학적 내지 심리학주의적인 협소한 틀에서 벗어나 헤겔이 정산현상학'이라고 불렀던 일반적인 문제 영역에 편입된다. 산화가 정신현상학이라는 보편적 과제와 내적이고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정신현상학이라는 개념에 대한 헤겔의 고유한 이해와 규정으로부터 이미 간접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다. 『정신현상학 』서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자신을 전개하면서 자신이 정신임을 알게 되는 정신이 바로 학이다. 학이야말로 정신이 자신을 완전히 실현한 상태이자 정신이 자신의 고유한 터전에 건립하는 왕국이다. (···) 철학의 시원은 의식이 정신의 고유한 터전에 존재할 것을 전제하거나 요구한다. 그러나 정신의 고유한 터전은 생성하는 운동을 통해서만 완성되고 투명해진다. 이러한 터전은 단순한 직접성이라는 방식을 갖는 보편적인 것으로서의 정신성이다. (···) 학은 자기의식으로 하여금 이러한 에테르[정신이 완성되고 투명해지는 상태]로 자신을 고양시켜 학과 함께 그리고 학 안에서 살 수 있게 되기를, 그리고 실제로도 살기를 요구한다. 역으로 개인은 학이 적어도 이러한 상태[정신이 완성되고 투명해지는 상태]에 이르는 사다리를 건네주도록, 또 한 개인에게 개인 자체 내에 이러한 상태가 있음을 제시하도록 요구할 권리를 갖는다. (···) 대상적 시물들이 자기 자신에 대립하고 자기 자신은 대상적 사물들에 대립한다고 생각하는 의식의 상태가 학에게는 다른 것으로서 간주될(···) 경우, 역으로 의식에게는 학의 터전은 아득하게 멀리 있는 피안이 되어 의식은 더 이상 학의 터전 속에서 자선을 갖지 못하게 된다. 이 두 부분들의 어느 쪽도 다른 쪽에게는 진리의 전도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 학은 그 자체로는 어떠한 것이든 간에 직접적인 자기의식[감각적 의식]에 대한 관계에서는 자신에 대해 전도된 거으로서 나타난다. 또는 직접적인 자기 의식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 속에 자신의 현실성의 원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학의 외부에 독자적으로 존재하게 됨으로써 학은 비현실성이라는 형식을 갖게 된다. 따라서 학은 직접적 자기의식이라는 터전을 자기 자신과 결합해야 하거나 또는 오히려 그러한 터전이 학 자체에 귀속되어 있음을 그리고 어떻게 귀속되어 있는지를 보여주어야만 한다. 직접적인 자기의식이라는 현실성을 결여할 경우, 학은 즉자(卽自, Ansich, 자기 자신에 머물러 있음)로서의 내용일 뿐이며 아직은 내적인 것으로 머무른다. 또한 정선적인 실체로 존재할 뿐 정신으로서는 존재하지 않는 목적에 불과하다. 이렇게 자기 자신에 머물러 있는 학은 자신을 외화해야 하며 자신에 대해서 반성적으로(fur sich) 되어야만 한다. 이는 자기 자선에 머물러 있는 학이 자기의식을 자신과 하나인 것으로서 정립해야 함을 의미한다. (···) 지(知, Das Wissen)가 우선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인 직접적인 정신은 아직은 정신을 결여한 것, 즉 감각적인 의식이다. 본래적인 지가 되거나 학의 순수한 개념 자체인 학의 터전을 산출하기 위해서는 지는 긴 도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 '학'과 감각적 의식의 관계를 특징짓고 있는 헤겔의 이 글은 인식과 산화적 의식의 관계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그리고 분명하게 타당하다. 왜냐하면 학의 생성을 위한 참된 출발점, 직접성에서의 학의 시원은 감성적인 것의 영역보다는 신화적인 직관의 영역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흔히 감각적 의식이라고 불리는 것, 즉 '지각세계'━이것은 더 나아가 명료하게 분리된 개별적인 지각권역들 색이나 음과 같은 감각적인 요소들로 구분되는데—의 존재는 그 자체로 이미 추상의 산물이자, '주어진' 것에 대한 이론적 가공의 산물이다. 이러한 추상으로까지 자신을 고양시키기 전까지 자기의식은 신화적 의식의 형성물들 속에 있으며 이러한 형성물들 속에서 산다. 자기의식은 '사물'과 '속성'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보다는 오히려 신화적인 활력과 힘, 악령이나 신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헤겔이 요구하는 것처럼 '학'이 자연적인 의식[감성적인 지각]에게 학 자체로 이끄는 사다리를 제공해야 한다면, 학은 이러한 사다리를 한 단계 더 낮은 곳[감성적인 지각이 아니라 신화적 의식]에 세워야 한다. 시간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이념적인 의미로 이해될 경우, 학의 ‘생성'은 학이 신화적 직접성의 영역으로부터 출현하고 부각되어 나오는 모습이 제시되고 이러한 운동의 방향과 법칙이 알려지게 될 때에야 비로소 완전히 통찰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단지 철학적 체계 구성의 요구가 아니라 인식 자체의 요구다. 인식은 신화를 단지 인식의 경계 밖으로 추방함으로써 산회를 지배하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식에게 중요한 것은, 신화의 특유한 내용과 특수한 본질을 파악했을 경우에만 인식이 신화를 진정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신화의 특유한 내용과 특수한 본질을 파악하려는 정신적 작업이 완수되지 않는 한 이론적 인식이 승리했다고 항상 믿었던 그 싸움이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다. 인식은 자신이 최종적으로 패퇴시킨 것처럼 보였던 적을 자기 자신의 중심에서 다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실증주의'의 인식론이야말로 이러한 사태에 대한 뚜렷한 증거를 제공한다. 여기서는 순전히 사실적인 것, 즉 사실적으로 주어진 것을 신화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정신에 의한 모든 '주관적인' 부가물로부터 분리하는 일이 고찰의 본래 목적이다. [실증주의에서] 학은 신화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모든 구성 부분들을 자신에게서 제거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고유한 형식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콩트 학설의 전개과정은 그 학설이 시작될 때 이미 넘어섰다고 생각했던 바로 저 계기와 동기가 그 학설 자체 내에 살아 있으며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신화적인 모든 것을 학의 원시시대(Utzeit)나 선사시대(Vorzeit) 로 추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던 콩트의 체계 자체가 일종의 신화적─종교적 상부구조와 함께 종결된다. 따라서 이론적 인식의 의식과 신화적 의식 사이에는―콩트의 3 단계 법칙이 말하는 의미의—선명한 시간적 중단에 의해 양자가 서로 분리된다는 의미의 단절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학은 오랜 세월에 걸쳐 태고의 신화적 유산을 보존하면서 이것에 단지 다른 형식을 각인할 뿐이다. 이론적 자연과학과 관련지어 말하자면, 수세기 동안 계속되어 오면서 오늘날에도 아직 종결되지 않은 투쟁, 즉 힘의 개념을 모든 신화적 구성 부분들에서 분리해 순수한 함수 개념으로 전환하기 위하여 수행된 투쟁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이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개별적인 근본 개념의 내용을 확정할 때 매번 거듭하여 출현하는 대립뿐 아니라 이론적 인식의 고유한 형식에까지 깊숙이 작용하는 갈등이다. 이론적 인식의 고유한 형식 내부에서 신화(Mythos)와 이성(Logos)이 서로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선화가 오늘날 순수한 방법론의 영역에서조차 다시 거주권이나 시민권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정이 잘 보여준다. 신화와 역사는 결코 논리적으로 명료하게 분리될 수 없고, 오히려 모든 역사학적 이해는 순전히 신화적 요소들에 의해 규정되어 있으며 그 요소들에 구속되어 있다는 견해가 이미 공공연하게 주장되고 있다. 이러한 견해가 정당하다면, 역사학 자체뿐 아니라 역사를 자신의 기초 가운데 하나로 삼으면서 역사에 의거하는 정신과학의 체계 전체가 학의 영역에서 벗어나 신화 영역에 속하게 될 것이다. 신화가 이렇게 학의 영역 안으로 침입하고 개입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막기위해서는, 미리 신화의 고유한 영역 내에서 신화의 정신이 무엇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인식해야만 한다. 신화의 진정한 극복은 신화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에 입각해야만 한다. 즉 신화의 정신적 구조에 대한분석에 의해서만 한편으로 선화의 독특한 의미가, 다른 한편으로 그것의 한계가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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